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 - 박준의 시를 읽는 마음
박준 지음 / 난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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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소속과 지위故김기영 감독의 1972년 영화 <충녀>, 작품에 등장하는 한인물은 가족들 앞에서 앞으로 식물도 동물도 먹지 않겠다며선언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무엇을 먹을 거냐는 질문에 그는답 대신 부엌의 찬장에서 꿀을 꺼내든다. 꿀. 식물에서 왔지만더이상 식물은 아니고 동물의 몸에 속해 있었지만 결코 동물은 아닌. 언어는 시이기도 하고 음악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모든 언어가 시나 음악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관건은 시간이다. 검붉은 침묵을 무겁게 무겁게 매달고 있는 어디에 쓰는 것인지도 모르니 버릴 수도 없다. 움켜쥐었다가 찬찬히 풀어내었다가 쓰다듬어보기도 하는 것. 그러다보면 침묵이시간을 거느리고 있던 것이 아니라 시간이 침묵을 꼭 붙들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도 찾아온다. 침묵에 소속된 언어만이 음악이 되고 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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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선의 선장들 - 당장의 삶, 다가올 죽음, 그 사이를 채운 책에 관한 216일간의 대화
김새섬.김진경 지음 / 어크로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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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새섬을 보며 감탄하는 것은 불굴의 의지나 긍정적 자세 때문이 아니다. 인간은 육체를 잠식하는 고통 앞에서도 그에 맞서는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절망 속에서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태도가 병으로 쓰러진 뒤 새롭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다져온 것임을 새섬과 대화하면서 알게 됐다. 좋은 죽음이란 결국 좋은 삶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새섬은 증명하고있다.

나는 관찰자에서 당사자로 입장을 선회했다.
머리로 이해하던 죽음을 몸으로 받아들인 것이 새섬과 함께한9개월 동안 내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다. 때가 되면 내가 탄 배도 난파할 것이다. 당신이 탄 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난파선의 선장들이다.


난파될 것을 알면서도 원하는 방향으로 뱃길을 잡는 이항해의 연료는 책이다. 암과 죽음에 대해서만 말했더라면 새섬과 나의 인터뷰는 이만큼 길게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한두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인터뷰가 열두 번까지 계속된 건 책에관해 나눈 이야기 때문이었다. 웃긴 책, 슬픈 책, 깨달음을 주는책, 힘이 되는 책을 함께 나누는 동안 그에게서 보였던 단단한태도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대화를 담은 이 책에 또 다른 많은 책들이 등장하는 이유다. 기쁘고 희망찬 날은 소수고,
절망스럽고 허무하고 외롭고 불안한 날은 다수다. 새섬과 대화하고 글을 쓰면서 책이 삶을 지탱하는 데 얼마나 큰 힘과 위로를 주는지 새삼스레 깨달았다.

이반 일리치를 고통스럽게 했던 또 한 가지는 그 누구도 그가 바라는 만큼 그를 가엾게 여겨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 부끄럽기는 해도 누군가가 자신을 병든 어린아이 대하듯 마냥 불쌍히여겨주기를 그 무엇보다 간절히 소망했다.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 광인의 수기》, 석영중. 정지원옮김, 열린책들, 2018

"사람들은 스스로를 너무나 귀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감정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어릴 때부터 교육이 이뤄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자꾸 특별함을 강조하잖아요. 특별한 자신이 어디서든 당연히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여기기도 하죠. ‘나‘에 지나치게 몰입하게만드는 사회 같아요. 요즘 서점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는나를 사랑하는 방법, 남들에게 상처받지 않는 방법에 대한 책들이 많아요. 이렇게까지 세상이 전부 자기 자신에대한 얘기로만 가득 찼었나 싶을 정도예요. 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내가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해도 사실 별 문제가없어요. 곧바로 다른 사람으로 대체가 되거든요. 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고 세계는 나 없이도 잘 돌아가요."

병에 걸린 사람은 자신의 생활 습관, 환경, 유전적 특질까지 모든 것을 되돌아보다가.
그래도 병의 원인을 알 수 없으면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일에대한 벌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끄집어낼 과오도 없는 사람은그것이 인간이 이해하기 버거운 신의 뜻이라고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자신이나 가족의 죗값을 치르든, 더 큰 하늘의 뜻을 받들든, 이유가 필요하다. 말이 안 되는 이유라도 이유가 아예 없는것보다는 위안이 된다. 사사 료코는 인간은 의미 없는 불운을 감당해내지 못한다고 말한다. 의미 따위 없는 우연적 사건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려는 게 인간이라는 것이다.
새섬이 놀라운 것은 병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이런 패턴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왜 하필 나인가‘라고 묻지 않고, ‘왜 나만 예외겠는가‘라고 묻는다. 새섬은 팟캐스트 <암과책의 오디세이> 34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들 공정에 대해 날을 세워 말하지만 이걸 보편적인 가치라고 할 수는 없어요. 지금도 세계 어느 곳에서는 공정보다 생존 자체가 더 중요해요. 우리 사회가 공정을 따지게 되었다는 건 어떻게 보면 우리가 좀 살만해졌다는 뜻이겠죠. 당장 먹을 게 부족하고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공정을 생각할 여유가 없을 거예요. 

나는 사고의 이유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 하는 토레시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납득할 만한 이유란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공정함을 추구하는 게 헛수고라는 뜻이 아니다. 정의가 무의미하다는 것도 아니다. 재판정 밖의 삶에도 공정과 정의를 실현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자는 얘기다. 어쩌면 정의 따위 개의치 않는운명의 차가운 얼굴에 질려버린 인간이 의지하고 붙들 끈이 필요해서 정의를 발명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것을 더 소중히여기는지도. 하지만 삶은 재판이 아니다. 따지는 것이 아니라받아들이는 것이다. 원치 않은 불운의 당사자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을것이다.

비르히니아 토레시아는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내 가족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매일 스스로 물어봐요. 하지만 답을 찾을 수가 없어요. 인생이란 그런 것이고,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 현실을 받아들여야 해요."

긴 침묵 끝에 딸이 던진 질문에 나는 억장이 무너졌다.
"아빠, 그러면 엄마가 나한테서 종양이 옮은 거예요?"
나는 아이 손을 꼭 잡고 나직이 대답했다.
"아니, 종양은 그런 게 아니야."
아이가 안정을 찾고 잠들 때까지 나는 같은 말을 되뇌었다.
앨런 타운센드, <우주의 먼지로부터>, 송예슬 옮김, 문학동네, 2025,
257쪽어린 네바를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빠의 이야기다. 내가 뇌종양에 걸린 다음 엄마에게도 뇌종양이생겼지만 그렇다고 내가 엄마에게 종양을 옮긴 것은 아니라는,
가족 셋 중 둘이 뇌종양에 걸릴 확률은 아주 낮지만 가끔은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가 아니라는과학자 아빠의 정확한 설명만이 네바를 위로할 수 있다. 새섬은자신도 그런 좋은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뇌종양에 걸린 이유를 제가 설명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뇌종양에 걸렸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이러저러한 일들을 했다‘는 서사를 스스로 만드는 거예요.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를완성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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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니주의보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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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호오(好惡)는 전통이거나 학습된 관념이다. 반면 일상은 구체다. 몸 쓰며 노동한다는 것은 몸으로 구체를 실천한다는 것, 어떤 관념도그 구체성을 뛰어넘지는 못한다. 그래서 촌구석의 낡디낡은 노인들이 때로는 깜짝 놀랄 정도로 선진적일 수 있는모양이다.

절골댁이 번쩍 손을 들려는데 한씨가 한발 빨랐다.
살라 허소. 우리헌티 돈 달래는 것도 아닌디 먼 상관인가. 나중에라도 먼 문제가 터지먼 벤호사 선상이 맡아줄것이고, 펭상 한동네서 살았는디 엄동설한에 길거리로 쫓게나는 것을 수수방관헐 수는 없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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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마지막 독서 강의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은정 옮김 / 상상스퀘어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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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의 디에고 리베라라는 거장 화가(거대한 벽화를그린 점과 독창적인 스타일에서 거장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의부인으로 그녀 역시 독특한 화가였던 프리다 칼로‘가 떠올랐습니다. 칼로의 그림 중 <헨리 포드 병원>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녀의 혈관이 몸 밖으로 튀어나와 태아또는 달팽이, 난초나 기계 등과 연결된 그림이죠. 저도 서고의 책들과 제가 혈관으로 이어져 있다고 느끼며 살아왔는데, 이번 ‘오에 겐자부로 서점‘ 책장에서 새삼 그걸확인하니 굉장히 만족스러웠습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책 네트워크‘가 있습니다. ‘이런사람들의 책을 읽고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다‘는 삶의 지도가 살아가는 동안 점점 완성되어갑니다. 그게 바로 꾸준히 책을 읽는 이유입니다. 제 나이쯤 되면, 이제까지 살아온 게 이런 책들과 함께여서 가능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 수준, 이 정도 양의 책이었나?‘ 더 나아가서는내가 살아온 게 ‘이 정도의 삶이었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그래, 나는 이렇게 살아왔었지‘ 하는, 그리운 마음도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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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존경의 본질은 "나의 고유한 인격과 행동이, 나와 동일한 가치를 가지며 동시에 내가 함께 있으면서 편안함을 느끼는 타자에 의해서, 높이 평가되고, 인정되는 것이다. 자기존경이나 자존감이 없는 사람, 심지어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은타자도 경멸한다. 자기존경과 타자에 대한 존경은 서로 손잡고 간다.

"자기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타자의 성취에 그만큼 더 즐거워한다.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은타자를 인정하는 데서도 인색하지 않다.

질서정연한 사회는 ‘사람들의 상호 존경(Achtung)‘을 전제로 삼는데, 이것은 곧 서로에 대한 인정으로 표현된다. 상호존중(Respekt)은 정의로운 사회의 토대를 이룬다.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의무"이며, "이 의무는 도덕적 주체 즉 정의감과 선(善)의 표상을 갖는 존재인 인간에게 마땅히 귀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상호 존경의 의무가 지켜지는 사회에서 삶의 장점을 누린다.

"물론 사람들은 능력이 서로 다르며, 모두가 똑같은 것에흥미와 자극을 느끼지는 않는다. 사실 질서정연한 사회에는언제나 전혀 이질적인 집단과 결사체들이 있으며, 그 구성원들은 각자의 목표 설정과 능력에 맞는 이상을 갖는다. […] 중요한 것은 집단생활이 그 구성원들의 능력과 욕구에 부응하고, 그들의 자존감(Selbstwertgefühl)을 지켜주는 확실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다. 성과의 절대적 가치는 비록 정의할 수있을지라도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타자의 생활 방식에 대한 모든 판단""은 중지되어야 한다. 모든 이성적 인생계획은 그 자체로 이미 의미와 가치로 충만하다. 그 밑에 선의이념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사회에서 자기 존경의 기초는 소득분배 상에서
점하는 위치가 아니라, 기본권과 기본적 자유의 공적인 분배다. 그리고 그것은 [정의로운 사회에서] 평등하게 분배되어있기에, 모든 사람은 더 넓은 사회집단의 공동 관심사를 다루기 위해서 타자와 만날 때, 모두 평등하고 확실한 지위를갖는다." "지위 욕구(Statusbedürfnis)"는 오로지 "시민권의평등을 통해서만 충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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