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천국을 보았다 나는 천국을 보았다 1
이븐 알렉산더 지음, 고미라 옮김 / 김영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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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하버드의대의 부속병원에서 신경외과교수로 근무했던 이븐 알렉산더박사가 7일 동안 뇌사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나는 천국을 보았다>에 담았습니다. “나는 죽었지만, 영혼은 살아있었다.”고 정리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말하려는 핵심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뇌사상태에 빠져있는 동안 경험한 것들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증언하고 있는 임사체험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입장입니다. 회의주의자 마이클 셔머는 <믿음의 탄생;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31601>에서 “영혼은 한 사람을 대표하는 독특한 정보패턴이다. 우리가 죽은 뒤에 개인 정보 패턴을 존속할 매개체가 없는 한, 영혼은 우리와 함께 죽는다.”는 일원론적 관점과 “의식을 가진 천상의 물질이 있어 생명체의 독특한 본질이 죽음 뒤에도 생존한다.”고 믿는 이원론적 관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원론적 관점은 천상의 물질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풀어야 하는 한계가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셔머는 “과학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에서 작동한다. 사실 초자연적․초과학적인 것은 없다. 자연적인 것, 정상적인 것 그리고 자연적 원인으로 아직 설명하지 못한 미스터리가 있을 뿐이다.(256쪽) (…) 시공간의 외부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신은 과학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그는 자연계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257쪽)”라는 입장을 내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알렉산더박사는 특별한 상황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장균에 의한 뇌수막염으로 빠르게 의식을 잃고 뇌사상태에 빠져 7일간 생시의 갈림길에서 투병을 하다가 극적으로 생환하였는데, 그 사이에 자신은 임사체험자들이 말하는 그러한 경험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소리조차 없이 어둡고 젤리같이 끈적한 물질로 채워진 공간에 갇혀있는 느낌에서 황금색의 빛줄기가 나타나고, 그 빛이 나오는 구멍을 통하여 빠져나온 그는 밝게 빛나는 대지 위를 날아가다가 다시 캄캄하고 무한하게 어두운 빈공간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은 창조주이며 만물을 있게 한 근원 - 저자는 이 존재를 옴(Om)이라고 부릅니다 -의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다시 돌아가야 할 것이라고 들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기존의 과학적 방법으로는 영혼과 사후세계, 환생, 신, 천상 등에 관한 질문에 답하기 어려워졌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제되기 때문이다. (…)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에 내가 이런 것들의 사실성을 의심했던 주된 이유는, 내가 제대로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의 단순한 과학적 세계관으로는 설명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204쪽)”고 하는데, 단지 자신이 임사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 정황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이유 하나로 임사체험과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자가 뇌사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기간 동안에 저자의 뇌가 어떠한 활동을 보여주었는지 설명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뇌의 활동이 전혀 기록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현재의 뇌과학으로 기록할 수 있는 한계 이내에서 설명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의료진이나 보호자와 전혀 의사교환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 있던 환자가 아내에게 이제는 포기하라는 설명을 들으면서 공포에 빠졌는데 다행히 아내가 의료진의 요구를 거부하는 바람에 오랜 투병 끝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현대의학으로도 아직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임사체험에 관한 내용은 <죽음, 그 후;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32081>에서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알렉산더박사의 경우는 관심을 쏟지는 않았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환자들로부터 임사체험에 관한 내용을 들어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임사체험과정에서 느낀 다중우주에 관한 내용들은 아마도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물리학 혹은 우주과학에 관한 글을 읽어 기억하고 있던 사항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영성주의자인 친구가 있다거나 열심히 나가지는 않았지만 목회자들과의 돈독한 관계도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경험했다고 하는 임사체험은 아마도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기억에 저장되어 있던 것들이 투병기간 동안에 의식의 흐름을 타고 인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이유로 힘든 투병과정에서 저자가 경험한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주장에 공감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신비한 임사체험이나 영혼의 존재를 믿는 독자들에게는 좋은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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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밀리타스 - 위대한 리더십의 완성
존 딕슨 지음, 김명희 옮김 / 포이에마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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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모 단체장 선거캠페인을 하면서 “서번트 리더십”을 내세웠던 적이 있습니다. 서번트 리더십은 경영학자 그린리프(R. Greenleaf)가 1970년대 초에 처음 소개한 리더십 개념입니다. 그는 헤세의 <동방순례>에서 순례자들을 돌보는 서번트 레오(Leo)의 역할을 인용하여 개념을 설명하였는데, 위계적 구조의 조직에서 리더가 다른 구성원들에 대해 가부장적인 위치에서 모든 권한과 책임을 혼자 독점하는 전통적 리더십과는 달리 서번트 리더십은 수평적 동료관계에서 나타나는데, 서번트 리더는 구성원들이 자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권한과 책임을 위임하고 지원하는 역할에 그치는 차이가 있습니다. 권위적 리더십에 대한 회원들의 반발이 심할 때였는데도 회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해서 안타까운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역사학자 존 딕슨이 겸손을 주제로 한 리더십의 개념을 설명하는 <후밀리타스>를 읽으면서 그때 실패한 서번트 리더십이라는 화두가 생각나서 적어 보았습니다.

 

<위대한 기업의 선택;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1512>으로 만났던 짐 콜린스의 전작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에서 위대한 기업으로 성장한 11개 기업의 핵심성장요소로 ‘강철 같은 결단력과 겸손한 자세라는 두 가지 특성을 지닌 리더십’를 꼽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딕슨은 겸손“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지위를 포기하거나, 자신의 자원을 사용하거나,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고귀한 선택”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23쪽) 이 정의에는 “첫째, 겸손은 당신의 존엄성을 전제한다. 둘째, 겸손은 자발적인 마음이다. 셋째, 겸손은 사회적이다.”라는 세 가지 핵심 개념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자는 겸손이 리더십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설득력과 본보기는 성공하는 리더십의 핵심이다. 겸손은 설득력을 높여준다. 어떤 면에서 겸손은 리더들이 갖춘 중요한 성격적인 특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겸손은 리더십에 중요하다.(49쪽)”라는 삼단논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역사학자답게 고대 세계가 겸손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소개하고, 명예에 대한 사랑이라고 직역되는 필로티미아(Philotimia)라는 그리스어를 제시하고, 그리스인들이 명예를 아주 좋아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즉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에서는 겸손이 미덕이 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나라렛 예수가 겸손에 대한 서구의 개념에 미친 영향을 개관하고 있습니다. 물론 역사학자로서 예수에 대하여 중립적 위치를 견지하고 있다고 전제하고는 있지만, 글내용을 보면 호의적 입장인 것으로 읽힙니다. 예를 들면, 또한 예수의 말을 기록한 글 어디에도 겸손에 대한 명쾌한 가르침이 강력하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고는, “예수는 진정한 위대함은 자기희생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115쪽)”라고 적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공감하고 있는 리처드 도킨스나 마이클 셔머 등이 주장하는 바에 대하여 저자가 의구심을 가지는 이유가 단지 그들이 자신의 이론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겸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에 대하여 동의하기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나는 우주의 역학에 대해 말하다가, 창조세계의 신비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거나, 신의 존재를 믿으라는 부드러운 주장으로 향하려는 것이 아니다.(67쪽)”라고 전제하였을 뿐 아니라 창조론에 대한 적극적 동조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독자로서 느끼는 감은 “그래서요?”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최근 발표되고 있는 다양한 연구결과와 역사적 인물들의 행적을 분석하여 얻은 결과를 토대로  “진정한 위대함은 겸손에서 나온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여섯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다라 우리의 모습이 형성된다. 둘째, 겸손한 사람들의 삶을 숙고해보라. 셋째, 겸손을 함양하기 위해 ‘사고 실험’을 하라. 넷째, 겸손하게 핻동하라. 다섯째, 비판을 쳥하라. 그리고 여섯째, 겸손해지는 것에 대해 잊어버려라.”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오히려 자신이 주목받는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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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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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도전했던 오르한 파묵 전작읽기가 반환점을 돌면서 시나브로 중단되었습니다. 파묵의 작품세계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졌던 것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어떻든 최근에 나온 이난아교수의 <오르한 파묵 변방에서 중심으로; http://blog.joinsmsn.com/yang412/13126504>를 읽게 된 것이 중단한 파묵 전작읽기를 다시 이어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살아있는 작가의 ‘전작읽기’가 적절한 용어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파묵이 노벨상 수상자라서가 아니라 터키라고 하는 특수한 위치에서 지켜본 동서양문명의 충돌현상을 작품에 담고 있다는 점이 주목거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친 책을 하나쯤은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 경우는 의과대학 신입생 때 읽었던 독일의 의사이며 작가인 한스 카로사의 <아름다운 유혹의 시절;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32807>을 꼽습니다. 유럽을 막연하게 동경하던 것도 있었지만, 특히 작가의 의과대학 신입생 시절의 행적을 적고 있었기 때문에 끌렸고 공감하는 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파묵의 다섯 번째 작품 <새로운 인생>에 등장하는 오스만과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습니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새로운 인생>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느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장에서부터 느껴진 책의 힘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 마치 내가 읽고 있던 책장들로부터 내 얼굴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그러한 강력한 힘 때문이었다.(9쪽)” 터키사람들이 평소에 과장이 심한 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과연 이런 책이 있을까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중반부에 등장하는 나린박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 작가 역시 조심스러운 입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의 세계 전체를 변화시킨다는 책, 그런 게 오늘날 자네 같은 청년들에게는 가능한 것인가? (…) 그렇게 강력한 마력이 오늘날에도 발휘될 수 있는건가?(177쪽)”

 

작가는 <새로운 인생>에 여러 개의 복선을 깔아두고 있기 때문에 헷갈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화자(話者)인 오스만은 젊은 여성 자난이 잠시 내려놓은 <새로운 인생>이라는 제목의 책을 중고서점에서 발견해서 구입하고 읽게 되는데. 그 결과가 오스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게 된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인생>은 파묵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고, 소설의 주인공이 읽은 책의 제목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주인공이 즐겨 먹는 캬레멜의 상표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인생>에는 두 가지의 여행이 있습니다. 하나는 오스만이 읽은 책에 담겨 있는 여행과 주인공이 새로운 삶을 찾아 따라가는 여행입니다. 책에 담겨진 여행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는 단서가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그 책을 읽은 독자들 대부분이 빠져들어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 보아 대단한 내용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독자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당국에서 배포를 금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하지 않은 경로를 통하여 흘러나온 몇 권의 책 속의 책들이 독자들의 손길을 따라서 건네지면서 그 영향을 받은 독자들이 늘게 됩니다. 이 책의 내용과 파급효과의 심각성을 우려한 나린박사는 대리점모임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대책강구에 나서게 되는데, 책의 원작자를 살해하고, 그 독자도 경우에 따라서 제거하기를 불사한다는 미스터리한 면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파묵은 오스만이 읽은 <새로운 인생>의 내용을 시시콜콜하게 소개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얼핏 전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매혹적인 서구적 삶을 담고 있어 독자로 하여금 이를 추종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어 터키전통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나린박사의 사명감을 자극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책에 빠진 오스만이 이 책에 대한 힌트를 던진 자난을 대학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데, 두 번째 만남에서 자난은 오스만에게 키스를 해서 순진한 젊은 영혼을 혼란에 빠트리는 상황 역시 생뚱맞다 싶습니다. 자난은 이 책을 먼저 읽었다는 메흐메트를 오스만에게 소개하는데, 오스만이 자난에게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려는 순간 메흐메트가 총격을 받는 상황을 목격하게 됩니다. 당하는 오스만이나 읽는 독자나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종적을 감춘 자난을 뒤쫓은 오스만의 추적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보면 파묵의 작품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오브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주인공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인물이 사라지는 상황은 앞선 작품 <검은책>과 뒤에 나오는 <순수박물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검은책;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06277>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아내 뤼야와 사촌형 제랄을 뒤쫓는 변호사 갈립이 진실을 찾아가는 미스터리 물입니다. 한편 <순수박물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2677>에서는 “한 여자와 만나 44일 동안 사랑하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으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본 한 남자의 30년에 걸친 처절하고 지독한 사랑과 집착”을 그려내고 있다고 요약하고 있으니, 어쩌면 <새로운 인생>에 나타난 실종과 다시 만남이라는 오브제가 한 단계 발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새로운 인생>에서는 실종되었던 인물이 모두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자난은 살아남을 뿐 아니라, 오스만이 메흐메트를 살해하는 것처럼 주인공이 실종된 인물의 죽음과 직접 관련이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행도 중요한 오브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하여 파묵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소설에 등장하는 여행은 ‘모색으로서의 여행’입니다. 모색은 나의 라이프스타일이지요. 나는 현실에서는 ‘여행’을 하고 책 속에서는 상상의 글을 통해 ‘모색’을 합니다.(이난아 지음, 오르한 파묵 변방에서 중심으로, 95쪽)” <새로운 여행>에서의 여행은 이 작품에서 많은 비밀을 담고 있고, 작가가 배치한 많은 장치들을 풀어내기 위한 구체적 방법이기도 합니다. 결국은 새로운 인생을 찾는 여행을 마친 메흐메트는 <새로운 인생>에 나오는 새로운 삶의 정체를 깨닫고 한적한 곳에 숨어 사는 선택을 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박물관 역시 익숙한 부분입니다. 비밀결사를 운용하는 나린박사가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하여 전통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거나, 아들 메흐메트에 관한 물건들을 보관하고 있는 것은 역시 퍼묵의 소설 <순수박물관>을 거쳐 이스탄블에 같은 이름의 박물관을 개관하여 작품세계에 등장했던 오브제를 구체화하기에 이르고 있습니다. <새로운 인생>에 등장하는 박물관이라는 개념은 <새로운 인생> 안에 등장하는 책 <새로운 인생>을 앞세운 비밀세력의 책과 글을 앞세운 거대한 공격에 대비한 전략으로 준비한 대응방안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장 위대한 보물’인 ‘기억’을 잃고 속수무책의 얼간이가 되지 않게 할 것이고, (…) ‘절멸의 위기에 놓인 우리 자신의 순수한 시간 그 역사를 통치할 주권’을 새로이 쟁취할 수 있게 할 것(178쪽)”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박물관이란 우리의 손때 묻은 일상의 물건들을 정지된 시간에 붙들어 매는 타임캡슐이라고 하겠습니다. 후세의 사람들은 타임캡슐에 담긴 앞선 시대의 물건들을 보면서 그들의 생각과 삶을 기억하고 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소설과 박물관의 목적은, 우리의 기억을 진심으로 설명하여 우리의 행복을 다른 사람들의 행복으로 만드는 것(오르한 파묵 지음, 순수박물관 권2, 113쪽)”이라는 파묵의 설명은 다양한 형태와 목적의 박물관이 가능하다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나의 모든 소설은 이전에 발표한 소설 속에서 태어난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에 나오는 젊은이들에서 <고요한 집>이 탄생했고, <고요한 집>에 나오는 파룩에게서 <하얀성>이 나왔다.”고 파묵이 말한 것처럼 <새로운 인생>에서도 이런 흔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책을 읽고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확신한 오스만이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집을 나서기에 앞서 <밀리예트> 신문을 뒤적여 젤랄 살리크의 칼럼을 읽는다거나 오스만이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 역시 젤랄 살리크가 자살로 죽은 다음에도 누군가가 그의 이름으로 칼럼을 쓰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사실은 젤랄 살리크라는 이름이 거론되는 <검은책>에서 젤랄 살리크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칼럼과 관련하여 살해하겠다는 협박을 피하기 위하여 뤼야와 함께 잠행하는 동안 누군가의 저격을 받고 살해되는 것으로 나옵니다.)

 

흥미롭게도 책속의 책 <새로운 인생>을 읽은 독자들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하여 여행을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천사, 결국 너를 찾았어. 결국. 빗속에서. 그렇게 긴 여행 끝에. (…) 내가 항상 쫓아 왔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내 앞에서 나타났다간 사라지는. 사라졌기 때문에 찾게 만드는 시선은 너의 시선이었어. 너의 시선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길을 나섰어.(114-5쪽)”

 

그 천사는 바로 오스만이 여행 중에 찾아 같이 여행을 하고 있던 자난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난과 같이 여행하고 있는 오스만이나 자난은 무슨 오해가 있다고 생각하는 정도 였던 것 같습니다. 책을 읽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찾는 것은 바로 천사였습니다. 그 이유는? 책을 읽은 사람들은 인간의 유한함을 깨닫게 되지만 천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빛이 닿는 사물이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게 된다고 믿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현 세계와 영원한 세계의 경계에 있는 출구가 의미하는 것은 바로 평온과 죽음 그리고 시간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을 읽고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급행버스를 이용하는 것도 사고가 많은 급행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다가 죽음을 만나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죽음에 대한 작가의 복선을 해석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다만 깨달음을 얻은 자, 메흐메트는 나린박사의 아들 나히트이기도 하고, 비밀조직의 추적을 따돌리고 숨어살 때는 주인공 오스만의 이름을 빌고 있어 다중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구분이 무너지는 경계에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나린박사는 자신의 아들이 오스만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이들의 존재가 수상쩍어 보이기도 합니다.

 

책을 읽고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전하는 진실은 이렇습니다. “책이 많은 사람을 탈선시키고,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망쳐 놓고, 모든 악의 원천이 된다고, 그리고 나린박사가 책에 대항해 벌이는 전쟁은,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외국 문명과 서구에서 유입된 새로운 문물에 대항하여 일으킨 전쟁이라는 것, 글에 대항한 투쟁이라는 것 등등..” 그렇다면 같은 깨달음을 얻은 메흐메트가 그를 사랑하는 자난을 떠나 비란바 마을에 숨어버린 이유가 단지 자신을 뒤쫓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서였을까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자신의 아버지 나린박사가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을까요? 그렇다면 자난을 차지하기 위하여 오스만이 자신을 죽이러 온다는 것을 몰랐을까요? 자신의 이름으로 숨어살고 있는 메흐메트를 저격하는 순간 오스만은 “넌 나 같은 사람을 찾아서, 책을 주고 읽게 만들어. 그리고 인생을 망쳐버리게 만들지.(306쪽)”라고 말하려 합니다. 책속의 책이 주는 경지에 오르기 전에 나린박사를 만났기 때문에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무서운 진실을 깨닫게 된 것일까요?

 

파묵은 이 작품에 독특한 장치를 숨기고 있습니다. <새로운 인생>을 읽는 독자들이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질문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책의 모든 구석구석을 충분히 주의하면서 지능적으로 보았는가? (…) 내가 극장에서 메흐메트를 총으로 쏘았을 때, 그가 자난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아챘는지 알고 있는가?(373쪽)” 마치 학과진도를 확인하기 위한 쪽지시험처럼 말입니다. 쪽지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으시려면 집중해서 책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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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와 열정
제임스 마커스 바크 지음, 김선영 옮김 / 민음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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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신입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해보았을 것 같습니다만, 동아리에서 책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끔 가졌던 것 같습니다. 봉사동아리라서 특별하게 논의할 사항이 없으면 모임을 끌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같이 읽었던 책 가운데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이 있습니다. 해변가에서 먹이나 찾는 보통의 갈매기와는 달리 혼자서 비행술을 연마하는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이라는 이름의 괴짜(갈매기 세계에서 그렇다는 이야기죠) 갈매기가 결국은 승화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는 짧으면서도 강렬한 경구는 특히 봉사활동을 중심으로 모인 젊은 의학도들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한참 뒤에 하계진료봉사활동을 마치고서 영화관에 같이 가서 본 동명의 영화는 난생 처음으로 영화관에서 잠에 빠져드는 바람에 입장료를 손해본 영화로 기록된 바 있습니다.

 

괴짜도 내림인가 봅니다. 바로 그 리차드 바크의 아들 제임스 마커스 바크가 제안하는 독특한 자기관리비법을 담은 <공부와 열정>을 읽게 되었습니다. 열여섯살에 고등학교를 자퇴하고는 정규교육이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는 젊은이가 스무살에는 애플에서 최연소 팀장으로 발탁된 이유를 설명한 책입니다. 맨사클럽 회원자격을 얻을 정도의 지적능력을 갖춘 저자는 막상 학교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체계에 자신을 맞출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학교교육에 대한 그의 생각은 ‘내게는 학교가 필요치 않다’는 제목의 첫 번째 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특수학교에 초대되어 학생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요약한 내용입니다. “배움은 중요하다. 그러나 학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내게는 학교가 필요 없었다. 너희들에게도 필요 없을 것이다. 학교가 배움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또 학교가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약 학교생활이 좋다면 학교에 남아라. (…) 나는 공부한다. 그렇지만 학교에 다니지는 않는다. 학교는 잠깐 다니고 졸업하면 그만이지만 배움은 그렇지 않다. 인생을 꽃피우고 싶다면 확 끌리는 분야를 찾아서 미친 듯이 파고들어라.(12쪽)” 저자를 초청한 교사는 바크가 아이들에게 위험한 메시지를 주었다고 생각하고 후회했던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꼭 같지 않은 것이 세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한 어떤 사람의 삶이 모든 사람들이 따라할만하다고 권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자와 같은 특별한 사람이 성공에 이르는 길도 있지만, 보통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성공에 이르는 길은 정규 교육과정을 통해서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 오랫동안 교육학분야의 연구를 통하여 정착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학교는 마치지 못했지만, 저자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성공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재능도 있었겠지만, “1) 공부에 시간을 투자하고 열정을 바쳤다. 2) 내 기질과 리듬에 맞는 공부 방법을 개발했다. 3) 활자로 된 증명서보다 실력과 괜찮은 발상을 높이 사는 분야에서 일했다. 4) 내 아이디어를 설득력 있게 표현하도록 자신감을 키워 준 스승과 동료들을 만났다.(28쪽)”는 점이 성공요인이었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자신을 위하여 개발한 열한 가지의 독학비결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 이가 저자와 같을 수 없기 때문이 그의 독학비결을 그대로 따라한다고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의 책읽는 방법은 나름대로 참고할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책을 빨리 읽는 게 느리게 읽는 것보다 나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아마도 그럴 것이라는 전제 아래 자신이 도전한 속독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사실은 천천히 읽는 완독의 매력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탐색하며 읽기와 사색하며 읽는 두 가지 독서방법을 활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색하며 읽을 때는 분당 300단어까지의 다양한 속도로 읽지만 탐색하면서 읽을 때는 사진이나 제목을 찾는 속도로 1초에 2쪽 정도까지도 넘긴다는 것입니다.(178쪽)

 

저자는 자신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 17세기 카리브해를 무대로 하여 스페인선박들을 약탈하던 버커니어를 닮았다고 했습니다. 이 지역에 뿌리를 내렸던 프랑스, 영국 등에서 온 사냥꾼과 농부들이 고기를 저장하는 방식을 뜻하는 ‘부카닝(boucanning)’에서 유래한 버커니어는 형식에 매이지 않는 점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원전이 기억나지 않는 “우리의 운명은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혹시 국내에는 아직 소개되지 않은 <파리떼>에 나오는 구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자의 삶의 방식이나 버커니어의 특징을 뜯어보면 저도 버커니어학자 그룹에 속하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게 합니다. 하지만 정규교과과정을 제대로 마친 탓에 저자와 같은 성공을 일구지 못했나 싶습니다만, 그래도 현재의 방식이 제게 맞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틀에 자신을 맞추는 게 힘든 경우에는 새로운 대안으로 검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정규교과과정이나 이를 포기하더라도 열성을 다하여 공부에 매진하는 것은 기본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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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스테이아 열린책들 세계문학 197
아이스킬로스 지음, 두행숙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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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신화의 주인공들은 신들의 손에 놀아나는 것 아닌가 생각해보곤 했습니다. 신탁을 통해서 신의 뜻을 미리 알고 피하려는 것이 오히려 신의 뜻대로 흘러가는 결말을 맞는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그래서 혹시 신의 뜻을 거스른 사람이 있었는지 궁금해 하던 참에 <어느 독서광의 유쾌한 책읽기; http://blog.joinsmsn.com/yang412/13128005>에서 작은 힌트를 발견했습니다. ‘자유로운 인간은 정말 행복한가?’라는 제목으로 된 장 폴 사르트르의 <파리떼>에 대한 리뷰입니다. 아르고스의 오레스테스 가문의 비극을 다룬 신화를 재해석한 것입니다.

 

트로이전쟁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전쟁이 끝나고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남편이 전쟁터로 떠난 다음 아이기토스와 정분이 났던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을 정부와 함께 남편을 살해합니다.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와 딸 엘렉트라는 어머니와 정부를 살해하여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하지만, 신의 계시를 밝혀달라는 오레스테스의 요청에 제우스신의 계시는 “젊은이, 신들을 심판해서는 안 돼, 신들은 그들만의 비밀과 슬픔을 가지고 있다네.”였습니다. 하지만 오레스테스는 번개와 함께 내려진 제우스신의 계시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번개가 큰 돌을 쳤어.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이야? 이 번개는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야. 나는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아. 사람의 명령도, 신의 명령도 듣지 않아.(김의기 지음, 어느 독서광의 유쾌한 책읽기 301쪽)”라고 신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결론을 내리고서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토스를 살해하여 아버지의 복수를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오레스테스가 제우스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된 배경을  사르트르는 이렇게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자유죠. 당신이 나를 창조한 순간, 나는 이미 소유가 아니게 되는거죠. 당신은 신이고 나는 자유로운 존재죠. 우리는 각자 혼자예요.” 오레스테스의 이런 생각에 대하여 제우스 역시 “일단 자유가 인간의 마음에 횃불을 당기면, 신은 그 앞에서 무력해지는거야. 이제 모든 문제는 인간과 신의 문제가 아닌, 인간 대 인간의 문제가 되고 말아”라면서 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다고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르트르의 이런 해석에 관심이 끌려서 읽게 된 것이 아이스킬로스의 <오르테이아>입니다. 호메로스가 전하는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구성한 오르테우스 가문에 얽힌 가족구성원들 간의 상쟁을 다룬 비극 3부작입니다. 아가멤논이 트로이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귀국하는 시점에서부터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토스에 의하여 살해당하는 시점까지를 다루는 제1부 아가멤논에서는 이들의 살해동기가 드러나게 됩니다. 아가멤논이 트로이로 떠나기 전에 역풍을 만나고 역질로 군대가 어려운 상황을 맞았을 때, 제우스신이 거느리는 독수리들이 새끼 밴 토끼를 잡아먹은데 대하여 아르테미스 여신이 분노한 때문이며, 아가멤논의 딸을 제물로 바쳐야 분노가 풀릴 것이라는 신탁을 받게 됩니다. 결국 아가멤논은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고서야 출항하게 된 것이고,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남편의 이런 처사에 분노하여 복수를 꿈꾸었던 것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살아남은 딸 엘렉트라를 방치하고 또 아들 오레스테스가 아가멤논의 복수를 할까 두려워 국외로 추방했다고 하는 이야기의 진행을 보면 그녀의 주장은 그저 부정한 자신을 감추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히려 아가멤논의 아버지 오르테우스와 그 동생 플레이스테네스 사이에 얽힌 피의 저주를 이어받은 플레이스테네스의 아들 아이기토스가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유혹하여 아가멤논을 살해함으로써 오르테우스에 대한 아버지의 복수를 대행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2부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는 아르고스로 돌아온 오르테이아가 엘렉트라를 만나고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토스를 살해하여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에서는 사르트르가 재해석한 것처럼 오르테이아의 복수극을 제우스가 거부한 것이 아니라 아폴론의 적극적인 신탁이 있었고, 제우스 역시 우회적으로 찬성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르테이아는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저주에 따라 복수의 여신들의 추적을 받게 되는 3부 자비로운 여신들에서는 오르테이아의 죄를 추궁하는 저주의 여신들과 무죄를 주장하는 오르테이아가 아테나여신의 판결을 구하는 장면입니다. 오르테이아에게 복수를 신탁했던 아폴론도 등장하여 변호하고 배심원단의 동수 판결에 대하여 아테나여신이 오르테이아를 지지하는 것으로 상황은 종료되는데, 이에 반발하여 아테네를 저주하는 복수의 여신들을 달래서 해피엔딩으로 결말을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니 그리스 신화는 시대가 흐르면서 얼마든지 해석을 달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앞으로 관심을 두고 공부를 더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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