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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고다 아야 지음, 차주연 옮김 / 책사람집 / 2024년 12월
평점 :
말년의 작가가 북쪽 홋카이도에서 저 남쪽 야쿠시마까지 나무를 찾아 정성껏 기록하고 오롯이 새긴 감동을 전한다. 첫 번째 에세이 ‘가문비나무의 갱신’에서 마지막 작품 ‘포플러’가 집필되기까지 13년 6개월이 걸렸다.
<나무>는 때로는 착실하게 초목을 배우고, 때로는 가슴 깊이 감상한다. 절에 자리를 잡은 소나무, 전원 속의 녹나무, 봄의 꽃과 겨울 숲…. 한 생명 곁에 머문 시간의 기록은 내내 다감하며 오묘하다. 저마다의 나무 이야기 속엔 삶의 이야기가 소박하게 숨어 있다.
<인터넷 알라딘 제공>
이 나무들은 같은 나무 위에 안착해 자랐기 때문에 일렬종대로 가지런하고 반듯하게 열 맞춰 서 있다. 그러니 아무리 뭘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 눈에 '아, 이게 스러져 죽은 나무 위로 새로운 나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에서 산속의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감동이 느껴졌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 이야기인가. 이 얼마나 인상적인 이야기인가.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내 눈으로 꼭 직접 확인해 보리라 결심했다. P12
그런데 꽃보다 등나무 뿌리를 보고 놀랐다. 천 년을 살아온 ‘옛 등나무’는 뿌리 둘레가 3미터를 훌쩍 넘는데 그 무시무시한 형태에 눈이 압도당했다. 서로 꾸불꾸불 얽히고설켜 땅 위로 솟구치기도 하고 뻗어가기도 하는 뿌리를 보면서 강대한 힘을 느끼는 동시에 몹시 배배 꼬인 것, 고집불통, 복잡함, 추악함과 괴상함을 느꼈다. 꽃은 한없이 부드럽고 아름답지만, 발밑은 보기도 무서워 이 뿌리를 보고 나서 꽃을 쳐다보면 꽃의 아름다움에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만다. 그러나 옆을 떠나가지도 않았다. 무서운 존재의 짓누르는 힘 때문에 일행이 재촉할 때까지 나는 우뚝 서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만 꽃에게 추억과 사죄를 마치고 온 것 같았다. 뿌리의 경우, 이번에 새로 대면했다는 인상이 강했다. 어쨌든 다음에 그 뿌리를 또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거란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는 산과 골짜기에서 자라는, 자연 속의 오래된 등나무, 어린 등나무의 꽃과 뿌리를 보여달라고 할 심산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다리를 놓을 때 쓰일 정도로 질기다는 등나무의 강력한 힘에 묶여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P43~44
오랜 세월 비바람과 햇빛에 노출되어 색이 바래서인지, 아니면 흰머리와 같은 노화 현상 때문인지 적갈색 가운데 회백색의 옹이가 굽이치고 있는 모습이 음산해서 불쾌했다. 뿌리는 넓게 땅 위로 기어 나와 사방팔방으로 얽히고설켜 몸부림치고 있다. 뿌리도 오랜 세월 비바람과 햇빛에 노출되며 색이 바랬기 때문인지, 발에 밟혔기 때문인지 껍질이 벗겨져 하얀 속살이 드러난 부분이 눈에 띈다. P88
숲속에 있다 보면 쓰러져 죽은 나무를 한두 그루 정도는 만난다. 폭풍우 속에서 줄기가 비틀리는 바람에 쓰러져 죽은 나무도 있고, 수명을 다한 뒤 흔들 하고 쓰러져 죽은 나무도 있다. 원인은 천차만별이겠지만,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나무는 모두 다 평안하고 여유롭고 아름답게 잠든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 나무를 바라볼 때면 곧잘 나라에 있는 도편수를 회상한다. 그가 숲속에서 평안한 모습으로 이끼 옷을 입고 누워 있는 나무를 본다면 어떻게 말할까? 목재는 잘리기 전까지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서 있던 나무이고, 쓰러져 죽은 나무도 본래는 뿌리를 내리고 서 있던 나무다. 하지만 숲속에 쓰러져 죽은 나무는 목재가 아니다. 어떤 표현을 택할지 그에게 묻고 싶다. 나는 숲속에 쓰러져 죽은 나무를 일컫는 호칭의 필요성을 깊이 절감하고 있었지만 딱 들어맞는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쓰러져 죽은 나무’라는 표현은 직설적이어서 좋지만 좀 더 위로가 필요한 기분이 든다. P121~122
그런 애처로움을 하나하나 만져나가는 동안, 퍼뜩 어느새 나무를 바라보는 마음이 이전과 많이 달라졌음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나무를 만나고 나무에게서 감동을 받고 싶어 숲속을 걷게 된 것도 요 몇 년 사이의 일이다. 그 방면의 전문가에게 그때마다 적절한 지도를 받은 덕에 짧은 세월 동안 홋카이도의 가문비나무, 나가노현기소의 편백나무, 야쿠섬 삼나무의 풍모 등 다양한 나무가 주는 감동을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음의 때가 씻기면서, 마음속에 새로운 양분이 보급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무와 숲은 좋은 약인데 입에도 달다고 생각했다. P131~132
행운과 불운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나무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 불운을 짊어지는 나무도 그것을 피할 수는 없다. 불운을 짊어지는 나무 생겨나기 마련이다. 불운의 형태는 다양하다. 폭풍, 눈보라, 산사태, 쓰나미, 화산재, 들불, 병충해 등으로 많은 나무들이 동시에 같은 불운을 짊어진다. 그런가하면 오직 홀로 겪는 불운도 있다. 나가노현에서 서본 편백 나무는 돌출된 벼랑 위에서 자라고 있었다. 줄기를 보니 무릎 높이 정도 오는 곳에 직사각형의 구멍을 뚫고 철사를 꼬아 만든 줄을 감아 골짜기 아래로 연결해 놓았다. 주위를 살펴보니 무슨 공사를 위해 설치한 듯 했다. 튼튼한 밧줄을 설치해 해놓은 이상, 조만간 제법 중량이 나가는 물건을 골짜기 아래로 내려 보낼 것 같았다. 너무 잔혹한 방식이다. 파낸 부위에는 계속 나뭇진이 눈물처럼 방울방울 맺혔다. 어느 정도의 행운과 불운을 겪는 일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나무처럼 얌전하고 조용히 살아가는 존재가 왜 이렇게 끔찍한 일을 겪어야 하냐며 불평하고 한탄할 때가 있다. P207~208
여행을 준비하며 비행시간동안 함께할 책은 뭘 가져갈까
고민이 많았다. 무겁지 않고 지루하지 않을...
지난해, 여름 관람한 영상부터 음악까지 너무 좋았던
'퍼펙트 데이즈'에서 주인공인 히라야마가 읽던 책이 사뭇 궁금했는데
여행 앞두고 출간 되었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구입해 기내용 가방에 넣었다.

늦은밤,
책을 읽으며 행복해 보이던 주인공처럼
비행기의 흐릿한 독서등 아래서
지루한 비행시간이 나름 견딜만했다.
오호~
내가 목도한 아는 나무도 등장한다. ^^;
오래전 겨울 홋가이도에서 만난 나무들은 하늘을 찌를듯
크고, 길고, 웅장했다.
마을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아주고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는 느름한 자태...
그 인상적이었던 나무의 이름이 '가문비나무'라는걸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이외에도 각각의 사연을 담은 많은 나무들과 폭풍, 쓰나미, 들불, 병충해를 겪는
나무의 불운도...
나무를 만나고 나무에게서 감동을 받고 싶어 숲속을 걷게 되었다는 저자의 이야기처럼
나도 얼른 이 좁은 의자에서 벗어나 나무냄새를 맡으며 숲속을 걷고 싶다.
이제 14시간의 비행기여행은 못할 것 같아...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