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51 | 352 | 353 | 354 | 35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당신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그럴듯한 착각들
실뱅 들루베 지음, 문신원 옮김, 니콜라스 베디 그림 / 지식채널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2008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제2차 광우병파동의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 있었던 인연 때문인지 사회심리학에 관심이 큰 편입니다. 그래서인지 <당신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그럴듯한 착각들>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에 쉽게 이끌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목차는 더욱 눈길을 잡아끄는 힘이 있습니다. ‘무엇이 사람들을 패닉에 빠지게 하는가?’, ‘유언비어는 어떻게 널리 퍼지는가?’, ‘틀린 줄 알면서도 왜 다수의 의견에 따를까?’, ‘완벽해 보이는 그들이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는 이유’ 등등 2008년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양 진영의 시각에서 보면 이해되지 않는 상대진영 사람들의 논리나 행보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줄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 책입니다.

 

사회심리학은 사회학과 심리학이 결합된 학문인데, “가상으로든, 은연중에든 혹은 명백하게든 타인의 존재와 그들의 특징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주어지는 다양한 사회적 자극이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분석하고, 나아가 개개인이 갖고 있는 심리적 요인들이 사람들의 사회적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과학적 연구영역”이라고 합니다.(8쪽) 저자는 심리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실험적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시람들이 저지르는 말도 안되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답을 독자들에게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러한 실험들의 상당수는 비교적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심리학의 고전영역에 속하는 것들로 보인다는 점과 이러한 고전적 실험에 대하여 비판적인 실험들이 제시되지 않고 있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패닉에 빠지는 대표적 사례로 1938년 10월 30일에 미국에서 있었던 라디오방송에 대한 시민들이 공포에 빠진 사건입니다. 허버트 조지 웰스의 소설 <우주전쟁>을 각색한 라디오 드라마가 방송을 탔는데, 화성인이 지구를 습격하여 인류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상황을 그려내 수백만명의 미국 청취자들이 실제상황으로 오인하고 공포에 떨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공황에 빠진 사람들은 암시에 쉽게 걸리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모를 난감한 상황에서는 냅다 뛰기 시작하고, 이를 본 사람들 역시 덩달아 뛰기 시작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흘러가게 된다는 것이 집단패닉이 발생하는 기전이라고 합니다.

 

유언비어, 소위 루머란 “사실의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 자료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사실인 것처럼 전해지는 일반적 주장”이라고 설명되는데(55쪽), 전달내용이 조금씩 변질되는 ‘단순화 과정’에서는 구조가 단순화되면서 기억하기 쉬워지고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기도 쉽게 되고, 여기에는 ‘강조 과정’이라는 보완적 기전이 작용하게 됩니다. 본질적인 내용은 유지되면서도 두드러지는 몇 가지 사항이 선택되어 강조되면서 날조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동화 과정’을 밟게 되는데, ‘없는 사실을 첨가시키거나 왜곡시키고, 망각하고 또는 부풀려 과장하는 것은 개인들이 연이어 정보를 전달하면서 자신들이 갖고 있는 가치와 규범 그리고 행동체계에 그 정보를 감정이입하면서 동화시키게 된다는 것입니다(59쪽).

 

소포클레스 원작의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를 보면 모두가 ‘네’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하기는 정말 어렵다는 말을 합니다만, 저자 역시 “모두가 ‘네’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외칠 수 있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67쪽). 뻔히 틀린 줄 알면서도 다수의 의견에 따라가는 이유는 다수의 환심을 사려는 심리, 개인이 스스로 남들과 비슷해지기를 바라는 동일화 심리, 그 집단에서 버림을 받을 까 두려워하는 내향성 심리 등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80쪽)

 

이러한 사례들 가운데 맹목적인 믿음과 인지 부조화로 인하여 생기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왜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할까요? 1930년대 초반에 인도의 비하르 주에서 강진이 발생한 적이 있는데, 주민들은 지진이 발생하고도 한동안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채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민들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혹시라도 여진이 발생할 우려가 있는지 등에 관한 구쳊적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자 급기야는 스스로 정보를 만들어내서 온갖 소문을 퍼뜨리면서 자신들이 처한 주변 상황과 주변 세계를 통제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 했다는 사례가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저자는 이성적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인간 행동의 밑바탕에 깔린 심리적 원인들을 이해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는 실수나 어리석은 짓의 근원적인 문제를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독자들이 사회활동을 하면서 흔히 만나는 인간관계로부터의 갈등을 이해하고, 이를 해결하는 심리학적 방법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해 바다의 미래를 묻다 - 과학이 말하는 동해의 가치와 미래 푸른행성지구 시리즈 2
남성현.김윤배 지음 / 이담북스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이 방위백서에서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내용을 명기하더니, 이어서 외교청서에서도 같은 내용을 담아 한일 양국간의 갈등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얼마전 동해안 속초로 워크숍을 다녀왔습니다만, 일본정부가 문제를 부각시킬 때는 온 국민이 나서서 들끓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실제로 독도와 동해에 대하여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독도가 우리나라의 영토라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다양한 자료들이 있다는 점은 나이토우 세이추우 선생의 <일본은 독도(죽도)를 이렇게 말한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48635>를 읽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독도를 품고 있는 동해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났습니다. 지난 주 읽은 <바다에서 희망을 보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97624>를 통하여 인류의 지속가능한 발전은 바다를 어떻게 지키고 활용하는가에 달려있다는 점을 알려준 해양학자 남성현박사님이 역시 해양학을 전공하는 김윤배박사님과 함께 동해에 관한 모든 것을 앞서의 책처럼 누구나 읽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 <동해, 바다의 미래를 묻다>입니다.

 

저자들은 동해를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나 해수욕과 일출감상으로 대표되는 낭만의 대상, 즉 존재하는 ‘풍경’으로서만이 아닌 ‘탐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먼저 한국과 일본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동해의 명칭으로부터 동해에 대한 과학적 탐사에 관한 역사부터 정리하고 있습니다. 동해와 독도의 명칭에 관하여 반크를 비롯하여, 뉴욕타임즈에 실린 가수 김장훈씨의 독도광고처럼 사회적 운동을 통하여 우리의 입장을 반영하는 방법도 중요하겠습니다만, 유관학계에서 자연스럽게 동해 혹은 독도라는 명칭이 스며들도록 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동해의 해양학적 연구를 한국이 주도하여 진행하고, 국제적 학술지에 동해 혹은 독도라는 이름이 실려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연스럽게 우리말 이름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동해에서 한류와 난류가 만나기 때문에 어자원이 풍부하다는 사실은 어렸을 적부터 들어온 이야기이고 최근에는 가스 하이드레이트와 같은 청정에너지 자원을 비롯한 광물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도 듣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동해, 바다의 미래를 묻다>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은 동해가 해양연구에서 중요한 모델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흔히 동해는 우리나라와 러시아 그리고 일본으로 둘러싸여 마치 내해처럼 보이기 때문에 변화가 별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 초반 동해를 집중적으로 탐사한 일본의 우다가 동해의 바닷물은 단일수괴로 되어 있다고 해서 ‘동해고유수’라고 하였지만, 해방후 국내외 학자들에 의하여 꾸준하게 탐사되어 축적한 자료를 보면 동해바다만큼 역동적인 바다도 드물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해의 이러한 환경은 군사적으로도 물론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지만, 해양에서의 바닷물의 흐름과 기후변화에 관한 연구를 행함에 있어 중요한 연구모델이 될 수 있다고 학계에서는 주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구절을 인용해보겠습니다. “동해는 바로 대양의 컨베이어벨트처럼, 북부해역에서 용존산소가 풍부한 표증 냉수의 결빙과 침강이 일어나고 남하한 이들 냉수가 심층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남하하여, 여름철에는 울산 근처 감포 주변해역에서 해안선에 평행한 남동풍의 바람 등에 의해 깊은 곳의 바닷물이 표층으로 올라오는 용승현상이 존재하는 등 그야말로 대양의 많은 현상들을 볼 수 있는 ‘작은 대양’ 혹은 ‘대양의 축소판’으로 볼 수 있는 바다가 동해이다.(71쪽)”

 

정리해보면, 이 책을 통하여 동해의 가치, 특히 과학의 영역에서 동해가 얼마나 중요한 곳인가 하는 점을 알게되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이 절대로 답할 수 없는 몇 가지 - 악의 시대, 도덕을 말하다
샘 해리스 지음, 강명신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학의 진화는, 상상 가능한 이론적 구성물 가운데에는 어떤 경우에서나 다른 구성물에 대해 결정적 우월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구성물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이 문제에 대해 천착했던 사람들은 우리의 지각세계가, 한 치의 오류도 없이, 어떠한 이론적 체계를 선택해야 할지를 실질적으로 결정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의 모든 원리로 이끄는 논리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식에 대하여 과학의 대표적 분야인 물리학의 한계에 대하여 1918년 막스 프랑크의 회갑에서 아인슈타인이 한 말입니다(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인용) 가세트는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과학의 흥성으로 퇴조되고 있는 철학이 본연의 소명으로 회귀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과학적 진리는 비록 정확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이며 완전한 진리는 아니다.’라고 설파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유와 존재의 상호 동화라고 정의되고 인식의 영역에 속하는 도덕적 진리를 과학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자유의지는 없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64786>를 통해서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을 설파한 샘 해리스박사는 <신이 절대로 답할 수 없는 몇 가지>에서 발전된 뇌과학의 증거들은 도덕적 진리를 과학적으로 판단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비록 “과학은 사실에 관한 것이지 규범에 관한 것이 아니다. 과학은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 양태에 대해 무엇이 잘못인지는 알려줄 수 없다. 인간의 조건에 관한 과학은 있을 수 없다.(23쪽)”고 한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제리 포더와 같이 반대하는 과학자들이 여전히 있는데도 말입니다. 선과 악에 대한 연구결과를 공론화하지 못하고 있지만, 적어도 도덕과 행복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꾸준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도덕과 행복에 관한 과학적 연구에서 얻어진 것들을 도덕적 진리, 선과 악, 믿음, 종교, 행복의 미래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원저의 제목이기도 한 ‘도덕의 풍경(The moral landscape)’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였습니다. 도덕의 풍경은 “가설적 공간이지만 실제적, 잠재적 결과의 공간으로, 봉우리의 높이는 잠재적 행복의 높이에 해당하고, 계곡의 깊이는 잠재적 고통의 크기에 해당한다. 서로 다른 사고방식과 행동방식, 즉 다양한 문화적 관습, 윤리 규정, 정부의 양태 등은 이 풍경에서 지점 사이의 좌표이동으로 표현되고, 이것은 또한 인간 번영의 정도 차이로 나타난다.(17-18쪽)”라고 설명되고 있는데, 다양한 변수를 데이터화하여 객관적으로 평가가 가능한 삼차원공간으로 구현하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우리가 높은 산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면 다양한 높이의 산들이 펼쳐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도덕적 가치 또한 하나의 정답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인데, 도덕적 진리를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경우에 이와 같은 오류를 저지를 가능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어떤 행동의 결과의 좋고 나쁨을 판가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점을 ‘스리마일 섬 효과’로 설명기도 합니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 있는 스리마일섬은 1979년 일어난 원자로 노심 용융사고로 세인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원자력의 평화적 사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나쁜 일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각을 바꾸어 보면, 이 사고를 통하여 각국은 핵안전을 보다 강화하는 정책을 수립하여 실행하게 되었고 더 많은 인명을 구할 수도 있었다는 해석도 가능하게 됩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83563>를 읽으면서 ‘문화를 전달하고 모방하는 복제단위’를 밈(meme)이라고 정의하고 “밈풀에서 펴져 나갈 때에는 넓은 의미로 모방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 뇌에서 뇌로 건너다닌다.(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323쪽)”라는 설명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고 적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기적 유전자>에서는 생물의 진화는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개체와 이타적 유전자를 가진 개체가 균형을 이루어야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진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해당 생물집단의 생존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킨스가 주장하는 밈이라고 하는 문화의 복제단위는 생존에 긍정적 요소만이 살아남고 부정적 요소는 소멸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샘 해리스는 밈의 존재를 인정하고 밈이 ‘전달된다’며, 숙주로 삼은 인간의 생식세포를 통해 전달되지는 않는다는 점도 인정하지만, “밈의 생존은 개인이나 집단에 실질적인 이익(번식되느냐 아니냐)을 가져다주느냐 아니냐에 좌우되지 않는다. 수 세기 동안 계속해서 사람들의 행복을 저하시키는 개념이나 문화적 산물에 매여 사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37쪽)”고 밈에 대한 개념을 수정하고 있습니다.

 

파푸어 뉴기니 하이랜드 지역에 사는 포레(Fore)족의 생존을 위협했던 쿠루(kuru)병의 확산과 소멸을 샘 해리스의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쿠루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먹는 카니발리즘(cannibalism)의 습속이 포레족 마을에 들어온 이후에 새로 생겼다가 쿠루병의 정체가 드러남에 따라 호주 정부가 카니발리즘을 강력하게 금지하는 정책을 실시하면서 소멸되어 갔던 대표적인 프리온질병입니다. 즉 카니발리즘이라고 하는 문화적 요인의 유입과 정착이 종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부정적 방향으로 작용하는 밈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소위 밈이라고 하는 사회문화적 복제단위가 믿음이라고 하는 집단의 사고결과로 만들어지고 확산되는 것이며, 집단적 행복추구를 위한 문화적 행동양식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앞서 예로 든 포레족의 사례처럼 어떤 종족이나 사회가 품은 실재에 대한 믿음이 허위일 뿐만 아니라 명백하게 해로울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저자는 진화론이 생물학적 명령으로서 이기심을 수반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부분에서 해석의 오류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전자 수준에서의 선택압력은 개인의 생존보다는 혈연관계가 있는 존재들을 위한 희생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의 생존보다 유전자를 공유하는 존재들의 생존이 유전자집단의 소멸을 막을 수 있는 선택을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이론이 진화생물학자 로버트 트리버의 호혜적 이타주의이론입니다. 혈연관계가 없는 친구들이나 심지어 요즈음 개그콘서트에서 보는 행복한 대한민국을 위한 프로젝트에서 보는 것처럼 모르는 사람들 사이의 협동이 가능한 이유가 설명되는 이론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개인과 집단의 행복의 지침이 되는 도덕이 분석범위에 있다는 가정을 다음처럼 요약하고 있습니다. “1. 뇌의 유전자 변화는 사회적 감정, 도덕적 직관, 언어 등을 발생시켰고, 2. 이로 인해 약속이나 명예 중시 등 점점 복잡한 협동 행동이 가능해졌으며, 3. 이러한 행동은 또 문화적 규범, 법, 사회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이들의 목적은 점점 발전하는 이 협동 체제가 그것을 상쇄시키는 힘에 맞닥뜨렸을 때에도 지속되게 하기 위함이다.(113쪽)” 물론 잘못된 믿음에 의하여 퇴보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유전자의 변화도 가능하다고 한다면, 이 이론은 문화의 복제단위가 밈이라고 하는 가설적 구조가 아니라 유전자라고 하는 실재적 구조가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실제로 뇌연구 결과 도덕적 인지와 관련된 뇌영역으로는 전전두엽피질(prefrontal cortex)과 측두엽(temporal lobe)의 많은 부분이 포함된다고 합니다. 전두엽 외측은 극악무도한 범죄자에 대한 분노를, 전두엽 내측은 신뢰 및 상호성과 관련된 보상의 감정을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뇌과학자 조르주 몰과 리카르도 데 올리베이라-수자 등의 연구에 따르면 다른 포유동물에서는 볼 수 없고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행위, “다른 사람에게 이로우면서 내게 직접적인 이익(물질적 혹은 명예에 대한 이익)이 없는 행위(진정한 이타주의)를, 특히 의도적으로 하는 경우”에도 뇌의 보상영역이 급격하게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161쪽)

 

내측전전두피질(MPFC)이 믿음을 담당하는 뇌부위로 생각되는 것 같습니다. MPFC는 자기표현과 관련되어 있는데, 남을 생각할 때보다 자신을 생각할 때 MPFC의 활성이 커지는 현상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MPFC의 활성을 높인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이는 ‘어떤 명제를 참이라고 믿는 것은 마치 그 명제를 확장된 자아의 일부라고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도파민 수용체 유전자가 종교적 믿음과 관여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고 합니다. 활성이 높은 형태의 D4 수용체를 물려받은 사람들은 과학에 대해 회의적이고 기적을 믿을 확률이 더 높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향은 종교의 종류와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서로 공존할 수 없다며 극한 대결을 불사하는 종교집단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거부할 수 없는 증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신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삶의 의미와 도덕 지침의 원천으로 믿을 게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신을 믿는 가장 흔한 이유라고 합니다.(17쪽)”

 

이 처럼 과학적 연구를 통하여 종교적 믿음의 본질이 베일을 벗어가고 있지만, 과학자들은 그 사실을 공론화하는데 주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과학자 공동체가 대체적으로 세속적이고 자유주의적인데도 불구하고 종교적 독단에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국립과학원, 국립보건원과 같이 과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기관, 심지어는 네이처와 같은 과학 잡지까지도 종교적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스티븐 굴드의 ‘중복되지 않는 권위’ 개념, 즉 ‘과학과 종교는 전문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두 분야가 적절하게 관점을 규정하면 갈등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는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과학은 물리적 우주의 작동에, 종교는 의미, 가치, 도덕, 선한 삶에 최고의 권위를 지닌다는 뜻이 담겨 있다.(16쪽)”고 양해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도덕문제에서 신앙과 이성 사이에 타협의 여지가 거의 없다고 보는 저자의 경우에도 막상 공적 담론에서 과학의 역할에 대하여 논의할 때는 어떠한 경우라도 종교적 의견이라는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혼란과 박해로 어두웠던 수 세기, 즉 종교적 암흑기를 지나 과학이 꽃을 피우게 된 지금에도 종교는 여전히 과학에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서구에서 광신도의 손에 고문이나 살해를 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지만, 미국에서는 종교에 공격적 태도를 취했다가는 연구비를 잃을 위험이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종종 흘러나온다.(42쪽)”는 인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 우주를 선으로 이끄는 위대한 힘이자, 우주를 악으로부터 지키는 진정 유일한 보호자임을 자처하는 가톨릭교회의 본산 로마 교황청이 사제가 되려는 여성을 파면하면서도 어린이를 강간한 남성사제는 파면시키지 않는다거나, 여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낙태를 시행한 의사를 파면시키면서도 인종 학살을 자행한 나치당원은 단 한 명도 파면시키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도덕에 대한 교회의 판단기준은 혼란스러운 것 아니냐고 묻고 있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 존재의 가장 절박한 문제에 관해 과학을 적용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즉 도덕적 믿음도 과학적 믿음과 같이 과학적 사실에 근거하게 될 것임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도덕적 믿음을 지켜온 종교의 역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쉬운 점은 저자의 이런 견해가 옮긴이의 생각으로 걸러져 전달된 점은 없었는가 하는 우려입니다. 옮긴이의 글에 적고 있는 바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이 책은 주로 종교에 대한 반대로 종교가 도덕을 말할 수 없고 말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독단에 가까운’ 강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39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다에서 희망을 보다 푸른행성지구 시리즈 1
남성현 지음 / 이담북스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에 읽은 엘리자베스 파렐리의 <행복의 권고;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88622>를 비롯하여 앨 고어의 <우리의 선택; http://blog.joinsmsn.com/yang412/11794488> 등과 같은 기후온난화를 예고하고, 제한된 지구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면 지구적 위기를 맞을 것이라는 주장과 이에 맞서 ‘비관주의자들에게 속지 말라’고 주장하는 매트 리들리의 <이성적 낙관주의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1893963>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을 읽고 있습니다.

 

이번에 읽은 남성현박사님의 <바다에서 희망을 보다>에서 또 다른 생각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자가 “이 책은 우리가 직면한 지구환경의 위기에 대해 단지 경각심만을 유발하고자 쓰인 것이 아니다. 전 지구적 환경위기의 심각성을 통해 어제를 반성하고, 내일을 새로운 희망으로 열기 위해, 오늘 그 바른 해결방향을 찾아내고자 하는 고민에서부터 출발한다.”라고 프롤로그에 적고 있는 것처럼 단지 위기의 고양보다는 구체적인 대안을 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합니다.

 

모두 4부로 구성된 책에서 저자는 미래의 지구적 위기상황을 예측케 하는 지표로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에 관한 통계자료를 제시하고 또한 환경오염과 에너지 자원의 고갈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에서의 불확실성을 이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지구를 푸른행성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지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바다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설명하고 우리나라 역시 바다로 눈을 돌려야 할 것이라는 점을 마지막에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지구가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쪽에 가깝다는 느낌을 주면서도 이와 같은 예상이 가질 수 있는 불확실성에 대하여도 언급하고 있어 나름대로 중립적 위치를 지키려 하는 점이 돋보입니다. 예를 들면 ‘기후변화가 인간활동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자연적인 변화인지에 대해서조차 논란을 완전히 종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42쪽)’라고 적고, 심지어는 개발도상국을 견제하기 위한 선진국의 음모론에서부터 기후변화의 증거들이 의도적으로 과장되고 있다는 기후게이트 등이 터지면서 지구온난화문제에 대하여 냉소적이거나 회의적인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기후변화가 인간의 활동에 의한 것이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는데 있어 수많은 불확실성이 개입되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폭염, 폭설, 폭우, 가뭄, 기근과 같은 기상이변이 점차 빈번하고 정도 역시 심해지고 있는 현상을 들고 있습니다.

 

저자는 “존재를 증명하지 못했다고 해서 이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영국의 시인 윌리엄 쿠퍼의 명언을 인용하면서 바다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바다에 살고 있는 해양생물의 다양성의 한계를 제대로 조사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며, 바다가 품고 있는 자원 역시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임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당장 현실화할 수 있는 에너지만 해도 조력, 조류, 파력 등 바닷물의 흐름과 관련된 에너지 자원은 말 그대로 청정에너지이면서 한계가 없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해양 쪽으로는 일본에 막혀 있는 한계가 있기는 합니다만,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협소한 반도에 비하면 다소 여유가 있다고 할 수 있겠고, 바다와 친숙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새 정부에서 해양수산부를 부활하여 바다와 관련된 정책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가 책머리에 적은 것처럼, 미래해양산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반 독자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어렵지 않은 용어들만을 사용하였고, 사진 등과 같은 상세한 자료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어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침대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영국의 신예작가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의 처녀작 <침대>를 읽고서, 정말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사람의 체중은 얼마나 될까 궁금해졌습니다. 인터넷을 조회해보니 미국 댈러스에 살고 있는 버스터 심커스씨가 40세의 나이에 무려 1,376kg이나 된다고 합니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삶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는지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고, 체중이 그처럼 불어나는 동안 아무 일도 없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제 경우는 체중이 85kg를 넘어가면서 몸이 둔해지고 운동이 조금 많아져도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통에 위기의식이 들면서 체중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노력이라고 해도 그저 조금 빠르게 걷는 운동과 함께 식사량을 줄이는 노력을 같이 했던 것인데, 처음에는 일주일에 20km정도 걷다가 70km 이상으로 늘려 걸으면서 체중감소효과가 뚜렷해지면서, 체중감소노력을 꾸준하게 계속한 끝에 만 1년 만에 69kg까지 줄이는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체중이 표준을 넘어서는 분들은 체질상 문제가 있거나 하는 것처럼 특별한 사정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20년 동안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는 사이에 체중이 630kg에 이르게 된 주인공의 형 에드 멜컴은 도대체 무슨 까닭이 있었던 것이며,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엮이고 있는 것인지 책을 읽어가면서도 쉽게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벽에 붙은 전자시계가 7483일째를 가르치는 날 주인공과 방을 같이 쓰는 형 멜컴의 모습을 그리면서 시작하지만, 이야기는 수시로 과거로 오르내리기 때문에 주인공이 이야기하는 시점을 파악하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 이날은 20년간 침대에 머물러온 멜컴이 방송을 타게 되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기로 한 날이라는 사실이 뒤에 밝혀지게 됩니다.

 

멜컴은 어렸을 적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달리 튀는 행동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특히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옷을 벗어 나체가 된다거나, 지붕위에 있는 TV안테나에 매달린다거나, 다른 학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는 중에 비오는 운동장에서 비를 홈빡 맞고 있다거나 하는 등입니다. 멜컴의 이와 같은 튀는 행동은 세상에서 제일 처음 그와 같은 행동을 해보아야 된다는 특별한 생각 때문이라는 설명이 뒤에 나오기는 합니다만, 제 아이가 그런 행동을 한다면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를 의심해서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하지 않을까 걱정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멜컴의 행동을 막으려는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끊임없이 감싸는 모습을 보일 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가운데 운명의 25살 생일날 멜컴은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겠다고 선언하게 되고, 침대에서 먹고-자고를 반복하게 됩니다.

 

큰 아들을 끊임없이 감싸고도는 어머니와 갈등을 빚는 아버지는 결국은 다락방으로 거처를 옮기고 어머니는 과체중남편을 돌본 경험이 있는 미국 여인 노마 비가 보내준 트레일러에서 생활하며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는 화자는 형 멜컴과 같이 지내게 됩니다. 주인공은 부모가 형에게 쏟는 관심을 부러워하면서도 별다른 문제행동을 일으키지 않는 평범한 청년이지만, 형을 바라보는 루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사랑임을 드러내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 순진한 구석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은 형과의 관계를 진전시키지 못하는 가운데 어머니가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나간데 충격을 받은 루와 함께 노마 비를 찾아 미국 오하이오로 가서 자리를 잡으면서 결국은 루의 마음을 돌리는데 성공합니다. 초비만인 형을 둘러싸고 돌아가는 집으로부터 탈출에 성공한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 주인공의 한계인 것 같습니다.

 

주인공은 “엄마는 자신의 지나친 사랑이 우리 모두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를까?”(13쪽)라는 생각을 하지만, 노마 비는 자신과 멜컴의 어머니, 멜컴을 사랑하는 루의 특징을 정확하게 짚어냅니다. 멜컴의 어머니는 멜컴을, 노마 비는 죽은 남편 브라이언을, 그리고 루는 아버지를 걱정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하여 무엇이든 가리지 않는 사랑, 대단한 이타주의를 말입니다(324쪽) 하지만 자칫 그 사랑이 상대를 망가뜨릴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노마 비는 브라이언이 죽은 다음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지요. “사랑은 긴 선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해요. 제아무리 사랑이라도 양쪽 끝이 있지요. 그 중 하나는 좋은 끝이에요. (…)하지만 사랑에는 나쁜 끝도 존재해요. 사랑이 우리를 망가뜨릴 수도 있으니까요.(325쪽)”

 

멜컴이 침대에서 나오지 않은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형이 우리 가족을 망가뜨렸어”라고 질책하는 주인공에 대하여 오히려 “아니야 내가 구원한거야(368쪽)”라고 답합니다. 역설적일 수도 있는 그의 답변에 공감할 수 있을까요? 멜컴은 왜 내가 가족을 구원한 것이라고 강변했을까요? 가족의 의미를 많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51 | 352 | 353 | 354 | 35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