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에 하느님을 찾고 발견하려는 것 … 그렇습니다. 매사에 하느님을 찾고 발견하려는 일에는 여전히 불확실성의 영역이 남아 있습니다. 그분은 거기에 계셔야 하지요. 누군가가 하느님을 확실히 만났다고 말하면서도 불확실성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중요한 표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모든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하느님이 그와 함께 계시지않는다는 증거입니다. 말하자면 그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종교를 이용하는 거짓 예언자임을 뜻합니다. 모세와 같은 하느님 백성의 위대한 지도자는 항상 의심할 여지를 남겼습니다. 우리 확신을 위해서가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여지를 남겨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믿음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우리 삶은 모든 내용이 들어 있는 오페라 리브레토처럼 주어지는게 아닙니다. 우리 삶은 걷고, 방황하고, 행동하고, 찾고, 바라보는 그런 것입니다. 만남을 찾는 모험에 나서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찾으시고 만나시도록, 하느님과 우리가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 저에게는 의심할 수 없는 분명한 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삶에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
예수회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대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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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닷 2024-01-01 0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안녕 잘 지내? 계절이 바뀌고 있어. 주위 풍경이전과 다르게 보이고 공기의 감촉이 바뀌어가. 아마 나도 조금은 변하고있겠지. 하지만 어디가 변했는지는 스스로 알 수 없어. 자신에게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마음을 거울에 비춰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림자는 말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여기 있는 그녀가그림자고 벽 바깥에 있던 그녀가 본체였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전부터 그게 마음에 걸려서, 여기 오는 사람들의 얘기를듣고 조각조각 정보를 모아 나름대로 생각해봤어요. 그리고이런 가설을 세웠습니다. 실은 이곳이 그림자의 나라가 아닐까. 그림자들이 모여 이 고립된 도시 안에서 서로 도와가며 숨죽이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하지만 네 말처럼 여기가 그림자들의 나라라면, 어째서 본체인 내가 도시에 들어가고 그림자인 너는 여기 갇혀 죽어가는 걸까? 반대라면 이해되지만."
"내 생각에, 여기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림자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에요. 자신들이 본체고 벗겨져나간 그림자가바깥으로 쫓겨난다고 믿고 있죠.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가 아닐까. 벽 바깥으로 쫓겨난 것이 본체고, 여기 남은 이들이야말로 그림자가 아닐까

"여기서는 아직 어릴 때 본체와 그림자를 떼어내죠. 그리고본체는 불필요한 것, 해로운 것으로 치부당해벽 바깥으로 추방돼요. 그림자들이 안락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지만 설령 본체를 쫓아내도 그 영향이 말끔히 지워지진 않아요. 미처 제거하지 못한 마음의 작은 씨앗 같은 게 뒤에 남고,
그것이 그림자의 내부에서 은밀히 성장해가죠. 도시는 그것을재빨리 찾아내서 긁어낸 뒤 전용 용기에 가둬버리는 겁니다."

"마음의 씨앗?"
"그래요. 사람이 품은 갖가지 종류의 감정이죠. 슬픔, 망설임, 질투, 두려움, 고뇌, 절망, 의심, 미움, 곤혹, 오뇌, 회의, 자기연민・・・・・・ 그리고 꿈, 사랑. 이 도시에서 그런 감정은 무용한것, 오히려 해로운 것이죠. 이른바 역병의 씨앗 같은 겁니다."
"역병의 씨앗." 나는 그림자의 말을 되풀이했다.
"네. 그러니 남김없이 긁어내 밀폐용기에 담아서 도서관 깊숙이 넣어두는 거예요. 그리고 일반 주민의 접근을 금지하죠.
"그럼 내 역할은?"
"아마 그 영혼을혹은 마음의 잔향을가라앉히고 소멸시키는 일이겠죠. 그림자들이 할 수 없는 작업이에요. 공감이란 진짜 감정을 가진 진짜 인간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런데 왜 그걸 굳이 가라앉혀야 하지? 밀폐용기 속에서깊은 잠에 빠져 있다면 그대로 둬도 될 것 같은데."
"아무리 단단히 갇혀 있어도 존재 자체가 위협이니까요. 그것들이 어떤 계기로 힘을 얻어 일제히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그게 이 도시의 잠재적 공포가 아닐까요. 만약 그런 사태가빚어지면 도시는 순식간에 와해될테죠. 그렇기에 더더욱 그들의 힘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히고 소멸시키고 싶은 겁니다.
누군가가 오래된 꿈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그들의 꿈을 같이 꿔줌으로써 잠재된 열량이 달래진다-그들은 아마 그런걸 원하는 거겠죠. 그리고 그럴 수 있는 건 지금으로선 당신한사람뿐이에요."

훗날 고야스 씨는 자신이 왜 일상적으로 스커트를 입는지친절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첫째로는, 이렇게 스커트를 입고 있으면, 네, 왠지 내가 아름다운 시의 몇 행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랍니다."

"그런 건 여기서 하루하루 일하다보면 차차 알게 될 겁니다.
때가 되면 동이 트고, 이윽고 햇살이 창으로 흘러드는 것처럼요. 지금은 그런 데 크게 신경쓰지 말고, 일단 이곳의 업무를차근차근 익히십시오. 그리고 이 작은 마을에 마음과 몸을 길들여주세요. 지금으로선, 네,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답니다.
괜찮습니다."

때가 되면 동이 트고, 이윽고 햇살이 창으로 흘러드는 것처럼, 나는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상당히 근사한 표현이다.

저토록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태워주지 않는지페르미나 다사가 신기하게 여기고 있자, 선장이 저건 물에빠져 죽은 여자의 망령이며, 지나가는 배를 건너편 해안의위험한 소용돌이 쪽으로 꾀어내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필요로 하지않았던 콜롬비아의 소설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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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은 왜 노잼도시가 되었나 - 성심당의 도시, 대전이 만들어진 이유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104
주혜진 지음 / 스리체어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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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흥미로운 북저널리즘 시리즈, 이번 책도 역시!! 너도 나도 인증하고 복사해대는 시대에 장소성을 고민하고 다시 보게하는 재밌고도 유익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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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은 왜 노잼도시가 되었나 - 성심당의 도시, 대전이 만들어진 이유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104
주혜진 지음 / 스리체어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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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움직임movement이라면, 장소는 정지pause다. 움직임 중에 정지가 일어나면 그곳은 장소가 될 수 있다." 머물지않고 스쳐 지나가면 장소가 되지 않는다. 스쳐지나간 공간은그저 점과 점의 연결, 거리distance일 뿐 ‘장소‘로 인식되지 않는다. 움직임이 멈췄다는 면에서 이미 장소는 시간을 움켜쥔다.
멈춘 자리에서 보낸 시간이 그 공간의 목적이나 특징, 의미나가치를 만들어 낸다. 흔히 ‘장소‘를 ‘의미 혹은 가치가 담긴 공간‘으로 정의하는데, 의미와 가치를 형성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면에서, 이 말 역시 시간이 장소를 만든다는 뜻이라 하겠다.

공간에서의 경험은 감정을 만들고 그것은 공간의 특성과 개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며 그곳을 떠나더라도머릿속에서 꾸준히 재현되는 기억이 된다. 기억에 남은 ‘장소가 된 공간‘은 의미가 있다. ‘여긴 내게 의미 있는 곳이야‘라고말할 때, ‘의미‘는 기억과 감정의 복합체다. 공간이 지닌 물질과 물질의 특성, 그 안의 사람들, 분위기까지, 이 모두를 한꺼번에 느끼는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경험에 기반해 비로소 장소는 인식된다. 그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장소가 지닌 특성, 즉장소성이 만들어진다.

결국 ‘장소성(sense of place 또는 placeness)‘은 나와 공간사이에 만들어진 관계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매일 지나는 골목이나 이미 알고 있던 곳이라 해도 어떤 사건을 통해나와 관계가 만들어지면 그곳은 특별해지고, 새로워진다. 익숙하고 흔한 곳에서 낯설고 새로운 면을 찾아낼 때, 그 낯설고새로운 면에 이름을 붙여 볼 때, 나와 그 장소는 관계를 맺게된다.

랠프는 장소의 특성이 ‘팔리는’ 시대가 이윤 창출을 위한 가짜 장소성들을 만들어 냈다고 비판한다. 라스베이거스에는 이집트 피라미드와 파리의 에펠탑이 있고, 내가 사는 도시 쇼핑몰과 백화점은 피렌체, 소호 거리와 샹젤리제 거리를건물 한가운데에 가져다 놓는다. 판에 박힌 이미지에 근거한획일적 공간 구성은 키치kitsch하지만, 어떤 장소에 대한 공통의 감각을 일깨우려니 어쩔 수 없다. 다 아는 만큼 저속하거나밋밋하고, 의미도 없지만, 그래도 이 장소가 무엇인지는 금방알게 해야 한다. 방문객들이 그 장소를 한 줄로 쉽게 기억해야하니까, ‘아, 거기, 뉴욕 센트럴 파크 같은 곳!‘ 이렇게 말이다.
그래야 쉽게 홍보할 수 있다. 방문이 이어져야 그 장소든, 그장소 안의 물건이든 팔 수 있게 된다.

똑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만들어진, 똑같은 방향성으로인식되는 장소는 과연 살아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장소에 꽤관심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장소에 대한 엄청난 얘기들(여행안내서, 관광 홍보물, 블로그 포스트와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등)도쏟아진다. 하지만, 사실 그것들이 살아 있는 장소는 아닌 것같다. 렐프는 많은 장소들이 피상적이고 판에 박힌 이미지로경험되고 있고, 결국 불명료한 배경으로만 있다고 지적하며,
‘장소성의 상실‘ 혹은 ‘무장소성‘을 주장한다.

‘장소성‘은 콕 집어 비난하기 어렵다. 나와 멀리 떨어져 뉴욕어디쯤 있던 레트로풍 카페는 이제 쉽게 우리 동네 골목으로재배치된다. 노출 콘크리트와 리드미컬한 음악이 흐르는 레트로풍 카페 거리는 충분히 예쁘다. ‘독특하다! 특별한 감성이 있다! 힐링된다!‘고 친구와 웃으며 얘기한다. 즐길 만한 특색을 잘 갖췄지만, 이게 이 공간만의 독특함인지, 이 공간의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는 진짜 특성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 걸까? 사람들은 헷갈린다. 이런 불명확함을 만드는 데 소셜 미디어가 한몫했다. 사람들은 공간과 관계 맺기를 멈추고, 그 공간이 제공하는 최상의 순간만 소비하고,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아 전시하기에 바쁘다.

소셜 미디어 속 장소 전시는 사실 관객 혹은 다음 소비자를 위한 것이다. 지금 내 팔로워들이 필요한 것을 예리하게짚어 전시해야 한다. 멋진 장소를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제시해야 한다. ‘인증샷‘과 ‘인생샷‘ 안에는 보여 주고싶은 멋진 장소의 모습과 그걸 바라보는 나의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은 금방 파편화돼 흩어질 뿐이다. 내 사진과 해시태그와 짧은 블로그 글을 본 다음 방문자도 결국 같은 사진을 찍어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전시할 테니 말이다. 새로운 이야기가 계속 만들어지지 못하는 장소는 결국 시들해질 뿐이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루도비코 에이나우디 LudovicoEinaudi는 지난 2016년 북극해에서 특별한 연주를 선보였다.
‘Elegy for the Arctic‘, ‘북극을 위한 비가‘란 제목의 짧은 피아노 곡이 연주됐다." 연주 직전, 빙하는 천둥 치는 소리를 내며 녹아내린다. 에이나우디는 손을 풀다 말고 그 소리에 깜짝놀라기도 한다. 가느다랗고 애절한 연주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북극의 빙하는 ‘쩡‘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무너진다. 다른어떤 설명이 없어도 이 3분짜리 연주 영상은 많은 감정과 이해와 설명을 들려준다.

전문적이고 어렵고, 비싼 용어들로 만들어진 역량처럼느껴지지만, 사실 우선 필요한 건 ‘가장 솔직해진 나‘다. 나의솔직한 모습과 위치를 아는 것이 지리적 능력에 꼭 필요한 시각을 갖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곳이 좋지, 혹은싫지?‘ ‘왜 저곳에 가고 싶을까?‘ ‘왜 가기 싫을까?‘ ‘왜 여기오면 어떤 단어나 노래, 사람, 냄새 혹은 기억이 떠오르지?‘
‘내가 여기서 하고 싶거나 느끼고 싶은 건 뭐지?‘ 따위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여행안내서와 누군가의 블로그 감상문이 강요하는 느낌, 꼭 해야만 한다고 제안된액티비티가 아니라, 내가 느끼는 것을 확실하게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느끼지 못한다면 그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사진은 이미 있는 대상을 촬영하는 것이다. 그렇다 보ㅣ 사진은 실재를 그대로 옮기기만, 정말 ‘잘 찍어 내기만 하면 될 것 같다. 사진에 찍힌 존재 자체가 이미 익숙한 만큼,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진은 색다르면서도 새로운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사진이 예술일 수 있는 이유다. 익숙한 존재지만 낯선 느낌을 주는 것, 그래서 두렵고신기하고, 예측하지 못했던 감정을 불러오는 것. 예술가들은그것을 ‘언캐니uncanny‘란 단어로 설명한다. 익숙한 것은 그 뒤에 숨겨진 낯설고 편치 않은 것들과 중첩돼 있다. 이러한 모순과 중첩이 사진을 통해 드러날 때, 사진 속 익숙한 대상은 언캐니해진다. 사진을 통해 장소는 새로워지고 특성을 갖게 된다. 익숙했던 장소에 색다른 감각이, 장소성이 생긴다.

매일 보는 건물과 골목, 공원과 산책길 그리고 사람들을 어떤 시각으로 어떠한 방법으로 사진에 담아 내는가에 따라 장소는 새롭게 드러나고 만들어질 것이다. 내가 찍어 올린사진과 글 포스팅이 어떤 팔로워의 ‘푼크툼punctum ‘을 자극할 수 있다. 한 장의 사진과 100자의 글이지만, 읽는 사람에따라 다 다른 푼크툼이 생겨난다면, 100개, 1000개의 장소감이 만들어진다. 그때 하나의 장소는 두껍고 풍성한 장소성을가진 것으로 다시 태어난다.

관념적 공간인 도시는 잘게 쪼개진 ‘모에Moe 요소‘로 쉽게 이해된다. 애니메이션 오타쿠들이 캐릭터에서 어떤 요소를 추출해, 자신들의 선호를 표현했던 것이 애초의 ‘모에’였다면, 이제는 그 역이 활발히 생성되어 소비된다. 이미 제시된도시의 모에 요소를 소비하면 그 도시를 다 소비했다고 말할수 있다. 부산에 간 사람은 해운대 해변 혹은 자갈치 시장 회를 소비하면 된다. 이는 부산에서 추출된 대표 특징이자 모에요소다. 대표적인 요소 한두 개만 빠르게 소비하고 즉각적으로 사진을 전시해야 미디어 의례의 충실한 참여자가 된다. 노잼의 도시인 대전을 소비하기 위해서 방문했을 뿐이니 뜻밖의 장소를 찾지 않아도 괜찮다. 성심당이라는 모에 요소, 그것하나면 충분하다. 노잼인 걸 확인한다는 것과 예쁜 사진을 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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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은 왜 노잼도시가 되었나 - 성심당의 도시, 대전이 만들어진 이유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104
주혜진 지음 / 스리체어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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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EdwardRelph"가 말한 것처럼 "사람은 곧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이고,
장소는 곧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비슷비슷한 자기소개 멘트인 것 같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출신지에 따른 엄연한 차이가 있다. "안녕하세요, **입니다. 저는 방배동 살아요."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부산에서 왔습니다,‘ ‘대전이 집‘이라고 얘기하는 와중에 서울 사람들은동네 이름으로 자신의 출신지를 얘기하는 섬세함을 보인다.
심지어 아파트 이름을 대는 경우도 있는데, 더 신기한 건 서울사람들은 아파트 이름만 듣고도 어느 동네인지 알아챈다는것이다. ‘대전 산다‘ 라고 하면 아무도 대전 어느 동네 사냐고묻지 않을 텐데, 왜 서울 사람은 꼭 특정 동네를 지칭하며 자신을 소개하는 걸까. 누군가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서울은 크니까. 그렇다, 서울은 크다. 그래서 그냥 서울에서 왔다고 하거나 서울 산다고 하면 부족하다. ‘서울이 다 네 집이냐?‘란 질문을 피하려면 서울 어느 동네라고 얘기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서울은 진짜 클까?

하지만 서울은 방배동으로 성북동으로 세검정으로 잘게 쪼개져야 하고 세분화돼 소개된다. 서울은 구와 동네가 각기 개성과 특성을 가진다. 종로구엔 광화문이 있고, 한옥이 지닌 감성과 골목길의 옛 정취가 있다. 심지어 탑골공원의 할아버지들과 80년대풍 상점들은 종로가 만들어 낸 레트로풍 스타일이 됐다. TV 드라마에서 한 번쯤 들어본 "예, 성북동입니다"는 부잣집 사모님의 단골 멘트였고, 성북동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어도 성북동을 저택과 외교공관, 갤러리와 연결해상상할 수 있게 했다. 대치동은 대학 입시 학원가로, 성수동은트렌디한 카페 거리로 소환된다. 이렇게 서울은 다채롭고 다양하다. 꼭 여행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소설과 영화에서, 누군가의 블로그 에세이에서, 광고의 배경으로 서울은 언제나탐험의 대상이다. 새로운 서울은 지금도 발굴 중이다.

살고 있는 동네, 도시나 지역이 식성과 억양에 배어 나오고, 그게 꼭 나를 다 설명하는 것 같다. 내가 속한곳이 허접하고 후진 것이라 취급된다면, 아니 그런 취급을 받고 있다는 걸 내가 알아챈다면 난 내가 누구인지 숨기고 싶다.
내가 떠나온 곳을, 동네를, 지역을 부정deny 하고 싶다. 부정 또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을 가진 ‘deny‘의 명사형 ‘디나이얼‘
과 ‘지방출신‘을 붙여, 두려움을 가지고 자기 정체성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지방(출신) 사람을 ‘디나이얼 지방출신‘이라부를 수 있지 않을까.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공간을 "어떤 물질이나 물체가 존재할 수 있거나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자리"
로 정의한다. 존재의 위치와 사건의 발생을 가정한다는 면에서 공간은 가능성을 지닌 빈자리 혹은 여지room 라 할 수 있다. 그 가능성은 움직임이다. 축구 선수가 ‘공을 패스하면서공간을 넓혀 간다‘고 말하듯이, 공간은 이동하면서, 움직임에의해 새롭게 생기고 확장된다.

공간이 움직임movement이라면, 장소는 정지pause다. 움직임 중에 정지가 일어나면 그곳은 장소가 될 수 있다. 머물지않고 스쳐 지나가면 장소가 되지 않는다. 스쳐 지나간 공간은그저 점과 점의 연결, 거리distance일 뿐 ‘장소‘로 인식되지 않는다. 움직임이 멈췄다는 면에서 이미 장소는 시간을 움켜쥔다.
멈춘 자리에서 보낸 시간이 그 공간의 목적이나 특징, 의미나가치를 만들어 낸다. 흔히 ‘장소‘를 ‘의미 혹은 가치가 담긴 공간‘으로 정의하는데, 의미와 가치를 형성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면에서, 이 말 역시 시간이 장소를 만든다는 뜻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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