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 개정판
김훈 지음 / 푸른숲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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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무생물이나 동물이 주인공인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김훈 님의 소설을 한참 찾아 읽을 때 이 책을 읽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얼마 전 좋은 블로그 이웃님의 책 소개를 보고 갑자기 너무 읽어보고 싶어 졌다. 김훈 작가 특유의 문체가 나를 끌었다. 즐겨 찾는 도서관에는 없어 다른 도서관에서 상호대차로 빌렸다. 앞부분만 읽어보고도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 거제도 여행 갈 때 다른 책들과 함께 무겁게 들고 내려갔는데 결국 한 권도 다 못 읽고 고스란히 가져와 집에서 읽었다. 


  보리는 수컷 강아지로 태어났다. 여러 형제들 가운데서도 활발하고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특징을 지녔다. 큰 형은 태어나는 중에 다리를 다쳐 얼마 못 가 슬픈 최후를 맞았는데 그게 좀 충격적이었다. 동물들의 세계는 사람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보리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과 뿔뿔이 흩어졌는데 팔려가는 엄마를 보는 보리가 정말 안타까웠다. 아기 똥을 먹는 장면이나 영희를 비롯한 동네 아이들이 학교 가는 길에 동행하며 뱀을 쫓는 장면이 정말 실감 났다. 강아지가 되어보지도 않은 작가가 어떻게 이렇게 진짜 강아지가 쓴 것처럼 글을 쓴 것일까? 아마도 강아지를 키웠거나 돌아다니는 강아지들을 자주 유심히 관찰하셨던 게 틀림없다. 

  이 책에는 사회의 여러 아픔도 등장한다. 조상 대대로 농사지어온 땅이 물에 잠기는 일, 가난한 어촌의 풍경과 다툼, 전염병으로 살처분하는 돼지농가 등 사회적인 이슈가 숨어있다. 개가 바라보는 인간 세상은 부조리하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이지만 보리는 모든 것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주인할머니네가 물에 잠기게 되면서 보리는 바닷가 마을에서 고기를 잡는 둘째네로 간다. 주인아저씨는 듬직하고, 힘도 세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고기를 조금밖에 잡지 못한다. 아이들을 따라 학교에 간 보리는 공부하고 밥을 먹고 노는 아이들을 관찰한다. 시골학교 풍경이 정말 잘 드러난다. 고학년이 동생들을 돌보고 설거지까지 한다는 내용이 조금 의아하긴 하다. 실제로 그런 학교가 있을 수도 있고, 이 책 속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완벽한 마을에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보리가 흰순이라는 암컷 강아지를 만나 마음을 빼앗기는 장면도 재미있다. 뒤에 흰순이를 찾아갔다가 우람하고 보리입장에서는 징그러운 악돌이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이름도 어찌나 재미나게 지었는지…….

  책장이 얼마 안 남았다 싶을 즈음 평화롭고 행복하던 보리의 견생에 갑자기 고난이 들이닥친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마지막을 짐작하게 되는데 더 이상 나쁜 일은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지막 장을 펼쳤다. 짧고 담백한 문장과 정겨운 대사가 일품이다. 시각, 후각, 청각, 미각, 촉각을 총동원한 묘사도 훌륭했다.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으로 나는 또 중고도서 구입 버튼을 누른다. 1500원이라니. 배송료보다 싼 가격이다. 횡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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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의 날들이 시작된 갯가 마을에서, 바다는 넓었다. 나는 바다로 달려들었으나, 갯벌에 발목이 빠져서 나아갈 수 없었다. 수없이 갯벌에 빠지고 나서야, 바다는 개들이 건너갈 수 없고 개들이 밟을 수 없는 큰 물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내가 건널 수 없는 바다는 내 눈앞에서 아득하고 찬란했으며, 멀고도 싱싱한 시간으로 가득 차 있었다.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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