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암, 알면 완치할 수 있다 - 소아뇌종양 환자의 투병일기
김태형 외 지음 / 이담북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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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커서 결혼을 앞두고 있습니다만, 아이를 키우면서 제일 어려웠던 일은 아플 때였던 것 같습니다. 특히 큰 아이의 경우는 감기로 열이 날 때 경기를 하는 바람에 혹시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나 마음 조렸던 기억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아파도 참거나 증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바람에 병을 키워서 중한 상태로 발전할 수도 있어 더욱 신경이 쓰이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아이들 질환에 대하여 쉽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책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한번쯤 생각해보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아암, 알면 완치할 수 있다>가 반가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목은 소아암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소아암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은 소아뇌종양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제가 중학교에 다니던 1967년에 만들어진 홍콩영화 <스잔나>에서 리칭이 연기한 여주인공이 뇌암에 걸려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을 보고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이야기입니다만, 그때만 해도 뇌종양하면 손쓸 방법이 별로 없는 치명적인 병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소아뇌종양의 경우도 일찍 발견하여 적절하게 치료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추천해주신 분께서 적어주신 추천의 말씀이 이 책을 정확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전문서적은 어려운 용어 때문에 읽기가 어렵고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은데, 실제 환자를 치료하면서 겪었던 당신의 고충, 부모와 환아의 어려움 등 모든 과정을 쉽게 그리고 전인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여 설명해주셨습니다.” 이 책은 부모님과 환아가 궁금해 하고, 알아야 할 소아뇌종양에 대한 기본 개념을 잘 설명하고 있는데, 환아를 진단하는 과정에서 치료를 마쳤을 때까지 전 과정을 통하여 생길 수 있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고, 학교생활과 사회 적응 등 치료 후의 문제까지도 다루고 있습니다.

 

뇌종양은 단단한 머리뼈 안의 폐쇄된 공간에 들어있는 뇌에 생기기 때문에 생기는 특별한 증상들과 뇌가 관장하고 있는 부위에 따른 특별한 증상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증상으로는 두통, 구토, 경련과 같은 증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밖에도 피로감, 졸림증, 불면증, 불안증, 우울증, 성격변화와 같은 증상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아이가 이런 증상들을 보일 때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실 제가 신경병리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만, 뇌에 생기는 질환은 정말 다양한데다가 다른 부위에 생긴 암이 전이되는 경우도 많아서 신경계의 질환을 진단하는 일이 정말 어렵기 때문에 병리학을 전공하시는 분들도 기피하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저자들도 지적을 했습니다만, 뇌종양은 종류도 다양하고 발생 부위 및 연령 등에 따라서 치료방법과 결과가 매우 다르기 때문에 이 책의 내용만을 가지고 추측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에 특히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저자를 대표해서 김태형교수님은 이 책이 소아뇌종양을 앓는 아이를 둔 부모님들에게 도움이 될 의학정보와 병원에서 의료진과 의사소통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상식을 제공하고, 부모들이 병원생활에 좀 더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되기를 희망하고, 그렇기 때문에 부모들의 눈높이에서 이해가 가능하도록 전문용어를 가급적 피하고 쉽게 썼다고 했습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소아뇌종양에 걸린 어린이가 그림일기로 치료과정을 적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느낀 점을 진솔하게 적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바로 중3때 백혈병으로 치료를 받고 완치된 이은혜씨가 자신이 치료받으면서 겪은 병원생활을 바탕으로 하여 구성했다고 합니다.

 

특이하게도 저자들은 책말미에 환자와 부모 그리고 소아뇌종양을 치료하는 의료진에 특별한 당부를 적고 있습니다. 핵심되는 내용만 옮겨보겠습니다. 환자에게, “암을 극복한 용기 있는 아이는 마음만 먹으면 이 세상에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주어진 순간의 행복을 마음껏 누리기를 바란다.”, 환자보호자에게, “아무리 어린 나이의 아이라도 완벽한 인격체임을 간과하지 마십시오. 때론 아이도 크나큰 고통으로 엄마에게 화를 풀 수밖에 없다는 심정을 이해해 주십시오”. 그리고 의료진에게, “때때로 당신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가 두려움에 떠는 환아에게 큰 용기를 준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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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김경집 지음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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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가 많이 다양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전공분야를 넘어서면 얄팍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저의 편협한 책읽기는 종교분야에는 아예 눈길조차 두지 않고 있는 것은 아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공연히 생각지도 않은 논쟁에라도 휩쓸릴까 미리 몸조심하는 점도 있지 싶습니다.

 

그래도 눈앞에 책이 있으면 읽지 않고는 베기지 못하는 버릇 때문에 김경집교수님의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을 읽게 되었습니다. 대학에서는 영문학을 그리고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는 김교수님은 가톨릭대학교 인간학교육원에서 인간학과 영성 과정을 맡게 되면서 종교에 대한 학생들의 생각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고, 그런 경향은 바로 우리나라의 종교계가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김교수님은 신구교를 막론하고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세 가지로 압축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근본주의와 교조주의에 지나친 집착을 보인다는 점, 두 번째는 지나치게 성직자 중심적이라는 점, 그리고 세 번째는 여전히 서구중심적으로 사고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복잡한 신학을 떠나서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아주 간결하게 서술한 복음서조차 교조적으로 해석하는데서 문제가 시작되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복음서에 충실하여 선입견이나 고정관념도 배제하고 순수하게 읽어가다 보면 눈이 밝아지고 생각이 자유로워지며 실천의지가 또렷해졌을 뿐 아니라 다른 이에 대한 편협함과 배타성도 사라지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1부의 제목을 ‘새로 읽는 성경’으로 정하고 첫 번째 글을 ‘예수의 탄생을 외면했던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 것 같습니다. 요즈음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표시가 나지 않는 초기 임산부를 배려하는 사회적 노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만을 앞둔 만삭의 마리아가 마구간에서 몸을 풀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를 복음서에서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지 않은 복음서 내용으로 전후사정을 밝히는 것이 쉽지 많은 않았던 듯 아무래도 추리에 추리를 거듭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늦게 여관에 도착한 마리아를 위하여 자신이 차지한 방을 내어줄 의인이 없었던 것처럼 현재를 사는 우리들도 그날 여관에 들었던 사람들처럼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하는 청맹과니가 아니냐고 질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심 불편했던 것을 보면 저 또한 그날 여관에 들었던 사람들과 다르지 않구나 싶습니다.

 

우리가 흔히는 ‘죽고 나서, 땅이 아닌 하늘에서, 소멸하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으로 이해하기 쉬운 하느님나라, 즉 ‘하늘에 있는 낙원’은 일종의 죽음이라는 근원적 공포에 대한 보상적 대안으로 이해되는데, 보상을 바라는 기복적 신앙관은 자칫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느님나라는 공간적 개념이 아닌 실천적 개념으로 ‘앞으로 항상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예수의 삶을 따름으로써 하느님의 통치가 구현되는 의로운 나라’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라는 주문인 것입니다.

 

‘포도밭 일꾼과 품삯이야기의 숨은 뜻’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저자의 순수하고 명쾌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 포도밭에 데려온 일꾼이나, 정오에 데려온 일꾼이나, 해질 무렵에 데려온 일꾼이나 차이를 두지 않고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내어준 포도밭 주인의 처사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최소한의 방편은 마련해주어야 더불어 행복할 수 있다는 점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설명만으로는 부족하였던지 “노동조합이라는 게 본디 노동자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보다 더 열악한 노동자들을 차별하는 것 보면 안타깝다. 자신들이 올라온 사다리로 다른 이들이 올라올까 봐 그 사다리를 발로 걷어차는 야박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161쪽)”라고 일갈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저자의 독특한 해석도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모든 인간의 본원적 공포인 죽음을 이겨내고 더 나아가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놀라운 사건이 되는 부활을 육신의 측면에서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부활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할 것인데, 이는 내 몸이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 부끄럽고 탐욕적이며 사악한 나, 실천하지 못하고 공염불만 되뇌는 내가 죽어야, 참된 부활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고 그 믿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작가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영적 세계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지혜와 사랑의 에너지를 이끌어낸다.”고 전제하고 종교의 유무와 종파의 차이를 떠나서 이를 깨달을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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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달린 드라큘라
브램 스토커 지음, 레슬리 S. 클링거 엮음, 김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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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호러영화에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만 올 여름에도 극장가에는 호러영화가 몇 편 개봉되어 관객을 모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호러영화의 대표적 주제이기도 한 흡혈귀에 관한 전설은 동양이나 서양 모두에서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흡혈귀하면 <드라큘라 백작>이 먼저 떠오르게 되는 것은 런던 라이세움극장 관리인 브람 스토커가 1897년 발표한 소설 <드라큘라>의 성공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샤를 보들레르가 1858년 발표한 시집 <악의 꽃>에 “넌 그 저주받은 노예 상태에서 / 건져 낼 가치가 없는 놈이야. / 어리석기 짝이 없는 놈! 우리가 아무리 애써서 / 너를 흡혈귀의 제국에서 건져 낸다 한들 / 넌 다시 입맞춤으로 흡혈귀의 시체를 / 부활시키고 말겠지!”라는 내용의 ‘흡혈귀(부분)’라는 시를 담고 있고, 에드바르 뭉크 역시 1894년 <흡혈귀>라는 제목의 그림을 완성한 것을 보면 19세기 유럽사람들은 이미 흡혈귀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가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던 작가적 요인으로 당시 실재했던 것들을 작품배경으로 삼아 리얼리티를 높인 것이 주효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판타지 소설<반지의 제왕>처럼 작가가 상상으로 구축한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독자의 관심을 끌 수도 있겠습니다만 호러소설에 등장하는 사건이 현실에서도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독자의 상상을 자극하는 것으로 공포심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을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호러소설에 큰 관심이 없는 제가 <주석달린 드라큘라>에 흥미를 가졌던 것도 바로 이 작품에서 19세기 당시의 유럽사회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알 수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에 새롭게 주석을 단 레슬리 클링거는 <셜로키언을 위한 주석달린 셜록 홈즈>를 통해서 빅토리아시대의 유럽사회의 매력에 빠진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서문에 적고 있습니다. 레너드 울프를 비롯한 몇 사람이 이미 스토커의 <드라큘라>에 주석작업을 했지만 클링거는 나름대로의 방식, 즉 출판된 스토커의 편지, 일기 그리고 기록물들을 검토하고 여기에 자신의 상상을 통해서 만들어낸 허구를 가미해서 스토커가 묘사한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처럼 보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읽어가면서 정말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기록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일단 책을 받으면 A4용지 사이즈에 가까운 커다란 크기와 764쪽에 달하는 두께로 1.7kg에 가까운 묵직함에 질리게 됩니다. 책을 들고 읽다보면 팔목이 시큰거리는 느낌에 자세를 자주 바꾸어야 하는 불편함때문에 완독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워낙이 방대한 양의 주석을 본문에서 가까운 곳에 정리를 하려다 보니 본문과 주석이 섞여 읽는 흐름을 끊어놓기도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클링거는 작품을 읽기에 앞서 흡혈귀 혹은 <드라큘라>의 배경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16세기의 과학적 설명에 근거를 두고 있던 흡혈귀에 대한 관심은 19세기 초반부터 점점 커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16세기의 과학적 설명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수혈에 관한 의학적 발견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16세기 영국사회에서 일어난 마녀사냥을 다룬 이언 피어스의 소설 <핑거포스트, 1663(1); http://blog.joinsmsn.com/yang412/12161443>에서도 수혈치료법이 등장하는데 다음에 설명하였습니다만, 작가의 고증이 충분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클링거의 주석과 빌 헤이스가 피의 역사를 정리한 <5리터: 피의 역사 혹은 피의 개인사;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29692>를 종합해 보면 1656년 영국의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이 새의 깃털을 이용해서 만든 일종의 주사기로 개의 정맥에 아편을 주사한 것이 계기가 되어 1665년에는 영국의 의사 리처드 로워가 대롱을 이용해 개의 동맥을 다른 개의 정맥과 연결하여 수혈하는 실험에 성공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발전하여 사람 사이에 수혈하는 치료법으로 발전하게 되었지만, 1901년 란트슈타이너가 ABO혈액형을 처음 발견하는 등 혈액형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어 수혈의 안전성이 확립되는 20세기 초반까지는 위험한 치료법이었습니다. 따라서 수혈법을 발견한 초기에 동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무분별하게 행하던 수혈을 금하는 조치가 1668년 내려졌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혈법을 꾸준하게 개량해온 것으로 보면 의사들 사이에서 수혈은 매력적인 치료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1888년에 나온 브리태니커백과사전 9판의 내용을 보면, “흡혈귀에 대한 믿음은 러시아, 특히 백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폴란드 세르비아와 같은 슬라브 민족들이 사는 지역과 보헤미아의 체코인들, 오스트리아에 사는 여러 슬라브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1730년과 1735년 사이에 흡혈귀에 대한 이야기가 헝가리에서 크게 유행했고,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흡혈귀 이야기들이 유럽 전역을 들끓게 하였다고 한다(24쪽).”고 적고 있어 흡혈귀에 대한 관심은 과학적 근거보다는 동유럽 사회에 전승되어온 민담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드라큘라>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로는 우선 드라큘라백작이 있는데, 그에 대한 개인기록은 거의 없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합니다. 다만 이 작품에서 드라큘라 본인의 진술을 통하여 ‘오래된 가문의 후손인 세케이인이고 트란실바니아의 귀족이라 했으며 터키와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군대를 지휘하였으나 자주 전쟁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는 동유럽 밖으로는 거의 여행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이나 스토커에 의하여 영국으로 진출을 시도하다가 이미 흡혈귀의 존재와 대항하는 법을 알고 있는 반 헬싱이 인솔하는 사람들에 쫓겨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죽음을 맞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마법으로 사람들을 움직이는 드라큘라백작에 대항하여 싸우는 드라큘라 사냥꾼들은 네덜란드출신의 의사이자 철학가, 저술가, 변호사, 민속학자인 아브라함 반 헬싱교수가 이끌고 있습니다. 이 팀에는 고용주를 대신하여 업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트란실바니아에 있는 드라큘라성을 방문했다가 백작의 정체를 알게 된 변호사 조너선 하커와 그의 약혼녀 미나 하커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설 정신병원을 운영하는 존 수어드, 드라큘라백작의 공격을 받아 영국인 최초의 흡혈귀가 되었다가 드라큘라 사냥꾼들에 의하여 죽음을 맞게 되는 루시 웨스턴라의 연인 아서 홈우드(나중에 고달밍 경이 됩니다.)와 미국 텍사스 출신의 퀸시 모리스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드라큘라백작의 조종을 받는 렌필드는 자발적으로 수어드의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정신병원의 이웃에 있는 은신처에 정착하려는 백작을 지원하게 되는데 나중에는 미나 하커에 매혹되어 백작을 배신하고 백작에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반 헬싱교수의 정체에 관한 주석을 보면, 스토커도 가명이라고 인정하고 있는데, 클링거는 스토커의 노트를 바탕으로 수사관 콧포드, 심령술 연구가 알프레드 싱글턴, 독일의 역사학자이자 철학사가인 막스 빈데쇼펠교수 세 사람을 섞어 한 인물로 설정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 책에 주석을 단 클링거는 “누가 봐도 빤히 알 수 있는 표절된 내용과 모순되는 내용들, 날조된 이름, 장소 날짜들과 가득 차 있는 이 작품은 드라큘라와 관련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출처로 보기는 어려우며, 작품에 기술된 흡혈귀 백작의 역사나 이름, 흡혈귀의 실제 특징, 그 많은 인물들의 알 수 없는 행동의 동기들도 역시 신뢰할 수 없다. 따라서 <드라큘라>는 브람 스토커가 흡혈귀의 강력한 통제 하에 하커 일지를 기반으로 쓴 소설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44쪽)”라는 알듯 모를 듯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사실 트란실바니아 지역에서 지내는데 별 불편함이 없어 동유럽을 떠난 적이 거의 없다는 드라큘라백작을 영국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스토커의 장치는 드라큘라성을 방문한 조너선 하커와 드라큘라백작의 대화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국이란 나라는 알면 알수록 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나라요. 난 사람들이 운집한 그 거리를 거닐고 싶소. (…) 그리고 런던의 생명력, 변화, 죽음 그리고 런던을 런던답게 만드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느끼고 싶소.(97쪽)” 대부분의 드라큘라 연구자들은 먹잇감이 많고 먹잇감들의 경계심이 덜한 새로운 사냥터를 개척하려는 의도로 해석한다고 합니다만, 스토커의 심중에 있는 빅토리아시대의 영국은 세상 사람들이 꿈꾸는 곳이라는 우월감이 반영된 것 아니었을까요?

 

조너선 하커를 자신의 성으로 불러들여 영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거점을 준비할 정도로 철저했던 드라큘라백작이 겨우 루시 웨스턴라 한 사람을 흡혈귀로 만들고 이내 정체가 탄로나서 고향으로 도망하게 되는 상황을 맞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서 고향을 목전에 두고 드라큘라 사냥꾼들에게 죽음을 맞게 되었다는 마무리는 요즈음 독자의 시선으로 보면 어설프다 싶습니다. 하지만 동유럽이라고 하는 생소한 지역에서 영국을 침범하려던 세력을 통쾌하게 무찔렀다는 승전보를 전하는 마무리가 아무래도 19세기 영국의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수혈에 대한 당시 영국사회의 인식을 볼 수 있는 장면이 눈을 끌었습니다. 흡혈귀가 된 루시를 죽여서 그녀에게 안식을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드라큘라 사냥꾼들이지만 그녀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각각 달랐던 모양입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옆에 있던 아서가 루시에게 자신의 피를 수혈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하자, 반 헬싱교수의 얼굴은 창백해졌다가 금방 다시 붉어졌다. 아서는 그때 이후로 자신과 루시는 실제로 결혼한 것처럼 느껴졌으며, 하나님의 눈에도 루시는 자신의 아내로 보일 거라도 말했다. 우리 중 누구도 루시가 또다시 수혈을 받았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361쪽)” 반 헬싱교수 역시 루시에게 수혈을 해주었던 것인데 주석에 따르면, 도덕적으로 엄격했던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성관계가 지닌 도덕적, 종교적 의미를 수혈에 부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의학을 전공한 반 헬싱교수가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이 의외라고 하겠습니다.

 

<드라큘라>에서도 등장합니다만, 백작의 등장과 맞물려 나타나는 박쥐를 백작이 변신한 것으로 믿고 있는 것으로 보아 흡혈귀 전설은 아무래도 흡혈박쥐와 관련이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흡혈박쥐과(吸血─科 Desmodontidae)에 속하는 흡혈박쥐류에는 보통흡혈박쥐(Desmodus rotundus), 흰날개흡혈박쥐(Diaemus youngi), 털다리흡혈박쥐(Diphylla ecaudata)의 3종(種)이 있는데, 아메리카의 열대지방 원산으로 겁이 많고 꼬리가 없으며 갈색털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주로 포유동물과 조류와 같이 조용히 쉬고 있는 온혈동물에 날카로운 앞니로 작은 상처를 낸 다음에 흘러나오는 피를 핥아먹는다고 합니다. 흔히 소와 같은 가축을 공격하고, 때로는 사람을 물기도 하는데, 흡혈박쥐가 물어뜯은 상처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으나 상처를 통하여 광견병과 같은 치명적인 전염병이 옮겨질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흡혈박쥐의 이타적 행동이라고 하겠습니다. 흡혈박쥐는 60시간동안 피를 먹지 못하면 굶어죽을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동물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야 하기 때문에 마땅한 상대를 찾지 못하거나 찾았다 해도 상대에게 들켜서 피를 빨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굶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하루에 필요한 양보다 많이 피를 빨아온 박쥐가 피를 빨지 못하고 돌아온 박쥐에게 피를 토해서 나누어주는 것이 확인되었고, 이는 상황이 바뀌면 보답을 하는 호혜적 반응으로 이타적 행위가 집단의 생존을 위한 보완장치로 해석하고 있습니다.(매트 리들리 지음, 이타적 유전자, 2001년, 93쪽; http://blog.joinsmsn.com/yang412/13147182)

 

마른장마가 끝을 보인다고 합니다만, 많이 덥습니다. 역시 무더위에는 으스스한 이야기가 제격인지도 모릅니다. 빅토리아시대의 유럽사회의 면모를 살펴보는 즐거움을 덤으로 얻을 수 있는 레슬리 클링거가 주석을 단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로 등줄기에서 한기를 느껴보시는 것은 어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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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논어를 읽으며 장자를 꿈꾸고 맹자를 배워라 1 - 절대지식 동양고전 죽기 전에 논어를 읽으며 장자를 꿈꾸고 맹자를 배워라 1
김세중 엮음 / 스타북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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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의 ‘2013 상반기 블로그 결산 인기도서 이벤트’에 참여하면서 고심 끝에 고른 책입니다. 고른 이유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그 첫 번째는 출판사의 책소개에 있는 글제목 ‘군자(君子)와 도인(道人)을 거울삼아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다’처럼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가 될 것 같아서입니다. 그 두 번째는 글쓰기를 풍성하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연암 박지원의 산문과 시를 엮은 주영숙님의 <눈물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20858>에 소개된 글쓰기에서의 법고창신(法古創新)에 대한 연암의 생각을 배워 제대로 법고(法古)할 길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는 우리네 속설대로였다고 하겠습니다. 어쩌면 공자, 장자 그리고 맹자에 대하여 아는게 없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읽기도 숨찰 정도로 긴 제목의 이 책은(편의상 <논어, 장자 그리고 맹자>로 줄여보겠습니다.)은 ‘깨달음을 본받다, 논어’, ‘도를 꿈꾸다, 장자’, ‘덕을 이야기하다, 맹자’라는 작은 제목 아래 각각 서른세 꼭지의 글을 엮었습니다. 각각의 글은 원전의 구절을 제목으로 하고[예를 들면 ‘명분이 바르지 아니하면 말이 이치에 맞지 않다(名不正則言不順)], 이어서 이야기의 핵심을 요약한 부분을 앞에 두고, 이어서 원전구절이 나오게 된 배경을 설명한 다음, ’명언의 역사적 사례‘로 원전 구절과 비슷한 사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동아시아인들의 사상 속에 녹아있는 고대 중국의 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논어>, <장자>, <맹자>를 읽어 자아를 통찰하고 세상을 관찰하고 지혜를 얻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적었습니다만, 방대한 원전에서 나름대로는 고심 끝에 골랐을 것으로 보이는 아흔아흡 꼭지나 되는 주옥같은 말씀을 담아내려는 욕심이 지나쳤던 탓인지 원전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지 못한 사례들이 적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장자>편에서 공자를 인용하는 등, 고대 중국철학에 지식이 일천한 까닭에 수긍하기 어려운 글들이 곳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첫 번째 글을 마무리하면서 “즉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만 명분이 바로 서게 되고 이와 더불어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자로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자 공자는 ‘명분이 바르지 아니하면 말이 이치에 맞지 않다.’는 말과 함께 명분의 중요성을 자세히 설명해줬다.(18쪽)” 자로도 이해해서 공자님께서 해주셨다는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면 저와 같이 우둔한 독자는 어떻게 이해하란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물의 신 공공(共工)과 전쟁을 치루는 과정에서 우임금은 영을 받지 않은 방풍씨를 참수했다는데 방풍씨의 키가 9m에 달했다는 고사를 들어서 공자는 오왕 부차가 월왕 구천과 전투를 치를 때 발견했다는 거대한 뼈가 방풍씨의 뼈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거대한 뼈조각은 화석이 된 공룡의 뼈였을 가능성이 컸을 것입니다. 직접 확인해보지 않은 것을 그저 전해오는 이야기를 듣고 아는 척한 것이 과연 잘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저자의 인용에 의문이 가는 점도 몇 곳에서 볼 수 있었는데, 예를 들면, “증국번은 한 연회에서 마장(馬掌)이라는 게이샤로부터 부탁을 받아 그녀의 이름으로 대련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160쪽)”고 적었는데 과문한 탓에 중국에도 ‘게이샤’라고 부르는 직종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눈앞의 이익에만 연연하여 등 뒤의 위험을 모른다(螳螂捕蟬黃雀在后; 당랑포선 황작재후)에서 춘추시대 오나라 왕의 사례를 인용하면서 어느 왕인지도 분명히 밝히지 않았을 뿐더러 어린 아들이 왕의 초나라 정벌을 말리기 위하여 (螳螂捕蟬黃雀在后)의 고사를 들어 왕을 설득했다는 설명이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왕의 측근의 아들이 혼자서 왕의 정원에 어떻게 들어갔는지도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법고(法古)할 길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했던 제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역시 힘이 들더라도 <논어>, <장자>, <맹자>를 읽고 뜻을 제대로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학문에 왕도는 없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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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 신들의 세계를 정복하다 즐거운 지식 68
윤동곤 지음 / 이담북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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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그리스-로마 신화, 특히 새로운 해석에 관심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윤동관교수님의 <제우스, 신들의 세계를 정복하다>도 이런 맥락에서 읽게 된 책입니다. 윤교수님은 서양의 학문, 역사, 문학, 미술, 음악, 연극 등 서구문화의 어느 분야에서건 그리스 신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즉 구전되어온 인간사회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의 탄생과 인간의 등장, 구 지배세력(신들의 세계)과 새로운 신흥세력(인간의 세계)의 조화와 대결이라고 이해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그리스 신화를 그리스 지역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지어 본다면, “청동기를 기반으로 한 신들의 세계와 철기를 토대로 한 인간 문명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사실 철기문화가 청동기문화보다 더 강력한 무기체계를 갖추고 조직이 잘된 사회조직이라고 하겠는데, 그리스 신화에서는 신들은 인간을 지배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적절한 비유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윤교수님은 방대한 분량의 그리스신화를 읽다보면 자칫 맥을 놓치기 쉬운 아쉬움이 있었기에 일관된 줄거리를 추출해서 요약함으로써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엮었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 신화를 재미있게 읽고 일상생활을 보다 풍부하게 가꾸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제우스, 신들의 세계를 정복하다>는 초등학교 고학년까지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꾸며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판도라의 상자에 관한 이야기에서 새로운 관점을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수확입니다. 사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서 불을 가져다 준 것에 분노한 제우스신이 판도라라는 이름이 여성을 만들어 에피메테우스의 짝으로 내려 보내면서 절대로 열어보지 말라는 주문과 함께 상자를 내주었고, 판도라가 이 상자를 열었을 때 인간의 신체와 영혼을 불행하게 만드는 온갖 것들이 쏟아져나오는 것에 놀란 판도라가 상자를 닫는 바람에 상자의 바닥에 있던 ‘희망’이 갇히고 말았다고 적은 책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갇힌 ‘희망’이 어떻게 인간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제게는 늘 의문이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온갖 것들을 붙잡아 상자에 가둔 것은 바로 프로메테우스이고 혹이 누군가 이 상자를 열게 될 경우를 상정해서 상자 안에 작은 상자를 넣고, 그 위에 “유사시에 열어볼 것”이라고 적어두었다는 것입니다. 이 작은 상자에 바로 희망이 들어있었던 것이고 판도라가 열어서 세상에 내보낸 불행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작은 상자를 열어 희망을 세상에 내보냈다는 것입니다(48쪽). 얼마나 합리적인 해석입니까?

 

참신한 해석을 하나 더 인용한다면 시지프스 신화입니다. 제우스와 하데스도 어쩌지 못했던 시지프스가 결국은 하데스로부터 높은 산의 기슭에 있는 바위를 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는 벌을 받게 되는데, 꼭대기에 도달하는 순간 바위가 다시 굴러 떨어지는 일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은 인간의 삶이 부조리함을 증거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카뮈는 무의미한 삶에 대하여 자살을 하거나 종교에 의지해서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긴 채 부질없는 희망을 갖는 정신적 자살도 비겁한 일이라고 그의 책 <시지프스 신화>에 신화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이 내린 징벌로 의미없는 노동을 치러야 하는 것에 좌절하여 스스로의 목숨을 끊거나 신에게 매달려 사면을 구걸하지 않고 자신에게 내려진 운명을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거기에 맞서고 있는 시지프스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삶의 모습이라고 할 ‘반항’의 원형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지프스 만세!

 

하지만 제우스와 테베의 공주 세멜레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디오니소스가 인간에게 술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쾌락과 즐거움 그리고 향연을 즐길 수 있게 해준 것은 불을 인간에게 전한 것과 비교될만 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디오니소스가 쇼펜하우어나 프로이트를 읽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 과연 적절한 비유라고 할 수 있을지 아쉬운 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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