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 빼앗긴 자들을 위한 탈환의 정치학
채효정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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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누구의 것인가는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해직 강사 채효정의 책이다. 이 책은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지만 교원도 아니고 노동하지만 노동자도 아닌 대학 강사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우리는 가장 손쉽게 절감할 수 있는 비용이었고 가장 효율적으로 평가 지표를 높일 수 있는 수단이었다.”(15 페이지)고 말한다.

 

저자는 교육자성과 노동자성이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프레임은 교사든 교수든 강사든 교육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깨뜨려야 한다고 말한다.(19 페이지)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학교가 선생님을 해고하면 우리가 당신에게 강의를 요청하겠다.”는 누군가의 주권적 제안으로 20161026일부터 1214일까지 매주 수요일 강의실 밖 잔디밭에서 진행한 열린 강좌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을 (대학 당국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자신의 불철저함에 대한) 반성문이라 말한다. 저자는 University의 어원을 예로 들며 자급하고 자립할 수 있는 단위를 가지고 그 안에서 공동체의 자치를 이루어 가는 모든 곳을 나라라고 정의(28 페이지)한 뒤 이곳이 정치의 장이 아닌 것 같지만 반드시 정치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공간이기에(31, 32 페이지) 대학은 나라이고 하나의 작은 폴리스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32 페이지)

 

저자는 대학을 대학으로 존재하게 하려면 대학으로서라고 할 수 있는 활동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33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대학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저자는 대학에서 쫓겨난 자신의 처지가 학생들의 머지않은 미래라고 말한다. 정치철학자인 저자는 그에 맞게 고대 민주정에서 민주주의를 이루는 세 요소를 언급하며 대학과 기업의 차이를 논한다.

 

대학은 기업이 아니라 대학다워야 한다는 취지에서다.(이소노미아, 이세고리아, 이소크라티아가 그것이다. 이소노미아는 법 앞에서의 평등이고 이세고리아는 똑같이 발언할 수 있는 권리이고 이소크라티아는 동등한 힘을 갖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책임지는 사람들이 결정하는 것이 민주주의라 말한다.(39 페이지)

 

저자는 비전임 교수가 전임 교수보다 훨씬 많고 비전임 교수 중에서 시간 강사가 차지하는 비율이 60퍼센트를 차지하는데 강의를 개설하거나 배정할 때 실제 강의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묻지 않는 것은 민주주의적이지 않다고 말한다.(41 페이지)

 

박정희 정권이 비판적인 지식인들과 젊은 소장 학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법을 개정하고 강사들을 교원에서 제외시켰음을 상기시키며 저자는 21세기 대학은 엔클로저, 젠트리피케이션 등이 일어나는 장소로 정의한다. 우리나라 사립대학은 국민의 세금인 공공 자원이 투입되기에 공공재이다.(엔클로저는 대학을 사유재로 봉쇄하는 것이다.)

 

대학은 모두의 것이다. 우리의 대학, 우리의 공화국을 자본으로부터, 국가로부터, 소수의 지배로부터 구해 내는 일이 필요하다.(49 페이지) 저자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이 만드는 정치 체제를 민주주의로 정의한다.(53 페이지) 저자는 민주주의를 시민의 정치가 아닌 노동자의 정치로 정의한다.(56 페이지)

 

저자는 인문학을 철학, 역사, 문학, 예술, 과학, 실천 등 다방면의 길을 통한 인간의 자기 해명과 자기 인식으로 정의한다.(57 페이지) 저자는 2() 노동 없는 대학에서 노동()에 적대적인 사회 환경을 문제삼는다. 대학 역시 노동()에 적대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시수라는 말이 있다. 이는 1학점에 대해 인정하는 강의 노동 시간을 말한다.

 

시수당 51,000원의 강사료를 받는 경우를 보자. 시수에 대한 노동 시간을 계산할 때 통상 3을 곱한다. 1학점 강의를 할 때 사전 사후 강의 시간이 앞뒤로 최소 한 시간씩은 더 들 것이기 때문이다. 1 시수는 대략 세 시간 노동으로 인정받는 셈이니 51,000원 나누기 3을 하면 시급은 17,000원으로 계산된다.

 

그런데 대학 교원으로서 강사는 강의 뿐 아니라 연구를 하고 학생도 만나는데 연구에도 시간이 들고 학생 상담 지도에도 시간이 든다. 1 시수당 아홉 시간의 노동 시간이 소모되는 것이다. 그렇게 계산하면 시간당 5,600원을 받는 것이니 최저 임금보다 못한 노동의 대가를 받는 것이다.

 

저자는 독재자의 반대편에 섰다고 민주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민중의 편에 서야 민주주의자가 되는 것이고 노동자 의식을 가지고 노동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 때 민주공화국이 되는 것이다.(70 페이지) 저자는 뒤로는 이권을 챙기면서 박근혜, 최순실의 나라에서 잘 살았던 사람들이, 노동자들이 감옥에 갇혀 가며, 한 농민은 쓰러져 죽으면서까지 정권을 때려눕혀 놓으니까 죽은 개 위에 올라 타 민주주의자인 척하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3강에서 저자는 1987년 민주 대항쟁과 2016년 촛불 집회를 대비하며 투쟁 현장에서 학생들(사회화된 집단으로서의 대학생)이 사라진 원인을 분석한다.(1987년에는 매일 데모를 했다. 2016년에는 평일에는 일하고 주말에만 시위했다. 학생들도 학교에 가지 않으면 학사 경고 받지만 단체로 가지 않으면 자를 수 없다.)

 

저자에 의하면 과거에는 등록금을 교육에 대한 대가로 생각했지만 오늘날은 등록금을 상품 구매 형식으로 생각하는 변화를 이야기한다.(등록금으로 학점을 사고 학위를 사는 것이다.)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도 어떻게 보면 학생들을 으쓱하게 만드는 브랜드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93 페이지)

 

교육이 상품 구매 행위로 이루어짐으로써 학생이 소비자가 되면 고육의 주체이자 정치적 주체로서의 학생 존재가 사라진다.(94 페이지) 학교는 학생을 돈으로 보고 학생은 자신이 낸 돈 만큼 가져가겠다고 하는 관계에서는 참된 교육도 우정의 관계도 성립할 수 없다.(95 페이지) 권리를 이익으로 환원하고 개인화하는 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적 극단적 개인주의를 통해 공동체를 파괴하는 길이다.(105, 106 페이지)

 

저자는 취업의 대안을 창업으로 설정한 현실을 비판하며 1인 기업체의 사장이란 것이 실은 자기 회사의 노동자인데 기업가와 노동자라는 이중적 존재를 하나의 몸 안에 체현한 이들에게 노동자라는 것은 쏙 빼고 사장님만 강조하는 비정상을 지적한다.(114 페이지) 대학에는 다시 대학생이 필요하다. 이 사회도 다시 대학생을 필요로 한다.

 

대학생들이 먼저 대학 안에서 싸워야 한다. 학생 사회가 해체되면 대학에서 사회의 공공성을 위해 싸울 수 있는 단위가 해체되는 것이고 전체 사회로 볼 때도 결정적으로 불리하다.(120 페이지) 4강 교수 없는 대학에서 저자는 지식인을 단지 자기 전공 분야에 대해서만 지식을 가진 기술직 전문가가 아니라 총체적이고 통찰적인 앎, 전일적인 앎을 갖춘 사람으로 정의한다.(125 페이지)

 

저자는 교수와 학생이 편의점 점원과 손님처럼 만나고 헤어지는 관계가 된 지 꽤 오래인 것 같다고 지적한다.(132 페이지) 저자는 대학 교수가 하는 일 가운데 어느 것이 우선 순위인지 묻는다. 연구 강의 사회실천이 아니라 강의 연구 사회실천의 순서이다. 저자에 의하면 교수는 존재론적으로 정의상 강의하는 사람이다. 학문과 지식의 시작은 교육이고 그 교육의 시작은 말이다.

 

배움이 서로 배움인 것은 서로 마주 보고 선 사람이니 가능한 것이다.(135 페이지) 강의는 항상 연구를 수반한다.(137 페이지) 그런데 오래 통합되어 있던 연구와 강의 사이에 언제부터인가 분절이 생기기 시작했다.(138 페이지) 연구중심대학은 소련으로부터 스푸트니크 쇼크를 당한 미국이 군산학 복합체 연구 단위를 중심으로 우주 개발, 군비 확장 등을 위해 국가가 나섬으로써 비롯된 제도이다.

 

이 시스템은 엄청난 대학 관료 시스템을 낳았다. 대학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죽은 것은 학진(학술진흥재단) 체제와 더불어서이다. 학진은 1981년 교수들의 연구비 지원을 위해 교육부 산하기관으로 출범했다. 문제는 학진이 거대 권력이 되었다는 점이다. 권력과 지식 엘리트들은 공생관계가 되었다. 대학에서 가장 많이 지원되는 분야는 곧 가장 많은 자본이 투자되는 시장 영역이다.(155 페이지)

 

]저자는 대학을 공공재로 생각한다면 오히려 국가 예산을 시장성이 없지만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분야에 지원해야 한다고 말한다.(155 페이지) 지금 대학은 더 큰 프로젝트를 따오는 교수들이 금권을 얻고 발언권을 얻는 구조가 되어 돈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상황을 맞고 있다. 돈에 길들여진 것이다. 상상력이 빈곤해진 것이다. 돈의 노예가 되면 연구의 자율성은 포기될 수 밖에 없다.

 

산학협력과정에서 교수들은 외부적으로는 업자이고 내부적으로는 관료화된다.(158 페이지) 저자는 교육과 학문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시급하다고 말한다. 연구 결과물을 만인이 볼 수 있도록 공개해야 한다고 말한다.(160 페이지) 저자는 우리가 알아볼 수 있게 교육과 학문 연구 결과물을 민중의 언어, 시민의 언어, 일반의 안어로 번역하는 과정까지를 국가 서비스로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160, 161 페이지)

 

피해는 만인이 보고 이익은 특정한 사람들이 챙기면서 불상사가 나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테크노크라시를 해체해야 한다. 연구 결과물에 대해 강력하게 책임지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161 페이지) 저자는 입학 성적이 대학 교육의 결과가 아닌데 그 성적이 대학 서열화의 기초가 되는 것을 모순으로 선언한다.(171 페이지)

 

저자는 공공성의 원리가 깨지면 대학 교육은 공동체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개인들이 자신에 대해 투자하는 행위가 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174 페이지) 대학 교수의 임금이 교사보다 높은 이유를 그들이 그만큼 오랜 교육 기간 동안 금전적, 시간적으로 투자했기 때문이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교육을 공동체 교육이 아닌 개인의 자본 취득 과정으로 이해할 때만 가능하다.(174 페이지)

 

저자를 통해 우리는 백화점의 인문 교양 센터와 차별성이 없는 대학 교양 교육 과정이란 인문학 앵벌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식의 인문학 붐은 좋지 않다. 인문학의 대중화는 인문학의 상품화와 다르지 않다.(184 페이지) 오늘날의 인문학은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중산층의 지적, 문화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속물주의적 교양으로 전락한 면이 있다.(185 페이지)

 

저자의 글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인문학의 생명은 저항성과 비판정신임을 확인한다.(187 페이지) 저자는 대학을 정치의 장소로 본다.(202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성직자와 관료, 귀족들을 양성하는 제도권 대학들이 대부분 산속 수도원에 있었던 반면 그 성스러운 캠퍼스를 박치고 나와서 철학과 법학 같은 세속의 학문을 커리큘럼으로 삼고 자유학예를 중심으로 가르치는 대학들은 도시의 거리와 장터 광장 옆에 자리 잡았다.

 

대학이란 공간은 사회의 아고라, 포럼 역할을 해야 한다.(204 페이지) 모두의 일인 공공 사안을 민주적으로 처리하는 민주 공화국인 대학에는 반드시 정치(대학 구성원들 전체가 의견을 모으고 이 대학이 나아갈 좌표를 함께 결정하고 결정한 것을 함께 나누는 것)가 있어야 한다.(205 페이지)

 

우려할 것은 통치가 정치를 대신하는 현상이다. 정치의 시작은 해결할 수 있는 권위자에게 답을 구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머리를 맞대고 동그랗게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213 페이지) 시민은 도시민(都市民)도 아니고 신민(臣民)도 아니다, 시민은 정치적 존재이다. 국민은 정치적 존재가 아니지만 시민은 정치적 존재이다. 그래서 시민에게는 거부권이 있다.(223 페이지)

 

시민이 된다는 것은 정치적 주체가 된다는 것이고 그것은 누구의 편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226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중립은 절대 민주주의가 아니다. 아테네에서 민주정이 처음 탄생했을 때 솔론이라는 사람이 민주의 요구를 받아서 정리한 개혁안이 있는데 그 내용에는 내란이 있었을 때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킨 사람은 시민권을 박탈한다는 규정이 있다.

 

이 이야기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솔론편에 나온다.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지켜보다가 이기는 놈의 편을 들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227 페이지) 저자는 편()과 선(), 두 가지만 기억하라고 말한다. 정치적 주체가 되는 것은 누구의 편이 되는 것이고 선을 넘지 않으면 끝내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235 페이지)

 

주인 없는 대학은 정치 없는 대학이라는 말이기도 하다.(238 페이지) 저자는 마지막 강인 대학의 탈환에서 너의 집권은 나의 실권, 나의 집권은 너의 실권으로 보지 말 것을 제안한다. 저자는 더 많은 사람들의 것이 되도록 권력의 지형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전제하며 어떻게 힘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힘을 어떻게 나누어 가질 것인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 힘을 제대로 쓸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탈환 전략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277 페이지)

 

공학적으로 생각하면 힘은 어디서 어디로 이동할 뿐 커지거나 줄어듣는 것이 아니다. 정치의 세계에서는 힘은 이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생기기도 한다. 저자는 2016, 2017년의 촛불이 정치 세력화하지 않았다고, 촛불은 정치의식이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광장의 촛불이 자기 동네, 자기 회사, 자기 공장, 자기 학교로 돌아왔을 때 그 100만의 힘으로 작은 박근혜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는 이유에서이다.(283 페이지)

 

중요한 것은 개인으로서는 절대로 정치적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287 페이지)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거론하며 40년 전 이야기로부터 우리의 시대는 얼마나 멀리 와 있는 것인가, 묻는다.(295 페이지)

 

저자는 사적 이익을 위한 투쟁처럼 보일까봐 빼앗긴 것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처음에는 교과 개편 재검토와 강사 처우 개선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자신의 강의는 포기할 수도 있다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고 신자유주의, 대학 교육과 제도 문제, 시간 강사 제도의 부당함 등 객관적인 부분에 집중할수록 공허해졌다고 말한다.

 

저자는 생존권 투쟁이라는 것을 정치, 사회적 구조를 바꾸려는 근본적 투쟁으로 보지 않고 오직 먹고 살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경제적 투쟁으로만 보는 관점이 정당한지 묻는다.(300 페이지) 저자는 밥그릇 싸움은 저차원적이고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는 투쟁은 고차원적이냐고 묻는다.

 

저자는 밥그릇 싸움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민주주의 투쟁이라 정의한다. 밥 한 그릇에 담긴 것은 배불릴 양식만이 아니라 삶을 지킬 주권과 존엄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전히 자신은 이 대학의 철거민, 난민, 몫이 없는 자로 서 있지만 또한 싸우는 사람으로 서 있다고 말한다.(306 페이지)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20176월 출간된 책이다. 내가 이 책을 구입해 읽은 것은 출간일로부터 7개월이 지난 최근에서이다. 그 이후 저자의 투쟁에 결실은 없었던 것 같다. 그의 페이스북에는 여전히 피켓을 들고 선 저자의 사진이 실려 있다. 지금도 그는 국회 앞에서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나는 그의 페이스북에 이런 댓글을 달았다. <선생님,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잘 읽었습니다. 정말 많이 (선생님의 주장에) 공감하며, (대학 당국의 무책임하고 뻔뻔한 대응에) 분개하며 읽었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우리의 실상, 대학의 구조적 모순, 정치와 민주주의 등 근본적인 개념에 이르기까지... 특별히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하고 상투적이지만 힘 내시라는 말만 하게 됩니다.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진경의 불온한 인문학을 읽은 이래 인문학의 본령을 비판정신과 저항이라 표현한 책을 만난 것이 소득이다. 요즘 인문학이란 말을 불편해 하는 나에게는 시의적절한 이론적 뒷받침이 되어 감사하다.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중산층의 지적, 문화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속물주의적 교양으로 전락한 인문학과 차별성을 두기 위해 깊이 읽고 많이 생각하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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