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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와 비밀의 부채 1
리사 시 지음, 양선아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특정한 과거의 시대를 돌이켜 보면, 세계 어디를 가나 여성의 지위는 동일하게 처절하고, 황폐한 고통으로 얼룩져 있다. 특히 서구문명보다 아시아나 제 3세계의 여성들은 더욱 심각한 남녀차별의 희생양으로 전락했었다. 나는 같은 아시아 민족의 여성으로서, 이 소설의 화자 ‘나리’를 이해하기가 더욱 수월했다고 생각한다. 미국인이나 유럽인들이 이 소설을 읽을 때 과연 얼마만큼 그녀의 입장을 고려해 주었을지. 그들의 혐오와 지나친 동정의 시선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할머니들의 푸념 섞인 목소리로 종종 듣곤 했던 말은, ‘너희들은 정말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 우리 때는 정말 힘들었는데.’ 였다. 우리의 할머니들이 겪었던 힘든 시기보다, 좀 더 오래전의 일이 이 소설에 등장한다. 19세기의 중국 후난성의 야오족. 여성들의 지위가 너무도 비루했던 그 시대는 우리 민족의 여성들이 겪었을 핍박보다 조금은 더 서글펐던 것 같다. 제도화된 풍습에 몸을 맡기고, 자유까지 빼앗긴 채 평생의 설움을 참고, 참고, 또 참으며 모든 고통들을 겪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돌림병에 걸려 사람들이 죽어나는 와중에서 유산을 겪고, 허약해진 몸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또 다시 아들을 낳기 위해 임신을 하는 여성들.
이제 여든이 훌쩍 넘은 ‘나리’는 격정적인 세월들을 소진한 후에, 비로소 모든 것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과거의 나’를 회상하기 시작한다. 시골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전족을 하기 위해 2년간 피고름 나는 발의 고통을 견디어 내고, 좋은 가문에 시집을 가서, 마침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자투리까지 모두 알뜰하게 보내게 된다. 그녀의 삶에서 가장 큰 위로이자, 행복이었던 사람, ‘설화’는 라오통이라는 전통에 의해 맺어진 평생의 지기이다. 중국, 여자, 전족, 가오통, 누슈…. 처음에는 무던히도 생소하던 이 단어들이 이제는 너무 친근하게 다가온다.
한 여자의 일생을 돌아보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싶을 만큼 그 무게가 가벼운 듯 하면서도, 그녀가 읊어주고 있던 세월의 무게감은 실로 대단했다. 과거, 여성과 남성의 지위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날 때, 살아있음 자체에 감사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인내와 슬기를 배웠다. ‘엄마들에게 딸이란 존재는 시집보내기 전까지 먹어야 할 입이자 입혀야 할 힘겨운 몸뚱어리일 뿐이었다.’ 가장 믿고 의지해야 할 어머니조차 그녀를 냉대했지만, 어차피 당시, 세상의 모든 딸들은 출가외인이었다. 결혼 후 완전한 남이 되어 시댁에 귀속된 채,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면 차라리 미리부터 정의 싹을 잘라버리는 게 편했으리라.
본서를 통해 19세기 중국 사회의 풍습과 의식 등, 사회상을 면밀하게 엿볼 수 있었다면, 또 하나의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여자들의 깊은 우정’이다. 솔직히 이 책을 모두 읽고, ‘그녀들은 레즈비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을 지우기 힘들었다. 아무리 깊은 우정을 논한다고 하지만, 단순한 우정으로 간주하기에 ‘나리’가 ‘설화’에게 맹목적으로 의존하고, 상대의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은 결코 우정에서만 비롯된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만약 저자가 의도적인 도발로 두 여자의 사랑을 에로틱한 감정까지 덧입혀버렸다면, 이 소설은 한층 더 미묘한 심리물로 간주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1권에서 등장했던, 어린 시절 두 소녀의, 한 여름 밤 나체의 교모한 손장난. 나리는 홀딱 벗은 설화의 나체를 보며 저도 모르게 긴장하기 시작한다. (노골적인 성행위 장면은 없었지만, 저자는 후기에 이 장면을 섹스라고 정의 내렸다.) 그리고 2권에 등장했던 설화의 편지에 상처 받은 나리. 설화가 나리 이외에 다른 의자매들을 두었다고, 그녀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절박한 감정까지 느끼게 된다. 나리의 남편이 첩을 두었는데도 그녀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설화가 자신 이외의 다른 여자들과 친분을 맺었다고 지나치게 화를 내며 냉정하게 돌아섰다는 부분에서 쉽게 납득이 가질 않았다.
간혹 우리가 학창시절 느끼던 친구를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그런 감정과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엄연히 나리의 감정은 그 정도가 이런 경우와는 달리 매우 심각했고 절박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이별한 후 8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설화를 그리워하는 감정의 고백은, 심적인 부분과 마찬가지로 육체적인 갈망 역시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나리와 설화가 이성적인 감정으로 서로를 사랑했건, 동성적인 감정으로 서로를 의지했건, 이 소설의 주요 테마는 두 여자의 고달픈 인생과 변하지 않는 사랑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니까, 그녀들의 정확한 감정의 정의까지 내리고 싶은 생각은 일단 접어두기로 한다.
소설을 읽으며 찾게 되는 재미와 감동은 절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소녀와 비밀의 부채」는 소설을 읽게 되며 느낄 수 있는 기본적인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으면서, 동시에 19세기 중국 여인들의 애달픈 삶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으며, 진정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일생의 동반자까지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여자들의 은밀한 비밀문자를 부채에 써서, 닫혀 있는 생활에서 유일한 한 가닥의 자유를 누렸던 그녀들의 삶. 그녀들의 일생이 너무도 고단하고 힘겨워서 내가 저런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진정으로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는 영혼의 동반자를 두었다는 사실 만큼은 매우 부럽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