노로는 충분하지 않다 - 트럼프의 충격 정치에 저항하고,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얻는 법
나오미 클라인 지음, 이순희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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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나오미 클라인은 북미 지역의 대표적인 사회참여적 시민운동가로서의 이름이 알려져 있는데요. 특히 그녀의 몇몇 저서들은 이미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고 진보주의 운동과 관련해서도 꽤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그녀에게 지극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노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이 책 역시 나오미 클라인의 중요한 관심과 연구에 놓여 있는 글이라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는 트럼프로 대표되는 ‘선동정치가’와 ‘우익 포퓰리즘’을 배경으로 미국 정치와 경제를 분석하고 있지만 큰 틀에서는 ‘약탈적 자본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미국의 보수 정치의 일관된 폐해를 알리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싶습니다. 관련된 주장들은 명확하고 일관되어 있으며 특히 번역의 질이 매우 훌륭하여 독자들에게 정확한 의미 전달을 하는데 몇박자가 갖춰진 글이라고 여겨집니다.

우선 미국 정치 무대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은 여러모로 정치경제적인 전면적인 후퇴를 내포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의미 부여를 내릴 수 있을듯 보입니다. 미국이 세계 민주주의를 차지하는 위상으로 봤을 때, 트럼프와 같은 거대한 선동주의 정치인이 본무대에 등장한 것은 여러모로 반동 정치의 현실화로 봐야겠죠. 저자는 이에 ‘공직을 이용해 엄청난 수익을 뽑아내는 정치’라고 트럼프 정치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트럼프 자신의 직계 가족을 포함한 자신의 사업 구상과 확대에 시민이 부여한 권력을 이용한다는 측면에서 과거 미국 정치에서 어떠한 사례도 찾아볼 수 없는 현재 유일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트럼프의 장녀인 이방카와 그의 남편 쿠슈너의 일련의 사례들로 매우 부정적 파급 효과가 큰 왜곡된 직계 정치 행위이고, 선거를 통한 선출된 관료나 임명된 관리가 아니라 대통령의 자녀가 아무런 검증없이 무자격으로 현실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미국 민주주의에 있어서 안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트럼프 본인의 본심이 뭔지 의심될 정도로 회자되는 파행적 정치 언어와 많은 시민들이 ‘역겹다’고 말할 정도로 인종주의적 편견, 아무런 근거 없는 여성차별적인 입장 등이 미국의 정치 상황에 얼마나 시한폭탄이 되고 있는지 근래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오히려 트럼프 만의 국한된 문제라기 보다는 과거 오바마 대통령이 2008년 뉴욕발 금융위기 이후 관련된 금융인들을 기소하지 않은 점과 미국 시민들에 대한 안보상의 이유로 일어날 수 있는 불법적인 통화 도청과 같은 것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보이는 등의 과거 행정부 시절의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신자유주의’가 힘을 잃은 것이 아니라 아직도 그 영향력은 유효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약탈적 자본주의’와 날로 강화되는 소득 불평등의 사회 가치적 분열과 왜곡을 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자의 해석은 매우 지당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강경한 보수파가 기후 변화를 부인하는 이유는 기후 행동 때문에 잃을지 모를 수조 달러의 부를 보호하는 것을 넘어서서 훨씬 더 귀중한 이데올로기적 프로젝트, 바로 신자유주의를 방어하기 위해서다’라고 통찰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결국 한때의 ‘월가 점령 운동’이 정치 기득권과 기존의 경제 세력에 대해 충분한 교훈이 되지 못한 것이 이러한 보수 정치권의 근본적인 신자유주의적 가치 보호에 있습니다. 주도적인 정치경제 이데올로기는 끊임없는 비판이 선행되어야 하지만 결국 과거 행정부가 신자유주의에 일종의 면죄부를 주었고 그러한 배경에는 저자가 판단한 대로 보수 (기득권) 정치 세력이 금권 정치에 기반한 영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에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외에도 트럼프가 보이는 인종 위계적 정치 행위, 이미 무효임으로 판명된 ‘낙수 효과’를 맹신한다든지 자유 무역의 가치를 앞세운 기존의 TPP를 ‘미국을 겁탈하는 행위’라고 판단하는 등의 정말로 미국을 대표하는 정치 수반의 언행과 사고라고 믿을 수 없는 왜곡 정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자의 다른 말로 ‘이미 미국 정치의 주도권이 상당 부분 진보에서 우파에게 넘어갔다’는 판단으로 귀결되며, 여기에서 또 광범위하게 논하기는 어렵지만 바로 진보 세력의 유명 무실이 이러한 ‘미국의 우익 사이비 포퓰리스트’를 잉태하게 만든 진정한 원인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우파 만의 정치 집중이 아니라 여기에 극단적인 포퓰리즘이 가세한 것으로 봤을 때 정말 진보주의 운동에 있는 사람들의 통렬한 반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즉, 이러한 현실 정치 왜곡의 해결로 저자는 ‘정당 없는 정치’를 제시하고 있는데요. 이는 금권 정치의 산실로 여겨지는 수많은 이익 단체에 의한 로비 정치를 제한하는 형태로 시민들이 기존의 정당주의 없이 자발적인 기초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그 틀을 잡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더해야 될 살이 있어야 하지만 이것을 순진한 도덕정치적 입장으로만 몰아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전에도 정치학자인 존 던, 로버트 달 등이 비슷한 논리를 우리에게 보인적이 있습니다. 사실상 지금 필요한 것은 더욱더 많은 민주주의의 확대이고 시민의 자발적인 정치 의식 개조와 대중을 선동하는 포퓰리즘적 정치인들이 발을 붙일 수 없도록 견제하고 감시하는 것이 요구되지 않나 싶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원론적인 입장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시급한 ‘시민 강령’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나오미 클라인의 이 책을 일독하면서 그녀의 오늘날 정치 상황에 대한 탁월한 분석과 반대의 유용한 결과물에 대해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배경의 주무대가 미국과 그녀의 모국인 캐나다인 것이 우리 정치와는 해석상의 차이가 있는데요. 이를테면 미국에서 빈자 계층의 실질적인 투표 제한을 위해 사진이 들어가 있는 신분증을 요구한다는 것에는 우리와의 현실 차이가 있어 보였습니다. 정부의 합법적인 신분 상태에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미국에는 많다는 점이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조금 차이가 있는 것이죠. 애초에 우리는 일반 선거에서 스스로의 신분증 제시를 명확한 것으로 인지하고 있으니까요. 다소 이런 점을 제외하면 우리 역시 정치와 경제를 위해 반면 교사로 삼을 만한 유익한 것들이 적지 않게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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덫에 걸린 유럽 - 유럽연합, 이중의 덫에 빠지다
클라우스 오페 지음, 신해경 옮김 / 아마존의나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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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클라우스 오페는 독일내의 명망있는 정치사회학자이고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또한 위르겐 하버마스 밑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이후 훔볼트 대학과 같은 독일의 여러 유수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 그리고 도미하여 프리스턴과 하버드 대학에서 교환 교수로 일했습니다. 그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연구하는데 평생을 할애했고 그래서 쓴 많은 저서들이 이런 맥락 위에 있습니다.

저자는 오늘날 통합 유럽에 대해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충분한 사전 조율없이 잘못된 공통의 통화 정책, 그리고 정책적 역량을 효과적으로 발휘하지 못하는 그 정치적 및 사회적 한계가 그렇습니다. 현재 유럽 내부에서는 “서로 대립하는 여러 정치적 성향과 전략들마다 시급하게 해결할 필요가 있는 일은 역시 극도로 인기가 없다”는 것은 바로 유로 문제와 궤를 같이 합니다. 즉, 지금 통합 유럽이 시급히 해결해야 될 부분이 바로 유로 문제 및 그 주변의 모든 제반 사항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현재 독일의 일종의 소극적 거부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태인데요. 이 통화 문제는 EU의 중심 세력이라 볼 수 있는 독일, 오스트리아, 핀란드,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의 일종의 단일 통화 효과로 그들이 얻는 이익이 분명한 반면 그외의 그리스나 포르투갈, 스페인 등과 같은 주변부의 국가들이 경상수지 악화와 국가 부채 등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보호되어야 할 것은 보호 수단과 특혜를 ‘살 수 있을’ 만큼 자원이 풍부한 이들의 신분이 아니라 가장 혜택 받지 못한 이들의 안전이다”라고 말하는 이들 나라의 소외 계층의 사회경제적 결핍을 더 심화시킨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단일한 그리고 동일한 제도적 계획이 (말하자면 유로가) 법적으로 구성된 공동체의 일부 구성원들에게 심각한 불이익과 고통을 부과하는 반면 다른 일부에게는 이익을 주는 식으로 운영되는 것으로 판명났다”고 저자는 다시 판단합니다.

사실상 그리스와 포르투갈 등의 PIIGGS 문제는 유럽 지역의 단일 통화 유로의 제한적인 한계에 기인한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근래 유럽에 자생하고 있는 우파 포퓰리즘이 유럽 통합에 반대하는 이데올로기로 이 ‘유로’를 재앙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반대로 이 글의 저자도 언급하지만 이미 많은 유럽인들은 통합 유럽을 자신들의 내재적 생활 양식에 까지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있어 예외적으로 극우 정치인들이 나타나고 있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시민들도 바로 이러한 점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입니다. 결국 유로가 “적자국 통화정책 수립자들의 손발을 묶어 예전처럼 자국 통화를 방어하는 조치들을 취하지 못하도록” 하고 여기에 독일인들이 “다른 이들이 나를 상대로 도덕적 해이를 하고 있다는 피해망상을 극복하지 못하는” 태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상황을 더 악화시킨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하지만 유럽 시민들의 여론과 유럽 통합의 의의와 발전으로 봤을 때, 저자가 말한대로 “독일은 공통화폐를 보전해야 한다는 생사가 걸린 이해 관계를 추구하면서 패자들에게 적자를 메울 자금을 꿔주는 방안을 제시하는 짓은 그만둬야 하고, 결국에는 그만두게 될 것이다.” 라고 강하게 말하는데요. 여기에는 독일 정치권에 대해 일종의 잠정적 지도국으로서의 신뢰적 역할을 기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현재 유럽 내의 비유럽 이민들에 대한 인종적 차별과 혐오가 나날이 부각되고 이를 기반으로 우파 포퓰리즘 세력이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저자가 ‘현상’으로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쉬웠습니다. 일종의 이들 모두를 사회적 약자로 넣고 미국과 다른 대륙의 시민들과 달리 ‘자기 비판적 태도’를 갖고 있는 유럽인들이 이러한 정치사회적 왜곡 상태를 개선시킬 수 있느냐에 대해서 저로서는 비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정치적 통합까지 마련되는 수준의 통합도 아니거니와 핵보유와 동시에 유엔의 안보리 회원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있는 것 만으로도 자국의 이해 관계가 우선인 이런 국제정치국가들이 유럽 통합에 온전히 힘을 쏟는 일은 극히 희박해 보이고 더욱이 영국은 최근에 그 궤를 벗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EU 중심국들이 주변국들에 대해 정치경제적 지원과 이해를 갖고 특히 독일의 경제적 양보와 지원이 바탕이 되어 유럽 의회와 실질적 유럽 통합 은행 등의 주권 이양이 이뤄질 수 있는 시도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상해봅니다. 오페는 여기에 이 글에서 앞선 유럽의 정치경제적 상황 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의 자유민주주의의 견고한 확산과 이념적 수용에 대한 언급과 근래 미국이 군사 행동을 통해 비인도적 잔혹 행위인 불법적 고문 등을 시도한 것과는 다른 유럽의 민주주의를 보여줘야 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유럽 여러 국가에는 아직도 사회민주주의적 토양이 자리하고 있으니 최근에 날뛰고 있는 포퓰리즘과 극우 세력,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인종 차별 문제 등을 해결할 수만 있다면 다른 국가들과는 다른 몇 계단을 뛰어넘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체적으로 여기에 소개되어 있는 주장들이 저자의 꽤 올바른 정치적 시각을 기반으로 미래의 유럽 통합의 가능성을 흥미롭게 진단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여러 현존하고 있는 문제들은 충분히 해결 가능하고 역동적 유럽 시민들이 기반이 되어 한번 더 자유민주주의를 강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지역의 시민 의식은 아직은 다른 대륙의 어떤 곳보다는 양호한 편이니 이 부분에 한번 희망을 가져봐도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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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승리인가 자본의 위기인가 - 자본주의의 작은 역사
울리케 헤르만 지음, 이미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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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쓴 울리케 헤르만은 독일 함부르크 출생으로 베를린 자유 대학에서 경제사와 철학을 공부하고 현재는 여러 미디어 등의 토론에 출현해 경제문제와 사회문제 등을 다루고 있는 언론인이기도 합니다. 저명한 경제학 논문을 발표하거나 동일 학계에 이름이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의 이 책을 통해 꽤 감명을 받았습니다. 또한 공감되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고 밝히고 싶군요. 독일어로 씌여진 원제는 ‘Der Sieg Des Kapitals’로 번역하면 자본의 승리가 되겠습니다.

책의 도입에서 저자는 많은 경제학자들이 경제사에 대해 소홀하거나 무시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경제학자들에게 경제사는 특히 영국의 산업 혁명에 대한 본질과 애덤 스미스가 신고전 경제학에서 인용하는대로 개인의 자유와 이기심에 대해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크게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는 측면의 진실을 인정하기 힘든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과거 구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경제권이 붕괴되었어도 그것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가려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라고도 생각됩니다.

일단 이 책은 전체적으로 4부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요. 1부가 고대 로마시대에도 있었던 자본의 개념, 네덜란드의 상업 부흥 시기와 영국의 산업 혁명 시기를 서술하고 2부는 우리가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자본의 세가지 오류인 ‘자본주의는 시장 경제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국가와 적대적이지 않다, 세계화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를 밝힙니다. 그리고 3부는 자본과 돈의 구별과 차이점을 열거하고 마지막 4부는 금융의 위기로 볼 수 있는 오늘날 자본의 위기에 대한 배경과 경제사를 함께 분석합니다.

우선 저자가 생각하는 자본과 자본주의의 기본적 인식은 “자본주의는 위기에 처하는 경향이 있어 정기적으로 통제할 필요가 있는 매우 유동적인 시스템”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자본주의의 진정한 원동력은 ‘임금’이라고 저자는 보고 있으며, 오늘날 그리스로 촉발된 유로화의 위기에 있어서 EU의 거대 자본주의 국가 독일이 자신들의 임금을 상승시켜야 유로 가맹국들이 통화 발행을 하지 못하고 있는 ‘자발적 제한’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이것이 위기의 출구 전략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은 경제사회적으로 복합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으로 ‘높은 부자 세금, 높은 임금, 강력한 감독 등의 자산가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사회주의가 도래한 것’이라 믿는데 워렌 버핏 등이 부자들의 증세에 동의하는 것도 이러한 정책이 오히려 경기 부양과 시장의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분명 이 부분도 공감이 되는 것인데요. 무엇보다 현재의 신자유주의가 이미 본연의 ‘신자유주의’가 아닌 것은 2007년의 금융업계의 도덕 불감증이 국가의 도움을 자발적으로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앞선 인식들은 저자가 말하는 자본주의가 세밀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자본주의와 금융시장을 별개로 여기거나 분리 이해하는 학자들이 전세계에 아직도 태반이 넘지만 이것은 사실상 의미없는 주장에 그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는 분명 다른 것이라고 글에서 다루고 있는데요. 저자의 말대로 시장은 판매자와 구매자가 존재하고 이들사이에 일정한 매커니즘이 있는 것으로 오늘날 너무 ‘무슨무슨 시장’ 이라고 무분별하게 쓰이고 있다고 언급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장 자체에서 ‘소수의 독점 이해자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는 이러한 시장경제의 측면이 과거 대공황 시기 이전에도 미국 시장의 소수 기업들이 독점화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이 있었던 것을 보면 시장 경제와 자본주의는 언뜻 부정적 영향의 연관성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자본주의가 시장 경제보다는 의미론 내지 분류론으로 봤을 때 좀 더 시장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만 오늘날에는 이러한 틀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또한 자본주의를 선도하는 기술의 발전은 국가 발전의 한 축이 될 수 있고 이렇게 본다면 자본주의와 국가는 적대적일 수는 없다는 것이 일부 증명될 것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는 어느 곳에나 존재하며, 국가의 지속적 개입이 없다면 자본주의는 결코 작동하지 못한다’는 저자의 해석도 자본주의와 국가의 본질적 관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여러 사례들을 보더라도 국가와 자본주의와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고 이들을 따로 분리 생각해서는 맞물린 현상들에 대해 충분한 이해가 힘들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4부는 금융과 금융시장의 위기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신자쥬우의를 우회 비판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는데요. 어떻게 보면 지난 1970년대의 미국 경제 위기와 2007년의 뉴욕 발 금융위기가 베트남 전과 이라크 전쟁이 큰 원인이었다고 저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전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부분인 것만은 확실해 보이는데요. 저자는 여기에 1973년 브레턴우즈 체제 붕괴가 신자유주의자들이 사실상 이것을 경제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이것을 의식적으로 뛰어넘어 금융시장의 문분별한 확대를 옹호하는 이들이 이러한 외적 팽창 시기를 자신들의 승리로 여긴다는 것을 비판합니다. 신용 대부를 통해 기업들을 사냥하는 행위가 과연 자본주의에 이롭냐 이롭지 않냐를 말하기에 앞서 ‘기업사냥꾼들’ 자체는 자신들의 잇속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후에 금융 시장을 통해 무분별한 증권화와 도덕적 해이는 금융인들 자신이 시스템을 통한 사익 추구가 너무나 만연되어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고 더 나아가 자신들의 책임을 국가가 대신 치뤘다는 결과만으로도 저는 이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오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책의 4부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반대로 ‘인플레이션 시기에 노동 조합들이 높은 임금을 고집한 것은 비극’이라고 말하고 무분별한 저축이 초래하는 재앙들을 명백히 밝히고 있는 것은 이쪽과 저쪽의 어느 한쪽의 입장보다는 이론적 자본주의와 시장의 여러 현상 등에 저자인 울리케 헤르만 특유의 시각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경제와 관련된 여러 문제와 과제들은 흔히 이념적으로 오도될 가능성이 큰데요. 일찍이 노엄 촘스키가 말한대로 ‘신자유주의자들이 당면한 경제문제에 개인의 자유 등을 비롯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어 본질을 흐려 이 판을 흙탕물로 만든 책임이 있다’것이 이런 의미가 아닌가 합니다. 얼마 전에 리뷰했던 조지프 히스의 글에서도 ‘좌파들은 경제학적 이론을 갖고 치열하게 다퉈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와 같지 않나 싶습니다.

끝으로 저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노동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벗겨내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기술 발전과 노동의 역할이 자본주의 발전에 큰 중요한 부분이라면 좀 더 건전한 발전을 위해 우리 시민들의 노력과 이 판 자체를 흙탕물로 만들려고 하는 일부 우파들의 오역된 주장들을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과거에 자본주의라는 단어가 그동안 너무 계급적으로 인식되어 좌파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점도 극복해야 될 문제일지도 모르겠군요. 경제사와 자본주의 및 시장경제를 과거와 오늘날을 함께 모색하며 서술하고 있는 이 책의 일독이 저에게는 오랜만에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여유가 된다면 조만간 한번 더 정독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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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 우리가 놓치는 민주주의 위기 신호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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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하버드 대 정치학과 교수로서 지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직후,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칼럼 ‘트럼프는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는가?’ 는 많은 조회수를 올리면서 큰 이슈가 된 바가 있습니다. 이에 두 저자는 출판사의 요청을 받아 ‘How Democracies Die’ 라는 기획물이 탄생하게 되었는데요. 이것은 이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원제이기도 합니다.

여기의 두 사람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를 부른 원인에 대해 포퓰리즘-즉, 대중중의 혹은 대중인기영합주의 등으로 해석되는-입니다. 오래전 폴 태가트는 포퓰리즘을 정의한 바 있습니다. 엘리트 정치 체제를 불신하면서 기존의 모든 체제를 부정하고 어떠한 가치주의 없이 대중의 인기에 영합해 탄생하는 정치 체제 혹은 정치가를 뜻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포퓰리즘은 다원주의하고는 확연히 다르고 더욱이 이 포퓰리스트가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독재가로 변신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학자들이 민주주의의 불완정성을 끄집어 내기 위해 자주 써먹기도 합니다. 자신들의 권위주의가 민주주의보다 월등하다고 믿는 것일텐데요. 여기선 이를 더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런 포퓰리즘의 대표적 예가 현재 미국의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일 것입니다. 두 저자들도 동일한 관점으로 트럼프의 출현을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공화당에 책임이 있다고 두 사람은 판단하고 있는데요. 대의적인 측면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당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을 접고 민주당의 힐러리를 지지했어야 했는데 공화당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포함한 다수 인사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는 “정치 엘리트 집단, 특히 정당이 사회적 거름망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는가에 민주주의가 달려있고, 정당은 민주주의의 문지기”라고 말하는 것에서 미국의 양대 정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이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인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 트럼프의 출현은 블루 칼라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미국의 종교적 보수주의 운동인 티파티의 암묵적 승인까지 받게 되어 대선에서 파란을 일으켰는데요. 사실 그때의 상황은 미국인들의 현 정치 불신이 극에 달했고, 트럼프 대통령의 오바마 대통령의 출생지 논란을 비롯한 유언비어 주장인 버서 논란과 힐러리의 이메일 사건을 ‘구속 주장’으로 확대시킨 불합리한 정치적 음모가 합리적 선택을 구축해버린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트럼프 와 이 트럼프 현상이 분명 포퓰리즘과 다름 없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스스로 인종차별주의자이면서 자신에게 비판적인 언론을 나치에 비유한다거나 아직도 오바마 전 대통령의 출생 논란을 주장하고, 오바마 케어와 관련된 기존의 입장을 철회하고 종전의 3국 이란 핵협상을 부정한다던가 하는 기존의 정치인에게서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기존의 체제와 상식을 존중하지 않는 행동에 거침이 없습니다.

미국은 건국 이래로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이 당시의 전제 왕권을 비롯한 전통주의적 통치로부터 안전한 모든 이들의 공화주의 정치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삼권의 안정과 견제로부터 견고한 헌법 체제 등 초기의 미국 정치 체제가 모든 미국 시민들이 이를 존중하고 정치인들도 이런 전통을 받드는 균형적인 발전이 있어 왔는데요. 저자들도 이를 “미국 민주주의의 버팀목은 헌법 뿐만 아니라 상호 관용과 자제의 규범이 보이지 않게 작동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하며 이것이 미국 민주주의의 특수성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런 보이지 않는 양자의 체계가 잘 작동해 왔으나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오바마 행정부를 거치면서 민주 공화 양당이 서로를 같이 나아가는 경쟁자로 더 이상 여기지 않고 극한의 정쟁을 벌여 왔던 것으로 이것이 상호 존중의 틀을 깨는 행위라 이에 간한 여러 사례를 제시하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바마 대통령 시절에는 이 점이 극심했는데요.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아직도 낙태 문제에 보수적인 공화당 인사들이 흑인 대통령을 맞으면서도 기존의 가치관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연방 정부를 셧다운 시키고, 오바마의 여러 개혁 법안을 막아내는 등의 행위들이 낙태와 흑인에 대한 인식, 종교 등 뿌리깊은 기존의 선입견 등이 배경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 정권 지우기에 강력하게 나선 현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비리 수사와 관련하여 “독립적인 수사를 방해하기 위해 사법부를 공격한 것은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는 나라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행동이었다”라고 분석하며, 투표를 억제하고 민주주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나은 공정 선거 대통령 자문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트럼프의 국제외교부분를 제외하더라도 국내 정치에 있어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책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특히 앞으로 더 어두운 전망으로서 트럼프와 공화당이 백인 중심의 정치 정당으로 다시 태어나는 등의 ‘인종적 민주주의’로 나아갈지도 모르는 우려는 매우 심각해 보였고 앞으로 미국의 중간선거와 다음 있을 대선 기간까지의 미국의 정치적 행보를 천천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미국의 반지성주의가 현실에서 종교와 정치를 분리시키는 기존의 이념을 부정하는 종교적 세속주의와 관련이 깊다고 말해왔고, 저는 여기에 이 반지성주의와 포퓰리즘은 거의 한 쌍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반지성주의와 포퓰리즘 양자는 기존의 지식 체계와 정치사회적 엘리트들을 부정 및 불신하며 반지성주의가 시민에 대한 지식의 습득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포퓰리즘은 정치적 각성이 없는 대중들의 단순한 이해 관계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양 자 모두 반사회적이며 반정치적이라고 여겨집니다. 결국 해결책은 투표권을 갖고 있는 시민들이 스스로 지식의 습득과 성찰, 정치적 각오 등을 새롭게 하여 이러한 반정치인들이 제외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겠는데요. 이러한 선동 정치인들이 설 땅을 없애는 것이 앞으로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에게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저의 입장과 관련하여 지난 프랑스 2017년 대선에서 르펜과 대결한 중도파의 후보인 마크롱을 시민들이 뽑은 것이 이러한 측면의 정치 행동이 아닐까 판단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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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 우파는 부도덕하고 좌파는 무능하다??
조지프 히스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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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서도 출간되어 큰 반향을 일으킨 ‘혁명을 팝니다’의 공저자 조지프 히스의 일반인을 위한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글인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을 일독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Filthy Lucre - Economics for People Who Hate Capitalism 로서 지난 2009년 출간된 것 입니다. 책의 저자인 히스는 몬트리올 맥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위르겐 하버마스의 밑에서 조교로 일한 경험 등으로 원래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은 아닙니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이 점에 대해서 자신이 여러 경제학서를 바탕으로 공부한 내용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도 경제학을 독학을 배운 것만큼 우리 독자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듯 했습니다.

국문으로 번역된 제목대로라면 세계의 유일한 사회경제적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좌파들에 대응하는 글 정도로 추측되지만 히스의 이 글은 자본주의를 해석하는 우파와 좌파 양쪽의 선입견과 확대해석 및 오해 등을 우리에게 매우 밀접한 실제 생활에서의 사례로 각각의 근거를 세우고 있는데요. 공공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가 세금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저자가 옆에서 “당신이 그 세금 때문에 생활할 수 있는 것”이라는 등의 우리가 충분히 공감할 만한 대화나 사례들을 글 곳곳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은 꽤 훌륭하다고 여겨지는데요. 물론 마찬가지로 많은 경제학자들과 사회학자들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보이는 저자의 논점은 크게 보면 ‘자본주의하의 시장이 분명 필요하고 반대로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내적 모순과 불안점은 개선시킬 필요가 있다”는 식의 균형점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에 1부는 우파가 저지르는 오류에 대해 2부는 좌파가 저지르는 그것을 각각의 동일한 비중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우파는 감세가 경제 발전을 추동한다, 국가 경쟁력이 중요하다, 인세티브의 중요성, 그리고 도덕적 해이를 잘못 인식하고 있는 부분을 비판하고 바로잡고 있습니다. 자유 방임주의자들에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우파는 시장에서의 개인의 이기심이 합리적으로 발휘된다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하여 정부가 시장에 무분별하게 개입하지 않고 야경 국가에 국한된 형태를 선호한다와 같은 주장들은 거의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기심을 통한 개인의 행동을 더욱 긍정적으로 유발시키는 인센티브와 관련된 입장에서도 과도한 해석을 하는 부분과 사실상 인간 이기심을 합리적이라고 단언하는 등의 내용은 우파가 얼마나 이 신고전주의 경제학과 연관되어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한 사회의 양상은 각 개인이 내리는 선택의 총효과이며, 개인의 선택은 지역의 사정과 상황에 상당히 민감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관건”이라고 저자가 언급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이기심을 포함한 행동들이 상황에 따라 변화되는 것 자체가 인간행동학에서 말하는 인간 행위의 단순 수치화가 어렵다는 측면의 해석과 개인이 합리적이라고 해서 집단이 무조건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오류에 가깝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각각의 이기적 개인들이 참여하는 시장에 있어서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이것을 간단하게 수치화해서 국가의 참여를 어느 정도까지인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완연한 법과 제도의 완비와 함께 국가의 역할이 분명 필요한 것은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에서도 앞의 가치가 거의 동일할 것입니다.

애덤 스미스가 조심스럽게 예측한대로 이기적 인간들이 합리성에 도달하기란 말 그대로 일어나기 어랴운 일이고 자유방임주의 자체가 직관에 기초한 논리인 만큼 이들간의 엄밀한 분리가 분명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런 측면에서 ‘개인의 이기심과 공익은 조화시키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 점일 것입니다. 토크빌은 이미 오래 전에 개인의 이기심을 조절하지 않으면 사회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예견한 바가 있습니다. 공익이라는 대의를 사익인 이기심이 과연 해치지 않고 조화롭게 나아갈 수 있는지는 앞으로 좀 더 지켜봐야겠죠.

뒤이어 좌파가 저지르는 오류에 대해 저자는 시장에서의 시장 참여자들이 가격을 조절하려는 욕망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과 돈버는 일이 나쁘다고 주장하는 것, 자본주의의 고도화는 결국 내부 모순으로 인한 붕괴로 이어진다는 전통적인 입장, 하향평준화는 평등의 방법으로는 옳지 않다는 등 좌파들의 이런 주장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실살 자본주의에 대한 좌파들의 비판은 자주 도덕주의적 원칙론과 같은 입장으로 선회해 그 목소리의 한계가 분명해 보입니다. 현실 상황에 합당한 비판들을 해야하는데 아직도 계급에 대한 입장에 돌아서지 않고 자본주의 자체를 타파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좌파 지식인들이 많아 이런 부분의 자기 수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잉 생산이 소비주의의 근원’ 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현실과 다른지 충분히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를 무조건 옹호하는 사람들의 반대편에 서서 이것을 건전하게 비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 레이건과 대처 이후로 시작된 신자유주의 시대에 좌파가 그 비판 세력이 되지 못하고 지리멸렬한 것은 히스의 이 글에서도 보이듯 너무나 그 비판이 도덕적이고 이념적이어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러한 태세를 전환하여 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해 경제적 타당성을 우선하여 끈질기게 비판해 나가는 것이 앞으로 좌파들의 여러가지 선결 조건 중에 하나가 되어야겠죠. 히스도 이런 입장의 문장을 글에 담고 있습니다.

다만, 빈곤층에 대한 히스의 도덕적 태도가 저는 약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매우 값싸게 생산되는 전력에 대해 낭비되는 자원을 막아보고자 계층의 상황과 상관없이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도 뭔가 납득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빈곤의 절대적 문제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문제라고 이제는 받아들여야 하는데 좀 더 힘든 노동에 처해 마땅한 댓가를 수용하고 있지 못한 하층의 노동계층에 대한 이해도 조금 부족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이런 몇 가지를 제외하면 다른 자본주의 경제론에 대한 여타 글보다는 충분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싶군요. 특히 앞서 언급한 대로 실제 생활로 많은 사례를 들고 있는 것은 큰 장점이라고 생각되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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