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프레이야 > 죽음을 보내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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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니 핑크 - 할인행사
도리스 되리 감독, 마리아 슈라더 외 출연 / AltoDVD (알토미디어)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유명하다 싶으면 뒤로 일단 물리는 버릇이 있어 이제야 이 좋은 영화를 보게 되었다. 에디뜨 삐아프의 샹송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첫장면부터 매력적이며 귀엽고 발랄한 아가씨 파니 핑크가 등장하고 그녀의 독백을 들어보면 그녀가 고민하는 문제와 해결의 실마리가 언뜻 보이는 것도 같다. 이후로 카메라는 빠르게 파니를 훑어간다. 해골모양의 귀걸이, 죽음의 사신이나 쓸 것 같은 검은 중절모, 게다가 ‘죽음을 결정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자신의 주검이 들어갈 관을 정성껏 만드는 모습. 관뚜껑은 특별하게도 유리로 만들었다. 침울하고 단절된 분위기의 허름한 아파트와 그녀의 방, 삭막한 분위기의 엘리베이터는 파니의 이야기를 위해 장소를 제공하는데, 공항검색대 앞이 그녀의 현실이라면 이곳은 그녀가 무의식중에 소망하는 환상의 공간이 된다.
자신이 생각해도 자기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여자, 남자친구랑 좋지 않은 일로 헤어져 4년째 솔로이며 앞날에 대한 불투명한 인식으로 하루하루 그저 시간만 보내는 것 같은 무능력한 여자. 파니는 이 모든 것을 엎을 수 있는 한 마디, “대화를 나눌 사람이 필요한 사람”으로 자신을 명명한다. 아주 사소한 말건네기를 할 수 있는 대상이 그리운 것이다. 영화는 외로운(외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인간의 불치병인 고독을 해결할 수 있는 단서로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 자주 언급되는 주제이지만 진부하지 않고 경쾌한 리듬을 잃지 않는 장점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두 주인공의 캐릭터가 충분히 매력적이다. 나는 오르페오를 파니와 나란히 두고 싶다. 오르페오는 파니가 스스로 타자화한 자기 자신의 모습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파니라는 애인없는'여성'을 주인공으로, 오르페오라는 '흑인'혼혈남성을 그 친구로 내세운 점은 상대적 약자들끼리의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맞춤이지 싶지만, 척 보아도 저울은 심하게 오르페오쪽으로 기운다. 파니는 자신이 오르페오에 비해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점차 깨닫게 된다. 유명세를 타며 포르노작가와 소설가 사이를 오가는 어머니, 모자라지는 않는 돈, 나쁘지 않은 직장, 그 외에도 오르페오가 파니에게서 최고로 꼽는 것은 ‘좋은 피부색’이다. 늘 못 가진 것에 대한 불만만 가득하고 자신의 고통만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못하고 마음을 나눠줄 줄도 모르는 파니에 대하여 오르페오는 쉽고도 간단한 말로 질책한다. 두사람이 나누는 교감의 정점에서 나란히 앉은 벤치 앞으로 펼쳐진 너른 호수의 물이 시간이 멈춘 듯 정지해 있다. 시간은 물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마음의 태엽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다.
눈 달린 생물은 먹지 않는, 아름답고 강하고 똑똑한 파니의 대단한 자의식에 펀치를 날리며 오르페오는 저 세상으로 가버린다. 아니면 그의 노스탤지어, 아프리카이던지. 마지막 가는 길에 진정한 친구로 남아 병든 그를 돌보며 애정을 쏟는 장면이 뜨뜻하다. 이들처럼, 사랑한다는 말은 이럴 때에 진정 어린 목소리로 나오는 것이었다. 파니는 육체적인 감흥을 돋우는 에로스적 사랑이 허탈하게 깨어지는 체험을 하고 속옷바람으로 시내를 걸어 집으로 온다.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 그녀에게 육체는 시들어버릴 피상적인 것이다. 그보다 우위에 있는 사랑, 우정은 그런 공허함을 매워 주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타인을 돌보고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경험을 통해 파니는 처음으로 ‘나’ 아닌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자신과 타인에게 엇비슷한 비율로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서 확신이 생기는 순간이다.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한 자신에게 최면을 걸던 문구들 중 목에 걸려 더 이상 자기최면이 진행되지 않던 그 문구가 실현된 것이다.
파니는 죽음에 관심이 많다. 그건 살아있는 자로서 아주 당연하고 올바른 정신 상태다.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 미리 유서를 써보고 영정사진을 찍고 입관체험도 해보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들은 죽음의 체험을 통해 삶에 더 애착을 가질 수 있었다고 했다. 파니에게 어느 날 우연처럼 나타난 오르페오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해골의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놓았다. 어쩌면 악귀를 쫓고자 하는 부적의 의미로 화장을 하듯, 그는 신들린 자 혹은 죽은 자들의 축제를 날마다 홀로 연다. 거리의 카니발이 방에서 재현되는 셈이다. 이 제의성 짙은 축제에 파니와 어린 여자아이가 온몸에 문신을 그리고 함께 하는 시간이 우연만은 아니다. 오래된 내적 열망이 표출되는 순간이다. 심장을 두드리는 음악소리와 함께 아프리카 토속민의 춤을 현란하게 추는 세 사람은 환희의 절정을 맛본다. 멕시코에서는 해마다 10월 31일에서 11월 2일이면 ‘죽은 자의 날’을 연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걷는 거리에서 이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파니가 오르페오를 대하는 것처럼 친근하고 다정하며 편견이 없다.
그를 하늘로 보낸 후, 구름 속에서 숨바꼭질 하는 달을 올려다보며 유머러스한 눈짓으로 말을 건네는 파니. 충분히 사랑스러운 그녀는 이제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 미래를 성급하게 기대하지는 않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갈 것이다. 앞만 보고, 시계는 보지 않고. Non, Je ne regrette rein. Non, Je ne regrette rein...... 이 노랫말처럼 지나간 시간은 어느 한 자락도 붙들고 후회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과거는 너의 뒤에 있는 네 모습, 미래는 너의 앞에 있는 네 모습일뿐'이라는 오르페오의 충고는 파니가 스스로 내린 결론이자 소중한 생의 열쇠이기에, 값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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