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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달린 드라큘라
브램 스토커 지음, 레슬리 S. 클링거 엮음, 김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3월
평점 :
개인적으로는 호러영화에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만 올 여름에도 극장가에는 호러영화가 몇 편 개봉되어 관객을 모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호러영화의 대표적 주제이기도 한 흡혈귀에 관한 전설은 동양이나 서양 모두에서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흡혈귀하면 <드라큘라 백작>이 먼저 떠오르게 되는 것은 런던 라이세움극장 관리인 브람 스토커가 1897년 발표한 소설 <드라큘라>의 성공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샤를 보들레르가 1858년 발표한 시집 <악의 꽃>에 “넌 그 저주받은 노예 상태에서 / 건져 낼 가치가 없는 놈이야. / 어리석기 짝이 없는 놈! 우리가 아무리 애써서 / 너를 흡혈귀의 제국에서 건져 낸다 한들 / 넌 다시 입맞춤으로 흡혈귀의 시체를 / 부활시키고 말겠지!”라는 내용의 ‘흡혈귀(부분)’라는 시를 담고 있고, 에드바르 뭉크 역시 1894년 <흡혈귀>라는 제목의 그림을 완성한 것을 보면 19세기 유럽사람들은 이미 흡혈귀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가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던 작가적 요인으로 당시 실재했던 것들을 작품배경으로 삼아 리얼리티를 높인 것이 주효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판타지 소설<반지의 제왕>처럼 작가가 상상으로 구축한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독자의 관심을 끌 수도 있겠습니다만 호러소설에 등장하는 사건이 현실에서도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독자의 상상을 자극하는 것으로 공포심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을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호러소설에 큰 관심이 없는 제가 <주석달린 드라큘라>에 흥미를 가졌던 것도 바로 이 작품에서 19세기 당시의 유럽사회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알 수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에 새롭게 주석을 단 레슬리 클링거는 <셜로키언을 위한 주석달린 셜록 홈즈>를 통해서 빅토리아시대의 유럽사회의 매력에 빠진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서문에 적고 있습니다. 레너드 울프를 비롯한 몇 사람이 이미 스토커의 <드라큘라>에 주석작업을 했지만 클링거는 나름대로의 방식, 즉 출판된 스토커의 편지, 일기 그리고 기록물들을 검토하고 여기에 자신의 상상을 통해서 만들어낸 허구를 가미해서 스토커가 묘사한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처럼 보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읽어가면서 정말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기록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일단 책을 받으면 A4용지 사이즈에 가까운 커다란 크기와 764쪽에 달하는 두께로 1.7kg에 가까운 묵직함에 질리게 됩니다. 책을 들고 읽다보면 팔목이 시큰거리는 느낌에 자세를 자주 바꾸어야 하는 불편함때문에 완독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워낙이 방대한 양의 주석을 본문에서 가까운 곳에 정리를 하려다 보니 본문과 주석이 섞여 읽는 흐름을 끊어놓기도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클링거는 작품을 읽기에 앞서 흡혈귀 혹은 <드라큘라>의 배경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16세기의 과학적 설명에 근거를 두고 있던 흡혈귀에 대한 관심은 19세기 초반부터 점점 커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16세기의 과학적 설명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수혈에 관한 의학적 발견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16세기 영국사회에서 일어난 마녀사냥을 다룬 이언 피어스의 소설 <핑거포스트, 1663(1); http://blog.joinsmsn.com/yang412/12161443>에서도 수혈치료법이 등장하는데 다음에 설명하였습니다만, 작가의 고증이 충분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클링거의 주석과 빌 헤이스가 피의 역사를 정리한 <5리터: 피의 역사 혹은 피의 개인사;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29692>를 종합해 보면 1656년 영국의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이 새의 깃털을 이용해서 만든 일종의 주사기로 개의 정맥에 아편을 주사한 것이 계기가 되어 1665년에는 영국의 의사 리처드 로워가 대롱을 이용해 개의 동맥을 다른 개의 정맥과 연결하여 수혈하는 실험에 성공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발전하여 사람 사이에 수혈하는 치료법으로 발전하게 되었지만, 1901년 란트슈타이너가 ABO혈액형을 처음 발견하는 등 혈액형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어 수혈의 안전성이 확립되는 20세기 초반까지는 위험한 치료법이었습니다. 따라서 수혈법을 발견한 초기에 동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무분별하게 행하던 수혈을 금하는 조치가 1668년 내려졌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혈법을 꾸준하게 개량해온 것으로 보면 의사들 사이에서 수혈은 매력적인 치료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1888년에 나온 브리태니커백과사전 9판의 내용을 보면, “흡혈귀에 대한 믿음은 러시아, 특히 백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폴란드 세르비아와 같은 슬라브 민족들이 사는 지역과 보헤미아의 체코인들, 오스트리아에 사는 여러 슬라브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1730년과 1735년 사이에 흡혈귀에 대한 이야기가 헝가리에서 크게 유행했고,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흡혈귀 이야기들이 유럽 전역을 들끓게 하였다고 한다(24쪽).”고 적고 있어 흡혈귀에 대한 관심은 과학적 근거보다는 동유럽 사회에 전승되어온 민담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드라큘라>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로는 우선 드라큘라백작이 있는데, 그에 대한 개인기록은 거의 없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합니다. 다만 이 작품에서 드라큘라 본인의 진술을 통하여 ‘오래된 가문의 후손인 세케이인이고 트란실바니아의 귀족이라 했으며 터키와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군대를 지휘하였으나 자주 전쟁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는 동유럽 밖으로는 거의 여행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이나 스토커에 의하여 영국으로 진출을 시도하다가 이미 흡혈귀의 존재와 대항하는 법을 알고 있는 반 헬싱이 인솔하는 사람들에 쫓겨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죽음을 맞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마법으로 사람들을 움직이는 드라큘라백작에 대항하여 싸우는 드라큘라 사냥꾼들은 네덜란드출신의 의사이자 철학가, 저술가, 변호사, 민속학자인 아브라함 반 헬싱교수가 이끌고 있습니다. 이 팀에는 고용주를 대신하여 업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트란실바니아에 있는 드라큘라성을 방문했다가 백작의 정체를 알게 된 변호사 조너선 하커와 그의 약혼녀 미나 하커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설 정신병원을 운영하는 존 수어드, 드라큘라백작의 공격을 받아 영국인 최초의 흡혈귀가 되었다가 드라큘라 사냥꾼들에 의하여 죽음을 맞게 되는 루시 웨스턴라의 연인 아서 홈우드(나중에 고달밍 경이 됩니다.)와 미국 텍사스 출신의 퀸시 모리스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드라큘라백작의 조종을 받는 렌필드는 자발적으로 수어드의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정신병원의 이웃에 있는 은신처에 정착하려는 백작을 지원하게 되는데 나중에는 미나 하커에 매혹되어 백작을 배신하고 백작에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반 헬싱교수의 정체에 관한 주석을 보면, 스토커도 가명이라고 인정하고 있는데, 클링거는 스토커의 노트를 바탕으로 수사관 콧포드, 심령술 연구가 알프레드 싱글턴, 독일의 역사학자이자 철학사가인 막스 빈데쇼펠교수 세 사람을 섞어 한 인물로 설정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 책에 주석을 단 클링거는 “누가 봐도 빤히 알 수 있는 표절된 내용과 모순되는 내용들, 날조된 이름, 장소 날짜들과 가득 차 있는 이 작품은 드라큘라와 관련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출처로 보기는 어려우며, 작품에 기술된 흡혈귀 백작의 역사나 이름, 흡혈귀의 실제 특징, 그 많은 인물들의 알 수 없는 행동의 동기들도 역시 신뢰할 수 없다. 따라서 <드라큘라>는 브람 스토커가 흡혈귀의 강력한 통제 하에 하커 일지를 기반으로 쓴 소설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44쪽)”라는 알듯 모를 듯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사실 트란실바니아 지역에서 지내는데 별 불편함이 없어 동유럽을 떠난 적이 거의 없다는 드라큘라백작을 영국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스토커의 장치는 드라큘라성을 방문한 조너선 하커와 드라큘라백작의 대화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국이란 나라는 알면 알수록 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나라요. 난 사람들이 운집한 그 거리를 거닐고 싶소. (…) 그리고 런던의 생명력, 변화, 죽음 그리고 런던을 런던답게 만드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느끼고 싶소.(97쪽)” 대부분의 드라큘라 연구자들은 먹잇감이 많고 먹잇감들의 경계심이 덜한 새로운 사냥터를 개척하려는 의도로 해석한다고 합니다만, 스토커의 심중에 있는 빅토리아시대의 영국은 세상 사람들이 꿈꾸는 곳이라는 우월감이 반영된 것 아니었을까요?
조너선 하커를 자신의 성으로 불러들여 영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거점을 준비할 정도로 철저했던 드라큘라백작이 겨우 루시 웨스턴라 한 사람을 흡혈귀로 만들고 이내 정체가 탄로나서 고향으로 도망하게 되는 상황을 맞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서 고향을 목전에 두고 드라큘라 사냥꾼들에게 죽음을 맞게 되었다는 마무리는 요즈음 독자의 시선으로 보면 어설프다 싶습니다. 하지만 동유럽이라고 하는 생소한 지역에서 영국을 침범하려던 세력을 통쾌하게 무찔렀다는 승전보를 전하는 마무리가 아무래도 19세기 영국의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수혈에 대한 당시 영국사회의 인식을 볼 수 있는 장면이 눈을 끌었습니다. 흡혈귀가 된 루시를 죽여서 그녀에게 안식을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드라큘라 사냥꾼들이지만 그녀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각각 달랐던 모양입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옆에 있던 아서가 루시에게 자신의 피를 수혈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하자, 반 헬싱교수의 얼굴은 창백해졌다가 금방 다시 붉어졌다. 아서는 그때 이후로 자신과 루시는 실제로 결혼한 것처럼 느껴졌으며, 하나님의 눈에도 루시는 자신의 아내로 보일 거라도 말했다. 우리 중 누구도 루시가 또다시 수혈을 받았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361쪽)” 반 헬싱교수 역시 루시에게 수혈을 해주었던 것인데 주석에 따르면, 도덕적으로 엄격했던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성관계가 지닌 도덕적, 종교적 의미를 수혈에 부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의학을 전공한 반 헬싱교수가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이 의외라고 하겠습니다.
<드라큘라>에서도 등장합니다만, 백작의 등장과 맞물려 나타나는 박쥐를 백작이 변신한 것으로 믿고 있는 것으로 보아 흡혈귀 전설은 아무래도 흡혈박쥐와 관련이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흡혈박쥐과(吸血─科 Desmodontidae)에 속하는 흡혈박쥐류에는 보통흡혈박쥐(Desmodus rotundus), 흰날개흡혈박쥐(Diaemus youngi), 털다리흡혈박쥐(Diphylla ecaudata)의 3종(種)이 있는데, 아메리카의 열대지방 원산으로 겁이 많고 꼬리가 없으며 갈색털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주로 포유동물과 조류와 같이 조용히 쉬고 있는 온혈동물에 날카로운 앞니로 작은 상처를 낸 다음에 흘러나오는 피를 핥아먹는다고 합니다. 흔히 소와 같은 가축을 공격하고, 때로는 사람을 물기도 하는데, 흡혈박쥐가 물어뜯은 상처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으나 상처를 통하여 광견병과 같은 치명적인 전염병이 옮겨질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흡혈박쥐의 이타적 행동이라고 하겠습니다. 흡혈박쥐는 60시간동안 피를 먹지 못하면 굶어죽을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동물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야 하기 때문에 마땅한 상대를 찾지 못하거나 찾았다 해도 상대에게 들켜서 피를 빨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굶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하루에 필요한 양보다 많이 피를 빨아온 박쥐가 피를 빨지 못하고 돌아온 박쥐에게 피를 토해서 나누어주는 것이 확인되었고, 이는 상황이 바뀌면 보답을 하는 호혜적 반응으로 이타적 행위가 집단의 생존을 위한 보완장치로 해석하고 있습니다.(매트 리들리 지음, 이타적 유전자, 2001년, 93쪽; http://blog.joinsmsn.com/yang412/13147182)
마른장마가 끝을 보인다고 합니다만, 많이 덥습니다. 역시 무더위에는 으스스한 이야기가 제격인지도 모릅니다. 빅토리아시대의 유럽사회의 면모를 살펴보는 즐거움을 덤으로 얻을 수 있는 레슬리 클링거가 주석을 단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로 등줄기에서 한기를 느껴보시는 것은 어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