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나무를 심다
김은경 지음 / 북촌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정조(正租)에 대한 자료를 모으는 중에 이런 구절을 만났다. “정조는 정구팔황(庭衢八荒) 호월일가(胡越一家)의 여덟 글자를 써서 소주합루(小宙合樓) 문에 걸어 두었다. ‘변방도 뜰처럼 가까이 하고 오랑캐도 한 집안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정조는 이로 인해 어려움도 많이 겪었던 듯 하다.

즉 정치적 이해관계를 달리 하는 노론의 심환지에게 자주 편지를 보내 지금 정조는 독살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나오게 된 원인이 되었다 할 수 있다. 이런 즈음에 김은경 교수의 ‘정조, 나무를 심다’를 읽게 되었다.

정조는 조선 최고의 식목왕으로 불린다. 정조는 열한 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최후를 맞는 비극을 겪는다. 저자는 정조가 죽은 나무로 만들어진 상자에 갇혀 숨을 거둔 아버지가 살아 있는 나뭇가지와 이파리를 타고 생명력을 가진 존재로 되살아나 자신과 조선왕실을 지켜줄 거라 확신했으리라는 말을 한다.(23 페이지)

정조가 즉위 후 7년 간 아버지 사도세자의 릉인 현륭원에 심은 나무만 1200만 그루였다. 이런 사실을 비롯해 쉽게 접하기 어려운 기록들을 담은 ‘정조, 나무를 심다’는 조선왕릉과 5대 궁의 나무 심은 기록을 “치열하게 들여다본 결과물”이다.

사도(思悼)세자란 호칭은 영조가 뒤주에서 목숨을 잃은(임오화변) 아들의 지위를 세자로 회복시킨 뒤에 붙인 시호(諡號)이다. 장헌(莊獻)세자란 호칭은 정조가 아버지의 시호를 높인 것이고 장조(莊祖)는 고종이 추존한 이름이다. 사도세자가 묻힌 곳은 수은묘(垂恩墓), 영우원(永祐園), 현륭원(顯隆園), 융릉(隆陵) 등으로 바뀌었다.

저자는 사도세자가 묻힌 곳이 격상되었듯 사도세자의 사후 지위도 나무가 자라듯 높아진 셈이라고 말한다.(25 페이지) 정조는 나무 심은 기록을 꼼꼼히 기록할 것을 명했다. 정조가 7년간 현륭원에 나무 심은 가록물이 소가 땀을 흘릴 정도(한우충동汗牛充棟)로 많았다(27 페이지)고 하니 놀랍다.

기록된 것은 나무 심은 날짜, 심은 사람, 감독자, 장소, 자원하여 나무를 심은 사람, 나무 종류, 그루 수, 캐온 곳, 캔 나무를 운반한 사람, 나무 가격, 나무를 심은 이들에게 지불한 품삯 등이다.

정조는 그 기록들을 한 권으로 정리하라는 명령에도 한 장의 문서로 정리, 보고한 정약용을 칭찬했다. 물론 정조는 즉위한 해에서 시작해 승하한 해까지 나무를 심었다. 저자는 1800년 정조가 승하했지만 그가 심은 나무의 생명력은 씨앗에서 씨앗으로 전해져 아직까지 여전하다고 말한다.(35 페이지)

저자는 일제에 의해 철저히 뜯겨나간 경희궁(慶熙宮) 터에 들어서면 쓸쓸함이 극대화되다가 마음이 정리되고 의로 받는 느낌이 들곤 한다고 말한다.(37 페이지) 저자는 경복궁과 구별하기 위해 창덕궁과 창경궁은 동궐(東闕)로, 경희궁은 서궐(西闕)로 부르게 된 사정을 말한다. 정조가 즉위한 곳이 경희궁 숭정문(崇政門)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경희궁을 걷다 보면 정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고 말한다.(38 페이지)

경희궁은 처음에 경덕궁이라 불렸는데 이것이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의 시호와 음이 같다는 이유로 경희궁으로 불리게 되었다.(39 페이지) 저자는 정조를 조선이라는 나무가 북풍한설을 맞아내면서도 틔워낸 새싹으로 비유한다.(38 페이지)

저자는 열세 살에 왕손으로 책봉(冊封)되어 왕으로 즉위하기까지 정조가 10년 넘게 경희궁에서 책과 씨름하고 할아버지 영조의 정치력을 배우는 동안 몸과 마음이 동궁 인근의 나무들과 함께 무럭무럭 자라났다고 말한다.(40 페이지)

정조는 여러 나무의 생태를 잘 알았다. 정조는 숲 박사였다. 정조는 다양한 나무를 심도록 명했다. 소나무, 개오동, 흰느릅, 느릅, 이나무, 오동, 가래나무, 옻나무 등..정조가 심도록 한 나무들은 농사 짓는 백성들이 쉽게 심을 수 있는, 먹고 사는데 유용한 것들이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나무와 곤충, 새 이름을 비우던 책은 ‘시경’이었다.(52 페이지)

그런데 정조가 나무를 배운 것은 경희궁을 통해서였다. 살아 있는 나무들을 보고 배운 것이다. 정조에게 나무 심기는 혀를 실천하는 방법이었다. 정조는 유독 단풍나무 종류를 많이 심도록 했다. 정조는 심은 나무를 철저히 관리할 것을 명했다.

정조가 아버지의 사당(祠堂)인 경모궁(景慕宮)에 나무를 심은 것은 효도 차원이었다. 저자는 정조가 나무들이 정치로 바쁜 자신을 대신하여 언제나 아버지 곁에서 푸른 그늘을 드리워 아버지를 지켜주기를 소망했다고 말한다.(80, 81 페이지)

정조가 아버지의 사당에 화색이 도는 단풍나무를 심으라고 한 것은 가장 화려하게 피어나야 했을 때 삶을 마친 아버지께 선물을 하려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81 페이지) 저자는 정조의 나무 심기와 규장각을 통한 인재 양성을 같은 차원으로 본다. 장차 인재로 클 어린 아이들을 이르는 꿈나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정조는 즉위 직후 왕립도서관이자 인재 양성소인 규장각(奎章閣)을 세웠다. 창덕궁 후원에. 정조는 왕과 그 가족만의 공간이 후원에 신하들을 초대했다. 규장각 각신과 검서관들이다. 외규장각은 강화에 설치되었는데 이는 국내의 변란이나 외적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의도였다. 창덕궁 후원에서 꽃을 감상하고 낚시를 하며 시를 지은 모임을 상조회(賞釣會)라 한다.

저자는 사람을 키우고 학자를 키워내려 했던 정조가 규장각에 소나무를 심어 학자들이 자라는 것을 소나무와 함께 지켜보았다고 말한다.(99 페이지) 서른 세 살의 정조를 아버지가 되게 한 존재는 순이었다. 세 살에 세자로 책봉된 순은 다섯 살에 홍역을 앓다가 세상을 떠난다. 후에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얻는다. 참고로 왕의 장례를 국장(國葬)이라 하고 세자의 장례는 예장(禮葬)이라 한다.

정조는 문효세자의 공간으로 새로 세운 중희당(重熙堂)에 천문관측 기구들을 설치했다. 왕세자 책봉식은 바로 이 중희당에서 거행되었다. 세자의 무덤은 풍수적인 길지보다 찾기 편하고 가까운 곳을 원칙으로 세운다. 문효 세자가 묻힌 효창공원 자리인 효창묘(孝昌墓)도 그렇다.(문효세자의 사당은 문희묘文禧廟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풍수지리적 명당에 자리 잡은 한양의 지세를 보호하기 위해 나무를 심어 지맥을 보호하고 소나무 벌목을 금지했다.(136 페이지) 정조 당시 문효세자의 묘 조성을 위해 자기 돈을 쓰고 자신 또한 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있었다.

왕릉에 가장 많이 심는 나무는 소나무이다. 그런데 소나무는 옮겨 심는 과정에서 살아 남는 비율이 낮다. 정조 14년 가을에 심은 나무는 소나무 45만 그루로 이때 심은 것들은 모두 흙을 붙여서 옮겨 심은 것들이어서 이식 성공률이 높았다. 소나무는 옮겨 심는 것보다 씨를 파종하면 더 잘 살아 남는다.

경관을 조성하려면 이식하는 것이 더 낫다. 정조는 두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았으나 옮겨 심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다.(161 페이지) 소나무의 이식 성공률을 높이려면 대토(帶土)해야 한다. 뿌리에 흙을 붙여서 옮겨 심는 것이다.

정조는 송충이를 잡으려고 백성들이나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다. 대신 구양수(歐陽脩)의 시에서 “관전 스무 냥으로 벌레 한 말을 사들이면 잠깐 사이에 잡은 벌레가 산처럼 쌓일 것”이란 구절을 인용하여 잡은 벌레의 무게에 따라 값을 쳐주도록 했다.(177 페이지)

계지술사(繼志述事)를 줄여 계술(繼述)이라 한다. 선왕이나 조상의 뜻과 업적을 계승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왕실은 계술하는 것을 가장 큰 효로 여겼다. 조선왕실은 나무심기도 계술을 했다. 식목왕 정조의 택목(擇木)에는 왕릉을 풍성한 숲으로 가꾸려는 마음과 백성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하려는 애민정신이 깃들어 있었다.(199 페이지) 잣나무 이야기이다.

정조 22년에는 홍살문 내외에 잣나무를 심었다. 홍은 붉다는 의미의 red가 아니다. 팥죽색에 가까운 색이다.(204 페이지) 잣은 해송자(海松子)라 한다. 송자(松子)는 소나무 씨앗이 아니라 잣을 말한다.(210 페이지)

정조가 현륭원(顯隆園)에 심은 나무 가운데 하나인 버드나무는 경계를 나타내는 역할을 했다. 버드나무는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20미터까지 자라기에 차폐 역할을 한다. 성종은 백성들이 창경궁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하려고 빨리 자라는 버드나무를 심도록 명했다.(238, 239 페이지)

경복궁 경회루에는 버드나무가 연못을 따라 자라고 있다. 저자는 경복궁에서 4년간 방문객들에게 설명하는 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 개량한복을 입고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경복궁에 대해 떨리는 목소리로 안내를 하면서 경복궁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자신만 아는 길로 방문객들을 안내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던 시간들 속에 버드나무가 있다고 말한다.(241 페이지)

버드나무의 솜을 유서(柳絮)라 한다. 정조는 봄이 올 때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현륭원을 찾았다. 아마도 그는 길가에 심어진 버드나무의 연초록 물결과 소나무의 진초록 물결을 가르며 가볍게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다.(245 페이지)

창덕궁 후원 옥류천(玉流川) 권역에는 청의정(淸漪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조선왕실은 농사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이 정자 앞에 작은 논을 만들어 직접 벼를 심고 거두었다.(247 페이지) 이를 친경(親耕)이라 한다. 왕이 농사짓는 밭을 적전(籍田)이라 한다. 왕비는 친잠(親蠶)을 했다.

영조와의 대화에서 농사짓는 이유와 뽕나무를 심는 이유에 대해 거침 없이 답한 정조는 실제 누에를 직접 보지 못했고 친잠례(親蠶禮: 양잠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예)때 처음 누에를 보았다.(248 페이지) 농업(農業)과 잠업(蠶業)은 조선의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다.

정조는 현륭원에 오얏나무도 심었다. 오얏은 자두의 옛말이다. 현재는 자두가 표준어이다.

대한제국 문장(紋章)에 오얏꽃잎이 그려져 있다. 오얏꽃은 꽃잎이 5장이고 꽃잎마다 꽃술이 3개씩 있으며 3송이씩 뭉쳐서 핀다.(262 페이지)

저자는 정조가 단지 나무를 심은 것이 아니라 나무들과 더불어 훌륭한 인재들을 심었다고 말한다.(276 페이지) ‘정조, 나무를 심다’는 정조를 나무와 연결지어 논한 색다른 책이다. 정치사가 아닌데 이렇게 흥미로운 것은 저자의 필력 때문이다. 정조의 서재 또는 책을 다룬 책이 있는지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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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7-01-31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조대왕을 다룬 책들은 많지만, 나무를 주제로 조명한 서적은 처음인 듯 합니다. 말씀처럼 색다르면서도 내용이 수박겉핥기 수준이 아니고 깊이가 있어 보입니다. 좋은 서평 읽고 갑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1-31 1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케모마일 님 감사합니다... 색다른 책임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