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은 옷을 입지 않는다 - 인류 최후의 에덴동산, 아마존 오디세이
정승희 지음.사진 / 사군자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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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이 따뜻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따뜻하다는 표현으로는 도저히 부족한, 가슴 뜨끈하게 아려오는 진한 감동의 깊이가 있는 책들이 있다. ‘한비야’의 오지 체험 이야기를 들을 때 느낄 수 있던 훈훈한 기분들을「아마존은 옷을 입지 않는다」로 통해서 다시 한번 느껴볼 수 있었다. 도전, 지구, 탐험. 이 세 글자를 사랑한다고 하는 KBS PD 정승희씨가, 지구의 마지막 오지라고 일컫는 아마존 체험기를 솔직하게 들려주었다.

  한번쯤 호기심에 아마존 열대우림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나 역시 사서 고생한다는 얘기를 분명 듣겠지만, 한번은 오지 체험을 해보고 싶었다. 간혹 일요일 아침 ‘도전 지구 탐험대’를 보면서 대리만족에 머물러 있던 인디오들의 모습을 책을 통해 다시 접하면서 좀 더 진솔하게 소통한 것 같다. 직접 가볼 수는 없으니, 이렇게라도 대리만족을 하는 수밖에….

  때 묻지 않는 순수한 인디오를 보면서 문명인이 느끼는 경견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듯 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온기가 가슴 곳곳에 퍼져 나간다. 사람이 사람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은 실로 다양한데, 달라도 너무 다른 두 문화가 만나서 과연 잘 화합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다르게 생각하면, 사람이 사람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은 매 한가지인 듯도 하다. 상대방이 웃으면 나 역시 기분 좋고, 상대방이 꾸밈없는 진실로 나를 대하면 그 진심이 고스란히 손끝으로 전해 오니까 말이다. 

  비로소 본서를 읽고, 정승희 PD가 아마존에 그토록 사로잡힌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발가벗고 뛰어놓는 아이 어른들을 보면서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자연과 몸이 하나 되는 순간을 경험한 것처럼, 숲, 나무, 벌레 할 것 없이 구분 짓지 않고 하나 되어 움직이는 천연 그대로의 순수한 사람들을 보고 있을 때의 벅찬 감격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10년이 넘은 세월동안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면서, 갖은 고생을 해 가면서도 아마존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도, 아마존은 문명인을 서서히 동화시킨 후 흡수 해 버리는 희망의 땅이기 때문이다. 갈등도 번뇌도 고통도 시련도, 그 어떤 좌절의 흔적이 보이지 않기에 흡사 유토피아처럼 비춰진다.

  저자가 직접 부딪히며 겪었던 10년간의 아마존 스토리에서 인디오들의 삶에 대한 열정과 순수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재미를 넘어선 고차원적인 행복의 결실까지 맛볼 수 있는 체험의 장이다. 첫 장부터 푹 빠져서 읽으며 마치 내 자신이 아마존 땅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유쾌한 이야기보따리도 많았던 반면, 안타까운 이야기들 역시 많았던 듯 하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철저히 파괴된 아마존의 살림과 백인들로부터의 학대. 그리고 이제 서서히 문명이 이끄는 자본의 힘에, 인디오 자신들도 모른 채 ‘돈’이라는 요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

  머지않아 인류의 마지막 에덴동산 아마존 역시 서구 자본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차츰 차츰 돈의 권력에 사로잡혀 소중하게 이어져 오던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버리게 될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인디오를 보면서 마음이 씁쓸하다고 말하던 저자의 안타까움에 속이 새카맣게 타 들어가는 듯 했다. 도저히 개인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멀지 않은 미래의 일…. 언제까지 지속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이 아름다운 에덴동산이 처음 인류가 그랬던 것처럼 처음 모습 그대로 마지막까지 남겨졌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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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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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외국어가 모든 사람들의 정신의 밑바닥으로 돌덩이처럼 떨어진다. 기상. 따뜻한 담요가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경계, 잠이라는 튼튼하지 못한 갑옷, 고통스럽기도 한 밤으로의 탈출, 이 모든 것이 산산조각난다. 우리는 다시 무자비하게 잠에서 깨어나 벌거벗고 연약한 상태에서 잔인하게 모욕에 노출된다. 이성적으로는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긴, 다른 날과 똑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너무나 춥고 너무나 배고프고 너무나 힘이 들어 그 끝은 우리와 더 멀어진다. 그러므로 회색빛 빵 한 덩이에 우리의 관심과 욕망을 집중시키는 것이 더 낫다. 빵은 작지만 한 시간 후면 틀림없이 우리 것이 된다. 그것을 집어삼키기 전까지 5분 동안 그것은 이곳에서 우리가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변할 수 있다. -94쪽

역사와 삶 속에서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며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가복음 4장 25절」- 라는 잔인한 법칙을 실감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인간이 홀로 존재하며 삶을 위한 투쟁이 원초적인 메커니즘으로 축소되어버리는 수용소에서, 이 불공평한 법칙은 공공연히 효력을 발휘하며 모두에게 인정을 받았다.-134쪽

이해하려 애쓰지 마라, 미래를 상상하지 마라, 모든 게 어떻게 언제 끝나게 될지 생각하며 괴로워하지 마라,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지도, 스스로 자문하지 말라.-179쪽

무기력하고 힘없고 헐벗은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우리 시대의 인간들이 가장 정밀한 도구를 이용해 서로의 죽음을 구하고 있었다. 그들이 손가락만 한번 움직이면 수용소 전체가 파괴되고 수천 명의 사람들 전멸시킬 수 있었다. 반면에 우리의 힘과 의지를 모두 다 합쳐도 우리들 중 한 사람의 생명을 단 1분도 연장할 수 없었다.-263-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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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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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 오로지 죽음의 결말 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인간을 죽이는 것은 바로 인간이다.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도, 부당함을 당하는 것도 인간이다. 강제 수용소에 잡혀온 2만 명가량의 사람들과 광기에 사로잡힌 독일군. 죽음의 결말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우슈비츠에서는 오직 피억압자와 억압자, 이렇게 단 두 부류로만 나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인간이 평등하다는 신화가 얼마나 공허한지, 감히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사치인지, 이유 없는 감옥에선 오로지 지옥의 기로에 선 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만이 메아리쳐 들려올 뿐이다.

  역사를 공부하고 싶었다. 아니, 부당함의 역사와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독일인의 치부를 건드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지옥과도 같았던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증언을 토대로 다시 한 번 반세기 전, 피의 전쟁터 그 살육의 현장을 바라본다. 반드시 존재했던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고 싶었다는 저자의 목소리가 새삼 건조하게 느껴졌다. 광기에 사로잡힌 히틀러의 나치즘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냉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그의 초연함에서 분노보다 더욱 무서운 증오의 순화를 경험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인간이 재생할 수 있는 모든 기본 권리마저 박탈당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제 3 수용소에서의 1년. 수용소의 사람들은 의식주는 고사하고 짐승 이하의 취급을 당하며 자살 할 의지마저 꺾이는 삶의 최 하단 층의 피 끓는 고통의 시간들을 겪는다. 이 곳에서는 이유가 없다. 인간이 인간에게 행사하는 모든 부당함뿐인 불공평한 법칙에 대한 이유 따윈 없는 것이다. 이유를 물어서도 안 되고, 알아서도 안 된다. 그저 구정물 통 속으로 집어넣어 군화를 지근지근 밟아대는 타인으로부터의 모욕과 가학을 견디거나, 스스로 죽어가는 길 밖에는 방법이 없다. 이것이 인간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중한 물음의 결과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를 누를 수 있는 자유의 보장에 따른 귀결점이다. 처음부터 자유가 없었던 사람은 스스로 자유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권력에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용소로 보내진 수많은 사람들은 비이성적인 파시즘을 결단코 이해하지 못했다. 저자의 말대로 이해라는 단어 자체에 용서와 관용, 혹은 수용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느냐, 답은 절대 ‘노동’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비이성적 광기와 가학만이 가득한 1940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치열한 삶이 가장 오래된 물음인 ‘인간’ 자체의 도덕에 대한 상을 적절하게 제시해 주는 듯 하다.

  지금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기록은 온갖 통계자료와 수치로 그 끔찍함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당시를, 그 날을 몸소 겪었던 이들은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몇 몇 영화나 소설, 혹은 문헌이나 자서전에서 폭로 혹은 증언 되고 있는 사실로서의 기록들은 여전히 유효하게, 잔인한 부분들을 더욱 더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의식이 남아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고통스런 운명의 가혹함을 직접 저술한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를 반드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 된다. 개인의 증오와 분노의 차원을 넘어, 인간이 인간에게 가지는 인간 자체에 대한 악의 폭로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반드시 되풀이 된다. 앞으로 우리에게 전쟁은 없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지구촌 모든 이들의 사고의 방식이 단일하게 발생하고 있는 전쟁터인데…. 언제 닥칠지 모를 악의 순환과 부조리한 인간 권력 상징의 두려움을 이처럼 강하게 느껴본 적이 없는 듯 하다. 국가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참으로 어려운 문제들이다. 아직도 나는 이 국가상들에 대한 진정한 이념을 깨닫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다. 인간을 가장 큰 두려움으로 몰고 가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을 죽이는 것은 바로 인간이며,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도, 부당함을 당하는 것도 오직 인간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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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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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이란 낯선 곳으로의 영원한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인생을 찾아보고자 노력하는 행위의 반복은 다양한 고민과 실망, 삶의 이면에 나타나는 행복까지 누려볼 수 있는, 오로지 생각하는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고유의 능력이자 사치일 것이다. 현재의 불만이 새로운 인생을 꿈꾸게 만들지 않더라도, ‘삶’이라고 하는 어려운 철학적 문제를 쉼 없이 이어가는 한, 우리는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 있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충분히 느껴지는 다른 삶을 꿈꾸고 있다.

  경험하지 못하는 미래의 어느 지점을 찾아 떠나는 여행,「새로운 인생」은 신비롭고 다채로운 색채로 가득 찬 순수 문학적인 매력이 가득 찬 소설이다. 세계인을 감동시킨 작가 ‘오르한 파묵’의 진정한 파워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어렵게 쓰면 다 노벨 문학상 탈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역시 이 소설에서도 일맥상통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수많은 현대 소설에 영향을 준 고전 소설의 느낌을 자아내는 유일한 작가라는 칭송을 받고 있는 ‘오르한 파묵’의 문학적 성취의 전정한 파워는, 고전의 부활을 꿈꾸게 만드는 몇 안 되는 현대 작가이기 때문이다.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는, 문인으로서 최고의 명예를 거머쥔 ‘오르한 파묵’의 1994년 작품 「새로운 인생」은 섬세한 그의 고전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경계를 가를 수 있는 신념에 매우 유사하게 접근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권의 책에서 비롯된 인간의 허황된 망상과 사랑의 발단, 신비로운 곳으로의 여행이 이어지는 복잡한 구도 속에서 시각적으로 다가오는 터키의 모습이 아주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주인공들의 이미지는 전적으로 배제한 채, 창 밖의 풍경을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오스만’이 생각하는 모든 감정의 실타래만을 거미줄처럼 난해하게 연결하고 있다. 그야말로 작가의 깊은 호흡과 독자의 상상력이 같은 위치로 움직이는 것이다.  

  책 한 권에서 비롯되는 모든 세계의 시작이 주인공을 움직이게 만드는 첫 발단이 되어, 이 책의 중심이라고 인식되는 ‘새로운 인생’이 펼쳐진다. 오스만이 사랑이라고 믿는 여자 ‘자난’와, 그녀가 절실히 사랑하는 애인 ‘메흐메트’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 계속해서 이어지는 사건들의 문제가 잠시도 시선을 거둘 수 없게 만들었다. 책 한권을 통해서 바뀔 수 있는 인간이라는 나약한 존재의 복잡한 공황상태를 작가 자신이 가장 정확하고 예리하게 느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만큼 사소설의 느낌이 강했다. 작가는 ‘책을 통한 새로운 세상이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견해를 지닌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 책을 통한 새로운 세상이 존재한다.’는 정의를 바탕으로 글을 이어가고 있는 만큼, 환상처럼 그려지는 다른 세상의 존재 여부가 더욱 확실해졌을 것이다.

  한 권의 소설에 담을 수 있는 상상력의 범위는 그야말로 무궁무진 한 듯 하다. 소재의 다양성이 작품의 질을 판단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새로운 세상」에 등장하는 다양한 소재의 근원과 해박한 서사의 관계들 속에서 특색 있는 작가와의 진솔하게 대화를 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책 속에서 영원한 믿음을 얻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책이 지니고 있는 고유의 영원성은 문자가 존재하는 한 지속될 것이고, 오스만처럼 한 권으로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며 나은 미래를 설계해 나갈 것이다. 반면 한 권의 책의 위험성과 영향력에 지배된 사람들에게는, 시비의 눈을 가린 채 불분명한 판단을 유도하는 독이 될지도 모른다. 작가의 의도처럼 모든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 되어 고스란히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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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1-26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셨군요. 저는 억울하게도 품절된 뒤에 어렵게 구했는데 아직도 못 읽고 있어요 ㅜ.ㅜ

mind0735 2007-01-27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 단단히 먹지 않으면 읽기 힘들 책이에요. ㅠ_ㅠ;; 어렵고도 어려워요.
 
어느 쓸쓸한 날의 선택, 자살 - 삶과 죽음에 대한 세계 지성인들의 명쾌한 진단!
프리드리히 니체 외 지음, 주정관 옮김 / 북스토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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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나와 무척 가까웠던 누군가의 자살을 목격하고서, 비로소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슬픈 공포를 처음으로 체험했었다. 그 후로,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나, 자살을 하게 되는 배경과 원인에는 무엇이 있을까, 라는 의문과 걱정이 증폭되었다. 우리는 왜 죽고 싶은 것인가? 자살은 명백한 살인 행위인가? 우리는 육체가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정신이 육체를 소유하고 있는 것인가? 만일 정신이 육체를 소유하고 있다면, 정신에 의해 일어나는 육체의 말살이 엄연한 살인일 것이고, 만일 육체가 정신을 소유하고 있다면, 육체에 의해 일어나는 자기 포기의 관점은 정신까지 포함되는 육체 자신에게 위배 될 것이다.

자살의 이유와 철학적인 견해가 궁금해서 「어느 쓸쓸한 날의 선택, 자살」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200P 의 얇은 책 한권을 읽는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만큼 생각할 시간이 많이 필요했던 책인 것 같다. 쇼펜하우어, 니체, 미우라 아야코, 생텍쥐페리, 알베르 카뮈, 장 그르니에, 뢰뵈트 등의 철학자, 소설가와 저명한 정신과 의사들의 에세이나 수필집에서 자살에 대한 부분만 발췌한 책이다. 니체는 그의 저서,「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정신과 의사들의 논문에서도 분명 발췌가 되었다.

1부의 철학적인 논의들에 대한 분량은 상당히 짧기 때문에, 약간은 실망을 했고,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3부 ‘자살의 방정식’ 의 ‘칼, A, 메닝거’ 자살의 해부 론이다. 좀 더 사실적인 측면에서 자살에 대한 통계와 상세한 분석을 볼 수 있었는데, 분량 자체로 책의 절반 가까이 된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간다. 사람에 따라 그 끝이 언제인가에 대한 차이는 있겠지만, 죽음 앞에 누구나 동등한 입장이라는 사실이 불변의 진리다. 누구나 인생의 마지막 종착점인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지만, 그 직립의 길을 역행하는 자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한 해 평균 백만 명에 육박한다고 하는 ‘자살자’들이 바로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는 신의 반역자이다. 스스로를 살인함으로써, 주어진 삶에 허락되지 않았던 마침표를 긋는 행위. 나는 무신론자이기에 기독교 신앙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어떠한 종교에서도 자살을 찬미하는 신은 없을 것이다.

신에 대한 배반,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이웃들, 관계 된 모든 이들을 배반하는 행위, 자살. 과연 사람은 무엇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인가? 정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본인의 육체와 결부해 많은 문제점들이 지적되기 마련이지만, 정신과 육체라는 분배의 의미가 과연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의문점이 생긴다. 육체는 어디에서 왔는가? 혹은 정신은 어디에서 왔는가? 자아라는 개념이 신에 존속되기 이전에, 육체의 소유권에 대한 철학적인 성찰은 분명한 사실은 좀 더 확고하게 만들어 줄 테지만, 아마도 정확한 결론의 정의는 내릴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죽음의 종류가 존재한다. 그 수많은 죽음의 종류 중, 유일하게 미화될 수 있는 죽음이 바로 자살이다. 죽음에의 동경, 유희가 혼합되어 죽음에 대한 완벽한 자유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자살을 꿈꾸었던 사람들에게서 느꼈던 보편적인 감정의 느낌은, 죽음 자체를 동경하는 것보다는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현재 상황에 있어 변화를 얻는 것이지 목숨을 끊는 게 아니다.’ 라는 양면의 견해도 찾아볼 수 있다.

한번도 자살을 꿈꾸어 봤다는 사람이 없다면 아마도 거짓말일 것이다. 나 역시, 적어도 몇 번의 힘든 시기를 겪는 도중, 죽고 싶다는 생각이 했었다. 그러나 죽음으로 나를 파괴하기 보다는, 현재의 상황에서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삶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바람이 극단적인 표현의 방식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실제로도 자살을 목격한 경우를 보았지만, 그들 대다수는 삶에 대한 불만이 가장 끔찍한 형태로 터져 나왔던 것일 뿐, 진심으로 원했던 것은 삶에 대한 변화였을 것이다.

흔히 자살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약한 사람들의 구차한 변명이나, 정신병적인 질환을 앓고 있다거나, 세상을 살아갈 힘이 없는 한심한 겁쟁이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절대로 적절한 견해가 아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 없듯이, 코앞에 나타난 죽음의 사신 앞에서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으며, 최대한의 용기를 쥐어짜서 실행에 옮겼을 것인가. ‘죽을 용기로, 살아라.’ 라는 말이 있듯이, 삶에 대한 회의감을 보다 타당하게 변화시키다 보면 자연히 삶에 대한 욕구가 솟을 것이다.

누군가를 향한 분노의 표출, 타인과 자신을 둘러싼 맹목적인 열등감의 잘못된 인식으로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는 노력으로 얼마든지 개선시킬 수 있다. 엄마 뱃속에서 태아로 있던 최초의 시간으로 돌아가려는 욕구의 자살로 볼 수 있는 물에 뛰어드는 행위처럼, 사랑이 우선적으로 내제되어 있어야 하겠다. 주변인의 도움을 먼저 찾고, 주변인 역시 잠재되어 있는 자살자들의 곁을 지켜준다면 끔찍한 자살의 숫자는 현저하게 줄어들게 될 것이다.

매일 밤, 뉴스를 장식하던 수많은 자살 보도들. 가령 카드 빚을 이유로 4인 가족이 동반자살을 한 경우나, 인기 배우나 가수들의 자살 사건,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의 총수의 자살 사건 등을 접할 때 마다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는 무관한 사람들의 자살이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는 않지만, 가까이서 자살을 접한 사람으로서, 자살자의 주변인의 심정 고충과 충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득 자살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유혹과 충동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면, 자기 파괴의 다른 돌파구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모른 척하고 홀로 떠나는 것만큼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인상깊은구절]
산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실패이다. 한 마리의 독충이 그들의 심장을 파먹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 사람에게는 죽음이 훨씬 더 성공적인 삶임을 알게 하라. - 1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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