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잘 지내? 계절이 바뀌고 있어. 주위 풍경이전과 다르게 보이고 공기의 감촉이 바뀌어가. 아마 나도 조금은 변하고있겠지. 하지만 어디가 변했는지는 스스로 알 수 없어. 자신에게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마음을 거울에 비춰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림자는 말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여기 있는 그녀가그림자고 벽 바깥에 있던 그녀가 본체였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전부터 그게 마음에 걸려서, 여기 오는 사람들의 얘기를듣고 조각조각 정보를 모아 나름대로 생각해봤어요. 그리고이런 가설을 세웠습니다. 실은 이곳이 그림자의 나라가 아닐까. 그림자들이 모여 이 고립된 도시 안에서 서로 도와가며 숨죽이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하지만 네 말처럼 여기가 그림자들의 나라라면, 어째서 본체인 내가 도시에 들어가고 그림자인 너는 여기 갇혀 죽어가는 걸까? 반대라면 이해되지만." "내 생각에, 여기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림자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에요. 자신들이 본체고 벗겨져나간 그림자가바깥으로 쫓겨난다고 믿고 있죠.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가 아닐까. 벽 바깥으로 쫓겨난 것이 본체고, 여기 남은 이들이야말로 그림자가 아닐까
"여기서는 아직 어릴 때 본체와 그림자를 떼어내죠. 그리고본체는 불필요한 것, 해로운 것으로 치부당해벽 바깥으로 추방돼요. 그림자들이 안락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지만 설령 본체를 쫓아내도 그 영향이 말끔히 지워지진 않아요. 미처 제거하지 못한 마음의 작은 씨앗 같은 게 뒤에 남고, 그것이 그림자의 내부에서 은밀히 성장해가죠. 도시는 그것을재빨리 찾아내서 긁어낸 뒤 전용 용기에 가둬버리는 겁니다."
"마음의 씨앗?" "그래요. 사람이 품은 갖가지 종류의 감정이죠. 슬픔, 망설임, 질투, 두려움, 고뇌, 절망, 의심, 미움, 곤혹, 오뇌, 회의, 자기연민・・・・・・ 그리고 꿈, 사랑. 이 도시에서 그런 감정은 무용한것, 오히려 해로운 것이죠. 이른바 역병의 씨앗 같은 겁니다." "역병의 씨앗." 나는 그림자의 말을 되풀이했다. "네. 그러니 남김없이 긁어내 밀폐용기에 담아서 도서관 깊숙이 넣어두는 거예요. 그리고 일반 주민의 접근을 금지하죠. "그럼 내 역할은?" "아마 그 영혼을혹은 마음의 잔향을가라앉히고 소멸시키는 일이겠죠. 그림자들이 할 수 없는 작업이에요. 공감이란 진짜 감정을 가진 진짜 인간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런데 왜 그걸 굳이 가라앉혀야 하지? 밀폐용기 속에서깊은 잠에 빠져 있다면 그대로 둬도 될 것 같은데." "아무리 단단히 갇혀 있어도 존재 자체가 위협이니까요. 그것들이 어떤 계기로 힘을 얻어 일제히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그게 이 도시의 잠재적 공포가 아닐까요. 만약 그런 사태가빚어지면 도시는 순식간에 와해될테죠. 그렇기에 더더욱 그들의 힘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히고 소멸시키고 싶은 겁니다. 누군가가 오래된 꿈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그들의 꿈을 같이 꿔줌으로써 잠재된 열량이 달래진다-그들은 아마 그런걸 원하는 거겠죠. 그리고 그럴 수 있는 건 지금으로선 당신한사람뿐이에요."
훗날 고야스 씨는 자신이 왜 일상적으로 스커트를 입는지친절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첫째로는, 이렇게 스커트를 입고 있으면, 네, 왠지 내가 아름다운 시의 몇 행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랍니다."
"그런 건 여기서 하루하루 일하다보면 차차 알게 될 겁니다. 때가 되면 동이 트고, 이윽고 햇살이 창으로 흘러드는 것처럼요. 지금은 그런 데 크게 신경쓰지 말고, 일단 이곳의 업무를차근차근 익히십시오. 그리고 이 작은 마을에 마음과 몸을 길들여주세요. 지금으로선, 네,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답니다. 괜찮습니다."
때가 되면 동이 트고, 이윽고 햇살이 창으로 흘러드는 것처럼, 나는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상당히 근사한 표현이다.
저토록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태워주지 않는지페르미나 다사가 신기하게 여기고 있자, 선장이 저건 물에빠져 죽은 여자의 망령이며, 지나가는 배를 건너편 해안의위험한 소용돌이 쪽으로 꾀어내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필요로 하지않았던 콜롬비아의 소설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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