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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 신들의 세계를 정복하다 ㅣ 즐거운 지식 68
윤동곤 지음 / 이담북스 / 2010년 10월
평점 :
요즈음 그리스-로마 신화, 특히 새로운 해석에 관심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윤동관교수님의 <제우스, 신들의 세계를 정복하다>도 이런 맥락에서 읽게 된 책입니다. 윤교수님은 서양의 학문, 역사, 문학, 미술, 음악, 연극 등 서구문화의 어느 분야에서건 그리스 신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즉 구전되어온 인간사회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의 탄생과 인간의 등장, 구 지배세력(신들의 세계)과 새로운 신흥세력(인간의 세계)의 조화와 대결이라고 이해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그리스 신화를 그리스 지역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지어 본다면, “청동기를 기반으로 한 신들의 세계와 철기를 토대로 한 인간 문명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사실 철기문화가 청동기문화보다 더 강력한 무기체계를 갖추고 조직이 잘된 사회조직이라고 하겠는데, 그리스 신화에서는 신들은 인간을 지배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적절한 비유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윤교수님은 방대한 분량의 그리스신화를 읽다보면 자칫 맥을 놓치기 쉬운 아쉬움이 있었기에 일관된 줄거리를 추출해서 요약함으로써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엮었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 신화를 재미있게 읽고 일상생활을 보다 풍부하게 가꾸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제우스, 신들의 세계를 정복하다>는 초등학교 고학년까지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꾸며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판도라의 상자에 관한 이야기에서 새로운 관점을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수확입니다. 사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서 불을 가져다 준 것에 분노한 제우스신이 판도라라는 이름이 여성을 만들어 에피메테우스의 짝으로 내려 보내면서 절대로 열어보지 말라는 주문과 함께 상자를 내주었고, 판도라가 이 상자를 열었을 때 인간의 신체와 영혼을 불행하게 만드는 온갖 것들이 쏟아져나오는 것에 놀란 판도라가 상자를 닫는 바람에 상자의 바닥에 있던 ‘희망’이 갇히고 말았다고 적은 책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갇힌 ‘희망’이 어떻게 인간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제게는 늘 의문이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온갖 것들을 붙잡아 상자에 가둔 것은 바로 프로메테우스이고 혹이 누군가 이 상자를 열게 될 경우를 상정해서 상자 안에 작은 상자를 넣고, 그 위에 “유사시에 열어볼 것”이라고 적어두었다는 것입니다. 이 작은 상자에 바로 희망이 들어있었던 것이고 판도라가 열어서 세상에 내보낸 불행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작은 상자를 열어 희망을 세상에 내보냈다는 것입니다(48쪽). 얼마나 합리적인 해석입니까?
참신한 해석을 하나 더 인용한다면 시지프스 신화입니다. 제우스와 하데스도 어쩌지 못했던 시지프스가 결국은 하데스로부터 높은 산의 기슭에 있는 바위를 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는 벌을 받게 되는데, 꼭대기에 도달하는 순간 바위가 다시 굴러 떨어지는 일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은 인간의 삶이 부조리함을 증거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카뮈는 무의미한 삶에 대하여 자살을 하거나 종교에 의지해서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긴 채 부질없는 희망을 갖는 정신적 자살도 비겁한 일이라고 그의 책 <시지프스 신화>에 신화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이 내린 징벌로 의미없는 노동을 치러야 하는 것에 좌절하여 스스로의 목숨을 끊거나 신에게 매달려 사면을 구걸하지 않고 자신에게 내려진 운명을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거기에 맞서고 있는 시지프스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삶의 모습이라고 할 ‘반항’의 원형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지프스 만세!
하지만 제우스와 테베의 공주 세멜레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디오니소스가 인간에게 술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쾌락과 즐거움 그리고 향연을 즐길 수 있게 해준 것은 불을 인간에게 전한 것과 비교될만 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디오니소스가 쇼펜하우어나 프로이트를 읽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 과연 적절한 비유라고 할 수 있을지 아쉬운 점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