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 이덕일의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
이덕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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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노론(老論)이 아닌 다른 시각을 견지(堅持)하는 이덕일 사학자. 그는 누군가가 역사의 음지(陰地)에 묻혀 있다 해서 무조건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가 정당성을 부여하는 기준은 역사의 음지에 묻혀 있는 이유이다.

그가 예시하는 인물들의 면면들은 다음과 같다. 아계 김일경(金一鏡: 1662 – 1724), 백호 윤휴(尹鑴: 1617 – 1680), 명재 윤증(尹拯), 이가환(李家煥), 이승훈(李承薰), 소현세자 등등..

김일경은 왕권을 위협하는 거대 정당에 맞서 싸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윤증은 증오의 시대에 사랑의 정치를 역설하다가 은둔했다. 이가환, 이승훈은 폐쇄된 사회에서 개방된 사회를 지향하다 사형되었다. 소현세자는 열린 미래를 지향하다가 독살되었다.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는 시대와 불화했던 스물 다섯 학자, 선비들을 오늘 이곳으로 초대한 책이다. 정도전, 조식, 이경석, 윤휴, 정제두, 유득공, 최치원, 이장옥, 허난설헌, 허균, 홍경래, 정하상, 김개남, 김육, 이익, 유수원, 이긍익, 박제가, 천추태후, 김시습, 김일손, 유몽인, 강홍립, 이광사, 김창숙 등이다.

정도전은 고려말 토지개혁을 주도한 인물이다. 토지가 소수에게 집중되어 대다수 농민들이 몰락한 시대였다. 조선 개창의 원동력은 토지 개혁이었다. 정도전이 토대를 마련했다. 정도전은 친명 외교정책을 주장하다가 유배까지 갔지만 사대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정도전은 요동 정벌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방원의 난으로 남은, 심효생, 이근, 장지화 등과 함께 살해됨으로써 요동정벌은 무위로 끝난다.

남명 조식(1501 – 1572)은 칼을 찬 선비였다. 조식은 벼슬에 나가면 대대적인 개혁을 하고 초야에 은거하면 가난 속에서 도를 찾는 선비가 되겠다는 원나라 허형(許衡)의 글에 큰 감명을 받았다. 조식은 과거(過擧)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조식의 거듭된 출사(出仕) 거부는 천거(薦擧) 당사자인 이황(1501 – 1570)과의 작은 논쟁으로 이어진다.

조식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천거했는가가 아니라 그 시대의 의미였다. 조식의 사상은 주자학에 매몰되지 않았다. 조식은 불교와 유교의 근본원리가 같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조식은 처사(處士)의 재야 정신을 죽는 순간까지 지녔다.

칼을 찬 선비 조식의 진가는 임진왜란 때 발휘되었다. 그의 제자들이 대거 의병장으로 활약한 것이다. 곽재우, 정인홍 등...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1595 – 1671)은 인조 대에 주화론(主和論)을 주청한 인물이다. 척화(斥和) 즉 주전(主戰)론이 대세인 시대, 척화론이 아니면 사대부 대접을 받지 못하는 시대에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광해군의 실리 외교를 상국(上國)에 대한 배신이라며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 정권으로서는 척화론 외에 길이 없었다.

윤휴(尹鑴: 1617 – 1680)는 양란(兩亂) 이후 주자학 유일사상과 신분제 강화라는 복고적 노선을 걸은 노론에 반대한 인물이다. 윤휴의 사상은 주자(朱子)의 견해와 배치되었다. 윤휴는 병자호란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열중했다.

집권 서인에게 주희(朱熹)는 일개 학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윤휴가 그와 다른 학문 체계를 수립한 것이다. 서인은 격하게 반발했다. 송시열(宋時烈: 1607 – 1689)은 중국의 다른 학자들은 주희의 주(註)를 보충했지만 윤휴는 대치(代置)했다고 주장했다. 송시열에게 성리학은 학문이 아니라 종교였다.

윤휴는 사상의 절대성을 비판했다. 그는 이이, 이황의 학설도 비판했다. 그는 이이의 이선기후(理先氣候)나 이황의 이통기국(理通氣局) 등을 보두 비판하고 기일원론(氣一元論)을 내세웠다. 성시열은 이황이나 이이를 비판할 수 있어도 주희는 비판할 수 없었다. 송시열에게는 사서(四書)보다 사서에 대한 주희의 해석이 더욱 중요했다.(58 페이지)

태극(太極)이 기(氣)라는 윤휴의 말은 교조화된 조선 주자학을 전면 부인하는 것이었다. 주희는 만물의 근원적 존재인 태극(太極)을 이(理)라고 설명했다. 북벌 군주 효종의 갑작스런 승하(昇遐)는 예송(禮訟) 논쟁을 낳았다. 효종의 계모 자의대비 조씨가 얼마간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예송 논쟁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조선 역사를 당쟁망국론으로 규정지은 소재였다. 그러나 이 논쟁은 어느 것보다 현실적인 정쟁이었다. 효종의 왕통 계승이 정당한가, 하는 논쟁이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1년복을 주장했다. 윤휴는 3년복을 주장했다. 송시열이 주장한 것은 체이부정(體而不正)이었다. 효종처럼 아버지를 계승했으나 가통을 이은 적장자가 아니니 3년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서인이 1년복을 주장하고 남인이 3년복을 주장한 것은 두 당파가 지닌 세계관의 표출이었다.(65 페이지) 서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주자학적 정치 이념은 신권 중심의 지배구조로서 국왕은 사대부 중의 1 사대부이지 사대부를 초월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남인들은 국왕을 사대부 위에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로 받아들였다.(65 페이지)

윤휴는 북벌을 주창했다. 서인 정권은 북벌론을 명분으로만 내세웠다. 저자는 현행 교과서가 효종이 송시열 등을 동원해 북벌을 준비했다고 쓰고 이는데 이는 잘못이라고 말한다.(67 페이지) 윤휴는 양반들에게도 호포(戶布)를 징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휴의 안(案)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1649 – 1736) 역시 주희의 이론에 반기를 든 인물이다. 정제두는 명나라 왕양명의 학설을 지지하는 양명학자였다. 왕양명은 세상 사람들 중 미친 사람이 있는데 내가 어찌 미치지 않겠으며 상심한 사람이 있는데 어찌 상심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가진 인물로 주자학의 신민설(新民說)을 비판했다.

백성들을 친함의 대상으로 보는 친민설(親民說)과 대립되는 신민설은 백성을 새롭게 변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학설이다. 양명학은 처음부터 금기의 대상은 아니었다. 이황이 ‘전습록변’에서 양명학을 사문(斯文: 주자학)의 화(禍)라고 비판한 뒤부터 금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황의 비판은 양명학의 핵심을 간과한 비판이어서 잘못된 것이다.

양명학이 이단으로 몰리면서 조선에는 외주내양(外朱內陽) 즉 겉으로는 주자학자를 자처하고 속으로는 양명학자인 경우가 많이 생겼다. 정제두는 유일한 외양내양의 선비였다. 정제두는 양명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대신 이단의 딱지를 붙이려는 사람들에게 강하게 대들었다. 그는 자신에게 이단 딱지를 붙이려는 주자학자들에게 참다운 도가 무엇인지 논하자면 당당히 맞섰다.

유득공(柳得恭: 1748 – 1807)은 역사인식의 전환을 이룬 서얼 지식인이다.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은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라고 불렀다. 청나라에 망한 명나라가 다시 서기를 갈망했으나 끝내 다시 서지 못하자 조선이 작은 중국이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85 페이지) 저자는 소중화 사상을 사대주의의 극치로 평한다.

유득공은 정조의 배려로 관직에 오른다.(규장각 검서관) 신라 통일 이후를 통일신라 시대라 인식하던 시절에 유득공은 그 역사를 남북국 시대라 인식했다. 북방 강토(疆土)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유득공은 ‘발해고’ 서문에서 규장각에 있으면서 비장(秘藏)된 책을 쉽게 읽어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93 페이지)

2부 ‘신선한 공기는 죽음보다 감미롭다‘의 첫 순서는 고운(孤雲) 최치원이다. 신라 시대의 학자로 저자의 저술 영역이 넓음을 증거하는 사례이다.

이징옥(李澄玉: ? - 1453)은 문약(文弱)의 나라 조선에서 특이했던 인물이다. 맨 손으로 산돼지를 잡았을 정도의 인물이 그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 – 1589) 허초희(許楚姬)는 시대의 모순에 시로 맞서 싸운 저항시인이다. 둘째 오빠의 배려로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한시를 배운 사람이다. 허난설헌은 아내의 사부곡까지 음탕으로 몰던 사회를 조롱했다. 허난설헌에게 도교는 현실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해주는 도피처였다.

허난설헌은 노동자가 노동의 결과물에서 소외된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나오기 300여 년 전에 시인의 직관으로 소외 현실을 간파한 선구자이다.(128 페이지) “용모인들 남에게 떨어지리오/....뉘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 되려나// 손으로 가위 잡고 가위질하면/ 추운 밤 열 손가락 곱아오는데/ 남 위해 시집갈 옷을 짜고 있건만/ 자기는 해마다 홀로 산다네”

저자는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 – 1618)처럼 수수께끼에 쌓이고 생전은 물론 사후까지 끝없는 논쟁의 대상이 된 경우를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131 페이지) 허균은 사주(四柱)처럼 순탄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 허균은 광해군 9년 말부터 시작되는 인목대비 폐출(廢黜) 논의에 앞장서 두고두고 논란거리를 제공한다.

다산 정약용의 스승으로 알려진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 – 1763)은 당쟁과 뗄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익은 남인(南人) 명가 출신이지만 출생 한 해 전 서인이 남인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한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나 부친이 평안도 벽동군으로 유배되었다. 이익은 서얼과 농민, 노비의 등용을 주장하고 농사와 학문을 택한 인물이다.

이익은 당쟁의 구조를 간파하고 편당심(偏黨心)을 강하게 비판했다. 편당심 속에서 성장하면 남에게 밝히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자신 또한 깨닫지 못한다. 참으로 밝은 지혜에다 결단성을 지니지 않으면 이를 뛰어넘어 높은 경지에 오르기 어렵다고 주장한 것이다.(196 페이지)

이익은 주자학을 뛰어넘어 서학도 수용했다. 다산은 둘째 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들이 능히 천지가 크고 일월이 밝은 것을 알게 된 것은 모두 이 선생(이익)의 힘입니다.”란 말을 했다.(199 페이지)

유수원(柳壽垣: 1694 ~ 1755)은 경종(景宗)에 대한 충심을 간직했던 선구적 실학자로 ‘우서(迂書)’를 썼다. 유수원은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들이 몰락한 숙종 20년 출생했다. 이 무렵 집권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分黨)되었다. 유수원의 집안은 소론이었다.

노론은 소론의 반대 속에서 장희빈을 사사하고 그의 아들인 경종까지 제거하려 했다.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경종의 이복동생 연잉군(延礽君: 영조)을 국왕으로 삼기 위해 왕세제(王世弟) 책봉(冊封)을 추진했다. 노론은 경종 1년 소론 대신들이 모두 퇴궐한 틈을 타 경종을 위협해 왕세제 책봉을 전격 단행했다.

경종은 서른 넷이었고 계비 선의왕후 어씨는 열일곱이었으니 젊은 왕에게 왕세제 책봉을 주장한 것은 명백한 쿠데타였다. 이때 왕세제 책봉 취소를 주장한 인물이 유수원의 종숙 유봉휘였다. 경종 독살설 속에 즉위한 영조는 즉위 뒤 노론과 소론을 모두 포옹하는 탕평책을 표방했지만 속마음은 노론에 있었다.(204, 205 페이지)

이긍익(李肯翊: 1736 – 1806)은 당파성을 배제한 역사서인 ‘연려실기술’을 쓴 인물이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편년체가 대부분인 우리나라에서 특이하게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역사서이다. 해당 사안에 대한 상반된 견해의 사료를 수록함으로써 사료로 말하게 하는 저술 방법을 택했다. 이긍익이 택한 관점은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이다. 옛것을 전하기만 할 뿐 짓지 않는다는 의미이다.(217 페이지)

물론 이긍익의 생각이 반영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무리 객관적인 사료를 제시한다 해도 해당 사건을 선택하는 것은 이긍익의 몫이었다.

박제가(朴齊家: 1750 – 1805)는 놀고 먹는 자들은 나라의 좀이라는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용후생(利用厚生)으로 가난을 물리치려 한 인물이 박제가이다. 서얼 출신인 박제가는 문관의 길이 막히자 무과로 방향을 전향해 정조 18년(1794년) 무과별시에 응시해 급제한다.(228 페이지)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란 말은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믿은 김일경이 영조에게 한 말이다.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에 나오는 모든 사람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고 불의에 맞선 선비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저자는 연산군 때의 사관 김일손(金馹孫)이 이미 죽은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성종실록’에 실으려다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한다.

무오사화의 한 장면인데 저자는 사화(士禍)와 사화(史禍)를 이야기한다. 사화(士禍)는 선비가 화를 입은 것을 지칭하고 사화(史禍)는 김일손, 권경유, 권오복 같은 사관들이 사지가 찢겨 죽는 능지처참을 당한 것을 이르는 말이다. 기록되지 않았지만 단재 신채호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단재를 식민사관의 틀을 깨고 우리 역사의 무대가 얼마나 넓고 광활한지 가르쳐준 역사가라고 말한다. 그는 역사 기록의 한 자 한 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제의 실증사학자들 이상으로 입증한 사학자이기도 하다.

사마천, 김일손, 신채호 세 역사가는 저자가 역사를 업으로 삼게 되면서 종종 생각한다는 역사가들이다. 저자는 사마천, 김일손, 신채호 등이 자신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이 분들이 당대가 아니라 다음 시대와 대화했기 때문이라 말한다.(10 페이지) 역사는 무엇이며, 역사가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잊혀진 인물, 잘못 알려진 사건을 찾아 발굴하는 저자의 노고에 고개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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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실마리가 될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경제학이 과학적일 것이라는 환상’이다.

저자는 현대 서구 사회를 인류학적 관점으로 분석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질베르 리스트(Gilbert Rist).

인류학적 관점으로 주요 이슈를 분석한 책으로 재작년 읽은 김현경 박사의 ‘사람, 장소, 환대’를 들 수 있다.

카(E. H. Carr: 1892 – 1982)가 역사보다 역사가를 먼저 보라는 말을 한 것을 경제학에 적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지난 2011년 감명 깊게 읽은 ‘경제학 혁명’ 생각이 난다. 이 인상적인 책에서 수학자이자 생물학자인 데이비드 오렐은 수학자 노버트 위너의 말을 인용한다.

즉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부정확한 생각을 미분학의 언어로 가장하는 기발한 습관을 개발했다는 것이다.

오렐에 의하면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은 경제학을 수학화 하는 사회과학자들의 일반적인 성향에 대해 그것들은 모두 사람들을 겁주기 위한 것 즉 오류라고 말했다.(305 페이지)

궁금한 것은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수많은 말들이 은유(隱喩)임을 의식하는지, 이다. 은유는 엄밀한 학문인 과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기적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이란 은유가 과학적 사실로 굳어지는 것을 보고 흐뭇해 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요즘 유행하는 통섭(統攝: consilience)도 은유이고 면역학의 자기, 비자기도 은유이다. 경제학에서 쓰이는 불황, 호황, 위축, 공황, 인플레이션, 보이지 않는 손,

낙수효과, 자유방임주의 등 숱한 용어들이 은유이다. 반등(反騰)하다, 바닥을 쳤다, 성장 동력 등도 그렇다.

물론 우리는 은유 없이 사유할 수 없다. 경제학 교수 윤기향은 고전학파들이 신봉했던 자유방임주의(laissez – faire)란 말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어라란 의미의

프랑스어 laissez faire, laissez passer에서 따온 말이라고 말한다.(‘시가 있는 경제학’ 112 페이지)

문제는 자유방임주의의 예에서 보듯 잘못된 생각을 하도록 하는 위험한 것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영감(靈感)이 다 좋을 수는 없으리란 말이 가능하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일이 아닐지?

이는 내 주된 관심사인 역사에도 분명 적용되어야 할 말이다. 관건은 1차 사료(에 대한 정독)이다.

이는 곧 ‘조선 왕조실록 연구‘ 팀에 들어가는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크로스 체킹을 염두에 둔, 겸허한 연구가 되어야 하리란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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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나무를 심다
김은경 지음 / 북촌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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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租)에 대한 자료를 모으는 중에 이런 구절을 만났다. “정조는 정구팔황(庭衢八荒) 호월일가(胡越一家)의 여덟 글자를 써서 소주합루(小宙合樓) 문에 걸어 두었다. ‘변방도 뜰처럼 가까이 하고 오랑캐도 한 집안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정조는 이로 인해 어려움도 많이 겪었던 듯 하다.

즉 정치적 이해관계를 달리 하는 노론의 심환지에게 자주 편지를 보내 지금 정조는 독살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나오게 된 원인이 되었다 할 수 있다. 이런 즈음에 김은경 교수의 ‘정조, 나무를 심다’를 읽게 되었다.

정조는 조선 최고의 식목왕으로 불린다. 정조는 열한 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최후를 맞는 비극을 겪는다. 저자는 정조가 죽은 나무로 만들어진 상자에 갇혀 숨을 거둔 아버지가 살아 있는 나뭇가지와 이파리를 타고 생명력을 가진 존재로 되살아나 자신과 조선왕실을 지켜줄 거라 확신했으리라는 말을 한다.(23 페이지)

정조가 즉위 후 7년 간 아버지 사도세자의 릉인 현륭원에 심은 나무만 1200만 그루였다. 이런 사실을 비롯해 쉽게 접하기 어려운 기록들을 담은 ‘정조, 나무를 심다’는 조선왕릉과 5대 궁의 나무 심은 기록을 “치열하게 들여다본 결과물”이다.

사도(思悼)세자란 호칭은 영조가 뒤주에서 목숨을 잃은(임오화변) 아들의 지위를 세자로 회복시킨 뒤에 붙인 시호(諡號)이다. 장헌(莊獻)세자란 호칭은 정조가 아버지의 시호를 높인 것이고 장조(莊祖)는 고종이 추존한 이름이다. 사도세자가 묻힌 곳은 수은묘(垂恩墓), 영우원(永祐園), 현륭원(顯隆園), 융릉(隆陵) 등으로 바뀌었다.

저자는 사도세자가 묻힌 곳이 격상되었듯 사도세자의 사후 지위도 나무가 자라듯 높아진 셈이라고 말한다.(25 페이지) 정조는 나무 심은 기록을 꼼꼼히 기록할 것을 명했다. 정조가 7년간 현륭원에 나무 심은 가록물이 소가 땀을 흘릴 정도(한우충동汗牛充棟)로 많았다(27 페이지)고 하니 놀랍다.

기록된 것은 나무 심은 날짜, 심은 사람, 감독자, 장소, 자원하여 나무를 심은 사람, 나무 종류, 그루 수, 캐온 곳, 캔 나무를 운반한 사람, 나무 가격, 나무를 심은 이들에게 지불한 품삯 등이다.

정조는 그 기록들을 한 권으로 정리하라는 명령에도 한 장의 문서로 정리, 보고한 정약용을 칭찬했다. 물론 정조는 즉위한 해에서 시작해 승하한 해까지 나무를 심었다. 저자는 1800년 정조가 승하했지만 그가 심은 나무의 생명력은 씨앗에서 씨앗으로 전해져 아직까지 여전하다고 말한다.(35 페이지)

저자는 일제에 의해 철저히 뜯겨나간 경희궁(慶熙宮) 터에 들어서면 쓸쓸함이 극대화되다가 마음이 정리되고 의로 받는 느낌이 들곤 한다고 말한다.(37 페이지) 저자는 경복궁과 구별하기 위해 창덕궁과 창경궁은 동궐(東闕)로, 경희궁은 서궐(西闕)로 부르게 된 사정을 말한다. 정조가 즉위한 곳이 경희궁 숭정문(崇政門)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경희궁을 걷다 보면 정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고 말한다.(38 페이지)

경희궁은 처음에 경덕궁이라 불렸는데 이것이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의 시호와 음이 같다는 이유로 경희궁으로 불리게 되었다.(39 페이지) 저자는 정조를 조선이라는 나무가 북풍한설을 맞아내면서도 틔워낸 새싹으로 비유한다.(38 페이지)

저자는 열세 살에 왕손으로 책봉(冊封)되어 왕으로 즉위하기까지 정조가 10년 넘게 경희궁에서 책과 씨름하고 할아버지 영조의 정치력을 배우는 동안 몸과 마음이 동궁 인근의 나무들과 함께 무럭무럭 자라났다고 말한다.(40 페이지)

정조는 여러 나무의 생태를 잘 알았다. 정조는 숲 박사였다. 정조는 다양한 나무를 심도록 명했다. 소나무, 개오동, 흰느릅, 느릅, 이나무, 오동, 가래나무, 옻나무 등..정조가 심도록 한 나무들은 농사 짓는 백성들이 쉽게 심을 수 있는, 먹고 사는데 유용한 것들이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나무와 곤충, 새 이름을 비우던 책은 ‘시경’이었다.(52 페이지)

그런데 정조가 나무를 배운 것은 경희궁을 통해서였다. 살아 있는 나무들을 보고 배운 것이다. 정조에게 나무 심기는 혀를 실천하는 방법이었다. 정조는 유독 단풍나무 종류를 많이 심도록 했다. 정조는 심은 나무를 철저히 관리할 것을 명했다.

정조가 아버지의 사당(祠堂)인 경모궁(景慕宮)에 나무를 심은 것은 효도 차원이었다. 저자는 정조가 나무들이 정치로 바쁜 자신을 대신하여 언제나 아버지 곁에서 푸른 그늘을 드리워 아버지를 지켜주기를 소망했다고 말한다.(80, 81 페이지)

정조가 아버지의 사당에 화색이 도는 단풍나무를 심으라고 한 것은 가장 화려하게 피어나야 했을 때 삶을 마친 아버지께 선물을 하려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81 페이지) 저자는 정조의 나무 심기와 규장각을 통한 인재 양성을 같은 차원으로 본다. 장차 인재로 클 어린 아이들을 이르는 꿈나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정조는 즉위 직후 왕립도서관이자 인재 양성소인 규장각(奎章閣)을 세웠다. 창덕궁 후원에. 정조는 왕과 그 가족만의 공간이 후원에 신하들을 초대했다. 규장각 각신과 검서관들이다. 외규장각은 강화에 설치되었는데 이는 국내의 변란이나 외적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의도였다. 창덕궁 후원에서 꽃을 감상하고 낚시를 하며 시를 지은 모임을 상조회(賞釣會)라 한다.

저자는 사람을 키우고 학자를 키워내려 했던 정조가 규장각에 소나무를 심어 학자들이 자라는 것을 소나무와 함께 지켜보았다고 말한다.(99 페이지) 서른 세 살의 정조를 아버지가 되게 한 존재는 순이었다. 세 살에 세자로 책봉된 순은 다섯 살에 홍역을 앓다가 세상을 떠난다. 후에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얻는다. 참고로 왕의 장례를 국장(國葬)이라 하고 세자의 장례는 예장(禮葬)이라 한다.

정조는 문효세자의 공간으로 새로 세운 중희당(重熙堂)에 천문관측 기구들을 설치했다. 왕세자 책봉식은 바로 이 중희당에서 거행되었다. 세자의 무덤은 풍수적인 길지보다 찾기 편하고 가까운 곳을 원칙으로 세운다. 문효 세자가 묻힌 효창공원 자리인 효창묘(孝昌墓)도 그렇다.(문효세자의 사당은 문희묘文禧廟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풍수지리적 명당에 자리 잡은 한양의 지세를 보호하기 위해 나무를 심어 지맥을 보호하고 소나무 벌목을 금지했다.(136 페이지) 정조 당시 문효세자의 묘 조성을 위해 자기 돈을 쓰고 자신 또한 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있었다.

왕릉에 가장 많이 심는 나무는 소나무이다. 그런데 소나무는 옮겨 심는 과정에서 살아 남는 비율이 낮다. 정조 14년 가을에 심은 나무는 소나무 45만 그루로 이때 심은 것들은 모두 흙을 붙여서 옮겨 심은 것들이어서 이식 성공률이 높았다. 소나무는 옮겨 심는 것보다 씨를 파종하면 더 잘 살아 남는다.

경관을 조성하려면 이식하는 것이 더 낫다. 정조는 두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았으나 옮겨 심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다.(161 페이지) 소나무의 이식 성공률을 높이려면 대토(帶土)해야 한다. 뿌리에 흙을 붙여서 옮겨 심는 것이다.

정조는 송충이를 잡으려고 백성들이나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다. 대신 구양수(歐陽脩)의 시에서 “관전 스무 냥으로 벌레 한 말을 사들이면 잠깐 사이에 잡은 벌레가 산처럼 쌓일 것”이란 구절을 인용하여 잡은 벌레의 무게에 따라 값을 쳐주도록 했다.(177 페이지)

계지술사(繼志述事)를 줄여 계술(繼述)이라 한다. 선왕이나 조상의 뜻과 업적을 계승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왕실은 계술하는 것을 가장 큰 효로 여겼다. 조선왕실은 나무심기도 계술을 했다. 식목왕 정조의 택목(擇木)에는 왕릉을 풍성한 숲으로 가꾸려는 마음과 백성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하려는 애민정신이 깃들어 있었다.(199 페이지) 잣나무 이야기이다.

정조 22년에는 홍살문 내외에 잣나무를 심었다. 홍은 붉다는 의미의 red가 아니다. 팥죽색에 가까운 색이다.(204 페이지) 잣은 해송자(海松子)라 한다. 송자(松子)는 소나무 씨앗이 아니라 잣을 말한다.(210 페이지)

정조가 현륭원(顯隆園)에 심은 나무 가운데 하나인 버드나무는 경계를 나타내는 역할을 했다. 버드나무는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20미터까지 자라기에 차폐 역할을 한다. 성종은 백성들이 창경궁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하려고 빨리 자라는 버드나무를 심도록 명했다.(238, 239 페이지)

경복궁 경회루에는 버드나무가 연못을 따라 자라고 있다. 저자는 경복궁에서 4년간 방문객들에게 설명하는 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 개량한복을 입고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경복궁에 대해 떨리는 목소리로 안내를 하면서 경복궁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자신만 아는 길로 방문객들을 안내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던 시간들 속에 버드나무가 있다고 말한다.(241 페이지)

버드나무의 솜을 유서(柳絮)라 한다. 정조는 봄이 올 때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현륭원을 찾았다. 아마도 그는 길가에 심어진 버드나무의 연초록 물결과 소나무의 진초록 물결을 가르며 가볍게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다.(245 페이지)

창덕궁 후원 옥류천(玉流川) 권역에는 청의정(淸漪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조선왕실은 농사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이 정자 앞에 작은 논을 만들어 직접 벼를 심고 거두었다.(247 페이지) 이를 친경(親耕)이라 한다. 왕이 농사짓는 밭을 적전(籍田)이라 한다. 왕비는 친잠(親蠶)을 했다.

영조와의 대화에서 농사짓는 이유와 뽕나무를 심는 이유에 대해 거침 없이 답한 정조는 실제 누에를 직접 보지 못했고 친잠례(親蠶禮: 양잠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예)때 처음 누에를 보았다.(248 페이지) 농업(農業)과 잠업(蠶業)은 조선의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다.

정조는 현륭원에 오얏나무도 심었다. 오얏은 자두의 옛말이다. 현재는 자두가 표준어이다.

대한제국 문장(紋章)에 오얏꽃잎이 그려져 있다. 오얏꽃은 꽃잎이 5장이고 꽃잎마다 꽃술이 3개씩 있으며 3송이씩 뭉쳐서 핀다.(262 페이지)

저자는 정조가 단지 나무를 심은 것이 아니라 나무들과 더불어 훌륭한 인재들을 심었다고 말한다.(276 페이지) ‘정조, 나무를 심다’는 정조를 나무와 연결지어 논한 색다른 책이다. 정치사가 아닌데 이렇게 흥미로운 것은 저자의 필력 때문이다. 정조의 서재 또는 책을 다룬 책이 있는지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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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7-01-31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조대왕을 다룬 책들은 많지만, 나무를 주제로 조명한 서적은 처음인 듯 합니다. 말씀처럼 색다르면서도 내용이 수박겉핥기 수준이 아니고 깊이가 있어 보입니다. 좋은 서평 읽고 갑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1-31 1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케모마일 님 감사합니다... 색다른 책임이 분명합니다...
 

 

우리나라 성인의 문해력이 아주 낮다고 하지요. 글을 읽을 줄 알지만 뜻을 잘 모르는 것이지요. 어려운 구문일수록 더 그렇지요. ** 님의 말처럼 글이 쉽고 짧고 간단하고 재미있으면 좋지요. 그러니 글 쓰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멋을 부리고 난해한 개념들로 지식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닌 이상 글은 명쾌하고 쉽고 재미있게 쓰도록 해야겠지요.

 

하지만 세상의 진실들이 그렇게 명쾌하게 딱 떨어지는 형식으로 정리되는 것이 아님을 유의해야 하지 않을까요? 글쓰기는 소통을 염두에 두는 작업이 되어야 하지만 더 난해하고 복잡한 개념, 분야, 영역의 내용들을 이해할 수 있는 훈련이기도 하지요. 충분히 생각하고 쉽게 풀어내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쉬운 글을 의도적으로 쓰려다 보면 결국 쉬운 생각, 상투적인 생각을 하는 데 그치고 말 것입니다.

 

쉽고 재미있는 글을 위주로 독서를 하려는 것은 게으름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성인의 낮은 문해력을 생각하면 처음부터 어려운 글을 읽게 하는 것은 무리이지요. 문제는 쉬운 글을 쓰는 사람이 일정 정도 후에 독자들의 지적 훈련을 위해 어려운 글을 쓰겠는가입니다. ** 님의 생각은 너무 안일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쉽고 간결하고 재미 있는 글을 쓰면 심사위원에게 좋은 평가를 받긴 하겠네요. **님의 글은 쉽고 재미있고 짧게 쓰라는 당부 외에 들을 만한 부분이 물론 있습니다. 가령 독자들을 가르치려 하지 말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가르치려 하지 말고 호소하라는 글은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라는 정희진 작가의 글을 참고할 만합니다. 이 분은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주식이나 자동차 분야를 잘 모른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글을 읽을 때 무지한 내가 문제지 어렵게 쓴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상적입니다. 동의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정희진 님 같은 분만 있으면 ˝인간이 가진 가장 나쁜 성향들 중 하나는 자신에게 원인이 있는 것을 상대방에게 돌리는 것이다. 나는 무식하다고 말하기 싫기 때문에 이거 뭐 이렇게 어려워라고 말하는 것이다˝ 같은 말(이정우 교수 지음 가로지르기‘ 145 페이지)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인용한 김에 더 하자면 정희진 님은 쉬운 글을 선호하는 사회는 위험하다고 말하며 쉬운 글은 내용이 쉬워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여서 쉬운 것이라 말합니다.(2013214일 경향신문 기사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

 

글이 어려우면 왜 그런지 동기를 헤아려야 합니다.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인지, 장하준 교수가 말했듯 주류경제학이 자신들의 과오를 은폐하고 경제학을 엄밀 과학으로 만들게(또는 보이게) 하기 위해 어려운 수식들을 쓰게 됨으로써 어려워진 것인지, 어려운 글을 이해하지 못해 글을 요령부득으로 쓰게 되어 어려운 것인지, 아니면 정말 어려운 것을 전하기에 어려운 글이 된 것인지 등을 가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다층적인 난해의 스펙트럼을 한 마디로 어려운 글이라 하는 것은 너무 안일해 보입니다. 쉬운 현상이나 개념은 왠만하면 쉬운 글이 되겠지요. 하지만 어려운 현상이나 개념마저 쉽게 쓰()는 것은 일정 정도 폭력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룻만에 이해하는 무엇 무엇, 쉽게 쓴 무엇 무엇 같은 책을 놔두고 장중하고 난해한 원전을 읽는 것은 난해에 중독되어서일까요?

 

윤동주 시인이 쉽게 쓰여진 시에서 한 말을 음미해봅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어떻든 최대한 풀어쓰는 노력을 기울여야 함은 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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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7-01-30 16: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글을 쉽게 쓴다는 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지합니다. 글을 쉽게 쓴다고 해서 내용까지 쉬워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같은 내용이라도 비유나 일상의 언어로 쉽게 설명하는 사람이 있고 전문용어나 혹은 난해하게 설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용과 그것을 확실하게 전달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희진씨의 글은 저도 참 좋아합니다. 하지만 어려워요. 보다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알리려면 쉽게 쓰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고양이라디오 2017-01-30 17: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시 벤투님의 글을 읽어보니 제가 독해를 잘못했네요ㅎㅎ

˝쉬운 글을 의도적으로 쓰려다 보면 결국 쉬운 생각, 상투적인 생각을 하는데 그치고 말 것입니다.˝

˝쉬운 글을 선호하는 사회는 위험하다고 말하며 쉬운 글은 내용이 쉬워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여서 쉬운 것이라 말합니다.˝

이 부분이 이 글의 요지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저 생각에 동의합니다. 정희진님과 벤투님이 말하는 쉬운 글은 제가 생각하기로는 편한 글, 뻔한 글,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치우친 글들이란 생각이 듭니다. 깊게 생각하지 않은 쉬운 생각들을 쉽게 이야기한다는 의미같습니다. 예를들면 여성문제, 역사문제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결국 저도 벤투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하는 것은 지향해야 하며 기존의 나쁜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답습하는 쉬운 글은 지양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1-30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습니다...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치열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17-01-30 17:31   좋아요 1 | URL
벤투님 덕분에 저도 그동안 너무 쉽고 편한 책만 찾지 않았나 반성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1-30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아닙니다. 저도 잘 실행하지 못하지요. 또 생각이 두서없이 전개된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꼬마요정 2017-01-31 0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점점 독해력이 떨어져서 고민입니다. 글들이 자꾸 어렵게 느껴져요ㅜㅜ 내용이 어려운 것도 있고, 번역투도 있구요. 결국 결론은 제가 공부를 더해야 하는거겠지만요 ㅠㅠ

하지만 저도 벤투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이데올로기 답습은 정말 무섭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1-31 0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꼬마요정님! 반갑습니다. 저의 경우 꾸준히 조금이라도 읽고 긴장을 놓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책을 대하고 있습니다... 의견에 동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명인도 아닌데 페친 신청이 거듭 들어오고 있습니다. 물론 진짜 유명인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수준이지요.

바흐의 종교 칸타타를 좋아한다고 말하며 그 수에 맞춰 200명의 친구만 유지하고 싶다는 말을 한 바 있는데 그 수를 80명이나 상회하는 친구를 사귀게 된 것입니다.

바흐의 세속 칸타타 수인 16을 더해도 80은 참 많은 오버입니다. 수난곡, 오라토리오, 마니피카트, 미사 등을 다 더하면 될까요?

마태 수난곡, 요한 수난곡,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승천 오라토리오. 마니피카트, b 단조 미사, 루터교 미사... 더 아는 성악곡도 없습니다.

저는 전에도 한 번 말한 바 있듯 친구보다 팔로우란 말이 더 마음에 듭니다.

언젠가는 친구 신청을 모르는 척 놔두면 그 분이 팔로우로 남을지 아니면 신청을 취소할지 생각해 본 적도 있습니다. 이러면 안 되겠지요? 예의가 아닐 것입니다.

이상한 것은 페북에서 읽기에는 긴 너무 긴 글을 계속 올리는데도 진심으로 성심껏 읽어주는 분들이 많고 좋아요 클릭에도 인색(吝嗇)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제 글은 길 뿐 아니라 너무 진지하고 무거운 글들인데...제 글의 단점을 너무 잘 아는 저는 지난 1월 5일 종묘(宗廟)에 가서 해설사께 흥미 부분은 어떻게 해결하시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분(윤** 해설사)은 자신은 모니터링에서 자주 최하위를 차지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마도 흥미가 없어서이겠지요?

그런데 제가 지난 1월 19일 고궁박물관 시연에서 생전 처음 시나리오가 재미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한 분이 아닌 두 분에게서 말입니다.

재미있다는 말은 스토리가 연결되어 감동을 주든지 기대를 계속 갖게 할 경우에도 나올 수 있는 것일까요? 어떻든 고맙습니다.

누군가는 감사하다는 말은 일본식 언어이고 당신은 신(神) 같다는 의미를 가진 우리말인 고맙습니다는 말이 진짜라고 하십니다.

감사하다는 말은 그런 점 외에도 자칫 ‘간사(奸邪)하다‘가 될 수도 있고 ’감시(監視)하다‘가 될 수도 있으니 가능하면 고맙다는 말을 써야 할 것입니다.

주저리 주저리 쓴 글이 되었습니다.

하나 부탁드릴 말씀은 ’쌓아서 구원에 이르려는 심리‘(페북에서 적용하자면 친구를 많이 두어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심리) 즉 바벨탑 무의식(정식 용어는 아닌 듯 하고 제가 좋아하는 철학자 김영민 교수께서 쓰신 용어입니다.)이 아니시라면 ’좋아요’ 클릭도 좋지만 그보다는 피드백을 원한다는 점입니다.

‘좋아요’는 그야말로 추상적인 수(數)로 환원되지만 댓글은 살아 있는 거울 같은 것이지요. 정신분석학자 라캉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생략하겠습니다.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찢겨진 몸일까 생각하며 유난히 엷고 어룽진 쪽을 여기에 대보고 저기에도 대보고 텃밭에 나가 귀퉁이가 찢어진 열무잎에도 대보고 그 위에 앉은

흰누에나방의 날개에도 대보고 햇빛 좋은 오후 걸레를 삶아 널면서 펄럭이며 말라가는 그 헝겊조각에도 대본다는 나희덕 시인처럼 댓글은 제게 거울이 될 것입니다..

아니면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 가만히 들여다본다는 윤동주 시인처럼 댓글은 제게 우물 물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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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발트그린 2017-01-30 1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과 글을 재밌게 표현하고 싶어서 이책 저책 보지만 쉽지 않죠 ㅎ 그래도 두 분께 따뜻한 피드백 받으셨다니 축하드립니다^^ 전 요즘 채사장님 책 보고 많은 걸 느끼는데요 고유명사 사용을 줄이고 유추와 비교를 섞어서 쉽게 설명하는 방식에 감명 받은 바 있습니다. 저도 언젠가 한 분 두 분 인정 해주시는 분이 나타나길 꿈꿔봅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1-30 15:51   좋아요 1 | URL
네.. 반갑습니다.. 좋은 책을 만나셨다니 축하드립니다. 열심히 하시면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영민하지 못해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지요...그래도 그 우직한 공부가 좋았다고 생각합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