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니콜라스 카 지음, 최지향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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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만프레드 슈피처박사의 <디지털 치매; http://blog.joins.com/yang412/13166541>에서는 디지털 미디어의 급속한 발전은 젊은이 사이에서 중독 문제를 성인들에서는 인지장애를 나타낼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뇌는 진화의 산물로서, 오랜 세월을 거쳐 특정한 환경 조건에 적응해왔고, 단언컨대 이러한 환경조건에는 디지털 미디어가 속해 있지 않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문명화 질병이 과거의 생활방식과 현대의 생활발식 사이의 부조화 때문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디지털 미디어가 진화와 신경생물학적 부분에서 우리의 정신적 프로세스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 또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19쪽)”

 

슈피쳐박사는 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인지능력은 기억을 바탕으로 한 사고의 깊이에 따라 결정되는 것인데, 디지털미디어가 바로 사고의 깊이를 더할 수 없도록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네트워크가 내 집중력과 사고력을 무너뜨리고 있다. 내 머릿속은 이제 정보가 네트워크를 통해 전달되는 방법 그대로 적용되기를 기대한다. 미세한 입자들이 아주 빠른 속도의 전류를 타고 전달되는 식으로 말이다. (…) 내 친구들도 나와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네트워크를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글을 좀 더 길게 쓰려고 집중할 때마다 거의 전투를 벌여야 한다.(18쪽)”라는 구절을 니컬러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니컬러스 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미디어혁명과 인간 사고의 확장, 그리고 인터넷의 발달이 인간에 미치고 있는 영향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인터넷이 단순한 정보를 유통시키는 수단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미디어는 생각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생각의 과정도 형성하게 되는데, 결국 이용자의 집중력과 사색의 시간을 빼앗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인터넷이 숨 가쁘게 발전하고 있어 처음에는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를 헤엄치면서 여유있게 즐기다가 정보의 양이 폭주하면서는 저자의 말대로 제트스키를 타고 달리는 식으로 겉만 핥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저의 경우도 인터넷 글을 읽을 때 빠르게 훑어보는 버릇이 생기다보니 내용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자는 인터넷 사이트와 서비스에 익숙해지고 의존하게 되면서 습관과 일상생활이 많이 변하였을 뿐 아니라 뇌가 기능하는 방식도 바뀐 것 같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전의 뇌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인간의 뇌가 놀라울 정도로 복잡하게 작용하고 있고, 뇌는 우리가 사고하는 대로 바뀐다는 사실을 실험결과를 통하여 입증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대 페니키아시대에 문자가 처음 등장한 이래로 문자를 담은 문서로 기록하는 방식이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리뷰하고 문자가 우리의 사고에 미친 영향을 살피고 있습니다. 특히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개발하여 필경사에 의존하던 도서유통의 범위를 확대한 이래로 책읽기를 통하여 사고의 깊이를 더하게 된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이어서 인터넷의 발전이 가지고 온 효과, 특히 멀티태스킹의 부정적 효과 뿐 아니라 쏟아지는 정보양을 수용하기 위하여 혹사당한 뇌가 보이는 이상적 반응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앞서 인터넷 문서를 대충 읽게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를 스캐닝 방식으로 읽는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방식의 글읽기는 의미파악이 충분하지 않을 가능성과 특히 하이퍼텍스트로 연결되어 있는 정보를 같이 읽는 경우에는 전체문서의 개요를 정리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감소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키워드 몇 개를 가지고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은 인터넷의 긍정적인 활용방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우리가 어떤 주제에 대해 직접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련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213쪽)”라는 새뮤엘 존슨의 말을 인용하여 기억을 아웃소싱할 수 있다는 생각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기억을 불러내 새로운 시냅스의 말단을 만드는 작업을 반복하는 것으로 기억을 강화하고, 기억의 유연성과 깊이를 더하는 것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저자는 기억은 인간이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이 우리를 망각에 익숙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한 자료검색도 좋지만 부단한 책읽기를 통하여 기억에 지식을 저장하고 사유를 통하여 지식이 서로 연계될 수 있도록 노력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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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실체다 - 신사상 운동과 프렌티스 멀포드의 종교사상
프렌티스 멀포드 지음, 정형철 옮김 / 이담북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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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healing)이 대세라고 합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에 따르면 2000년 7건, 2011년 435건에 불과했던 ‘힐링’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기사의 수가 2012년에 지난해 9,385건으로, 그리고 올 들어서는 6월까지 만해도 1만 2,447건으로 급증했다는 것입니다.(서울신문 2013년 7월 13일자 기사, “몰아치는 ‘힐링 열풍’ 빛과 그림자”) 치유를 의미하는 영어가 언젠가부터 우리네 삶에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면서 너도나도 사용하다보니 치유를 행하는 주체가 애매해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힐링을 화두로 삼는 연예프로그램도 생겨 시청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하는데, 신변잡담에 머물거나 심지어는 초대손님이 숨기고 싶은 이야기까지 까발려 상처를 덧나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힐링’은 쌓이는 스트레스나 마음에 생긴 커다란 상처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다독여 온전한 상태로 되돌리는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힐링열풍이 불고 있는 현상은 우리들 삶이 그만큼 고단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설명에 공감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스트레스란 마음을 다스리기에 따라서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보면, 사람들이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 즉 독서와 사유로부터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힐링 프로그램을 통하여 위로와 다독임을 받았는데도 달라진 것이 별로 없어 실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힐링을 받을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라면 어떤 묘방을 써도 기대만큼 효험을 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한다는 힐링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요? 힐링이 마술 호리병에서 ‘퐁’하고 튀어나오는 지니처럼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개념은 아닐 것이란 생각을 하던 중에 우연히 읽게 된 프렌티스 멀포드의 <생각이 실체다>에서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힐링은 바로 19세기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태동한, 마음에 의한 치유를 구하는 ‘신사상 운동’에까지 그 뿌리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신사상 운동이 태동하게 된 배경에는 ① 4복음서, ② 초절주의 혹은 에머슨주의, ③ 버클리의 관념론, ④ 심령론, ⑤ 낙관주의적 대중과학 진화주의, 그리고 ⑥ 힌두이즘이 있었다고 합니다. 론다 번의 <시크릿>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프렌티스 멀포드는 신사상주의가 태동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1834년 뉴욕주 롱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멀포드는 20대 선원생활을 통한 다양한 모험을 배경으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가 1883년 뉴저지주의 어느 강가에 터를 잡고 사유와 집필활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런 선택에 대하여 멀포드는 다음과 같이 적은 바 있다고 합니다. “1884년 나는 보스턴으로 갔다. 이 지상에서의 어떤 새로운 사상 혹은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보스턴으로 갈 필요가 있었던 것은 어떤 신비로운 이유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화이트 크로스 라이브러리>를 시작했다.(17쪽)” 멀포드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호수가 생활을 연상케 하는 뉴저지 강가에서의 생활에서 얻는 사유의 결과를 담은 에세이를 발표하여 <화이트 크로스 라이브러리>에 수록하였고, <생각이 실체다>는 여기에서 발췌한 에세이를 엮어 1908년에 영국에서 발간된 것입니다. 한 세기 전에 발표된 글이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 가운데는 현대에 와서 개념이 바뀐 것들도 적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멀포드는 인간은 몸의 마음과 영의 마음이라고 하는 두 가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온갖 형태를 지닌 물질들의 배후에 있고, 어떤 점에서 보면 그 물질들을 창조하는 힘을 우리는 영이라 부른다.’고 전제한 멀포드는 ‘몸의 마음 혹은 물질적 마음은 전적으로 물질적 혹은 신체적 관점에서 보고, 생각하고, 판단한다. 반면 그 물질들을 창조하는 힘에 대한 지식을 통해 생명과 사물을 보고, 추론하며, 판단함으로써 우리는 영적 마음을 형성하게 된다.’고 정의하였습니다. 물질적 마음은 몸의 죽음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끝이라고 보지만 영적 마음은 몸의 죽음이란 단지 소모된 수단이 영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일 뿐이라고 봅니다. 쉽게 설명하면, 물질적 마음은 일을 추진하기 위해 사람들을 다룰 때 필요한 힘은 말이나 글을 사용하는 것과 같이 단지 설득하는 능력에만 있다고 보는 반면, 영적 마음은 당신의 이익을 위한 일이나 이익에 반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이 하도록 영향력을 주는 것이 다름 아닌 ‘당신의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마음이 치유능력을 가지는 것은 “완전한 건강, 쇠퇴로부터의 자유, 몸의 약함과 죽음의 극복, 신체의 한계를 벗어난 통행과 여행, 관찰의 능력 등을, 혼자서 하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건, 고요한 마음이나 생각의 작용과 작동을 통해 얻는 방법들을 알기 때문”입니다.

 

앞서 힐링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사람들이 생각했던 효과를 얻지 못해 실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만, 멀포드는 이미 한 세기 전에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습니다. “개선은 내부로부터 와야만 한다. 그것은 자율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전적으로 다른 사람의 존재나 영향에 의존해서는 개선이 될 수 없다. 만약 된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개선이다. 그러한 개선은 그것을 추진한 사람의 영향력이 제거되면 실패할 것이다.(70쪽)” 따라서 힐링을 인도하는 분도 힐링이 필요한 분이 스스로를 변하게 할 수 있도록 마음의 토양을 바꾸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최근 우리사회는 자신과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날선 공방이 오가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저지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현상은 편가르기를 좋아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만들어진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2008년 제2차 광우병파동 무렵부터 극심해진 것으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 뭉쳐 사상적, 논리적 대응을 하기 때문에 자신의 논리에 유리한 것들만 읽고, 반대편 논리에 유리한 것은 외면하는 극단적인 선택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주장을 두루 섭렵하여 근거의 경중을 따져 논리를 세워야 상대를 설득할 기회도 생기는 것입니다.

 

마음공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멀포드는 마음공부를 할 때 지켜야 할 점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잘 못을 보고 좋은 것은 하나도 볼 능력이 없는 편파적이고, 냉소적이며, 독설적인 마음들이 쓴 것들만 읽는다면, 우리는 그들의 불건강한 생각의 흐름을 우리 속으로 들어오게 하고 그것과 하나가 된다. 언제나 적의와 독설을 바른 화살은 그것을 쏘는 자에게 치명적인 것이 된다.(87쪽)” 편파적인 마음가짐은 부지불식간에 마음의 부담으로 남아 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공평하고 가치중립적인 생각의 흐름을 살리는 것이 힐링의 기본요건이 되는 셈입니다.

 

신사상이 힌두철학 특히 요가체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만, 멀포드는 북미 원주민의 삶과 동양철학에서 얻은 일종의 선(禪)에 가까운 생각을 적기도 했습니다. “모든 생각을 제거하고 마음을 완전히 비우게 하여 두려움을 느낄 수 없는 상태로 만들 수도 있고, 또한 이러한 정신 상태로 인해 몸이 아무런 신체적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107쪽)” 이는 마음이 몸을 지배하는 상태를 말하는데,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을 통하여 영적능력을 키움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경지라고 하겠습니다. 평소 천천히 생각하고 침착하게 생각을 집중하는 명상훈련을 통하여 마음이 늘 평정한 상태로 유지되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힐링이 갑작스럽게 대두되었던 것처럼 갑작스럽게 관심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은근과 끈기’를 특징이라고 하던 우리 국민이 어느새 ‘빨리빨리’로 특징이 변하게 된 것처럼 관심의 주기가 빨라졌기 때문입니다. ‘힐링’이 주목을 받기 전에는 ‘참살이(웰빙)’가 관심을 받았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은 힐링이 기울고 행복이 떠오르고 있다고 하는 분들도 계신 것 같습니다. 최근에 읽은 정신과의사 고든 리빙스턴선생이 <서두르다 잃어버린 머뭇거리다 놓쳐버린; http://blog.joins.com/yang412/13182130>에서 내세우고 있는 주제가 바로 행복이란 점이 생각납니다. 리빙스턴선생은 모든 생물이 그렇듯 사람 역시 혼자서 살 수는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서 삶이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는 벨기에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가 1906년에 발표한 <파랑새>라는 이름의 아동극에 나오는 파랑새가 행복을 의미하는데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 아동극이 우리의 행복은 먼 곳이 아닌 가까운 곳에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처럼 행복은 우리가 주변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달려있는 것인데, 결국은 관계라는 것도 마음에 따라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보면 “행복의 과학은 우리의 생각을 조절하는 데에 있고 건강한 삶의 원천들로부터 생각을 이끌어 내는 데에 있다.(136쪽)”는 멀포드의 행복에 관한 생각이 정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사랑이라고 하는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사랑은 비록 물리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공기 혹은 물과 같은 실질적인 엘리먼트이다. 그것은 행동하고 살아가고 움직이는 힘이며, 우리를 포함하는 보다 더 큰 생명의 세계 속에서, 물질적 감각에 의해서는 인식되지 않지만, 대양과 같은 물결과 흐름 속에서 움직인다.(143쪽)”라고 했습니다.

의학의 발전은 늙어감의 의미를 바꾸고 있습니다.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사람을 보냈지만 결국 불로초를 손에 넣지 못했던 진시황이 만약 시간여행이 가능해진다면 현대의학 아니 미래의학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황제의 자리를 포기하고 시간여행에 나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요즘 우리사회에 광풍처럼 불고 있는 불로(不老) 추구현상이 정작 필요한 젊은 정신은 외면하면서 젊은 몸만 생각하는 편향된 마음의 병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해봅니다.

 

멀포드는 늙어감 역시 마음에 달려있다고 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에 자리잡기 시작한 늙고 추한 모습의 이미지 혹은 형상에 대한 두려움이 몸의 영혼에 영향을 미쳐 늙어가는 표시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젊지 않다는 것은 상대적이며, 마음이 오래 될수록 이전의 많은 존재들로부터 얻어온 힘이 그만큼 더 많기 때문에, 몸의 젊음과 활기와 유연성은 더 잘 유지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멀포드의 생각을 풀어보면 독서와 사유를 통하여 선각자들의 깨우침을 공부하고 마음을 다스려나가면 정신이 건강해지고 결국은 몸의 건강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사상주의가 성경과 기독교에서 출발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신사상운동은 신(God)의 의지를 배우고 그 의지의 활동에 협력하는 것을 통한 치유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신중심적이라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중심주의적이기 때문에 제도권 종교계에서는 이단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영은 신, 즉 무한한 힘 혹은 위대한 신이 깃든 영의 일부이다.(183쪽)”라고 한 멀포드는 신을 정의하여 “최고의 능력과 최고의 지혜가 우주를 지배한다. 최고의 마음은 측량할 수 없고, 무한한 공간 안에 충만한다. 최고의 지혜, 최고의 능력, 최고의 지성이 원자로부터 행성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들 안에 있다.(28쪽)”면서 모든 것들이 신의 무한한 영혼의 부분이라는 것 그리고 모든 것들이 자신들 안에 선 혹은 신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 신을 특정 종교에 국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생각을 확산시킬 필요가 있다는 멀포드의 메시지가 담긴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류는 무엇인가 더 나은 것을 요구한다. 그 요구와 갈망은 수 세기 동안 확장되었고 증가되었다. (…) 인간의 삶과 그것이 관여하는 모든 것 속에서 새로운 빛, 새로운 지식, 새로운 결과가 이 땅에 도래하고 있다.(270쪽)” 물질적인 것에 매달려 정신의 발전에는 관심이 없는 우리에게 한 세기 전을 살았던 선각자가 주는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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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렉트라 지만지 고전선집 557
소포클레스 지음, 김종환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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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한류의 한축을 이끌고 있는 우리나라의 드라마에서 사극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극의 바탕이 되는 사료의 범위도 한계가 있어 같은 주제를 다시 극화할 때는 전작과는 다른 해석으로 역시 새로운 시각을 가진 시청자들을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제작방식이 때로는 역사를 왜곡한다는 지적도 나오곤 합니다만, 드라마는 작가와 연출가의 창의적인 해석에서 새롭게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 신화 역시 시대에 따라, 작가에 따라 새로운 해석으로 독자 혹은 관객을 만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트로이의 영웅 아가멤논 가문의 비극에 관한 신화는 그리스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가들의 손으로 해석되어온 주제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그리스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3부작 <오레스테이아; http://blog.joins.com/yang412/13137059>를 읽었습니다. 김의기님이 <어느 독서광의 유쾌한 책읽기; http://blog.joins.com/yang412/13128005>에서 소개하는 사르트르의 <파리떼>에서는 아버지 아가멤논의 복수를 위하여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의 정부 아이기토스를 살해하려는 오레스테스가 아가멤논의 죽음 역시 신들의 뜻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듯, 복수를 허락하지 않는 제우스신의 신탁을 거부하고 복수를 감행하면서 “나는 나의 자유죠. 당신이 나를 창조한 순간, 나는 이미 소유가 아니게 되는거죠. 당신은 신이고 나는 자유로운 존재죠. 우리는 각자 혼자예요.”라고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표현하였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신의 의지를 거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에서는 트로이에서 귀환한 아가멤논이 살해되고 그의 딸 엘렉트라가 남동생 오레스테이아를 국외로 빼돌리고, 외국에서 성장한 오레스테이아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복수를 한 다음에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저주에 따라 복수의 여신에 쫓기다가 아네타여신의 중재에 따라서 신과 인간이 화해하기에 이른다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는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엘렉트라를 중심으로 아가멤논의 죽음에 대한 복수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이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에서는 비중이 별로 크지 않은 엘렉트라를 소포클레스는 주연으로 기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킬로스의 남성중심의 해석에서 발전하여 여성인 엘렉트라를 복수극의 중심에 세우는 독특한 시도로 당시 그리스관객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엘렉트라>의 내용을 요약한 옮긴이의 해설을 보면, 서막에서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을 잊지 않고 있는 엘렉트라의 탄식으로 시작하여, 제1삽화에서는 엘렉트라와 여동생 크리소테미스 사이의 대화가, 제2삽화에서는 아가멤논의 살해에 대한 엘렉트라와 클리타임네스트라 사이의 논쟁과 오레스테스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엘렉트라는 절망하게 됩니다. 제3삽화에서는 오레스테스가 살아있는 것 같다는 크리소테미스의 전언과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엘렉트라의 대화로 구성되고, 제4삽화에서는 죽음을 가장했던 오레스테스가 정체를 밝히고 복수를 다짐하고 마지막 종막에서는 복수가 완성됩니다. 이 과정에서 아가멤논 가문의 비극에 신의 의지는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지금을 살고 있는 저의 시각으로는 등장인물들이 내세우는 복수의 이유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 시대의 윤리적 판단으로는 복수가 가능하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르는 악순환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에 등장하는 엘렉트라와 크리소테미스의 대화내용을 읽다보면, 그의 비극 <안티고네>에 등장하는 안티고네와 동생 이스메네의 모습과 겹쳐보입니다. 자신의 판단하는 정의에 따라 행동하는 강경파 안티고네와 엘렉트라, 그리고 상황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생존을 위하여 현실과 타협하는 협상파 이스메네와 크리스테미스는 소포클레스가 즐겨 사용하는 대치되는 배역방식이었던 모양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주요등장인물들이 모두 죽음을 맞는 <안티고네>와는 달리 <엘렉트라>에서는 복수를 완성하고 몰락한 가문을 다시 세운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는 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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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독점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 슈퍼 리치의 종말과 중산층 부활을 위한 역사의 제언
샘 피지개티 지음, 이경남 옮김 / 알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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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사회는 중산층이 얇아지면서 부익부 빈익빈이 두드러지는 양극화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중산층은 실물경제의 중심을 잡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일각에서는 치솟는 사교육비와 보육비, 생업의 불안정성 그리고 노후의 삶에 대한 부양비용 때문에 우리나라의 중산층이 붕괴되었다는 진단을 내놓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만, 1992의 대외개방, 1997년 외환위기, 그리고 2003년 카드대란이 3대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합니다. 결국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모자란 국정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2008년 국정감사자료에 따르면 1996년 68.7%에 달하던 중산층 비중은 2006년 58.5%로 10.2%포인트가 감소했다고 합니다. 같은 기간 동안 빈곤층은 11.2%에서 17.4%로 상류층은 20.1에서 24.1%로 늘어 양극화되는 현상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문화일보 2008년 10월 6일자 기사). 앞서 지적한 3대 원인 이외에 양극화에 기여한 것은 참여정부 시절 각종 부동산경기 부양책과 지방경기활성화를 내세워 행복도시, 기업도시, 혁신도시 등을 추진하면서 99조원이나 되는 토지보상비가 풀려나간 것도 주요요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요즘 부각되고 있는 하우스푸어현상도 그 뿌리는 참여정부시절의 부동산경기 부양책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심화되고 있는 사회의 양극화현상은 계층간의 대립이 심화되어가는 부작용을 낳고 있어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완화되는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요? 그래서 문제의 해결방안을 역사를 되돌아보면 찾아낼 수 있다고도 합니다만, 한편으로는 사건이 동일한 조건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방식으로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은 아니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노동전문기자 샘 피지개티의 <부의 독점은 어떻게 무너지는가>는 지난 100년간 부의 분배를 두고 벌어진 미국의 역사-특히 정치와 사회분야에서의-를 본격적으로 추적하고 있습니다. 20세기 초반 미국사회를 쥐고 흔들던 슈퍼리치들의 전횡에 제동을 걸어온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국가와 결탁하여 돈되는 사업을 독점하여 엄청난 수익을 올리면서도 걸맞지 않는 세금으로 체면치레를 하던 관행에 제공이 걸린 것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이었다고 합니다. 막대한 전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부자들에게 전시공채를 발행하기 보다는 세금부과율을 높이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래도 부자들은 전쟁특수를 업고 그들의 부를 더욱 확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 상류층의 모습을 최근에 개봉된 영화 <위대한 개츠비; http://blog.aladin.co.kr/761535117/6425262>에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1928년 대공황 이전 미국사회의 최상위 1%의 슈퍼리치는 전체 국민소득의 25%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두 차례 전쟁이 끝난 1950년대 이들의 몫은 10분의 일로 줄었다고 합니다. 그런 미국이 최근 불어 닥친 경기침체 직전인 2007년에 전체 국민소득의 23.5%를 가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극히 불평등한 소득 분배를 낳는 자유방임경제성향을 중화하는 평등화제도”의 효과라는 경제학자 로버트 커트너의 지적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21쪽).

 

저자는 미국의 일반국민들이 20세기에 이룩한 위대한 업적으로 지목되는 히틀러와 나치를 물리치고, 러시아와 공산당을 극복했으며 인종적 편견을 버렸다는 점에 20세기 전반에 부가 지배하던 금권정치를 몰아냈다는 사실을 더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 재력가들이 국가의 양대 정당을 지배하는 금권정치에 제동을 걸려는 노력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방대한 자료들을 조사하여 요점을 정리하다보니 인용문이 많고 우리에게는 생소한 인물들을 적지 않게 만나야 하는데다가 등장인물이 수시로 바뀌는 바람에 읽어나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만,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목표, 미국사회의 양극화를 주도하는 주범으로 지목된 수퍼리치들에 대한 각종 정책들이 어떻게 도입되어 시행되었는가를 살피는데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금권주의가 다시 교두보를 확보하여 세를 넓혀나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함께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이 같이 노력하여 함께 번영하는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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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첼로 - 이응준 연작소설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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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보던 드라마 <내 연애의 모든 것>을 쓴 이응준작가의 신작소설 <밤의 첼로>를 읽었습니다. 표제가 되는 ‘밤의 첼로’를 포함하여 모두 여섯 편의 소설을 묶은 연작소설이라는 특이한 형식입니다. 여섯 편의 소설은 그대로 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만, 읽다보면 등장인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소설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한 인물이 다른 소설에서는 주인공 역할을 하고, 한 소설에서는 중요한 에피소드가 다른 소설에서는 뉴스 한 꼭지로 간단하게 처리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특정 집단을 구성하는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연결하여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도식이 떠오릅니다. 특정 집단의 구성원이 모두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몇 몇 핵심인물을 중심으로 작은 집단으로 나눌 수 있지만, 이들 작은 집단을 연결하는 사람이 있어 전체 집단이 끊어짐 없이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처럼 등장인물들이 서로 겹치기 출연을 하고 있어 독립적인 스토리이면서도 서로 연결되는 독특한 구조를 연작소설이라고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분위기는 하나같이 어둡고, 등장인물들 역시 하나같이 어두운 분위기에 관계의 갈등을 수월하게 풀어가지 못하고 갈등하는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극적 결말을 쉽게 예견할 수 있기도 합니다. 작가가 인용하고 있는 독일의 여류시인 안나 헨리케의 <밤의 첼로>의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구에게나 제 생애에서 가장 혹독한 밤이 꼭 한 번은 찾아오고 그러면 그는 홀로 눈보라 치는 광야에서 뜨거운 무쇠 난로를 끌어안듯이 신의 이름을 부른다. (…) 가장 절망스러운 밤의 밑바닥에서 신의 얼굴을 보고자 기도하는 인간은 신이 연주하는 첼로소리를 듣게 된다. 단 한 번은, 꼭 한 번은, 듣게 된다. 신이 흘리는 눈물보다 더 아름다운 더 첼로소리를.(20쪽)” 마치 그 첼로소리를 듣게 되면 지난한 삶을 더 이상 이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의미로 읽히는 시입니다만, 다른 길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공연히 시빗거리를 찾으려는 속셈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절망의 극한에서 듣게 된다는 첼로소리에 이어서 바다에서 올라온 인간이 잃어버린 바다에 대한 기억 대신에 남겨진 ‘물고기 그림자’가 역시 주인이 극도의 고통에 처하게 되면 견디다 못해 떠나가 버린다는 설명 또한 인간이란 절망에 아주 취약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엿보이는 같습니다. 어쩌면 작가는 주어진 고난을 쉽게 이겨내는 입지전적인 인물보다는 고난에 쉽게 무너지는 안타까운 인물들에 대한 연민을 더 가지고 있어 그런 인물들을 주로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희망이란 애시 당초 존재하는 않은 특별한 무엇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무렵 작가가 던지는 한 마디에서 손에 잡힐 듯한 무엇이 느껴집니다. 바로 “사막 밑에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어요. 녀석을 낚으려면 모래를 깊이깊이 파 내려가야 해요. 사막에도 100년에 몇 번은 폭우가 있거든요. 그때 빗물을 타고 지하 수맥으로 빠져 들어가 번식하게 된 거예요. 사막 아래 물리 출렁인다고 하면 안 믿기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막 한가운데 홀연히 오아시스가 나타나는 거거든요.(72쪽)”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히 사막 아래에 지나는 수맥이 지표 가까이 지나기 때문인 점을 고려한 표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여기에 작가가 무력함에 좌절하는 등장인물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여기에 더하여 한강변 버드나무 군락지가 불타사라지면서 누구에게는 죽음이 예고되지만 누구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기이한 엇갈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는 숙제로 남는 것 같습니다.

 

짧은 소설들이면서도 방대한 스케일을 자랑한다고 할까요? 국내에서도 다양한 지역이 무대가 될 뿐 아니라 몽골, 인도까지 무대와 등장인물을 확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북극늑대까지 등장시켜 신비로운 분위기로 이끌고 있는 것도 독특하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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