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움직임movement이라면, 장소는 정지pause다. 움직임 중에 정지가 일어나면 그곳은 장소가 될 수 있다." 머물지않고 스쳐 지나가면 장소가 되지 않는다. 스쳐지나간 공간은그저 점과 점의 연결, 거리distance일 뿐 ‘장소‘로 인식되지 않는다. 움직임이 멈췄다는 면에서 이미 장소는 시간을 움켜쥔다. 멈춘 자리에서 보낸 시간이 그 공간의 목적이나 특징, 의미나가치를 만들어 낸다. 흔히 ‘장소‘를 ‘의미 혹은 가치가 담긴 공간‘으로 정의하는데, 의미와 가치를 형성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면에서, 이 말 역시 시간이 장소를 만든다는 뜻이라 하겠다.
공간에서의 경험은 감정을 만들고 그것은 공간의 특성과 개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며 그곳을 떠나더라도머릿속에서 꾸준히 재현되는 기억이 된다. 기억에 남은 ‘장소가 된 공간‘은 의미가 있다. ‘여긴 내게 의미 있는 곳이야‘라고말할 때, ‘의미‘는 기억과 감정의 복합체다. 공간이 지닌 물질과 물질의 특성, 그 안의 사람들, 분위기까지, 이 모두를 한꺼번에 느끼는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경험에 기반해 비로소 장소는 인식된다. 그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장소가 지닌 특성, 즉장소성이 만들어진다.
결국 ‘장소성(sense of place 또는 placeness)‘은 나와 공간사이에 만들어진 관계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매일 지나는 골목이나 이미 알고 있던 곳이라 해도 어떤 사건을 통해나와 관계가 만들어지면 그곳은 특별해지고, 새로워진다. 익숙하고 흔한 곳에서 낯설고 새로운 면을 찾아낼 때, 그 낯설고새로운 면에 이름을 붙여 볼 때, 나와 그 장소는 관계를 맺게된다.
랠프는 장소의 특성이 ‘팔리는’ 시대가 이윤 창출을 위한 가짜 장소성들을 만들어 냈다고 비판한다. 라스베이거스에는 이집트 피라미드와 파리의 에펠탑이 있고, 내가 사는 도시 쇼핑몰과 백화점은 피렌체, 소호 거리와 샹젤리제 거리를건물 한가운데에 가져다 놓는다. 판에 박힌 이미지에 근거한획일적 공간 구성은 키치kitsch하지만, 어떤 장소에 대한 공통의 감각을 일깨우려니 어쩔 수 없다. 다 아는 만큼 저속하거나밋밋하고, 의미도 없지만, 그래도 이 장소가 무엇인지는 금방알게 해야 한다. 방문객들이 그 장소를 한 줄로 쉽게 기억해야하니까, ‘아, 거기, 뉴욕 센트럴 파크 같은 곳!‘ 이렇게 말이다. 그래야 쉽게 홍보할 수 있다. 방문이 이어져야 그 장소든, 그장소 안의 물건이든 팔 수 있게 된다.
똑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만들어진, 똑같은 방향성으로인식되는 장소는 과연 살아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장소에 꽤관심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장소에 대한 엄청난 얘기들(여행안내서, 관광 홍보물, 블로그 포스트와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등)도쏟아진다. 하지만, 사실 그것들이 살아 있는 장소는 아닌 것같다. 렐프는 많은 장소들이 피상적이고 판에 박힌 이미지로경험되고 있고, 결국 불명료한 배경으로만 있다고 지적하며, ‘장소성의 상실‘ 혹은 ‘무장소성‘을 주장한다.
‘장소성‘은 콕 집어 비난하기 어렵다. 나와 멀리 떨어져 뉴욕어디쯤 있던 레트로풍 카페는 이제 쉽게 우리 동네 골목으로재배치된다. 노출 콘크리트와 리드미컬한 음악이 흐르는 레트로풍 카페 거리는 충분히 예쁘다. ‘독특하다! 특별한 감성이 있다! 힐링된다!‘고 친구와 웃으며 얘기한다. 즐길 만한 특색을 잘 갖췄지만, 이게 이 공간만의 독특함인지, 이 공간의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는 진짜 특성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 걸까? 사람들은 헷갈린다. 이런 불명확함을 만드는 데 소셜 미디어가 한몫했다. 사람들은 공간과 관계 맺기를 멈추고, 그 공간이 제공하는 최상의 순간만 소비하고,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아 전시하기에 바쁘다.
소셜 미디어 속 장소 전시는 사실 관객 혹은 다음 소비자를 위한 것이다. 지금 내 팔로워들이 필요한 것을 예리하게짚어 전시해야 한다. 멋진 장소를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제시해야 한다. ‘인증샷‘과 ‘인생샷‘ 안에는 보여 주고싶은 멋진 장소의 모습과 그걸 바라보는 나의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은 금방 파편화돼 흩어질 뿐이다. 내 사진과 해시태그와 짧은 블로그 글을 본 다음 방문자도 결국 같은 사진을 찍어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전시할 테니 말이다. 새로운 이야기가 계속 만들어지지 못하는 장소는 결국 시들해질 뿐이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루도비코 에이나우디 LudovicoEinaudi는 지난 2016년 북극해에서 특별한 연주를 선보였다. ‘Elegy for the Arctic‘, ‘북극을 위한 비가‘란 제목의 짧은 피아노 곡이 연주됐다." 연주 직전, 빙하는 천둥 치는 소리를 내며 녹아내린다. 에이나우디는 손을 풀다 말고 그 소리에 깜짝놀라기도 한다. 가느다랗고 애절한 연주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북극의 빙하는 ‘쩡‘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무너진다. 다른어떤 설명이 없어도 이 3분짜리 연주 영상은 많은 감정과 이해와 설명을 들려준다.
전문적이고 어렵고, 비싼 용어들로 만들어진 역량처럼느껴지지만, 사실 우선 필요한 건 ‘가장 솔직해진 나‘다. 나의솔직한 모습과 위치를 아는 것이 지리적 능력에 꼭 필요한 시각을 갖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곳이 좋지, 혹은싫지?‘ ‘왜 저곳에 가고 싶을까?‘ ‘왜 가기 싫을까?‘ ‘왜 여기오면 어떤 단어나 노래, 사람, 냄새 혹은 기억이 떠오르지?‘ ‘내가 여기서 하고 싶거나 느끼고 싶은 건 뭐지?‘ 따위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여행안내서와 누군가의 블로그 감상문이 강요하는 느낌, 꼭 해야만 한다고 제안된액티비티가 아니라, 내가 느끼는 것을 확실하게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느끼지 못한다면 그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사진은 이미 있는 대상을 촬영하는 것이다. 그렇다 보ㅣ 사진은 실재를 그대로 옮기기만, 정말 ‘잘 찍어 내기만 하면 될 것 같다. 사진에 찍힌 존재 자체가 이미 익숙한 만큼,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진은 색다르면서도 새로운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사진이 예술일 수 있는 이유다. 익숙한 존재지만 낯선 느낌을 주는 것, 그래서 두렵고신기하고, 예측하지 못했던 감정을 불러오는 것. 예술가들은그것을 ‘언캐니uncanny‘란 단어로 설명한다. 익숙한 것은 그 뒤에 숨겨진 낯설고 편치 않은 것들과 중첩돼 있다. 이러한 모순과 중첩이 사진을 통해 드러날 때, 사진 속 익숙한 대상은 언캐니해진다. 사진을 통해 장소는 새로워지고 특성을 갖게 된다. 익숙했던 장소에 색다른 감각이, 장소성이 생긴다.
매일 보는 건물과 골목, 공원과 산책길 그리고 사람들을 어떤 시각으로 어떠한 방법으로 사진에 담아 내는가에 따라 장소는 새롭게 드러나고 만들어질 것이다. 내가 찍어 올린사진과 글 포스팅이 어떤 팔로워의 ‘푼크툼punctum ‘을 자극할 수 있다. 한 장의 사진과 100자의 글이지만, 읽는 사람에따라 다 다른 푼크툼이 생겨난다면, 100개, 1000개의 장소감이 만들어진다. 그때 하나의 장소는 두껍고 풍성한 장소성을가진 것으로 다시 태어난다.
관념적 공간인 도시는 잘게 쪼개진 ‘모에Moe 요소‘로 쉽게 이해된다. 애니메이션 오타쿠들이 캐릭터에서 어떤 요소를 추출해, 자신들의 선호를 표현했던 것이 애초의 ‘모에’였다면, 이제는 그 역이 활발히 생성되어 소비된다. 이미 제시된도시의 모에 요소를 소비하면 그 도시를 다 소비했다고 말할수 있다. 부산에 간 사람은 해운대 해변 혹은 자갈치 시장 회를 소비하면 된다. 이는 부산에서 추출된 대표 특징이자 모에요소다. 대표적인 요소 한두 개만 빠르게 소비하고 즉각적으로 사진을 전시해야 미디어 의례의 충실한 참여자가 된다. 노잼의 도시인 대전을 소비하기 위해서 방문했을 뿐이니 뜻밖의 장소를 찾지 않아도 괜찮다. 성심당이라는 모에 요소, 그것하나면 충분하다. 노잼인 걸 확인한다는 것과 예쁜 사진을 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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