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물학과 윤리 - 출간 30주년 기념판
피터 싱어 지음, 김성한 옮김 / 연암서가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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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윤리학 분야의 거장이자 동물해방론자인 프린스턴대학의 피터 싱어교수가 쓴 <사회생물학과 윤리; 원제 The Expanding Circle: Ethics, Evolution and Moral Progress>는 1981년에 출간되어 우리나라에는 1999년 김성한님의 번역으로 처음 소개되었고, 2011년에 30주년 기념판으로 나온 것을 역시 김성한님이 번역하여 2012년 소개되었습니다.

 

어디에서 이 책을 발견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만, 아마도 매주 연재하는 북리뷰에서 다루어볼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이 책을 제대로 읽을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는 것을 읽어가면서 절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윤리의 본질을 천착해온 저자는 종교가 더 이상 답을 내놓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보고 과학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정적 계기는 우리에게 <통섭>으로 친숙한 에드워드 윌슨교수가 1975년에 내놓은 〈사회생물학:새로운 합성 Sociobiology:The New Synthesis〉였다고 합니다. 윌슨은 이 책의 마지막장에서 ‘윤리를 철학자들의 손에서 과학자의 손으로 넘겨주어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고 밝히고 있어 철학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것인데, 싱어교수는 윌슨교수의 윤리에 대한 사회생물학적 접근방식이 부정할 수 없는 미숙한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에 대한 사회생물학적 접근 방식은 윤리에 대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알려주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점이 제가 아직 이 책을 제대로 읽을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점입니다. 즉 윌슨교수의 <사회생물학>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싱어교수의 비판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책은 1995년 민음사에서 핵심을 요약하여 <사회생물학 1,2>로 소개하였는데 지금은 절판이 되어 구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싱어교수는 <사회생물학과 윤리>에서 윤리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서 이타성의 기원을 추적하는데서 사회생물학적 접근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윤리의 생물학적 토대를 인간의 윤리에서의 혈연에 기반한 이타성에서 호혜적 관계를 기대한 이타성, 나아가 집단의 이타성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타성을 논하려면 인간의 이기성을 논할 필요가 있는데, 호혜적 이타성에 대한 해석은 1976년 나온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83563>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는 종족유지본능에 따른 이타성으로 해석이 가능한 점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타성에 대한 다른 시각을 매트 리들리교수의 <이타적 유전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3147182>에서는 호혜주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헌신성이 이타적 행위를 결정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리들리교수의 주장이 도킨스교수의 주장을 번복한다기 보다는 보완하는 설명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싱어교수는 자기 보존에 관한 다윈의 진화이론과 윤리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살피고 있습니다. 사실 진화는 생존을 위한 유전자의 본능적 투쟁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윤리의 핵심요소라고 할 이타성과 연관을 지을 수 있는 길은 인간의 이성에서 찾고 있습니다. 즉, 혈연과 공동체의 성원들을 보호하려는 유전적 토대를 가진 이타성에서 윤리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지만, 이러한 이타성이 곧 윤리는 아니며, 이성 능력이 역할을 함으로써 오늘날의 윤리로의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정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문화가 유전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인간의 지식이 확장됨에 따라 유전자의 구속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란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책의 특징은 옮긴이가 잘 정리하고 있는 풍부한 각주와 각 장의 논지를 요약하여 먼저 읽을 수 있더록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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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
크리스 임피 지음, 박병철 옮김 / 시공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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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일주일 뒤에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스티븐 헤렉감독이 2002년작 영화 <어느 날 그녀에게 생긴 일; http://blog.joinsmsn.com/yang412/4076152>에서 다룬 주제입니다. 이 영화의 리뷰를 정리하면서 리더스 다이제스트 2002년 10월호에 다룬 할리우드의 유명한 남자배우 브루스 윌리스가 췌장암으로 진단받고 6주 만에 죽은 동생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한 내용을 인용하여, 사랑하는 가족이 미처 작별할 틈도 없이 이별을 한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낸 적이 있습니다.

 

죽음이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안다는 것은 궁금하기도 하고 피하고 싶기도 한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도록 미리 대비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미리 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크리스 임피교수의 <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는 바로 우리의 미래를 과학적으로 예측한 책입니다. 일반화가 가능한 인간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지금은 지구를 지배하고 있지만 인류가 멸종할 수도 있다는 가정도 검토하고,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더 나아가 태양계와 우주가 소멸하는, 진정 세상이 끝나는 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지금까지 알려진 과학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흔히는 어떤 일이 시작하는 것을 먼저 설명하고 끝나는 일을 설명하는 것이 순서 같습니다만, 저자는 거꾸로 세상이 끝나는 상황을 먼저 설명한 다음에 세상의 시작을 설명하는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43832>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저자는 덴마크의 유명한 만화가 스톰 피가 “무언가를 예측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에 속한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 “과학의 주된 관심사가 끝이 아니라 ‘진행되는 과정’이지만, 모든 만물의 ‘끝’을 조명하는 것”이 책을 쓴 목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이야기를 듣다가도 끝이 용두사미가 되어버리면 흥미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아무리 시시한 이야깃거리도 흥미로운 결말로 이끌어 듣는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재주를 가지고 있어야 진짜 이야기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2부를 통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현대의학을 필두로 하여 다양한 영역의 발전으로 기대여명을 3배 이상으로 늘려왔지만 결국은 늙어감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점을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탄생과 죽음은 지구의 생태계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사건에 불과하다고 단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연이 지독하게 인색한 재활용의 선수라는 점을 다음처럼 일깨우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원자들은 새것이 아니라 유구한 세월동안 대물림하여 재활용되어왔다.(74쪽)” 결국 생명체의 실체는 구성원자들의 재활용에 불과하다고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한 생명의 삶을 통해서 얻어진 그 무엇은 유전자라는 기록을 통하여 다음 세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개념은 우리가 지금까지 이해해온 것처럼 환생이라고 하는 구체적 상황을 이름이 아니라, 유전자를 통하여 미시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3장부터 6장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지구 생태계의 종말을 논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류의 종말에 대해서는 진화과정을 포함하여 태양계 생태계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지난 40억년 동안 지구에는 거의 5억종의 생명체가 존재했지만, 그 가운데 2%만이 현재 생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생명체는 물리적인 변화나 환경의 변화로 인해 멸종할 수도 있지만, 개체 수나 생식 능력, 유전자 특성, 지리적 분포, 다른 종과의 관계 등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합니다. 비교적 화석이 풍부한 지난 5억년 동안을 살펴보면 생물종의 수와 다양성을 추정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고 하는데, 4억 3500만년전, 3억 7500만년전, 2억 5000만년전, 2억 500만년전 그리고 6500만년전 등 모두 다섯 차례의 대량멸종이 자연재해와 관련하여 일어났다고 합니다. 특히 육지와 바다에 살던 생명체의 95%가 사라진 고생대 말기인 2억 5000만년전의 대멸종은 화산폭발에 의한 기후변화가 유력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고, 6500만년전의 대멸종은 운석때문이라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라고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대멸종이 일어났던 2억 5000만년전에 있던 페름기의 대폭발을 계기로 지구상의 생명체가 엄청나게 다양해지고, 멸종하는 속도보다 새로운 종이 탄생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지금 인류에 의한 여섯 번째 대량멸종이 진행되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특히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핵전쟁 등이 대량멸종의 원인이 될 가능성을 논하면서 과거 지구생명체에게 재난을 안겼던 자연재해의 가능성도 짚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운석이나 소행성의 충돌, 그리고 외계로부터 유입되는 미생물에 의한 신종전염병의 가능성도 포함됩니다. 미미 레더감독의 1998년작 영화 <딮임팩트>가 다루고 있는 주제입니다. 이 영화는 미확인 혜성과 충돌을 앞둔 지구적 대응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국적 우주선을 발사해서 혜성을 파괴하거나 그 궤도를 바꾸려고 시도하는 한편, 미국은 현대판 노아의 방주라고 할 지하요새를 건설하고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의 샘플과 20만 명의 각계 전문가들, 컴퓨터가 추첨한 50세 미만의 미국 시민 80만 명을 2년간 수용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지구의 에너지원이 되고 있는 태양의 종말도 검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말년의 태양의 활동을 이렇게 예측합니다. “말년의 태양은 정신분열증 환자처럼 행동한다. 외피는 차가워지면서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는 반면, 중심부는 안으로 수축하면서 온도가 1억℃까지 상승한다. (…) 새로운 핵반응은 잠시 동안 엄청난 불꽃을 낳고, 평소의 1000억 배에 달하는 가공할 에너지를 방출한다.(246쪽)” 영드(영국드라마) 마니아들은 빨간 영국식 공중전화부스를 기억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시간여행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닥터 후>에서 나온 태양이 붉게 타오르면서 장엄하게 죽어가는 장면이 이럴까 싶습니다.

 

태양이 죽어간다면 당연히 지구적으로 살아남을 궁리를 해야겠지요. 그래서 천문학을 하시는 분들이 태양계 밖에서 생물체가 살 수 있는 행성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 역시 ‘지구에서 도망가기’라는 제목으로 인류가 살아남을 방법을 어떻게 모색하고 있는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주에서 신천지를 찾기 위하여 떠나는 미래인류의 모습은 쉽게 연상되지 않습니다. 신대륙을 찾아 돛을 올리고 항구를 떠나던 콜럼버스의 모습이 그랬을까요? 드라마 스타트랙에서 나왔던 장면을 기억하실 것 같습니다만, 저자는 무거운 짐이나 사람을 우주선으로 실어 나르지 않고 공간 이동시키는 방법은 지난 50년 동안 SF소설의 단골메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생각하니 초등학생 때 읽었던 공상과학 동화에서도 ‘조운트’라고 하는 공간이동방법을 미래인류가 사용하는 것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태양이 늙어가서 백색왜성이 되는 시나리오 말고도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가 가장 가까운 안드로메다은하와 충돌하는 상황도 예견된다고 합니다. 안드로메다은하는 우리 은하계로부터 220만 광년 떨어져 있는데 초속 130km의 속도로 다가오고 있어 앞으로 30억년이 지나면 우리 은하계와 합쳐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5억년에 걸쳐 유령처럼 상대 은하를 통과하게 될 두 은하는 복잡한 상호작용을 교환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가 사는 태양계가 은하의 꼬리를 타고 우주공간으로 탈출하게 될 확률이 12%, 안드로메다은하로 편입할 가능성이 3%라고 합니다. 하지만 새로 생긴 은하의 중심부로 내던져 은하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사라질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 은하계가 안드로메다은하와 합쳐 밀코메다라는 새로운 이름의 은하로 탄생한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핵융합의 한계온도를 간신히 넘긴 상태에서 희미하게 목숨을 보존하는 소수의 백색왜성만이 남게 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세익스피어의 희극 <뜻대로 하세요>에 나오는 대사처럼 ‘이도 없고, 눈도 없고, 맛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존재로 남았다가 결국은 우주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주의 마지막 순간은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궁금하게 됩니다. 어느 코미디언은 궁금하면 500원만 내면 알려준다고 합니다만, 우주의 마지막 순간도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주가 빅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가설은 대체적으로 굳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커지고, 차가워지고 희박해지는 우주의 빅뱅과정이 특정 시점에서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차가운 종말이 첫 번째 생각할 수 있는 결말입니다. 이와는 달리, 물질이 서로를 잡아당기는 효과가 누적되어 어느 임계치에 이르면 팽창하던 우주가 최댓값에 도달하여 한숨을 내쉬고 빅뱅의 과정을 역으로 되밟으면서 수축하기 시작한다는 뜨거운 종말이 두 번째 생각할 수 있는 결말입니다. 우주의 종말이 차가울지 뜨거울지에 대하여 학자들의 논쟁이 분분하지만 최근에 암흑에너지라는 개념이 나오면서 상황이 바뀌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 전 읽은 <우리 안의 우주; http://blog.joinsmsn.com/yang412/13146507>를 통하여 개념을 잘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쓴 닐 투록은 폴 스타인하르트와 함께 ‘주기적 우주이론’을 제안해 우주물리학은 새로운 숙제를 떠안게 되었습니다. “주기적 우주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수조 년을 주기로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고 있으며, 이 주기는 중단없이 영원히 반복된다.(364쪽)”는 것입니다. <우리 안의 우주>에서 이 부분을 읽고 정리한 제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빅뱅 이후에 우주는 팽창했다가 수축하고, 또 순환할 때마다 우주의 크기는 커지고 점점 더 많은 물질과 복사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오실로스코프에 나타나는 파장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는 모습을 연상하시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輪廻)와 겁(怯)의 개념, 그리고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이르는 알쏭달쏭한 말들이 바로 우주물리학이 밝혀낸 것들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연일까 싶습니다.” 임피교수는 “앞으로 지어질 중력파 감지 시설과 우주에서 중력파를 찾고 있는 플랑크 위성이 좀 더 세밀한 데이터를 보내온다면 우주가 일회용인지, 아니면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지 판정이 내려질 것이다.(365쪽)”라고 조심스러운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임피교수는 “과학은 우주의 종말을 예견할 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다. 이 분야에서 과학자들은 최고로 난해한 질문을 제기하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최상의 이론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우주의 종말은 모든 과학을 통틀어서 가장 불확실한 분야이기도 하다.(372쪽)”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물리학자 레프 란다우가 “우주론 학자들은 실수를 자주 범하지만 결코 의심하지는 않는다.”고 다소 비꼬는 듯 말했다고는 합니다만, 우주의 신비를 밝히려는 그들의 노력은 결코 폄하할 수 없다 하겠습니다.

 

‘마술 같은 사건으로 가득 찬 이 우주에서 마지막에 어떤 일이 일어나건, 그게 무슨 상관인가?’라는 임피교수의 마무리 글이 인류의 부단한 노력을 다그치는 일갈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주에서 빛이 사라지면 끈기 있고 독창적인 생명체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 어쨌거나 우리는 생각이 없는 물질보다는 우월한 존재임이 분명하다.’라고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읽고서, ‘크리스 임피교수가 안내하는 우주의 시원으로 가는 여행은 그의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을 덕분에 유익하고 재미있었다.’고 정리한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의 전작 <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를 읽은 느낌으로 대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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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 우리 시대가 알아야 할 최소한의 인문 지식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1
주현성 지음 / 더좋은책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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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무엇을 하는 학문인지도 모르던 제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을 보면, 인문학이 대세라는 말이 맞기는 한 것 같습니다. 인문학공부에 왕도는 없다고들 해서, 인문학이라고 하면 닥치고 읽고는 있습니다만, 여전히 코끼리 다리 만지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입문서로 좋다고 하면 우선 눈길이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역시 그런 생각으로 읽게 된 책입니다.

 

읽고 얻은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우리 시대가 알아야 할 최소한의 인문 지식’이라는 부제가 달린 것처럼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개론서 형식으로 인문학을 이루는 가장 기본 개념이라고 할 심리학, 회화, 신화, 역사, 철학, 글로벌이슈에 이르는 여섯 개의 핵심분야를 한권의 분량으로 압축하려는 의욕이 오히려 수박 겉핥기가 되고 만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요약하고 있는 먼저 책내용을 소개드립니다. “심리학편에서는 문학과 문명을 해석하는 데 가장 많은 심리적 기초를 제공했던 프로이트부터 현대 심리학의 대세라 할 수 있는 인지심리학까지 순서적으로 다루었으며, 다양한 심리학의 관찰 실험법과 베스트셀러 심리학 책들의 내용까지 살펴보았다. 회화에서는 회화 지식의 흥미를 각인시키기 위해, 회화 운동이 본격화되는 근대의 인상파부터 다루기 시작했으며 최대한 각 유파 간의 인과관계를 추적하여 현대 회화까지 소개했다. 신화편에서는 유럽 문화가 주도적인 현대사회에서 첫 번째 교양이 되어버린 그리스신화를 다루었다. 기존 신화를 다룬 책들은 많은 내용들을 보여주느라 정리가 잘 되지 않는 점을 염려해, 신화의 주요 주인공인 올림포스12신과 테세우스 등 전쟁 영웅들만을 골자로 다룸으로써 그들의 계보를 쉽게 정리할 수 있게 했다. 역사편은 서양 유럽사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단순히 교과서식 서술을 피하고 역사적 인과관계가 있는 부분들을 중점적으로 다루어, 원인과 결과의 세계사로 구성해보았다.인문의 중심이며 그 해석의 기초를 제공하는 철학. 그러나 철학은 그 쟁점들을 단순화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주요 쟁점들을 담아내다 보니, 많은 분량을 할애하게 되어 현대 이전의 철학과 현대의 철학으로 나눌 수밖에 없었다. 철학 편에서는 기존의 쉬운 철학 안내서들이 중요하지만 난해했던 쟁점들을 철학자의 사변 이야기로 돌아간 것을 지양하고, 최대한 쉽게 쟁점들과 맞서려고 했다. 특히 현대 철학 부분에서는 기존의 철학서들이 유럽파와 영미파 전공자로 나뉘어 반쪽만을 소개한 데 반해, 처음으로 두 파를 모두 소개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글로벌 이슈는 현대사회의 쟁점인 세계화, 자유무역, 환경, 종교 및 지역 분쟁들을 소개해 현대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마련해보았다.(6-7쪽)”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여섯 개의 주제가 책 한권의 분량으로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독자도 많을 것 같은데, 몇 쪽으로 요약하기 위하여 작가적 역량을 총동원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한편, 저자가 사용한 원전을 밝히지 않고 있어 보다 깊이 파고들어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독자로서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다만 철학부문에서는 그리스철학으로부터 현대철학까지 철학이 발전해온 과정을 잘 요약하고 있고 특히 복잡하게 나뉘고 있는 현대철학의 계보를 가늠할 수 있었던 점은 참고할만 했습니다.

 

한 가지 더 아쉽다 싶은 대목은 이 책에서 굳이 다루어야 했을까 싶은 글로벌이슈를 논하는 과정에서 저자가 지켜야 할 중립적 시각이 특정한 철학으로 기울어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개론서가 개론서로서 역할을 하려면 관련 분야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두루 인용하여 소개하되 저자의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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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예술 - 예술은 죽었다, 예술은 삶의 불길 속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심보선 지음 / 민음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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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아서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막연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먼저 제목의 의미를 챙겨 읽었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그을린 예술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나는 삶 속에서 꾸는 꿈으로서의 예술을 ‘그을린 예술’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때의 예술은 순수한 예술, 자율적 예술, 천재라 불리는 예외적 개인의 예술, 지상에 떨어진 타락한 천사의 예술, 진리를 선포하고 미래를 예언하는 선지자적 예술이 아니다. 단언컨대 그런 예술은 죽었다. (…) 그을린 예술은 타들어 가고 부스러지는 현대인의 삶, 자본주의의 격렬하고 성마른 불길에 사로잡힌 우리네 삶 가운데서 꿈틀거리는 꿈, 긍정성의 몸짓, 유토피아적 충동이다. 그러므로 그을린 예술은 언제나 위기에 직면해 있다(14쪽).”

 

저자는 순수예술을 스노비즘의 표상으로 길가름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소노비즘이 무엇을 말하는지 몰라서 인터넷을 뒤져보았더니, ‘출신이나 학식을 공개적으로 자랑하며 고상한 체하는 성질. 금전이나 영예 등 눈앞의 이익에만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유의로 안내하고 있는 속물근성이라는 단어가 오히려 피부에 와닿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속물근성이라고 적었더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시인이자 사회학자인 작가는 ‘조금 더 잘 살기 위해서, 조금 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조금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삶을 재창조하려 하는 예술의 모습들’을 담고자 하였다고 했습니다만, 여기 담은 글들은 미리 기획하고 쓴 글이 아니라 저자가 그동안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발표한 글들을 모아 편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인용하는 에피소드가 중복되는 경우도 눈에 띄었고, 다섯 부로 나누어진 글들은 독립적으로 읽어도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을 듯합니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서 말한다면, 나는 이 책이 하나의 선언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 선언은 다음과 같다. 예술은 죽었다. 예술은 다른 곳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삶 속에서, 삶의 불길에 그을린 채.(15쪽)”라고 적은 것처럼, 대중과 괴리를 보이는 순수예술을 지양하고 민중과 같이 숨쉬는 예술이 제대로 대접받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고 읽었습니다.

 

역시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사회학자가 지켜야 할 금도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사회학자는 세계와 인간과 거리를 둔다. 사회학자는 자신을 구속하는 구조에 맞서는 인간들의 눈물, 탄식, 분노, 기쁨, 경탄, 동경, 희망에 참여하지 않는다. 사회학자는 인간이 꾸는 꿈, 오류와 과장이 가득한 그 유토피아적 충동을 해석할지언정 그것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려 한다.(11쪽)” 그리고 자신은 그러한 사회학적 계보에 충실했다고 말씀하고는 계시지만, 글 내용으로 보면 과연 그러한가 싶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6.9 작가선언’은 이명박 정권하의 한국 사회를 ‘민족주의의 아우슈비츠, 인권의 아우슈비츠, 상상력의 아우슈비츠’로 명명하면서, ‘지금 바로 여기’가 전쟁 상태이며 적의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81쪽)”고 했는데, 이어서 “‘6.9 작가선언’이 한국 사회를 아우슈비츠로 명명한 것이 현실과 부합하는가, 혹은 적절한 문학적 비유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아우슈비츠라는 용어의 의미, 혹은 무의미성은 그것이 가지는 효율성이나 호소력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83쪽)”라고 적고 있어 과연 논리적인가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책의 제목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짐작되는 용산참사에 관한 글에서 “일반적인 유가족들이 으레 있어야 할 곳과는 완전히 다른 공간에서 그들은 실은 어떤 유가족들보다도 더한 슬픔에 처한 상태로 살아간다.(94쪽)”고 적었지만, 같이 한 사진은 저자의 간절한 마음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는 느낌입니다. 사실 사고가 있기 오래 전에 집을 구하려 그 지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재개발을 반대하는 시위를 바라보면서 걸음을 돌린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곳에서 살게 된다는 것에 대한 심리적 부담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리해보면, 저자는 일상적 삶에서 예술이라는 무엇을 창조해내는 사람들이야 말로 삶의 주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 하고, 누구나 생각보다는 조금은 위대해질 수 있는 구체적 계기를 발견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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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논리 들뢰즈의 창 6
질 들뢰즈 지음, 하태환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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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괴물이 된 그림; http://blog.yes24.com/document/7277164>을 쓴 이연식님은 집필동기를 ‘괴물과 견주어 보았을 때 비로소 인간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것’에 두고 미술작품에 등장하는 비정상적인 모습을 분석하였습니다. 저자가 괴물이라고 지칭한 것들은 ‘저자는 괴물을 기괴한 형상, 뒤틀린 형상, 타락한 형상, 합쳐진 형상, 한없이 작은 형상, 한없이 커다란 형상, 인간을 닮은 형상, 손끝에서 나오는 형상 등이 있는데, 모두 95의 작품을 인용하여 나름대로의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에 프랜시스 베이컨의 <십자가 아래 인물들을 위한 세 습작> 가운데 오른편 작품을 인용하고 있어 내심 반가웠던 것은 베이컨의 그림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담은 <감각의 논리>를 읽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용한 베이컨의 작품에 대하여 이연식작가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0세기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에도 목이 길쭉한 괴물이 등장한다. 눈과 코가 있어야 할 자리를 날카로운 이빨이 들어찬 입이 몽땅 차지하고 있다. 얼굴 양편에는 큼지막한 귀가 있어서 이 형상이 인간과 관련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이연식 지음, 괴물이 된 그림, 15쪽)” 저자는 <감각의 논리>를 인용하지 않고, 베이컨이 그린 인물에 대하여 ‘내면에서 나온 무언가에 먹히는 얼굴’이라는 영화감독 베르톨루치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에 등장하는 추한 인물에 대하여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외양은 구상에만 해당될 따름이다. 벌써 형상은 죽지 않고 아직 살아남아 있는 구상의 관점에서만 괴물처럼 보인다. 우리가 이것을 ‘형상적으로’ 보자마자 괴물적이 되기를 멈춘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형상들은 그들이 채우고 있는 일상적인 업무에 따라, 그리고 그들이 직면한 순간적인 힘의 기능에 따라 가장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173쪽)” 들뢰즈는 누구나 기괴하다고 볼 수 있는 베이컨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을 괴물이 아닌 무언가의 의미를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읽은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153217>의 리뷰를 정리하면서 확인한 것입니다만 들뢰즈에게서는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흄, 칸트, 니체 등을 재해석하는 철학사가로서의 모습 뿐 아니라 감각, 사건, 정신분열, 영화, 철학 등과 같은 다방면의 개념들에 대하여 철학적 해석을 하는 생성의 철학자의 모습도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처음 책을 열었을 때는, 영국경험론의 비조로 인식되고 있고, 데카르트와 함께 근세 철학를 개척한 것으로 알려진 16세기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철학에 대하여 재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읽어가면서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들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책읽기가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배다른 형 니콜라스 베이컨의 후손으로 20세기 중반에 활동한 아일랜드 태생의 화가로, 대담성과 소박함, 강렬함과 원초적인 감정을 담은 화풍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추상적인 형상이 특징 없는 단색의 배경 위에 유리나 기하학적인 철창에 갇혀 있는 것으로 표현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들뢰즈는 베이컨을 ‘반 고흐와 고갱 이래 가장 훌륭한 색채주의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베이컨은 이집트의 예술적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본 들뢰즈는 구조 혹은 골격, 형상 그리고 윤곽이라고 하는 세가지 요소들이 색채 속에서 효과적으로 수렴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화가 베이컨이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44년 삼단제단화, 십작책형을 기초로 한 형상의 세 가지 습작을 통해서 돌파구를 찾으면서라고 합니다. <감각의 논리>에서도 베이컨의 삼단화 작품들을 도판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들에서는 구조에서 형상으로, 그리고 형상에서 구조로 향하는 이중의 움직임이 있었다. 고립과 변화 그리고 흩뜨림의 힘들. 그러나 두 번째로는 형상들 자체 내에 움직임이 있다. 자기들의 층리에서 고립과 변형 그리고 흩뜨림 현상을 또 취하는 짝짓기의 힘, 마지막으로 세 번째 유형의 움직임과 힘이 있다. 바로 거기서 삼면화가 개입한다.(98쪽)”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떻든 들뢰즈의 베이컨의 회화작품 해석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베이컨의 작품에서 표현되어 있는 기괴한 형상을 한 사람의 모습에서 괴물이 아닌 무엇을 찾아가는 방법을 제대로 배울 수 있을지 다시 읽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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