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클래식 - 우리 시대 지식인 101명이 뽑은 인생을 바꾼 고전
정민 외 36명 지음, 어수웅 엮음 / 민음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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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조선일보에서 기획하여 책읽는 분들의 큰 관심을 모았던 <파워클래식>이 단행본으로 나왔습니다. ‘우리 시대의 지식인 101명이 뽑은 인생을 바꾼 고전’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조선일보의 파워클래식은 부제가 말하는 것처럼 책말미에 소개하고 있는 101분으로부터 세권의 고전을 추천받고, 이 가운데 가려 뽑은 고전과 특별한 인연을 가진 각계의 명사들이 자신과 그 책과의 내밀한 인연을 담은 글을 매주 월요일 소개해왔다고 합니다. <파워클래식>에서는 그 가운데 가려 뽑은 37권의 글과 기획하신 어수웅기자님이 해당 고전과 작가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책을 읽은 분들 가운데 왜 나에게는 추천의뢰나 집필의뢰가 오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생길법 합니다만 그냥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당연한 선정이라는 생각이 드는 책들이 대부분입니다만, 어떤 책이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만 ‘이 책도 뽑혔구나’ 싶은 책도 없지는 않습니다.  이 기획이 진행되면서 많은 독서인들이 뜨겁게 호응했다고 엮은이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저 역시 열심히 지켜보고 참여했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소개하고 있는 책을 따라 읽거나 읽을 준비를 하고 있는 책도 10권이나 됩니다. 그리고 예전에 읽은 책들도 11권 정도 되는 것으로 보아서 선정된 대부분의 책들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역시 서문에 소개된 것처럼 선정된 책을 두고 진행된 북콘서트에도 참석한 적도 있습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님과 문학평론가 강유정님이 진행하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습니다. 열혈독자들이 그리 좁지 않아 보이는 객석을 가득 채운 가운데 뜨거운 열기 속에서 진행된 북콘서트는 작가에 대하여 그리고 작품에 대하여 인식의 깊이를 더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2847499).

 

이번 기획을 위하여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읽고 ‘자유’에 대한 조르바식 질문에 견디다 못해서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문화심리학자 김정운교수님과 같은 파격적 감동까지는 몰라도 그리스 사람의 역사인식과 삶에 대한 생각을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젊어서부터 즐겨듣던 노래< 조르바의 춤>도 다시 찾아 듣게 되었습니다. 덧붙인다면 김정운교수님의 경우처럼 책을 읽는 사람마다 그 느낌이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뻐꾸기둥지 위로 날아간 새>처럼 원작이 아닌 영화로 만난 경우도 있습니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 http://blog.joins.com/yang412/13089182>처럼 원작을 다시 해석한 경우에는 재해석된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도 충분히 즐길만 하지만, 그래도 영화만으로는 원작의 깊이를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아쉬움이 있을 수 있기에 원작을 찾아 읽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보니 <안나 카레니나>는 <파워 클래식>에서도 다룬 작품입니다. 문학평론가 김미현님은 “안나는 소위 불륜을 불륜답지 않게 온몸으로 실천했기에 유죄이자 무죄이다.(109쪽)”라고 적었습니다만, 저의 경우는 단순히 감성적 사랑과 이성적 사랑을 대비시키는 구도보다는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두고 생각을 많이 한 책읽기였던 것 같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3076051).

 

이 점에 대해서 엮은이도 “소설은 안나가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지는 장면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레빈의 도덕적 탐색 및 개인과 공동의 생활을 새롭게 하려는 시도로 끝난다. 여러 겹으로 읽을 수 있는 <안나 카레니나>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라고 적고 있는 것처럼, 읽는 독자에 따라서 혹은 같은 독자라도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고,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책들이 가지고 있는 힘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책에 담은 37권의 고전을 소개하는 이는 어떻게 읽었고 내가 읽은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보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직 읽어보지 못한 고전을 가늠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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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학과 생명윤리 - 생명과 과학의 공존을 바라보다 생명문화총서 2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 엮음 / 한국학술정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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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소속 국가생명윤리위원회의 ‘무의미한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권고안 초안’에 대한 공청회가 지난 5월 29일 연세의대 강당에서 열렸습니다. 이날 공청회에서 의료계, 종교계, 환자단체들은 모두 무의미한 연명의료의 중단을 결정하는 절차가 필요가 있다는 점에는 대체로 인식을 같이했지만 이를 법제화하는 것에는 입장차이를 보였다고 합니다.

 

종교계는 이 제도가 소극적 안락사로 변질하지는 않을까하는 우려를, 환자단체에서는 환자와 가족이 치료 중단 선택을 사실상 강요당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고 합니다. 아마도 지난해 말 건강보험공단과 병원협회가 수가협상을 진행하면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는 부대조건에 합의하였다는 소식이 전달되면서 일었던 의료윤리문제의 논란의 여진이 남아있는 탓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 체결된 부대합의문에 명시된 ‘협회는 만성질환 예방 및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등 국민운동을 전개한다. 단, 목표지표를 설정하고 그 성과에 대한 별도의 인센티브를 고려할 수 있다’는 조항이 해석에 따라서는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의 문제를 경제적 논리로 접근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보라매사건을 계기로 의료현장에서 관행적으로 이루어져왔던 연명치료문제가 수면위로 부상하고, 세브란스병원의 김할머니사건을 통하여 법률적 판단의 개입이 필요한 상황이 되기까지 연명치료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연구가 진행되어 이제는 제도화에 이르게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의학의 발전에 따라 과거에는 문제되지 않던 다양한 윤리적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의료현장에서 부딪히는 윤리문제들은 이제 의료계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양한 분야에서 관심을 두고 연구한 결과를 공유하고 최선의 해답을 구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생명의 존엄성’을 화두로 하여 종교, 인문학, 사회과학, 생태학, 의학, 자연과학 등의 영역에서 생명과 반생명에 관한 담론을 이끌면서 대안적 생명문화들을 연구해온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가 내놓은 <생명과학과 생명윤리>에 관심이 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생명과 과학의 공존을 바라보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에서는 생명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시작으로, 뇌사판정의 기준문제, 연명치료 문제, 재생의학, 줄기세포연구와 관련한 난자에 대한 인식, 유전자특허에 관한 윤리적 논의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편집을 맡은 심현주박사는 생명과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죽음을 수용하는 자세가 변하고 있어 이와 같은 논의가 필요하게 된 것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편집자가 쓴 서론의 모두에 인용되어 있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과 죽어감>에 나오는 다음 구절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슈의 필요성을 압축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죽음의 진실을 점점 더 두려워하고 부정하게 되었다. 사회적 의미에서 죽음의 부정은 사람들에게 살아갈 희망과 목적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불안을 가중시켰고, 진실을 외면하고 자기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는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키웠다. 미래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생명과 직결되는 신체 기관들을 기계로 대체하고 생명을 연장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삶과 죽음, 장기기증과 수혜자에 관한 논란 역시 복잡해질 것이다. 법적, 도덕적, 윤리적, 심리적 문제들이 제기될 것이고 인류는 삶과 죽음에 관한 수없이 많은 질문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9쪽)”

 

먼저 생명론에 대한 논의에서 소광희교수님은 과학적, 철학적, 종교적 차원에서 생명에 대한 인식이 변화해온 과정을 요약하였습니다. 종교적 차원의 생명에 대한 인식을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생명을 물활론적, 즉 범생명적인 것으로 보고 있으며, 철학적 차원에서는 인간의 삶의 방식, 즉 윤리적인데 관심을 두고, 과학적 차원(주로 생물학)에서는 층구조에 기반한 기계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진화론의 대두로 이런 설명이 가능해졌다고 보았습니다. 필자는 생명존중은 사랑을 바탕으로 하되 그 사랑은 인간에 국한되어서는 안되며 자연에까지 연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생명과학은 인간을 비롯한 생물계의 본질을 규명하는데, 즉 자연을 아는데 공헌해야 하며, 윤리학은 생명보호에 앞장서고, 종교는 하찮은 미생물도 신의 의해 창조된 거신 만큼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는 고귀한 심성의 교화에 힘써야 할 것이라 결론짓고 있습니다.

 

맹광호교수님은 논의의 대상을 인간의 생명으로 좁혀서 의학적 측면에서의 인간생명을 논하고 있습니다. 의학은 전통적으로 인간생명과 그 생명현상을 보호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왔지만, 인간생명의 탄생과 죽음에 대하여는 수동적인 자세를 견지해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료기술의 발전에 따라 기계론적 생명관이 대두되면서 변화가 일어났는데, 대표적인 사례로는 인공적 피임기술과 인공임신중절수술 기술, 인공수정과 시험관아기 출산기술, 태아진단 기술, 장기이식을 포함한 생명연장 기술 생명체의 합작과 조작 기술, 그리고 안락사 시술 등이 있습니다.

 

맹교수님은 기술이란 일단 개발되면 빠르게 확산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의학분야의 기술은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문제라서 기술의 발전을 기다리는 환자가 항상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확산속도가 빠른 것이 특징이라고 전제하고, 올바른 의학적 생명관의 정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지금까지의 인류문명의 역사는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보다는 인간의 본래적 존엄성마저 잃게 하는 기술개발에 열중하고 있는 경향을 경고하고, 인간성에 바탕을 두지 않은 모든 학문과 기술은 결국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역사적 교훈을 새길 필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장기이식술의 발전에 따라 사망의 기준이 전통적으로 내려온 심장사(心臟死)에서 뇌사(腦死)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뇌사의 정의에 대한 하버드 의대 위원회 보고서>를 계기로 ‘회복 불가능한 혼수상태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서’ 인정하자는 입장으로 전환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한없이 계속되는 혼수상태가 환자와 환자가족 및 의료자원에 지우고 있는 부담을 줄이고, 이식수술용 장기의 획득을 둘러싼 논쟁을 피할 수 있다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뇌사와 장기은행과 관련하여 죽음을 실용적으로 재정의하게 된 것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북소리]에서도 다루었던 한스 요나스교수님의 <기술 의학 윤리; http://blog.joins.com/yang412/12420243>에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요나스교수님이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영역에서 행해지는 죽음의 대한 규정은 더욱 엄격하게 이루어져야 하며, (…) 무슨 일이 있어도 환자는 의사가 그의 사형집행인이 되거나 그의 죽음을 정의할 수 있도록 전권을 위임해서는 안된다.(한스 요나스 지음, 기술 의학 윤리, 215쪽)” 라고 한 이유는 우리가 아직 삶과 죽음 사이의 정확한 경계선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가 뇌사판정에 관하여 아직까지 공식적 가르침을 공표한 바 없음에도 로마 알폰시아눔 대학원의 윌리엄 비히교수님은 뇌사판정의 기준에 관한 윤리적 검토를 통하여 “죽음이 일어난 후에 자신의 기관을 기증함으로써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삶을 연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일은 윤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며, 심지어는 거룩한 행위이다.(84쪽)”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생명유지를 위한 의무의 한계와 죽음의 판정 및 기준에 관하여 광범위한 고찰을 통하여 죽음판정을 위한 뇌사기준은 충분히 발전되어 왔고 타당한 정의가 내려져 있다고 보기 때문에,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된다면 뇌사판정의 기준은 윤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신빙성과 확실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습니다.(83쪽)

 

앞서 인용한 무의미한 연명의료의 중단과도 관련된 사안은 울산의대의 김장한교수님이 다루고 있습니다. 뇌사, 존엄사, 지속적 식물인간상태를 정의하고 카렌 퀸란양과 낸시 크루잔양의 사례를 인용하여 치료중단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지속적 식물상태에 대한 의학적 접근으로는 식물상태를 진단하는 기준에 관하여 임상증상과 진단에 필요한 최소관찰기간, 진단기준을 적용하는 나이 등을 고찰하고, 지속적 식물상태 환자에 대한 치료수준 그리고 환자 가족이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 등을 논하였습니다. 존엄사의 본질이 ‘삶의 질’의 측면에서 본 생명유지에 대한 가치평가이며,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연장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미끄러운 비탈길’의 논리에도 불구하고 인용의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개진하고 있습니다.

 

신체의 결손을 해결하거나 파킨슨병, 루게릭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과 같은 난치성질환을 치유하는 방안으로 생체이식, 인공장기의 이식, 자체복원력의 극대화에 의한 자연적 치유 기술 등이 적용되고 있지만 아직 많은 제한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가운데 생체 이식의 제한점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대두된 것이 줄기세포치료기술입니다. 줄기세포란, 무제한적인 분열 능력을 가지는 미분화상태의 세포로서 다양한 종류의 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최근 일본에서 인체 줄기세포를 이용하여 실험실내에서 미니간을 만들어냈다는 뉴스가 화제가 된 바 있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3172317).

 

줄기세포를 얻는 방법에 따라서 성체줄기세포, 제대혈줄기세포, 배아줄기세포 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배아줄기세포의 경우는 수정란에서 시작되는 배아로부터 얻는 것이기 때문에 수정란을 얻는 방법에서부터 배아로부터 줄기세포를 얻는 과정에 대한 윤리적 문제와 배아줄기세포가 가지고 있는 부작용에 관한 의학적 문제까지 산적해 있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단순히 무지의 공포에서 떨기보다는 희망을 가지고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열린 마음으로 우리의 장래를 개척해 나가는 자세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130쪽)”고 맺은 김원선교수님의 글은 논의되어야할 사안들이 충분히 검토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리고 배아줄기세포 기술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난자의 제공에 대한 사회학적 측면의 문제를 파헤친 조주현교수님의 글에서는 여성의 재생산건강권(의학용어로서 reproduction은 재생산이라기보다는 생식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복제기술이 적용되지 않는 한 남성이건 여성이건 독자적으로 인간을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은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원에서 난자제공을 다루고 있는 점이 특이하지만 지나친 확대해석이 아닌가 싶다는 생각입니다. 아마도 배아복제기술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황우석교수님의 사건의 본질 가운데 하나였던, 연구원을 비롯한 자원자로부터 기증받은 혹은 매매를 통하여 얻은 난자로 실험이 이루어졌다는 의혹에서 나온 논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더 나아가 해방후 국가가 주도한 출산과 관련된 제반정책을 보면 여성의 건강에 대한 충분한 배려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에서 발전하여 국가주의의 강화, 가부장적 가족의 유지, 그리고 출산의료기술의 확산 아래 여성의 모성이 도구화되어왔다는 주장은 논의점이 있다고 보입니다.

 

최근 미국 연방대법원이 인간 유전자(DNA)는 ‘자연의 산물’이므로 특허권을 부여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놓았다는 소식과 관련하여 가톨릭대학교의 이상헌교수님이 다룬 유전자 특허와 관련된 글도 관심이 가는 주제입니다.

 

요약하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은 관련분야에서 오랫동안 논의해온 것들인 까닭에 오래 전에 발표된 내용이기는 하지만 출간을 앞둔 시점에서 최신지견을 반영하여 수정보완했다고 합니다. 생명과학은 뜀박질하는 상황에서 생명윤리의 논의는 거북이걸음이라는 느낌입니다만 그래도 꾸준한 노력이 좋은 결실을 맺을 것이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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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일찍 나이 들어버린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 2 너무 일찍 나이 들어버린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 2
고든 리빙스턴 지음, 노혜숙 옮김 / 리더스북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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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든 리빙스턴의 책들을 읽고 있습니다. 세 번째 책입니다. 정신과의사이자 심리치료사인 그는 참 매력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상담을 원하는 분들에게 다른 치료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 같습니다. 흔히 상담을 원하는 사람들은 삶이 주는 고통에 대하여 위로받고 명쾌한 해답을 듣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의 치료철학을 함축하고 있는 구절을 발견하였습니다. “삶은 때로 우리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주고 시간과 운명의 무거운 짐을 견디어낼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이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도움을 주는 사람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위안을 받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44쪽)” 이런 그의 철학은 두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고통을 겪었고 베트남전에서 많은 죽음을 직접 목격하였기에 얻은 것이라서 더욱 절절한 것 같습니다.

 

심리상담은 보통 소크라테스식으로 진행된다고 합니다. 심리치료사는 적절한 질문을 던져서 상담을 받는 분들이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상담을 받는 사람들은 치료사가 특별한 조언을 해주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치료사들이 그런 인식을 심어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정신과의사로서 그는 상담하고 약물을 처방하는 전통방식의 효과에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환자 스스로가 변해야겠다는 의지를 가져야만 변화의 물꼬를 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면증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수면제를 처방하기보다는 원인을 먼저 찾기 위하여 노력하고, ‘잠드는 것’을 환자의 관심 우선순위에서 낮추게 되면 초조한 기분이 사라지면서 잠을 잘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약물보다는 상담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몸과 마음의 건강을 생각하는 방식에서 흥미로운 구절을 찾았습니다. “만일 각종 매체들이 우리가 언제 어디서 광우병에 걸릴지 모른다고 두려움을 자극하면 스테이크를 먹는 즐거움을 거부하게 될 것입니다.(135쪽)” 바로 2008년 우리사회를 혼란에 빠트렸던 제2차 광우병파동의 핵심을 짚은 것입니다. 아마 지금도 쇠고기를 먹지 않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광우병소가 처음 발견되었을 무렵 아마도 2004년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의 국립환경보건연구원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만났던 분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미국에서 광우병이 확산된 가능성과 쇠고기를 먹는 문제를 물어보았지만, 큰 문제가 될 것 없다면서 쇠고기 먹는 것을 피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라는 답을 들었습니다. 미국의 도축시스템이 그때보다 더욱 강화된 시점에서 미국산 쇠고기를 먹을 기회가 더 적을 우리나라에서 더 요란을 떤 셈입니다.

 

나이들어감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만큼 나이먹는 것에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늙어간다는 사실을 죽음만큼이나 두려워하는 세상이 된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도 우리 처지를 말하는 것 같은 재미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회에 존재하는 세대간의 갈등을 감지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노인들의 느린 동작과 무능함에 대한 농담들, 운전에 부적합한 나이가 얼마인지를 놓고 벌이는 토론, 나이를 근거로 한 폄하와 차별 등에서 언젠가 자신들도 늙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179쪽)”

 

“바로 그 늙은이들이 없었다면 자네 같은 젊은이들도 없었을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알려주고 싶습니다만 저자는 나이를 먹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이고 그때의 젊은이들에게 같은 대접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우회적으로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지난 대선을 기점으로 확연하게 드러난 우리사회의 세대간의 갈등을 더 이상 방치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옮겨보았습니다.

 

인생은 시행착오에 의한 학습의 결과이고, 지나간 잘못과 실수를 통해 교훈을 얻고 개선과 변화를 시도할 수 있기에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발전해나갈 수 있는 것이라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돌아보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마음을 얻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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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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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를 타보기 전에는 ‘공항’하면 ‘이별’이란 단어가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문주란씨가 불러서 히트를 쳤던 ‘공항의 이별’의 영향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학회참석차 혹은 공무로 비행기를 타는 일이 많아지면서부터 ‘공항’은 ‘출발’ 혹은 ‘여행’이라는 단어가 우선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아직은 순수하게 관광을 목적으로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는 탓에 설레임보다는 은근한 압박감을 안고 떠나는 여행이다 보니 공항에서도 들고가는 일에 매달리는 경우가 많아 공항을 찬찬히 살펴보는 시간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일을 마치고 귀국길에 만나는 외국의 공항 역시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 구경하는 일보다는 들고갔던 일을 마무리하고 난 다음에 쏟아지는 피로감에 어서 비행기를 타고 싶다는 생각, 혹은 비행기가 제 시간에 떠날까하는 걱정에 더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여행의 기술; http://blog.joins.com/yang412/13104741>에서 공항에 대한 작가의 소회의 단편을 읽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만, <공항에서 일주일을>은 지금까지 제가 공항에서 보낸 천편일률적인 시간을 알랭 드 보통은 어떻게 보냈을까 하는 궁금증 때문에 읽게 되었습니다. ‘1. 접근, 2. 출발, 3. 게이트 넘어, 4. 도착’으로 글을 구분하여 쓴 것으로 보아 공항을 통하여 어디론가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과정이 될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들어본 기억이 없는 최초의 ‘공항상주작가’라는 이색적인 경험을 하게 된 보통의 입장에서 보면 공항에서 상주하면서 맡은 일을 시작하고 마무리하기까지의 과정을 나눈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작가 자신은 데번셔 백작들의 재정지원을 받아 책을 쓰고 그들에게 화려한 헌사까지 바쳤다는 토마스 홉스의 사례를 인용하면서, 자신은 히드로 공항에 임시직이었지만 상주작가로 고용되면서 아무런 요구를 받지 않았음을 강조하여 자신의 도덕성을 강조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만, 사실은 누구나 보통의 맛깔나는 글솜씨와 그의 명성을 염두에 두고 색다른 방향에서의 공항 홍보전략의 하나로 그를 초청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일 것 같습니다. 특히 일반 여행객은 당연하고 공항에 상주하는 직원들도 출입할 수 없는 제한구역까지도 돌아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고, 사람들이 왕래하는 공항로비에 책상을 두고 집필하는 모습을 일반인들이 볼 수 있도록까지 한 것을 보면 그가 어떠한 말로 설명하더라도 저의 생각을 바꾸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몇 해 전에 영국의 전염병관리정책을 살펴보기 위한 짧은 출장길에 히드로공항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습니다만 작가처럼 히드로의 속살까지 살펴볼 수는 없었습니다. 공항에서는 소피텔이라고 하는 공항호텔을 보통에게 숙소로 제공하여 24시간 공항을 살펴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하는데, 사실 저도 공항구역에 있는 호텔에서 하루 정도 묵어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특히 비행기를 놓치고 연결편을 타기 위하여 하루밤을 머물러야 하는 경우에 말입니다.

 

보통은 호텔시설에서부터 근무하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공항에서도 시설에서부터 근무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 관찰한 듯 적어내려가고 있습니다만, 그들의 삶 혹은 애환을 제대로 적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스티븐 스필버그감독의 2004년 작 영화 <터미널>에서 동유럽에서 날아온 톰 행크스가 좌충우돌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공항의 진면목이 아닐까합니다.

 

유명한 다큐멘타리 사진작가 리처드 베이커가 마치 보통과 함께 움직인 듯 찍은 히드로공항의 속살 같은 사진들은 분명 볼거리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공항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의 인터뷰도 글에 녹여냈다고 합니다만, 보통의 눈으로 본 것들을 그의 생각으로 풀어낸 것이란 느낌입니다. 가끔은 만나는 그의 독특한 시각은 그래도 이 책을 읽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비행이라는 의식은 겉으로는 세속적으로 보이지만, 이 비종교적인 시대에도 여전히 실존이라는 중요한 주제 그리고 세계의 종교 이야기에 그 주제들이 굴절되어 나타난 모습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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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뻔뻔한가 - 부도덕한 특권 의식과 독선으로 우리를 욱하게 하는 사람들
아론 제임스 지음, 박인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살다보면 무례하고, 잘난 체하고, 뻔뻔하기까지 한 사람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경험을 누구나 한번쯤은 해보셨을 것 같습니다. 뇌구조는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한 사람들을 어떻게 상대를 해주시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 뻔뻔함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치열하게 싸운 적은 없으신지요. 아니면 ‘X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고 생각하시면서 상대조차 하지 않으시는지요. 저도 그런 경우를 여러 번 경험했다 싶은데, 막상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면서 저 자신은 남에게 그런 상처를 준적은 없는지 절로 돌아보게 됩니다.

 

한마디로 요약해서 부를 마땅한 말을 찾기가 어려운 이런 사람들을 심층분석하고, 상대하는 방법도 안내하는 책이 나왔습니다. 캘리포니아대학 어바인 캠퍼스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아론 제임스교수가 쓴 <그들은 왜 뻔뻔한가>입니다. 이야기들을 묶은 제목에서부터 저자의 의도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1장 무례하고 잘난 체하고 뻔뻔한 사람들, 2장 어딜 가나 이런 사람들 꼭 있다. 3장 전혀 새로운 골칫덩이들이 몰려온다. 4장 그들은 욕먹어도 싸다. 5장 언제까지 당하고만 있을 것인가. 6장 자본주의가 위험하다. 7장 현실을 인정하면 희망이 보인다. 등입니다.

 

원저의 제목은 <Assholes: A Theory>입니다. 직역하면 항문이라는 의미의 단어를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살리는 우리말을 찾아 많은 고민을 한 끝에 ‘골칫덩이’로 했다는 옮긴이의 고충이 느껴집니다. 어쩌면 ‘지붕뚫고 하이킥’에 나왔던 해리가 부르는 ‘빵꾸똥꾸’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적당한 용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 골칫덩이를 정의하고 그들의 행위를 분석하고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 지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접근하고 있어서 흥미롭기까지 합니다만, 아쉬운 점은 골칫덩이를 조금 더 분명하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하겠다 싶습니다. 예를 들어. 습관적으로 새치기를 하는 사람, 걸핏하면 대화의 흐름을 끊는 사람, 도로에서 곡예 운전을 하는 사람, 집요하게 다른 사람의 잘못만 강조하는 사람, 본인의 무신경한 태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시당했다고 여겨질 때는 극도로 민감하게 구는 골칫덩이, 즉 개념없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1. 스스로 특전을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조직적으로 그렇게 한다. 2. 이러한 행동의 바탕에 뿌리 깊은 특권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3. 이러한 특권 의식으로 다른 사람의 불만에 면역되어 있다.(21쪽)“

 

저자는 미국에 특히 골칫덩이가 많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저자가 골칫덩이라고 콕 짚은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애플신화로 유명한 스티브 잡스, 파블로 피카소, 어니스트 헤밍웨이, 더글러스 맥아더, 랄프 네이더 등등 저자의 골칫덩이 명단에 오르지 못하면 명사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인 것 같습니다. 특히 주목되는 골칫덩이들은 미디어를 통해서 존재를 드러내려는 독설가들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의 방송가에서도 독설을 무기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분들이 간혹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트위터를 통해서 이슈를 생산하고 이를 언론이 받아주는 식으로 급부상하는 골칫덩이들을 보고 흉내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아 무언가 잘 못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자가 ‘겸손한 한국인, 눈에 띄는 미국인’이라고 제목을 달 정도로 한국에 대하여 호의적인 것이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골칫덩이를 대하는 좋은 방법은 있는 것인가? 저자는 일단 우리 자신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전제하고 개인적 차원의 골칫덩이 대처법은 많지 않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체념하거나 저항하는 방법도 최선이 될 수 없는 것은 웬만하면 그들을 피할 수 없는데다가 당신이 피한다고 골칫덩이가 당신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핵심은 자신만의 태도를 세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 에픽스테토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만약 누군가 너를 무례하게 대하거나 너에 대해 나쁜 말을 했다면 그 사람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176쪽)” 결국 자신이 꼬투리를 제공한 셈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길이 보인다는 것인데, 그 길이 무엇인지는 남겨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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