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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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며칠 전 「사랑이라니, 선영아」로 나에게 한바탕 웃음을 선사했던 김연수 작가는, 「나는 유령작가 입니다.」로 끝없는 작품 탐구의 연속 길을 걷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작품의 성격에 따라 작가의 문체와 사고는 360도 회전을 한다지만, 어쩜 분위기가 이다지도 틀릴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내 판단이 짧았고, 내가 한 작가에 대해 지니고 있는 어떠한 관념 자체가 지나친 오만이자 만용이었다. 솔직히 가벼운 마음으로 읽고자 했던 한 권의 소설집을 저녁 내내 붙잡고 있으면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내면의 진지한 결과물을 맞닥뜨렸을 때의 낭패감이란….

첫 작품을 읽는 순간, 내 머리는 이미 아플 준비를 하고 있었고, 두 번째 작품을 읽는 순간,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에 사로잡히며, 마침내 ‘작가의 말’이 적혀 있는 마지막 장까지 읽은 후 책을 덮으면서 어벙벙해진 머릿속을 억지로 수습하기에 바빴다. 창백하고 고요한 문체는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는 법 없이 온통 겨울 빛으로 물들어 있다. ‘사랑’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역사’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인간’을 냉정하게 논하면서도, 지나간 ‘시대’를 발견할 수 있는 탁월한 재량을 흠뻑 만끽해 보았다.

바나나를 먹으며 우유를 마시면 바나나 맛이 나는 우유를 마실 수 있는데, 굳이 바나나 맛 우유가 탄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더 달달해서? 더 편리해서? 은근한 매력이 있어서? 아니면 단순히 더 맛있으니까? 개인차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모든 이유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설에서 찾을 수 있는 일관된 감동이나 인생의 회환 따위도 그 비슷한 역할을 하지 않을까? 역사가 궁금하면 역사서를 찾아보면 되는 것이고, 사랑이 고프다면 연애론의 솔직담백한 해설서를 읽으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인간의 생이 집약되어 있는 소설책을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

소설에서 얻게 되는 부차적인 행복까지 더 합산하여, 반드시 찾게 되는 단 하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필시 작품 속에 녹아있는, 도저히 단어로 나열 할 수 없는 작가의 ‘만족스러운 힘’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나는 유령입니다.」를 읽는 내내, 그러한 김연수 작가의 만족스러운 힘과 섬세한 작업의 귀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장편소설로 오인하고 읽던 도중, 단편 분량의 연작 소설임을 알았을 때, 어느 작품 하나 깨알만큼도 부족하지 않을 수준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음에 다시 한번 놀라움에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지나친 한쪽의 기울임 없이 두루두루 여러 방면을 살펴보고 있는 작품들이다. 시집의 제목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창의적이고, 사색적인 제목들에서부터, 그 제목 속에 녹아 있는 세계 곳곳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나’에 해당하는 많은 인물들의 행로가 슬프고도 아름답다. 특정 시대에 대한 지나친 반감을 품은 글은 아니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험스럽게 느껴지는 세계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간상에 대한 제시 역시 획일 되지는 않았으나, 느껴지는 시선은 비슷한 듯 하다. 암울하고도, 허전한 겨울 같은 메마른 체온을 가진 사람들의 불완전한 사랑과 삶.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 들었던 책인데, 의외로 아주 강인한 인상으로, 하루 종일을 묵직하고도 짙은 먹 냄새를 맡은 기분이었다. 절대로 말을 할 수 없는 어느 유령작가가 내게 들려준 아홉 편의 이야기에서, 내가 살지 않는, 앞으로도 내가 살지 않을 시대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오늘 역시 내일의 역사로 가는 발목 일 텐데, 암묵적으로 이루어질 어떤 행위에 대한 누군가의 설명이 덧붙여져 씌어질까?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는 본문의 한 문장이 자꾸만 눈앞에서 맴을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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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7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nd0735 2006-12-27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저도 아직..
이번달 말에 입금된다고 하시던데.. ^^;;

2006-12-27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nd0735 2006-12-28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1일에 반드시 좋은 소식 있을 겁니다. -
저도 눈이 빠져라 기다렸답니다. ㅠ_ㅠ;;; 하하.
원고료 받으심 뭐하실 거예요? 연말이라 저도 이리저리 나갈 구멍이 많군요.

2006-12-28 08: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nd0735 2006-12-28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아이고! 대량 출혈이었군요. ^^ 노트북 구매하셔서 너무 좋겠어요. 몇 년 전에 비해서 가격이 많이 다운된걸로 알고 있는데.. 그래도 노트북은 노트북이죠 ; 한동안 궁핍한 생활을.. ㅠ.ㅠ 얼른 입금이 되야 할텐데....;;
 
사랑이라니, 선영아 작가정신 소설향 18
김연수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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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사랑에 불만족한 것도 아닌데, 어느 날 갑자기 기억 속에 묻어 뒀던 ‘그’가 나타났다. 결혼을 앞둔 여자의 마음처럼 복잡한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결혼을 앞두고, 배우자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서 ‘사랑해.’란 말을 들을 때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까?

결혼을 앞둔 광수와 선영에게로 느닷없이 추억 속의 남자 진우가 나타나 평온한 저수지에 돌을 던져 흙탕물을 일으키고 있다. 세 사람은 대학동창이고, 지금까지 이어져 온 절친한 친구 사이다. 다만 하나의 문제점은 과거 선영이 진우와 사귀었던 사이라는 점 때문이다. 지금은 말끔하게 정리 된 상태라고 하는데, 남의 떡이 늘 상 커 보이는 법이므로 진우의 평온했던 마음에는 불연 듯 평범했던 선영이 예뻐 보이기 시작하며, 잊고 있던 ‘사랑’이라는 불안요소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흔들려야 하느니라. 흔들려야 하느니라.’ 누군가가 다그치는 것도 아닌데, 세 사람은 서로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갈등의 폭은 점점 커져만 간다. 언제나 모든 연애소설이 그렇듯이, 겉 테두리만으로 판단하자면 충분히 진부한 내용이다. 30분 동안 섹스 하다가, 30분 동안 피 터지게 싸우다가, 30분 동안 화해하고 다시 화합하는 뻔한 프랑스 멜로 영화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이게 흐르는 연인들을 위한 찬가가, 모든 연애의 공식이라면 공식일 것이다.

그러나 시작부터 독특한 「사랑이라니, 선영아」는 평범한 연애 공식에 새로운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본서의 시작은, 결혼식장에서 신부 선영의 부케 팔레노프시스 꽃대가 부러진 것을 보고 ‘지나치게’ 신경을 곤두세우며 집착하는 광수의 시점이다.) 일률적으로 그려질 남, 녀 간의 말다툼도 없이, 맛깔스럽다고 밖에 할 수 없을 탁월한 대사들 하나로 독자를 압도 하고 있다. 한국말에 이런 단어가 있었나, 싶을 만큼 생소한 형용사들과 유머러스하게 펼쳐지는 그들만의 리얼한 사랑 풍경이, 시간의 흐름도 잊게 할 만큼 유유히 흘러간다.

‘사랑’이라는 가장 흔하지만 중요한 주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보았다. 흐르는 시간에 묻혀져 있었던 과거의 사랑을 진정으로 잊을 수 있었다는 여자와, 추억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는 누군가를 쫓아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는 얼멍얼멍한 남자와, 적절한 수준의 로맨틱함을 갖추면서도 쫀쫀한 남자의 끓어오르는 질투심의 절정까지.

‘선영아, 사랑해’ 라는 유명한 광고 카피는 대한민국 여자들의 가슴에 사랑하고 싶다는 불을 질렀고, ‘사랑이라니, 선영아’ 는 대한민국 여자들의 가슴에 사랑이라는 지금의 현실을 돌아보게 해 준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광수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느끼고 있는 그 사실을, 그래도 부인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지나친 이기심일까? 결혼과 함께 시작될 그들의 운명이 더욱 궁금해 진다. 읽는 내내 ‘진우를 믿지 마!’ 라는 외침을 나도 모르게 내지르게 되었던 즐거움을 겸비한 아주 발칙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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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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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친근하고 익숙한 느낌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책을 통해 저자와 소통하며 마치 내 분신을 마주 대하는 듯한 생경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지금의 기분을 어수룩한 언변으로 표현하자면, 유년기를 통해 겹겹이 쌓여 있던 나의 치부를 조심스럽게 들춰내는 놀라움과 그 번뜩임을 넘어선 약간의 불쾌함에 사로잡히는 기이한 체험이다. 같은 사람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같은 여자이기 때문일까. 어찌 되었든 김형경 작가의 「사람 풍경」을 통해, 절대로 알아내고 싶지 않았던 내 안의 나를 꺼내어 볼 수 있었다.

우선, 「사람 풍경」다소 독특한 구성으로 독자에게 접근하고 있다. 여행 중에 겪었던 실질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인간 심리를 파헤친 ‘심리/여행 에세이’라는 절묘하게 궁합이 맞아 떨어지는 주제와, ‘소설가’라는 저자의 능력을 한껏 발휘한 매력적인 문장들이 만난 것이다. 20년이 넘도록 글만 써온 탁월한 문장가에게 ‘여행’의 맛은 참으로 알싸했음이 틀림이 없다. 그녀의 곳곳에 베인 상처들과 절망들에서 새롭게 느껴 볼 수 있는 가득한 충만의 기운을 찾아서, ‘여행’을 도피 삼아, 기회 삼아, 혹은 다시 모든 것이 처음부터라는 기분으로 일생일대의 기나긴 외출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좋다. 그녀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그 ‘여행’들에게서 희망을 배웠고, 사람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기회를 제공 받았으니 말이다. 본서를 읽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절대적으로 공감 할 수 있었던 수많은 일화들에서 느낀 점은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라는 일종의 동질감이었다. 사람 대 사람, 반드시 가식적일 수밖에 없고, 뭔가 삐걱거리는 불협화음이 들릴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편일률적이게도 나만은 그렇지 않다는 지나친 자기애의 승화는 내 스스로를 가장 이기적인 인간으로 몰고 가야했었다. 그러나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심리를 공부하면서, 혹은 부득의하게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그녀의 고충과 깨달음을, 여행이라는 현실의 이탈에서 철저하게 복습했던 것 같다. 대한민국인 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집합에서 나와서, 세계 곳곳을 누비면서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며 인간의 심리와 적절한 해석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심리학 전공자가 아니기에, 일반인들의 상식 수순에 머물러 있던 ‘심리’라는 심오한 학문은, 한층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 받을 수 있었다. 일상에서 느꼈던 불안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면서, 나 또한, 내가 사랑하는, 내가 증오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라는 쉽고도 편한 정의를 이해하기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나 보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사람’을 느끼고 상대하는 것만큼 어렵고, 피곤한 일도 없을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았던 오해를 사거나, 지나친 관심, 혹은 지나친 무관심 등에서 상처 받는 것은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남겨질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사회와 일종의 계약이라면 계약을 맺고 살아가는 동물이므로, 결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러한 내면의 문제점들을 짚어보면서, 인간의 심리를 쉽고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책을 만났기에, 원인모를 성취감마저 느껴진다. 결국은 혼자이지만, 결국 혼자가 아니라는 불변의 진리.

나는 항상 내 자신이 나약하고, 볼품없다는 자기 비약이 심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본서에도 언급되어 있는 유년기의 불안정한 심리가 발단이 되었으리라 생각 된다. 결코 정신이 빈약한 것은 아닌데, 무언가 허전하고 텅 빈 것 같은 초라함이 나를 휩싸고 돌면, 우울증의 증세를 동반해 몸까지 아파왔다. 많은 나이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상 다 산 사람처럼 허망하게 앉아 땅만 바라보던 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행복해지자고 소리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가면서 다시 한번 용기를 다짐해 봤다. 사람이라면 다 비슷비슷하다는 단 결론으로, 지금의 문제들을 원만히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혼자 하는 여행이 뜻 깊은 이유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솔직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혼자 보고, 혼자 걷고, 혼자 느끼고, 혼자 사유하며,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응원군인 나 자신을 만나는 길이다. 그 혼자 하는 여행길에서, 작가 ‘김형경’은 그 때 만났던 사람들을 추억했고, 그들의 심리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치료하고자 노력했다. 결국, 문제가 있다고 느꼈던 많은 사람들은 나와 많이 다르지 않은 보편적인 인간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의 솔직하고도 편안한 고백이 진심으로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나와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 역시, 그냥 보통의,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평범하지만, 조금 특별하기도 한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풍경이 궁금하다면, ‘김형경’의「사람 풍경」을 꼭 읽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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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철학 - 고대 그리스 철학부터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멍윈젠 지음, 이영옥 옮김 / 책과함께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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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easy’라는 단어가 붙었다는 이유로 만만하게 봤다가 큰 코 다쳤다. easy 옆에 붙은, ‘철학’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심오하고도 난해한 학문을 감당하기에는 아직도 내 소양이 부족한가 보다, 라는 좌절감에 절로 고개가 떨어뜨리어졌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이 소설의 형식으로 쉽게 쓰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솔직히 책의 내용을 절반 정도라도 내가 제대로 이해를 한건지 스스로 의심스러울 정도다. 이것이 처음으로 철학이라는 학문을 내 스스로 찾아 직접 접한 무지한 나의 솔직한 한줄 감상이다.

본서의 저자가 명시되어 있다시피, <이지 철학>은 철학사상의 원류 및 발전변화를 명확하게 알기 위해 ‘철학사’를 주르륵 훑어보는 정도의 간편함을 최우선의 목표로 설정 하고 있다. 그러므로 철학이란 학문의 상세한 파악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철학의 흐름을 명료하게 기술했다고 볼 수 있겠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점은, 어머니의 자장가보다 더욱 나른해서 나도 모르게 잠 속으로 빠져드는 따분한 해설서가 아닌, ‘소설’의 형태를 차용하여, 초보자의 빠른 이해를 돕고 있다는 점이다.
‘세라드’와 ‘케빈’, 두 친구를 주축으로 세라드의 할아버지 ‘로타비트’와 ‘스티븐스’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마치 시간탐험대의 타임머신처럼 그들은 과거로 여행을 해서 유명한 철학사상가들을 만나서 직접적인 사유의 진리를 얻게 되는 기발한 내용이다. 어린 그들은, 호수에서 우연히 ‘상체루스’를 만난 이후로, 플라톤과 데카르트, 칸트, 프로이트, 그리고 맹자나 장자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위대한 철학자’들과의 신비로운 조우에 사유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청소년들의 눈높이에 맞춘 철학서인 듯한데, 역시 나에게는 쉽지 않은 책이었다. ‘단 한 문장’의 물음만으로도 하루 종일을, 아니, 평생을 고민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철학의 세계인데, 어찌 단 며칠간의 시간 투자로 그들의 심오하고 난해한 뜻을 이해할 수 있으랴. 예를 들어 제 1장 상단에 기입된, ‘헤라클레이토스’의 ‘우리는 한번 들어갔던 강에 다시 들어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며, 우리는 존재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라는 딱 한 문장을, 나는 제법 오랜 시간 글자들을 노려보며 그 말을 해석코자 노력 했었다. 그러나 갈래갈래 얽히고설킨 여러 학파의 주장과 유명 철학자들의 견해들까지 차근차근 짚어가며 완벽한 이해를 바란다면, 며칠이 아닌, 평생의 공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애초에 철학 입문서로 점찍어서 아주 깊숙이까지 알고자 함이 아니었으므로, 처음 생각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대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고, 신경을 바싹 곤두세운 채 책을 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공자님의 자장가 소리에 수업시간마다 책상에 기대에 잠을 잤던 무례한 나였기에, 이번의 철학서 입문은 일종의 모험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첫 파트너가 마음에 드니까, 앞으로의 근심까지 아주 말끔히 날아간 기분이다.

헤겔, 니체, 비트겐슈타인, 노자 등, 텅텅 빈 나의 뇌를 영양가로 가득 채워줄 그 분들의 진리 찾기 여행에 동참한 기분은 상쾌하다. 나에게 이런 집중력이 있었나 싶을 만큼, <이지 철학>과 함께 흐르는 시간도 빨랐던 것 같다. 모든 인간과 사물의 존재 자체가 신비이고, 그 신비를 밝혀내고자 끊임없이 철학에 파고들었을 그분들과 다시 한번 뜬 눈으로 밤을 한번 지새워봐야겠다. 생각하자, 고로 나는 존재하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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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문학을 그리다
종이나라 편집부 엮음 / 종이나라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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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에는 침묵이 숨어있다고 속삭이는 김지하 시인의 시를 읽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초겨울의 파고가 높은 오늘 같은 날과 가장 잘 어울리는 책이 <그림, 문학을 그리다>가 아닌가 싶다. 그림과 문학의 적절한 만남을 기대하며 책장을 넘기면서도, 너무 짧은 내용만을 담은 게 아니었나 싶었던 걱정들이 아주 말끔히 사라지고 있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44인의 문장가와, 33인의 화가를 단 한권의 책에서 모두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다. 평소에 문학을 좋아하여 편식 없이 책을 대한다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모두 살필 수 없었던 소설들과 시를 주요한 엑기스를 간추린 듯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너무도 곱고 고운 미술 작품까지 함께 감상 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고마운 책인가. 생활 속의 작은 미술관은 이렇게 찾아보면 되는 거였다.

평소 단 한번도 깊이 연관지어 생각해보지 않았던 미술과 문학을 결코 동시에 가져 볼 수 없기에, <그림, 문학을 그리다>를 읽으며 약간의 발상의 전환이 새로운 감동을 자아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나누어 가진다면, 책을 대하는 만족까지 두 배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직 책을 읽지 못하여 망설이고 있는 분을 위한 자세한 감상을 말씀드린다면, 지금까지 출간된 소설 작품과 시집 중 일부분을 발췌하여 글의 분위기가 정확히 살아있는 미술 작품을 나란히 그려 넣은 책이다. 발군의 문장들과 한국미가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그림들이 같은 자리에 함께 있어서 더욱 더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는 것 같다.

간혹 소설이나 시를 읽을 때, 그 영상을 머릿속에 그려보곤 한다. 정확하게 들어맞는 이미지는 아닐지라도, 추상적인 영상의 모습이 미묘한 신경 선을 자극하게 되는데, 그것이 문학의 영상화가 일반적이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순리일 것이다. 본서에 나온 그림들은 추상적인 성격이 강하고, 느끼는 이에 따라 그림의 해석까지 천차만별일 것이라 생각 된다. 그것이 그림이 주는 힘이자 궁극적인 예술의 목표가 아니겠는가.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 예술이지만, 획일 된 답 또한 없는 것이 예술이니까 말이다.

지금까지 읽어보지 못했던 문학 작품집과, 감상하지 못하고 있던 생소한 미술 작품들을 함께 만나볼 수 있었던 귀중한 경험을 했기에, 오늘의 만남은 매우 뜻 깊다. 마음에 들었던 몇몇 문학 작품들은 새로이 정식으로 읽어봐야겠다는 다짐도 들었고, 단조로운 생활 속에서 단아하고도 청아한 그림들을 감상하는 기쁨도 더욱 누려보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간혹 책을 선물 할 때, 어떤 책을 선물해야 할지 굉장히 막막할 때가 있는데, <그림, 문학을 그리다>는 소중한 사람에게 건네는 선물로도 아주 만족스러울 것 같다. 예스러워서 아주 기품이 살아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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