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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과 운명 살림지식총서 135
심의용 지음 / 살림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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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용 교수의 주역과 운명은 상수역(象數易)과 의리역(義理易) 가운데 의리역에 초점을 둔 책이다. 전자는 점역(占易)이고 후자는 학역(學易)이다. ‘주역(周易)’은 원래 제사와 점을 치는 일을 관장하는 무당과 사관(史官)들이 점을 치는 일과 역사 자료, 생활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가 담긴 기록들이었다.

 

이런 기록들이 역사적 변화와 사상적 발전에 따라 그 의미가 증폭되고 재해석되는 과정을 겪었다. 주역의 번잡함을 일소에 제거한 사람이 의리역의 효시(嚆矢)인 위진 시대의 왕필(王弼)이다.

 

한편 정이천(程伊川)에게 점이란 결정된 숙명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의 가치를 창출해내는 실천적 결단의 행위였다. 그 결단의 지침서가 바로 주역(周易)’이다.

 

성재(誠齋) 양만리(楊萬里: 남송시대의 시인)주역(周易)’을 인간사의 변화와 인간 마음의 변화를 읽는 책으로 보고 인간사의 득실과 사회의 흥망의 변화, 인간 마음의 변화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왕필, 정이천, 양만리가 의리역의 대표자들이다.

 

()가 상징하는 상황<()>이란 의리역학자들에게 하나의 사회, 정치적 삶의 현실이다. 그것은 사회, 정치권에서의 권력장(權力場)이라 할 수 있다. 이 상황은 괘가 상징하는 64괘의 전체적 상황이고 효가 상징하는 384효의 특수한 상황이다.

 

물론 이 64괘의 상징들이 우리의 삶과 우주의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아우르지는 못한다. 64괘와 384효는 현실 상황에 도식적으로 대입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상황이 무한한 가능성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유동적이고 연속적인 흐름이듯 64괘 또한 유동적인 가능성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21 페이지)

 

현실의 삶의 구조는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 괘효(卦爻)의 구조 또한 그런 흐름 속에서 이해되어야지 단순한 도식적 틀 속에서 이해될 수는 없다. ‘주역(周易)’은 현실의 변화와 인간 마음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는 경전이며 현실 속에서의 주역(周易)’의 이해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이해하는 것일 뿐이다.(22 페이지)

 

주역(周易)’은 인간과 현실을 이해하는 방편이자 거울이다. ‘주역(周易)’에는 다양한 상황에 처한 인간이 살아 움직이고 있고 그들의 감정적 변화와 심리적 갈등을 읽을 수 있다.(29 페이지)

 

주역(周易)’은 삶의 기예 즉 덕()을 기르는 방식과 양상에 대한 보고서이다, 그것이 삶에 대한 변통의 정신이다.(49 페이지) 같은 의리역 계통에 속하지만 해석 차이도 있다. 왕필은 무욕 상태 속에서 하늘과 같은 진실무망한 마음이 드러난다고 풀이하여 무욕의 상태를 천지의 마음의 상태로 생각한 반면 정이천은 새로운 욕망의 탄생, 진정한 생명력의 약동으로서의 욕망을 긍정했다.(54 페이지)

 

정이천의 경우 고요 속에서 떠오르는 미세한 떨림을 어떻게 분별, 확대시키는가, 란 문제가 있다. 현실 속에서 삶의 기예를 닦는 것 즉 수덕(修德)의 문제이다. 주역의 괘효에 나타난 이야기 편에서 택수(澤水)곤괘(困卦: 위에 연못을 상징하는 태괘兌卦, 아래에 물을 상징하는 감괘坎卦가 자리한 괘)를 이야기하며 공자의 곤궁함을 설명한 저자는 결론부에서 공자가 운명을 그르칠 수 있는 자기 마음의 미세한 낌새와 그 작은 마음의 돌부리의 요동(搖動)을 알아 차리고 삶의 기예를 기르는 배움을 구하는 길로 나아갔다고 말한다.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고.(84 페이지)

 

저자는 주역(周易)’이 마지막으로 도달해야 할 곳은 바로 뜨겁고 더러운 삶의 현실이 아닐까?란 말을 한다.(87 페이지) ‘주역과 운명은 공자를 비롯한 중국 인물들의 구체적 삶을 예시하며 주역 괘들로 설명하는 일관성이 돋보이는 책이다. 작은 분량의 책에 알찬 내용을 담아낸 돋보이는 책이다. 의리학에 관심을 둔 사람들이라면 읽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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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속 인생을 묻다 - 찰리 채플린 한시
김태봉 지음 / 미문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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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공자(孔子)이다. 시를 통해 감흥을 일으킨다는 의미의 흥어시(興於詩)라는 말을 했고 시 삼백편은 생각에 삿됨이 없다는 의미의 사무사(思無邪)라는 말을 했다. 중문학자 김태봉 교수는 한시 속 인생을 묻다의 부제를 찰리 채플린 한시라 설정했는데 그 이유는 우리는 너무 많이 생각하고 너무 적게 느낀다는 그의 말이 공자처럼 감성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시 속 인생을 묻다의 키워드는 인생이란 말이다. 그러니 이는 다른 말로 사계(四季)를 노래한 선인들의 시들을 통해 희로애락의 감각들을 갈무리하려는 의도가 담긴 이름이라 할 수 있다.

 

한시는 우리보다 중국에서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흥했다 할 수 있다. 한시를 잘 몰라도 도연명, 이백, 두보, 소동파 등의 이름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춘하추동으로 분류된 책에서 역시 우리가 많이 만나게 되는 시인은 두보, 이백, 도연명 등이다.

 

모두 중국 시인들인데 한용운, 이옥봉, 기대승, 이덕무, 정몽주, 황진이, 이규보, 이색(李穡), 변계량(卞季良), 강정일당, 김삿갓 등의 우리 시인들도 만날 수 있다. 눈에 띄는 사람은 설도(薛濤), 이색(李穡), 주희(朱熹) 등이다.

 

설도는 동심초의 주인공이고 이색은 성리학자여서 관심이 가고 주희 역시 그렇다. 황진이, 강정일당, 이옥봉, 설도 등의 여성 시인들의 시도 관심을 가지고 읽을 만하다.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 매창 등의 시가 빠진 것이 아쉽다.

 

가장 관심을 끄는 사람은 강정일당이다. 여성이고 성리학자이고 조선 후기에 살았던 분이기에 우리와 많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남편에게 간곡히 성인지도(聖人之道)의 학문을 권면해 남편으로 하여금 학문에 뜻을 두게 했고 자신도 곁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남편의 글소리를 듣고 함께 공부한 분이다.(이은선 지음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 30 페이지)

 

시문과 성리학에 두루 능했던 그의 시를 보자. 가을 매미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의 청추선(聽秋蟬)’이다. ‘만목영추기(萬木迎秋氣)/ 선성난석양(蟬聲亂夕陽)/ 침음감물성(沈吟感物性)/ 임하독방황(林下獨彷徨)‘.. 뜻은 어느덧 나무마다 가을빛인데/ 석양에 어지러운 매미 소리들/ 제철이 다하는 게 슬퍼서인가/ 쓸쓸한 숲속을 혼자 헤매네이다.

 

책에 첫 편으로 실린 시는 이옥봉(李玉峰)의 안방의 춘청이란 의미의 춘정(春情)이다. 이옥봉은 조선 중기의 기녀 시인으로 명성이 명나라까지 알려졌다. 유약래하만(有約來何晩) 약속은 했지만 오는 게 어찌 이리 늦는지/ 정매욕사시(庭梅欲謝時) 뜰에 핀 매화 시들려고 하는 때가 되었네/ 홀문지상작(忽聞枝上鵲) 홀연히 가지 위에서 까치 소리 들리자/ 허화경중미(虛畵鏡中眉) 거울 보고 공연히 눈썹을 그려 보네.

 

()란 말이 의미심장하다. 이 단어는 사례한다는 의미도 있고 하직한다는 의미도 있다. 매화가 시들려고 하는 것을 사()로 표현한 것이다. 시인은 약속을 했지만 늦게 오는 님을 기다리며 뜰을 바라본다. 그리고 거울을 보고 공연히 눈썹을 그린다. 공연히 그리는 것을 허화(虛畵)라 한 것이다.

 

만해 한용운 시인의 벚꽃 유감이란 시를 보자. ’지난 겨울은 눈이 꽃과 같더니/ 올봄은 꽃이 눈과 같구나/ 눈도 꽃도 모두 진짜가 아니거늘/ 내 마음 찢어지려 함을 어찌할 거나란 시다. 구도자 같지 않은 모습일 수도 있다. 그리고 님의 침묵의 의연함과 거리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의 말대로 공즉시색 색즉시공을 설법하는 승려이기에 시적 안목이 남다른 데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도 좋으리라. 그 만큼 섬세하고 감성적인 존재가 시인이 아닌가.

 

시를 수놓는 주요 모티브가 꽃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매화, 벚꽃, 살구꽃, 해당화, 모란꽃, 연꽃, 석류꽃, 국화 등이 이 책에서 눈에 들어온다. 술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눈에 띄는 것은 다른 시인의 이름이 등장하는 시편들이다.

 

두보(杜甫)는 도연명과 사령운(謝靈運)을 이야기했고(38 페이지) 왕유(王維)도 도연명을 이야기했다.(203 페이지) 차이가 있다면 두보는 도()라고 표현했고 왕유는 오류(五柳)라 했다는 점이다. 오류는 도연명의 호이다.

 

두보는 어떻게 하면 도연명과 사령운처럼 시를 잘 쓸 수 있는지 말했고 왕유는 오류 선생집 앞에서 술 마시고 취해 미친 듯 노래 불렀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왕유는 하루하루 사람은 부질없이 늙어가는데/ 해마다 봄은 다시 돌아오네/ 한 동이 술 있는 걸 즐기면 되지/ 꽃 날리는 것을 애석해 할 필요는 없네라 노래했다. 이 시에도 술 이야기가 나온다.

 

애석해 하는 시 가운데 가장 아픈 것은 두보의 시이다. 높은 곳에 올라의 의미를 지닌 등고(登高)‘에서 시인은 “..만 리 먼 곳 서글픈 가을에 항상 나그네 되어/ 한평생 병 많은 몸, 홀로 누대에 오르네/ 어려움과 고통에 귀밑머리 다 희어지고/ 늙고 쇠약한 몸이라 새로이 탁주마저 끊어야 한다네라고 노래했다.(236 페이지)

 

평생 떠돌이 생활을 한 시인이 두보이다. 당나라 시인 두보는 一片花飛減却春한 조각 꽃잎이 떨어져도 봄기운은 줄어드는데/ 風飄萬點正愁人바람이 만 점 꽃잎을 날리니 정말로 사람을 시름에 젖게 한다는 시를 쓴 감성적인 사람이다.

 

이백의 시를 보자. ’여산 폭포를 바라보며란 시이다. 원제는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이다. “향로봉에 해 비치니, 자색 안개 피어올라/ 아득히 폭포 바라보니, 앞 내가 걸려 있구나/ 공중을 흐르다가 직각으로 삼천척을 내려 떨어지니/ 은하수가 하늘에서 떨어진 게로구나란 시이다. 안개를 자색(紫色)으로 표현한 감각이 돋보인다. 본문 상으로는 자연(紫煙)이다.

 

이 시에 나오는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이란 표현은 너무 유명하다. 이백은 시선(詩仙), 두보는 시성(詩聖)으로 불린다. 두 시인 모두 당나라 시인으로 이백이 11살 연상이었다.(이백: 701 ~ 762. 두보; 712 770) 위의 시에서 눈에 띄는 단어는 은하수이다. 두보의 시 세병마(洗兵馬)‘가 있다. 이 시에서 통영의 세병관이란 이름이 유래했다. ‘은하수를 끌어와 병장기를 씻는다.’는 구절이다.

 

이제 주희(朱熹)의 시를 보자. ‘매화(梅花)’란 시다. 개울가에 한매는 이미 피었을 텐데/ 벗은 매화 한 가지 꺾어 보내지 않는구려/ 하늘 끝인들 어찌 꽃이야 없겠냐만/ 무심한 그대 향해 술잔을 드네란 구절이 눈길을 끈다. 성리학의 성인(聖人)으로서 보인 학문적 분위기와 어딘가 다르게 느껴진다.

 

이 시는 이 밖에 ”..내 사는 곳 근처 개울가의 복사꽃 활짝 피어 봄빛 어지러운데 당신은 잘 지내나요..“란 조용미 시인의 , 양화소록(養花小錄)’을 생각하게 한다. 이리 저리 얽히고 설킨 삶과 인연을 생각한다. 난분분(亂粉粉) 즉 흩날리어 어지러운 세상사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저자의 선() 또는 편()의 미학을 생각하며 책을 읽었다. 두고 두고 펴볼 시들이 담긴 책이다.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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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위한 역사학 강의 - 21세기, 역사학의 길을 묻다
김기봉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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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중요한 메시지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란 말이다. 저자 김기봉은 카가 과거가 현재에 전하는 다양한 메시지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의 진보에 이바지할 수 있는 과거에만 발언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현재와 과거의 대화를 제안했다고 주장한다.

 

카는 진보로서의 역사만이 객관적이라고 주장한, 역사에 정답이 있다고 믿었던 역사가라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진보의 공식으로 역사 공간의 차이를 시간적 순서로 위계화하는 역사 담론을 근대주의라 부른다.(10 페이지)

 

근대를 하나의 시대를 지칭하는 보편사적인 기획으로 설정한 근대의 역사 담론은 시간 축만을 기준점으로 삼고 역사를 정의했다. 아날 학파의 창시자 마르크 블로크가 역사를 시간 속의 인간에 관한 과학이라 본 것과 달리 페르낭 브로델은 역사에서 공간을 발견한 역사가이다. 페르낭 브로델이 제안한 것은 움직이지 않는 역사를 발굴하는 구조사이다.

 

저자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카의 정의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아닌 문제의 시작이라 말한다.(13 페이지) 연구는 과학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서술은 문학적으로 행해진다는 점에서 역사는 과학과 예술 사이에 위치한다. 역사의 해답은 현재와 과거의 대화를 어떤 방식으로 해서 어떤 이야기를 구성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다.(14 페이지)

 

역사 담론이란 과거 실재를 역사 이야기로 구성하는 인식의 프레임, 푸코의 용어를 빌려 말하면 에피스테메라 할 수 있다.(15 페이지) 역사를 과거 실재가 아니라 역사가가 붙인 이름으로 보는 탈근대 역사 이론을 구현하는 대표적 역사 서술이 미시사이다.(15, 16 페이지)

 

미시사는 아래로부터의 역사라는 관점과 시각으로 역사로부터 소외당하고 배제된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진다. 우리는 지식보다 상상력이 더 중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어디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는 인문학 3()이다.(27 페이지)

 

한국인이 하나의 단일 민족으로 있기 때문에 한국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의 이야기가 한국인이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만들어낸다.(29 페이지) 역사는 인간의 이야기이지만 인간은 역사를 통해 인간이 되기에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다.(29, 30 페이지)

 

하이데거는 다른 존재자들은 사멸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죽음에 대한 인식을 가지기에) 죽음을 향해가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역사는 우리가 발명한 세대간의 시간과 경험의 단절을 이어주는 이야기이다.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아 시간과 공간을 씨줄 날줄로 해서 풀어내는 이야기가 역사이다.(41 페이지)

 

저자는 카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들만이 잘 보이는 너무나도 훌륭한 거울을 만든 장본인이라 말한다.(43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역사는 인간의 자기 인식을 위한 거울(43 페이지)이고 역사의 거울이 위험하다고 해서 거울 자체를 부수는 것은 더 위험한 야만을 초래한다.(44 페이지)

 

저자는 카를 지난 반 세기 넘게 한국인의 역사의식을 지배해온 역사의 우상으로 정의하고 그런 우상을 타파하기 위해 책을 썼다. 카는 기본적으로 역사를 역사가가 구성하는 서사라고 생각한 구성주의자다. 그는 수많은 과거의 사실들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여 역사 이야기를 구성하는 요소로 배열하느냐는 역사가의 선험적 결정에 의해 좌우된다고 주장했다.(49 페이지)

 

역사가는 무중력 상태에서 자유롭게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역사학계의 담론 권력의 중력장 속에서 사료들을 취사선택하고 배열한다.(50 페이지) 저자는 영국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의 민족적 정체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전하며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를 포괄하는 총칭으로서의 브리튼적인 것이란 말이 대체로 18세기 말 또는 19세기 초에야 명확한 것으로 나타났기에 처음부터 영국인들이 있어서 영국사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영국사가 영국인들을 만든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 결론짓는다.

 

저자는 같은 차원에서 민족으로서의 한국인은 처음부터 있었던 실체가 아니라 한국사가 만든 역사적 사실임을 지적한 뒤 그 예로 김춘추, 연개소문, 계백이 당대에 서로 한국인이 아니라 각기 다른 신라인, 고구려인, 백제인으로 인식했다는 주장을 한다.(54 페이지)

 

저자는 정치와 역사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모든 역사는 정치적이지만 정치가 역사를 지배하면 궁극적으로 학문의 자유는 말살(55 페이지)되며 역사는 정치의 뿌리이고 정치는 역사의 열매(65 페이지)라는 것이다.

 

저자는 역사의 객관성과 진실이란 고정불변의 정답이 아니라 과정과 절차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56 페이지) 즉 메타역사를 형성하는 역사관의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역사분쟁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은, 증거로 사용하는 사료가 얼마나 신빙성이 있고 풀이 과정이 얼마나 논리적인지를 상호 교차해 검토할 수 있는 합리적 의사소통의 장이 마련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카가 말하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란 해석을 의미한다. 저자는 역사사가 자신의 해석에 맞추어 사실을 만들고 그것에 맞춘 해석을 끊임없이 하는 것을 과연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 말할 수 있는가? 묻는다. 저자는 이를 대화가 아니라 역사가 자신의 독백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59 페이지)

 

저자는 역사가의 해석이 주도하는 대화를 통해서는 과거는 스스로 말하지 못하고 역사가의 물음에만 답할 수 있을 뿐이라 말한다.(59 페이지) 역사가는 말하기보다 듣는다는 자세로 과거와 만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카는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하는 한편 역사에 특별한 정답이 있다고 믿은 양면성을 보였다.(61 페이지) 카에게 역사의 정답이 된 사건은 러시아혁명이었다. 저자에 의하면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인은 기억으로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이 있어야 집단과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다.(6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20세기 사학사는 역사 인식의 범주를 국가로 설정하고 민족을 주체로 하는 정치사와 사회를 범주로 계급이나 민중을 주체로 한 사회사 모델의 대립으로 전개되었고 탈근대주의의 세례를 받고 국가와 민족 또는 사회와 같은 거대 담론에 의거해 현재와 과거의 대화를 부정하는 신문화사가 나타났다.(67 페이지)

 

신문화사는 삶의 의미망인 문화를 매개로 한 현재와 과거의 대화를 시도함으로써 거대 담론 역사에 의해 배제되고 억압된 기억들을 고고학적으로 발굴해내는 일상사와 미시사라는 새로운 역사 서술을 등장시켰다.(68 페이지) 신문화사는 글로벌 시대의 문제들에 대해 답을 줄 수 없다는 약점이 있다.

 

저자는 글로벌 시대인 지금 한국사는 더 이상 현재와 과거 사이의 소통의 장을 민족과 국가라는 울타리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71 페이지) 역사주의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이 시간 속에서 변한다는 것을 공리로 하는 세계관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상대주의라는 문제에 봉착한다.(75, 76 페이지)

 

카는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르는 역사적 시간의 흐름을 운동으로 파악함으로써 상대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 운동에는 선악을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은 없지만 (앞으로 가는 진보인가, 뒤로 가는 반동인가의) 방향성은 있다. 물론 그 판단 기준 자체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76 페이지)

 

역사가가 탐구 대상으로 삼는 것은 영웅의 개인적 삶이기보다 비극과 희극을 낳는 시대정신이다.(78 페이지) 랑케는 헤겔의 진보사관을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목적론이라 보고 반대했다. 카가 역사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가설로 진보를 설정한 것과 달리 랑케는 인간의 자유를 역사 연구에서 포기할 수 없는 가설로 보았다.(79 페이지)

 

마르크스는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그대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 말했다. 마르크스는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 속에서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환경 속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라 말했다.(80 페이지)

 

헤겔, 마르크스, 랑케 모두 역사를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운동으로 파악했지만 그들은 운동이 일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진보인가 아니면 그때그때마다 시대의 필연성으로 나타나는 내적 연관성의 전개인가에서 차이가 난다.(81 페이지)

 

랑케는 조건 짓는다는 말을 했지만 이는 절대적 필연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계기를 이루면서 조건 짓는 일련의 사건들 앞에 직면한다.”(80 페이지) 랑케는 모든 시대에는 신이 낸 문제처럼 주어진 시대정신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그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펼쳤던 행동의 자유를 있었던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라고 보았다.(82 페이지)

 

랑케는 역사는 하나의 예술이란 점에서 다른 과학들과 구별된다. 역사는 수집하고 발견하고 통찰한다는 점에서 과학이지만 발견하고 인식한 것을 재형성하고 묘사한다는 점에서 예술이다. 다른 과학들은 발견한 것을 오직 그런 것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역사는 재창작하는 능력이 요구된다.”고 말했다.(85, 86 페이지)

 

역사가 과학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인과론을 토대로 하는 설명이 가능해야 한다는 점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과학 혁명을 출범시킨 위대한 발견은 인류가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해 무지하다는 깨달음이라 말했다. 무지(를 깨달은) 혁명인 것이다.(86 페이지)

 

물리학자가 법칙을 찾아낼 목적으로 보편적 사실에 대한 인과관계를 밝혀내는 연구를 하는 반면 역사학자는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찾아내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탐구한다.(87 페이지) 법칙은 사실을 설명하게 해주고 이야기는 사태를 이해하게 해준다. 법칙은 일반화를 추구하지만 이야기는 의미를 지향한다.

 

카는 다른 나라, 다른 시기, 다른 조건애서도 유용한 교훈을 줄 수 있는 인과관계를 구성하려는 노력을 통해 역사가 과학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고 믿었다.(88 페이지) 인간은 뇌를 통해 사실을 정보로 인식하는데 뇌는 거짓을 걸러내는 필터 기능을 하기보다 믿고 싶은 것을 사실로 인정하는 편향성이 있다.

 

카는 미래의 진보에 이바지하는 방식으로 역사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이 과학적 역사라고 주장했다.(89 페이지) 저자는 카가 제기한 역사의 거대 담론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제 역사학은 더 이상 단선적인 진보에 이바지하는 이야기이기보다 통일성 속의 다양성 또는 다양성에 의거한 통일성을 각성시키는 이야기를 발굴해야 한다고 말한다.(90, 91 페이지)

 

필요한 것은 역사에서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닌 해답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현재와 과거의 대화를 하는 것이다.(91 페이지) 카는 역사에 하나의 정답이 있다고 믿고 역사적 인과관계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근대주의자이다.(92 페이지) 역사의 사실들은 순수하게 객관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역사가가 부여하는 의미에 의해서만 역사의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93 페이지)

 

카는 역사의 객관성을 사실의 객관성이 아니라 관계의 객관성이라 정의했다.(95 페이지) 관계의 객관성은 주체와 대상의 분리를 전제하는 근대 인식론과는 다른 의미의 객관성이다. 근대 인식론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근대적 주체의 독립 선언과 함께 시작되었다.

 

주체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Subject는 문법적 주어를 지칭하는 라틴어 수브엑툼에서 유래했다. 수브엑툼은 본래 종속된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나라는 주어는 술어가 규정하는 조건을 충족시킬(종속될) 때 유효한 것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주어와 술어 관계를 역전시킨 것이다.

 

랑케는 주어인 나를 소거하고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역사의 객관성이라 보았다.(96 페이지) 카는 실증사학과 현재주의의 양극단을 지양하면서 이를 연결시키는 방안으로 관계의 객관성을 주창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관계란 과거, 현재, 미래 사이의 관계이고 이 관계는 결국 역사가 진보를 향한 운동이라는 관점으로 규정된다.(96 페이지)

 

역사는 인간, 시간, 공간의 3간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서사이고 그것의 재구성을 통해 다시 써짐으로써 다양한 서술이 생겨나는데 카는 오직 시간 축만을 고려해 사유한다는 문제점이 있다.(97 페이지) 전통 시대 역사 담론에서는 주어인 현재가 술어인 과거에 종속되었다. 근대에서는 그 관계가 역전되었다. 중요한 것은 너라는 과거를 사물이나 타자로 여기지 않고 현재의 나를 존재하게 만들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근대적 주체 이전의 주어와 술어 사이의 연결 방식을 지향하는 것이다.(98 페이지)

 

마르틴 부버는 나라는 의식은 데카르트의 자아처럼 세계라는 대상과의 분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관계의 짜임 속에서만 나타난다고 보았다.(99 페이지)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관계를 재구성하면서 끊임없이 다시 쓰여지는 서사이며 이는 결국 현재라는 주어와 과거라는 술어의 나와 너의 상호연관성을 갱신하여 새로운 문장을 쓰는 방식으로 의미를 만드는 행위이다.

 

공간 축을 기준으로 관계의 객관성을 고찰하려는 시도는 진보사관의 단선적 시간관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공간적 차이를 복원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나온다. 역사 인식은 장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저자는 그 예로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를 든다. 우리는 안중근을 의사로 여기지만 일본은 안중근을 자국의 위인을 암살한 테러리스트로 본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듯 장소(국가)에 따라 역사 인식은 천양지차로 다르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경우 문제가 있다. 누가 보아도 이토 히로부미는 침략자이다. 이는 내가 한국인이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장소(국가)에 따라 역사 인식이 다른 것은 맞다. 하지만 이 경우 이토 히로부미가 잘못했다고 주장하는 일본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묻고 싶다.

 

일본이 조선 침략의 명분으로 제시한 논리에는 설득력이 없다.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고 발전을 돕는 것이라는 논리를 제시한 듯 한데 만일 당시 일본보다 강한 나라가 일본에 대해 그런 논리를 제시했다면 일본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수용할 수는 없었으리라.

 

저자는 고구려사를 둘러싼 한국과 중국의 역사 분쟁을, 한국사는 역사 3간 가운데 민족을 상수로 보고 중국은 영토라는 공간을 범주로 자국사를 정의하기에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100 페이지)

 

유발 하라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를 역사의 진보가 아닌 인간 행복의 관점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했다.(105 페이지) 저자는 카의 바람과 달리 진보의 과정으로서의 역사는 우리 시대에 이르러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파국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말한다.(111 페이지)

 

미시사는 연구 대상이 작다고 그 연구의 성과물마저 작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대상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작은 대상에서도 커다란 의미 연관성을 발견해낼 수 있는 시각이다.(144 페이지) 역사학이란 사건 자체가 아닌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내적 연관성을 밝히는 학문이다.(152 페이지)

 

승자는 역사를 기록하고 패자는 소설을 쓴다는 말이 있다. 이 경우 역사는 사실을 통해 허구를 주입하고 소설은 허구를 통해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161 페이지) 극단적인 경우이다. 저자는 사실, 허구, 진실은 모순 관계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하나의 트라이앵글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개별 사물에 대한 보편적 관념이라는 허구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개별적인 사물들에 대한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개념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개념은 반사실적이지만 진실이라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162 페이지)

 

사료(史料)들 사이에는 무수한 빈틈이 있다. 의미는 사실을 해석하는 것을 넘어 틈새를 잇고 채우는 이야기를 어떻게 만드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미시사는 그 틈새를 현미경적으로 확대해 과거를 밝힌다.(164 페이지)

 

사실과 사실 사이에 있는 것들은 사실은 아니지만 진실일 수 있는 반()사실들이다. 이는 양자물리학에서 말하는 물질과 반물질 관계를 연상하게 한다. 저자는 반물질이 사라졌음을 언급한 뒤 미시사는 사라진 반역사를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말한다. 위로부터의 역사 시각으로 구성된 종래의 역사 서술이 수목(樹木) 모델에 해당한다면 아래로부터의 역사 시각을 구현하고자 하는 미시사는 리좀 모델을 지향한다.

 

전자가 영토화를 시도했다면 후자는 탈영토화를 지향한다. 그런데 작은 역사 이야기들이 만들어내는 탈주선(脫走線)이 역사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넘어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재영토화 해나가는 통로가 될 수 있을까?

 

인간 역사는 거대 담론이 만들어내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이 아니라 미로를 헤맨다.(178 페이지) 저자는 아우슈비츠를 가능하게 한 것으로 두 가지를 든다. 기술 발달과 관료제적 노동 분화이다.(189 페이지) 이 둘은 근대 국가와 근대 문명이 이룩한 업적에 속한다.

 

근대는 세계의 탈주술화(막스 베버의 표현)가 일어난 시대이다. 주술을 대신한 것이 과학기술이다. 인간 삶에 관여하는 비밀스러운 초월적인 힘이 없다고 믿을 때 근대인은 모든 것을 과학의 연구 대상으로 삼았고 그것에 의해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비과학적인 것으로 앎의 영역에서 추방했다.(190 페이지) 그런데 근대는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는 탈주술화의 시대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세속적 종교성이 만들어질 수 있는 온상의 시대였다.(191 페이지)

 

홀로코스트 당시 독일인들에게 나치즘은 하나의 정치 종교였다.(191 페이지) 나치 시대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위기와 불행의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을 필요로 했고 그 희생양으로 유대인을 민족의 제단에 바치고자 하는 광기로부터 홀로코스트가 비롯되었다. 탈식민주의는 제국주의 문명을 문법을 해체할 목적으로 유럽중심주의가 은폐하고 지운 타자의 역사를 발굴하는 지식의 고고학을 수행한다.

 

그것은 근대 유럽이 비유럽이라는 타자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동일자가 비유럽이라는 부정적 타자를 거울로 삼아 근대 유럽이라는 동일자를 발명한 것이라 주장한다. 유럽중심주의가 이 같은 발견과 발명, 은폐의 변증법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었던 것은 구대륙과 신대륙, 유럽과 비유럽의 공간적 차이를 발전 단계로 치환하여 시간 순서로 위계화하는 역사주의를 통해서였다.(225 페이지)

 

인간과 세계에 대한 모든 지식을 시간화하는 역사주의는 공간을 인식론적 범주에서 배제했다.(226 페이지) 문화와 문명의 소통과 교류는 장소의 고유성을 전제로 한 번역으로 이루어진다. 공간은 외부의 어떤 것으로 채워져도 상관이 없는 균질적인 빈 곳이지만 장소는 사람들의 삶의 무늬로 수놓아진 의미의 세계다.(226, 227 페이지)

 

인류 역사는 추상적인 공간을 시간 속에서 거기 살았던 인간들의 노력과 경험이 축적된 구체적인 장소로 변형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228 페이지) 저자는 한국인들의 삶의 장소인 한반도는 페르낭 브로델이 말하는 움직이지 않는 역사로서 한국사의 운명을 결정하는 장기 지속 구조라 말한다.(230, 231 페이지)

 

동아시아 역사를 보면 수많은 역사 공동체가 번성하다가 사라졌다. 중국, 일본, 베트남, 한국, 몽골만이 국가로 존속해 자국사를 가지고 있다. 영국의 역사가 기번은 로마가 왜 망했는가?“보다 어떻게 그토록 오래 제국을 유지했는지?”를 밝히기 위해 로마제국 쇠망사를 썼다.(235 페이지)

 

마르크스의 말대로 인간은 역사를 만들 수 있지만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에 구속되어 새 역사를 창조한다.(236 페이지) 저자는 인구 절벽으로 한국인이 지구촌에서 사라지는 첫 국가가 될 것이라 말한 데이비드 콜먼을 언급하며 우리나라가 이민국가가 된다면 더 이상 민족을 상수(常數)로 하는 국사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장소를 근간으로 하는 문명사로 재구성하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있을까? 묻는다.(238 페이지)

 

저자는 민족과 이념이라는 두 굴레로부터 모두 탈피하여 세계사적인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보는 방법이 문명사 패러다임이라 말한다.(239 페이지) 사실과 사실 사이에는 틈새가 있다. 그 틈새를 상상력이 메운다. 그렇기에 사실들의 집합으로서의 역사는 결국 허구라는 주장이 제기된다.(243 페이지)

 

역사학자에게 상상력은 사실을 재현하기 위한 보조 수단이고 사극 제작자에게 상상력은 최대한 발휘되고 있다.(244 페이지) 포스트 트루스(post truth)는 사실이나 진실보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사회에서 더 잘 통용되는 현상을 의미한다.(245 페이지) 저자는 가짜 뉴스는 어디에나 있었다는 예로 백제 무왕이 왕이 되기 전 신라의 선화공주와 결혼할 목적으로 서동요를 유포시킨 것을 언급하며 진실이 밝혀짐과 동시에 거짓이 드러나기에 거짓은 진실의 반대가 아니라 그림자라고도 한다고 지적한다.(246 페이지)

 

유발 하라리는 유약한 유인원에 불과한 인류 종이 만물의 영장이 된 결정적 이유는 인간이 현실과 가상 세계라는 두 세계에 살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248 페이지) 저자는 역사학과 사극의 관계를 진짜 역사 vs 가짜 역사가 아닌 현실과 꿈의 상보적 관계로 볼 것을 제안한다.(249 페이지)

 

일연이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대항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쓴 것은 역사로서 기록될 가치가 없다고 배제된 꿈의 세계를 위해서다.(250 페이지) 시가 역사보다 더 진실하다는 말을 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시는 일어난 일을 말하는 역사와 달리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말한다.(251 페이지)

 

저자는 현실 없는 꿈은 공허하지만 꿈 없는 현실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257 페이지) 사극의 역사 왜곡 논쟁을 현실 역사와 꿈꾸는 역사의 대화로 푼다면 양쪽 모두에게 시너지 효과가 될 수 있다.(257 페이지)

 

현실과 허구가 혼합된 현실이 증강현실이다. 인간이 증강현실에 산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화폐다.(278, 279 페이지) 화폐 자체는 종이에 불과하지만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신뢰 시스템이다. 그런 시스템이 보이지 않는 손처럼 작동할 수 있는 근거는 계약, 국가, 법 등과 같은 가상 현실에 대한 믿음이다.(279 페이지)

 

현재 인류는 한 번도 가지 못한 길을 가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지도 밖으로 행군을 하면서 길을 찾는 게 아니라 길을 만들어 가야 하는 인류에게 지식보다 중요한 것이 상상력이다.(288 페이지)

 

저자는 미래는 생각이고 상상이라 말한다. 자연과학이 현실 과학이라면 인문학은 상상의 학문이라는 것이다.(290 페이지) 저자는 우리가 일어날 미래를 알 수 있다면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은 현재의 우리가 과거의 인류가 해왔던 것과는 다른 행동을 함으로써 열린다.(29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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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패킹 980g - 전국 백패킹 성지 가이드
고요한 지음 / 성안당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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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패킹이란 짊어지고 나르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반드시 장비를 챙기고 다녀야만 백패킹은 아니다.(79 페이지) 여행가 고요한의 백패킹 980g’은 백패킹의 모든 것을 담은 책이다. 주로 걷기에 해당하는 백패킹은 산을 걸을 수도, 바닷가를 걸을 수도 있는 것으로 이동 중 어딘가에 텐트를 치고 밤을 보냄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백패킹은 얼마나 짐을 적게 하는가, 그리고 얼마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가가 관건이다. 중요한 사실은 짐을 줄이자는 것은 자연을 즐기는 것에 초점을 둔다는 말이다. “여행에 중독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저자의 조언은 예산부터 신과 기타 장비 등에 이르기까지 세세하다.

 

등산화 끈을 묶는 방법까지 귀띔할 정도인 저자에 의하면 백패킹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배낭(의 무게)이다. 그런가 하면 침낭과 매트는 생존과 직결된 아이템이다. 책은 세세한 온갖 사진들을 담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저자는 텐트에 큰 욕심이 없다면 중저가를 고르라고 말한다. 히말라야에서 야영할 것이 아닌 이상 텐트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고 소비는 합리적일수록 좋다는 것이다.

 

당연히 취사장비도 필요하고 등산 장비도 필요하다. 등산 스틱, 의자, 테이블, 실타프, 의류도 주의해 골라야 한다. 헤드 랜턴, 물통, 보조 배터리, 다용도 칼, 상비약 등도 챙겨야 한다. 중요하게 알게 된 사실은 현행법상 야산에서의 취사는 지정된 야영장을 제외하면 전국 어디서든 불법이라는 점이다. 이런 사실 때문에 많은 백패커들이 아슬아슬하게 취사한다.

 

국가가 지정하고 관리하는 국립공원, 도립공원, 군립공원, 자연휴식년제 지정장소, 생태계 보존 지역 등에서 텐트를 칠 수 없다. 저자는 지난 201010월 중순 배낭 하나 둘러메고 한 달간 강원도 도보 일주를 하던 중 만난 한 백패커로부터 이런 저런 정보를 얻었다. 그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은 저자는 2013년부터 본격 백패킹을 결심한다.

 

그런데 여행 시작점인 천년 고찰 월정사에 도착해 난처한 지경에 이른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월정사는 지금도 내 감성을 자극한다. 어쩔 수 없이 도둑 야영을 한 이야기를 저자는 전한다. 저자는 백패킹에 관심을 갖는 많은 사람들이 결행하기까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체력 부담, 야생의 무서움, 행동의 불편함 때문이라 말한다.

 

체력적인 고단함보다 떠나기까지의 결정이 더 힘든 것이라는 저자는 그러나 일단 무모하게 떠나보면 새 여행이 열릴 것이라고 말한다.(87 페이지) 평창 오대산, 인천 덕적도, 대부도, 하동 섬진강, 제천 청풍호와 비봉산, 파주 파평산, 여주 강천섬, 고창 선운산, 영남 알프스, 정선 연포마을, 인천 자월도, 인천 대이작도, 인천 굴업도, 울진 전곡리, 삼척 덕풍계곡, 정선 만항재에서 동해 무릉계곡, 정선 방장산, 평창 장암산, 강릉 괘방산, 정선 민둥산, 고흥 마복산, 영동 민주지산, 홍성 오서산, 태백 태백산, 횡성 태기산, 강릉 안반데기, 김녕 성세기 해변, 높은 오름, 한라산 둘레길, 우도 비양도, 돈내코 계곡 등을 추천한다.

 

주제별로 나뉘어 있는 것이 특색인데 가령 백패킹과 어울리는 섬, 최고의 풍경, 환상적인 겨울 풍경, 제주도라는 특별한 이름 등이다. 저자의 책에는 사계절이 담겨 있다. 우리 나라의 자연적 조건이 반영된 편집이다.

 

물론 우리는 뚜렷한 사계절이 우울증과 연관이 깊다는 사실을 안다. 점점 여름과 겨울이 길고 봄과 가을은 짧아지는 듯 해 아쉽다. 이번 책에서 나는 많은 명소를 처음 접했다. 우리가 찬사를 보내는 자연에 꽃과 나무, 풀들이 포함되어 있고 산과 바다를 빼놓을 수 없다. 나라면 어땠을까?

 

꽃과 바다를 노래한 시들을 읊으며 백패킹을 실행할 수 있을까? 체력 걱정을 가장 많이 할 수 밖에 없다. 할까 말까, 하는 고민의 주된 요지가 체력에 있다. 월정사(月精寺)가 있는 오대산도 좋고 남해 물건리에서 미조항으로 가는 삼십 리 물미해안도 내 로망이다.

 

고두현 시인의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를 생각하게 된다.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보세요./ 낮은 파도에도 멀미하는 노을/ 해안선이 돌아앉아 머리 풀고/ 흰 목덜미 말리는 동안/ 미풍에 말려 올라가는 다홍 치맛단 좀 보세요./ 남해 물건리에서 미조항으로 가는/ 삼십 리 물미해안, 허리에 낭창낭창/ 감기는 바람을 밀어내며/ 길은 잘 익은 햇살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고/ 섬들은 수평선 끝을 잡아/ 그대 처음 만난 날처럼 팽팽하게 당기는데/ 지난 여름 푸른 상처/ 온 몸으로 막아주던 방풍림이 얼굴 붉히며/ 바알갛게 옷을 벗는 풍경/ 은점 지나 노구 지나 단감 빛으로 물드는 노을/ 남도에서 가장 빨리 가을이 닿는/ 삼십 리 해안 길, 그대에게 먼저 보여주려고/ 저토록 몸이 달아 뒤채는 파도/ 그렇게 돌아앉아 있지만 말고/ 속 타는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좀 보아요.”

 

나는 체력을 잘 유지해 시를 외우는 백패킹을 할 수 있을까? 각 명소를 가는 데 필요한 체크 포인트, 여행지 정보, 교통편 등을 상세하게 전하는 저자의 꼼꼼함이 돋보이는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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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보내온 편지 푸른사상 산문선 23
박지영 지음 / 푸른사상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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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꼬리는 길다의 저자 박지영 시인/ 평론가의 꿈이 보내온 편지는 정신분석 평론을 하는 저자의 에세이집이다. “내가 다른 나에게 보내는 편지인 꿈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다.

 

이 밖에 책에는 꿈과 관련해 주요 진술들이 언급되어 있다. “꿈은 무엇보다도 독창적이고 창조적이다. “꿈이나 환상이 더 시적일 수 있. “꿈은 나와 나를 둘러싼 어두운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꿈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시학이고 뛰어난 비유를 가지고 있으며 비할 데 없는 멋진 유머와 절묘한 아이디어를 가져다준다.” “꿈을 따라가면 무의식과 만나게 되고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눈에 띄는 점은 꿈과 시‘, ’꿈 일기‘, ’알람‘, ’또 우울하다‘, ’섬뜩함 뒤에는‘, ’낯설다‘, ’타인의 시선‘, ’깊은 달우물‘, ’새소리‘, ’머리카락‘, ’자화상‘, ’무꽃‘, ’여름 가다‘, ’()‘, ’겸허해지다등처럼 한 바닥 분량의 글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간단한 메모 같다고 볼 수 있지만 시처럼 읽히는 글이라 보는 편이 타당할 듯 싶다. 가장 시처럼 읽히는 글은 또 우울하다이다. “우울의 뿌리가 계속 뻗어나가고 있어. 난 우울의 기미를 빨리 감지하지...슬픔의 촉수가 자꾸 자라나 잔뿌리가 얽히고설키고. 내 슬픔에는 당신의 것까지 합쳐져 유리컵 속 양파 뿌리 자라듯 길게 자라지.”

 

우울이란 단어가 눈에 띄는데 알람이란 글에도 우울이란 단어가 나온다. “엄마는 자는 듯이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순간적으로 어머니는 우울증을 앓고 계셨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울증이 엄마의 병을 키웠겠구나. 그럼 지금 나도 우울증을 앓고 있는 건가?”(18 페이지)

 

질투라는 글에도 우울이란 단어가 나온다. “나는 남들보다 인정을 못 받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휩싸여 지냈던 때가 있었다. 그런 생각은 분노와 괴로움을 낳고 우울증을 유발한다는 것을 알았다.”(188 페이지)

 

낯설다란 글, ’깊은 달우물‘, ’자화상도 시처럼 읽히는 글에 속한다. 한편 카뮈 이방인의 뫼르소를 분석한 ’7월의 태양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 글의 키워드는 우울, 어머니, 리비도 내사(內射) 등이다. 저자는 뫼르소의 살해 동기가 정말 태양빛 때문이었을까,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한 뒤 어머니의 장례식 때 내리쬐던 것과 똑같은 태양이 머리 위에서 작열했다.”는 구절을 예시하며 뫼르소는 갑자기 당한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당황했으며 그동안 어머니를 잊고 지낸 자신이 못마땅했고 그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함에 절망했을 것이라 말한다.(25, 26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뫼르소는 애도의 단계에서 병적인 단계를 지나 멜랑콜리의 단계인 우울증에 급속도로 빨리 접어들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했다.“(26 페이지) 우울증 이야기는 봄의 불청객이란 글에도 나온다. 이 글에서 저자는 봄을 탄다는 말이 우울증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35 페이지)

 

중요한 사실은 애도를 잘 하지 못하고 대상에 집착하면 병리적인 애도가 나타나고 더 진행되면 멜랑콜리 단계에 이른다는 점이다. 한국인의 자살과 관련이 높은 우울증 유형은 멜랑콜리형이다.(35 페이지)

 

일상적인 글 사이 사이에 정신분석의 메시지들이 전달되는 것도 이 책의 미덕이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만으로 50%의 치유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는 사실(40 페이지)도 그 중 하나이다. 테이레시아스, 오이디푸스, 심학규(심청 아버지)의 실명(失明)을 거세와 연결지어 설명하는 것(47 페이지)도 그렇다. 술김에 한 말은 실수가 아닌 자기 통제와 검열이 해제된 틈을 타고 표출되는 무의식의 말이라는 말도 그렇다.(116 페이지)

 

1입이 붙어서에 이어지는 2시여 내게로 오라에서 저자는 모든 시는 상처라는 말을 한다. 저자는 그렇게 자신은 아이러니하게 상처받으면서 계속 시를 쓰니 시쓰기에도 중독성이 있는가 보다고 말하고(65 페이지) 삶과 죽음을 종이의 앞뒷면이라 여겼지만 이제는 대칭점 끝에서 서로 바라보며 팽팽히 잡고 있던 끈을 슬쩍 한쪽에서 내려놓으면 중심이 다른 한쪽으로 기울게 되는 것인가 보다고 말한다.(69 페이지) 이런 통찰은 신선하다.

 

가장 중요하게 읽히는 글이 시와 진실이란 글이다. 저자는 시에 리얼리티가 있는가, 묻는다. 작품 속에서 진실을 다 말할 수 없기에 그 진실은 부분적 진실이다.(87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잘 말하는 것은 반쯤 말하는 것이다. 그렇듯 시 쓰기도 반쯤 말하기와 같은 방식의 쓰기이다.

 

저자는 시는 의미 없이는 안 되지만 의미에 치중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88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사물은 관습적 이미지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다. 이는 시가 남다른 자신만의 사유가 응축된 것, 에둘러 말하는 것임을 알게 하는 말이다.

 

소리를 보다란 글도 감동적으로 읽힌다. 종이 한 장에서 한 그루 나무를 보아야 하고 거기에 물과 바람과 햇빛이 스며 있는 것을 보아야 한다. 모든 것은 이어져 있다. 그것이 연기(緣起).(96 페이지)

 

책에 관한 가장 핵심적이라 할 내용이 종이책 예찬이란 글에 있다. ”진정 책의 진가를 아는 사람은 밑줄을 긋고 읽던 페이지를 접어 놓고 눈 감고 사색을 하며 보고 또 보아야 하기에 손에 잡히는 종이책을 선호한다.“(127 페이지)는 글이다.

 

글쓰기란 글도 심상치 않다. 첫 문장에 어떤 문구가 오느냐에 따라 글의 흐름이 달라지고 영감이란 다른 게 아니라 언어의 소리에 복종하는 것이며 그것은 무의식, 계시, 우연 등 어떤 것으로 오든지 항상 타자의 목소리라는 글이다.(128 페이지)

 

글쓰기는 유년의 나를 어르고 달래고 화해하는 과정이며 그 순간이 바로 상처 치유의 순간이란 글(128 페이지)도 그렇다. 저자에게 글쓰기는 상처를 치유하고 상처를 받는 과정이다. 보로메오의 매듭 같은 구조이다.

 

모든 시는 상처다란 글에서 저자는 욕망은 언어로 흐르기에 언어가 없으면 욕망도 없고 언어가 없으면 상처도 없는바 그런 의미에서 모든 시는 상처라 설명한다.(141 페이지) 저자는 지금의 위치(시인, 평론가)에 자리하게 된 데에는 자신이 두루 섭렵한 독서가 자양분이 되었는지 모른다고 말하며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심리와 정신분석서들에 관심을 주로 갖게 되었고 그 결과 자신의 시와 평론들이 정신분석에 줄을 대고 있는게 아닌가, 란 말을 한다.(153 페이지)

 

애별(愛別)‘이란 글도 인상적이다. 저자는 일본 홋카이도 설경 여행 중 애별(愛別)이란 지명을 보았다. 애별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을 말한다.

 

참 이상한 일이다/ 도로 표지판에서 분명히 보았는데/ 어디에도 없다 지도에도 없다/ 낮에 본 애별에 마음 베이고/ 몸은 벌써 애별에 들어 애별을 앓고 있는데/ 참 이상한 일이다/ 애별은 추억을 안고 애처롭게 울던 새끼 고양이/ 애별은 가물어 바닥 드러낸 저수지/ 애별은 내가 아는 애별도 네가 아는 애별도 아니다/ 해 뜨고 바람 불고 산꼭대기 흰 눈 위로 애절하게/ 노을 지는 동안 애별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시계가 작동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평상시와 달리 밀가루 반죽처럼/ 말랑거리고 끈적거리며 달라붙었다/ 이스트 넣은 반죽처럼 부풀기도 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애별은 어떤 물질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외로움을 확보하는 순간 힘이 났다/ 별의별 생각을 다하며/ 애별을 낳다가 애별을 놓쳤다“..

 

저자는 이렇게 애별이란 지명을 보고 애별이란 시를 썼다. 저자는 어린 시절 고모의 친구가 언 강에 빠져 죽은 사건을 계기로 어머니가 들려주신 물에도 숨구멍이 있다는 말씀에 착안해 말에도 숨구멍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는 말을 한다. 책이 전하는 몇 가지 시론(詩論) 즉 시는 이런 것이라는 정의가 이 말을 통해 완결되는 듯 하다. 내가 읽은 것은 꿈론이고 시론 그 가운데서도 시론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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