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 줘 안아 줘 아기 그림책 나비잠
조 신타 글.그림, 이선아 옮김 / 보림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아이들 키울 때 생각이 난다.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모르고 엄마 힘든 건 아랑곳하지 않았던 우리 아이들. 어떤 날은 너무 힘들어 배 위에 올려놓고 내가 먼저 잠이 들어버린 적도 있었다. 그렇게 힘들게 했건만 밉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으니...

지금도 우리 아들은 학교 갔다 오면 일단은 엄마 품으로 뛰어든다. 언제까지 막내티를 낼 건가 싶다가도 조금 더 크면 안아준다고 해도 도망가겠지 싶어 꼭 안아주곤 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책을 만지작거리는 아가들을 위한 책이다. 물고 뜯어도 찢어지지 않는 보드북인데다 펼친 면이 한 장면이라 그림이 아주 시원스럽다. 그림을 한장 한장 들여다보고 있으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지붕 위에 벌렁 드러누운 엄마 고양이 위에 아기 고양이가 "야옹야옹 야옹야옹 안아줘, 응?"

코랑 꼬리가 똑 닮은 엄마 돼지 배 위로 기어오른 아기 돼지가 "꼴꼴꼴꼴 꼴꼴꼴꼴 안아 줘, 응?"

살랑살랑 꼬리 흔들면서 엄마 배를 간지럼 태우던 강아지가 "망망망망 망망망망 안아 줘, 응?"

천천히 굴러가는 큰 공에 작은 공이 딱 달라붙어 "대굴대굴 대굴대굴 안아 줘, 응?"

엄마 다리는 길어서 좋아 먹물 뿜으며 "매끌매끌 매끌매끌 안아 줘, 응?"

왕 햄버거 위에 미니 햄버거 낑낑 올라타며 "폭신폭신 폭신폭신 안아 줘,응?"

큰 아이스크림 덩어리 위에 작은 아이스크림 "사르르 사르르 안아 줘, 응?"

큰 신발 위에 영차영차 작은 신발 "타박타박 타박타박 안아 줘, 응?"

힘들어 잠깐 누웠더니 어느새 기어온 우리 아기 "안아 줘, 안아 줘. 엄마, 안아 줘."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가들의 모습을 단순한 색과 시원한 터치로 그려냈다. 바라보는 엄마 동물의 얼굴엔 흐뭇함이 가득하고 아가들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잠이 들듯 편안하다.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가들은 반복되는 의성어를 흉내내며 금방 말을 배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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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프레이야 > 헤르만 헤세 展을 보고

 

귀엣말 같은 봄바람 탓에 오랜만에 치마를 입고 나섰다. 흰색 레이스치마에 흰색 아사 블라우스 그 위에 청자켓을 걸치고 발이 좀 불편해도 굽 있는 구두를 신고서 또각또각... 오전에는 글벗들을 만난 후 오늘 내가 데이트하기로 한 사람은 헤르만 헤세다. 탄생 130주년 기념 전시회를 하고 있는 가까운 박물관이 데이트 장소다. 몇 해 전 <정원일의 즐거움>을 읽고 자연과 생명을 애모하는 노인의 혜안과 흙냄새 깊게 패인 주름의 미덕이 인상에 남아있던 나는 그를 만나는 일이 어느 서재지기님의 말씀처럼 인연이라 생각한다. 성인 9000원의 좀 과하다 싶은 입장료를 냈지만 평일이라 조용하고 느긋하게 이것저것 볼 수 있어서 흡족했다.

 



전시는 출생부터 사망까지 전기를 읽는 기분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조숙하였고 구속이나 권위를 못 견뎌하여 네 살 때 이미 유치원 생활도 적응하지 못한 그는 12세 때 벌써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14세 때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고 15세 때 연애를 하고 16세 때 술집에 드나들며 금기된 책을 읽었다.” 칸슈타트 김나지움 7학급 당시(15세) 학우들과 찍은 사진 속의 그는 안경을 끼고 고집스런 입매와 침울하지만 강렬한 눈매, 그리고 조금은 작은 키를 하고 있었다. 14세 때 신학교에 입학하여서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권적인 생활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다 탈퇴를 하고 자살미수와 가출을 반복하였다. 김나지움에서는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예민한 자신과 자애로운 어머니를 무던히도 괴롭혔던 것 같다. 그 후, 시계수리공, 서점 점원 등의 일을 하면서도 오로지 문학을 향한 갈망은 식지 않았다.


칼 융의 제자로부터 정신분석과 심리치료를 받고 난 후 에밀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데미안>을 쓴 게 1919년의 일이었다. 알을 깨고 태어나 아프락사스에게 날아간 새의 이야기는 청춘의 표상과도 같다. 제도권에 억눌린 한 생명이 성장의 고통을 겪는 <수레바퀴 아래서>와 젊은날의 정신적, 육체적 고뇌가 담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지와 사랑’이란 제목으로 읽었던 게 참 오래 전 일이다. 오늘 내가 알게 된 헤세는 노년에 매달린 정원일과 40세 이후 시작한 붓질을 죽을 때까지 놓지 않은 완고하고 순정한, 세상일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던 사람으로서의 위대한 작가가 아니었다. 그의 수채화에는 사람이 나오지 않고 대체로 호숫가의 풍경만을 담담한 선과 투명한 색이 담아내고 있다. 유일하게 사람이 나오는 그림은 자신이 물뿌리개를 들고 꽃에 물을 주고 있는 뒷모습인데 난 그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어쩐지 지구를 떠나기 전 기우뚱하니 서있는 ‘어린왕자’를 닮았다. 꽃을 정성껏 돌본다는 점에서도 그런 연상을 불러왔다. 헤세는 사람에 대한 배신감과 혐오감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헤세를 화가라고 부르진 않지만 '화가의 눈을 가진 시인'으로 불리는 마땅한 이유가 있다. 화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나는 아름다운 자연을, 그러니까 여기에 있는 숲과 포도나무와 마을들을 너무 사랑하여서 늘 자꾸 그것들을 그려야 할 지경이네. 그리고 조금은 진전이 있다네. 그리고 지금은 아주 단순한 모티브에 머물러 있는데 그 이상 더 앞으로 나갈 것 같지는 않네. 살아 움직이는 동물이나 물체 같은 다른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람인데, 나는 사람을 그릴 수 없다네.” 애틋한 연민이 물씬 일어나는 이 글귀에 자연과 사람을 사랑한 온건한 감수성이 묻어난다.


그가 사람을 증오하게 된 이유가 있었다. 헤세는 1914년 이후 군국주의와 지나친 민족주의에 반발했고 나치를 비판한 글로 인해 조국의 배반자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나치의 박해로 독일 국적을 버릴 수밖에 없었고 1923년 스위스 시민권을 얻었다. 당시 히틀러는 그의 작품을 몰수하고 출판금지령까지 내렸다. 그는  중립국 스위스에 살면서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독일의 전쟁 포로들과 수용자들을 위해 잡지를 편집하고, 그림을 팔아 책과 구호품을 보내는 등, 두 차례의 세계대전 동안 지극한 평화주의자로 활동하였다. 1933년 나치의 탄압 속에서 그는 <유리알 유희>를 쓰기 시작했고 10년의 집필 끝에 1943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1946년 프랑크푸르트 괴테상과 동시에 노벨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피비린내 나는 폭력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인간의 도리와 정신문화에 대한 헌사로 순수한 정신의 이상향을 구축하고자 했던 대작이라는 평이다. 읽어봐야겠다.


헤세의 수채화는 화가로서의 그림이라기보다 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삽화 같은 것이었다. 그가 타이프라이팅 하여 보낸 아기자기한 편지들마다 마음에 평화를 주는 그림들이 소박하고 화사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1962년 사망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는데 그림을 그리며 숨통을 짓눌렀던 많은 일들(아내의 정신병, 막내아들의 중병, 부친의 사망, 조국과의 마찰)로부터 마음의 평화를 구하고자 했다. 두번의 결혼생활 위기를 맞고 50세쯤에야 양처를 만나 안정된 결혼생활을 하였다. 그 부부의 사진이 행복해보였다. 말년에는 주치의에게 끊임없이 보낸, 약을 구하는 편지들이 유리장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평생의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 고통을 그림과 문학으로 승화한 문호였다.

 

“그림 그리는 일은 나의 마술도구이며 파우스트 외투다.” 라는 글귀와 함께 이런 글귀가 마음에 깊이 박혔다. “어느 날, 나는 완전히 새로운 기쁨을 발견했다. 나는 이제 40세가 된 나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가 나를 화가로 간주했다거나 화가가 되려고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림그리기는 아주 멋진 일이다. 그것은 사람을 더 유쾌하고 더 참을성 있게 만든다. 나중에는 글을 쓸 때와는 달리 검은 손가락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빨갛고 파란 손가락을 갖게 된다.”

 

전부터 가끔 생각했던 것이지만 난 오늘로 죽기 전에 배워보고 싶은 게 또 하나 늘었다. 헤세를 만나며 난 그분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노년에 그림을 그리며 불치병으로 죽음을 준비하시는 칠순 넘은 문우님을 위해 헤세의 수채화가 담긴 액자 하나를 샀다. 다음주에 드리면 기뻐하실 화사한 얼굴에 기쁘다. 선생님이 오늘 내게만 특별히 주신 수선화가 지금 거실에서 노오란 향기를 피우고 있다. 수선화는 수채화로 그리면 정말 어울릴 것 같은 꽃이란 생각이 문득 든다.


헤세는 예술가적 기질을 타고 났다. 평생 음악을 좋아하고 대위법을 숭배했는데 음악이 가져다주는 조화와 균형의 미를 최고로 여겨 이를 문학에도 반영하였다. 그의 시가 수백 편의 음악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음반이 몇몇 전시되어있어 멋진 재킷을 볼 수 있었다. 그 밖에도 초판책들이 여럿 있었는데 책마다 자신의 그림이나 사진을 앞장 속지에 붙이고 자필 서명을 해서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그중 1927년에 출간된 눈길을 끌었다. 1960년대 전쟁을 반대하고 자유를 구하려고 데모하던 히피족들의 손에 일제히 책이 들려있어서 보니 이 책이었다는 에피소드를 들었다. 60년대 히피족들에게는 바이블 같은 책이었다니! 이 책은 영화로도 나왔던지 비디오테잎이 전시되어 있었다. ‘늑대인간’ 또는 ‘황야의 이리’로 번역되어 있었다.

 


미국산 Smith Premier No.46


마지막 코너에는 그의 무덤과 데드마스크 사진 그리고 묘비명이 적혀있었다. 

“오래도록 무거운 짐을 진 자,

 그 짐을 부리도록 허락이 내린다.

 그것은 감미롭고 근사한 일이다.“

<유리알 유희> 중의 한 구절인가 보다.

 

한 사람의 일생을 함께 따라가보는 것은 분명 두근거리는 일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얼굴을 눈여겨보았다.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 고통을 겪고 그림과 문학으로 승화한 일생을 통해 동그란 안경 너머 번득이는 혜안이 예사롭지 않다. 그가 썼던 동그란 테의 안경과 손때 묻었을 타이프라이터도 유리장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수채화그림 아래로 따박따박 박혀있는 타자기 글자들이 시공을 건너 사람의 말을 건네오는 것 같았다. 전시실을 나오니 화단 옆에 노인들이 앉아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봄볕바라기를 하고 있는 노인들의 눈이 밝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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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하니 2007-04-11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님 덕분에 저는 오늘 9000원을 저금한 기분에요...
갑자기.헤르만헤세를 다시 만날 기회를 가져볼까,,하는 마음이 생겨요..
40이 넘어 다시 읽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좋을 꺼 같아요..
 
 전출처 : 프레이야 > [퍼온글] 사진 한 장을 위해 목숨을 던진 기자 -로버트 카파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너무 멀리서 찍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카파

1913~1954년, 41년의 생애를 산 남자.
어떤 위대한 역사가와 작가도 광포한 야만의 20세기를 이 남자처럼 사실적으로 그리지 못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도 이 남자가 찍은 사진 한 장만큼 전쟁의 참상을 극명하게 전달할 수는 없었다. 또 어떤 방대한 분량의 전쟁문학도 극한 상황에서의 휴머니티를 이 남자처럼 비극적으로 묘사하지는 못했다.

전설적 포토저널리스트, 포토저널리즘의 신화(神話), 가장 위대한 종군기자, 보도사진 에이전시 매그넘의 창립자…. 그 이름 앞에 붙는 형용어들이다. 그가 전 생애를 던져 찍은 사진 140점이 지난 3월 말부터 5월 26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전시되고 있다.

모든 사진기자의 우상이자 영웅이 된 남자, 그의 이름은 로버트 카파(Robert Capa)다. 너무나 유명한 이름. 그러나 로버트 카파는 본명이 아니다. 엔드레 에르노 프리드먼(Endre Erno Friedmann)이 본명이다. 왜 그는 본명을 쓰지 못하고 영어 이름을 썼을까? 여기에 그의 생애를 규정짓는 운명적 역사성이 숨어 있다.

로 버트 카파는 1913년 10월 22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양복점을 하는 가난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때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지배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마지막 숨을 헐떡거리고 있던 시점이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중심부는 오스트리아 빈이었고,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그 주변부였다. 또한 그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유럽에 살면서도 비(非)유럽인으로 아웃사이더의 운명을 피할 수가 없었다.

1914년 유럽은 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그가 한 살 때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프로이센(독일)과 한편이 되어 프랑스·러시아 연합군과 전쟁을 벌인다. 그의 유년기 기억은 전쟁의 비참함과 굶주림으로 채워졌다.
1918년, 1차 대전이 끝났으나 그 후유증은 유럽 전역을 강타했다. 생필품 부족은 인플레이션을 낳았고 경제침체로 이어졌다. 경제난으로 인한 실업률 증가는 또다시 유럽 전역에 반(反)유대주의 기독교운동을 불러왔다. 반유대주의운동은 1930년대 들어 독일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다.

그 는 1931년 좌익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헝가리에서 추방되어 독일 베를린으로 건너간다. 베를린대학을 다니며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사진통신사 데포트(Dephot) 암실보조원으로 취직한다. 이것이 프리드먼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그는 암실보조원으로 일하면서도 능력을 인정 받아 소소한 취재를 하게 된다.

1932년, 러시아의 레온 트로츠키가 볼셰비키 혁명 이후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망명길에 오른다. 그 해 12월, 트로츠키가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에서 강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마침 데포트 통신사에서는 트로츠키의 강연을 취재할 마땅한 사진기자가 없었다. 대신 취재를 나가게 된 프리드먼은 단 한 번의 기회에서 사진 특종을 건져 올렸고, 이로 인해 정식 사진기자로 채용된다.

1933년, 히틀러가 반유대주의 광풍(狂風)에 편승해 권력을 잡게 되자 유대인인 프리드먼은 신변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베를린을 떠난다. 프리드먼은 부다페스트를 거쳐 파리로 들어갔다. 파리는 반유대주의의 영향에서 비켜선 도시였다. 그는 파리에서 세 살 연상의 포르투갈 출신 사진작가 게르타 포호라일(Gerta Pohorylle)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1935년, 프리드먼은 돈을 벌기 위해 ‘로버트 카파’라는 가공의 미국인 사진작가 행세를 한다. 게르타는 프리드먼이 찍은 사진을 미국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가 찍은 것으로 꾸며 신문사에 비싸게 판매한다. 유대인이라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런 식으로 사진작업을 하다 프리드먼은 로버트 카파로, 아내 게르타는 게르다 타로(Gerda Taro)로 아예 이름을 바꿔버린다.

로 버트 카파가 된 프리드먼을 세상에 알린 것은 스페인 내전이었다. 1936년 8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다. 카파 부부는 인민전선 진영에 서서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카파의 생애를 결정짓는 첫 종군취재였다. 당시 세계의 지성들은 프랑코 정권에 맞서 싸우는 인민전선을 지지하면서 앞다투어 참전했다. 앙드레 말로, 어네스트 헤밍웨이, 조지 오웰, 노먼 베순, 파블로 피카소 등이 인민전선 편에 선 지식인이다.

1936년 9월, 카파는 인민전선 진영의 코르도바 전투를 취재한다. 인민전선 병사가 참호에서 뛰쳐나와 돌격하는 순간 머리에 총을 맞고 뒤로 쓰러졌다. 이 찰나의 장면이 카파의 카메라에 잡혔다. 이 사진이 미국의 화보잡지 ‘라이프’에 실리면서 로버트 카파의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 한 장의 사진으로 로버트 카파는 전쟁 사진작가로 이름을 굳혔으며, 이 사진은 20세기의 전쟁기록 사진 중 가장 뛰어난 사진으로 평가 받게 된다.

1937 년 7월, 카파는 잠시 파리에 가 있었고 게르다는 혼자 전선에 남아 사진취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게르다가 후퇴하던 공화파의 탱크에 치어 즉사한다. 이 소식을 듣고 카파는 보름 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때 카파 나이 스물넷. 한창 젊은 나이였지만 이후 카파는 평생 독신을 고집했다. 카파는 수차례의 스페인 내전 취재를 통해 피카소와 헤밍웨이를 알게 되고 죽을 때까지 우정을 나누게 된다.

1938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카파는 중국 대륙으로 발길을 돌린다. 카파는 6개월간 중국 대륙을 누비며 중일전쟁을 취재해 일본군의 만행과 잔학상을 세계에 알렸다.
1939 년 9월,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카파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헝가리 국적을 갖고 있던 카파는 미국 입장에서 보면 적성국(敵性國) 시민이었다. 미국 당국에 의해 카메라를 압수당할 처지에 몰리기도 했다. 위기를 넘긴 카파는 1942년 미국 잡지 ‘콜리어스’와 계약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연합군에 종군하게 된다.



잉그리드 버그만의 연인… 1954년 베트남전서 지뢰 밟고 사망

카파는 1943년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탈환·시칠리아 탈환·나폴리 해방을 거쳐 이탈리
아 반도 전쟁을 취재한다. 2차 대전은 종군사진기자 카파의 명성을 또 한번 드날리게 했다. 연합군의 승리를 결정 지은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해안 상륙작전 취재였다. 연합군의 상륙작전 동행취재에 선발된 기자는 20명이었다. 이 중 사진기자는 네 명이었고, 로버트 카파가 여기에 포함되었다. 카파는 2차 대전 종군기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필맥)를 남겼다. 카파는 오마하 해변에 상륙하는 미군 제1파 부대와 함께 상륙용 주정(舟艇)에서 뛰어내렸다. 카파는 총알이 쏟아지는 그 순간을 이 책에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바닷물은 너무 차가웠고, 해안까지의 거리는 아직 100m 이상 남아 있었다. 내 주위로 총탄이 날아들어 물을 튀겼다. 나는 제일 가까운 철제 장애물을 향해 내달렸다. 병사 한 명도 나와 동시에 그 장애물 뒤로 뛰어들었다. 몇 분간 우리 둘은 장애물을 나눠 썼다. 그는 소총에서 방수포를 떼어내고는 연기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해안을 향해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 그제야 안전하다고 생각한 나는 나처럼 장애물 뒤로 움츠리고 숨어 있는 다른 병사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아직 이른 새벽이었기 때문에 선명한 사진을 찍기에는 좀 어두운 편이었다. 그러나 회색빛 하늘을 배경으로, 히틀러의 정책참모들이 디자인한 초현실주의 작품 같은 장애물 뒤에 작게 움츠린 병사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면 매우 효과적일 것 같았다.”

이때 카파가 찍은 사진은 모두 106장이었으나 ‘라이프’지 암실직원의 실수로 대부분 쓸 수 없게 되고 10장만 살아 남았다.
카파는 1945년 초 또 한번 목숨 건 취재를 감행한다. 미군 제17 공수단 대원과 함께 낙하산을 타고 독일로 침투한 것이다.
1945 년 6월, 카파는 파리에서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을 만나 2년간 연인으로 지낸다. 버그만은 딸을 둔 유부녀였으나 카파에 빠지고 만다. 종전 후인 1946년 카파는 미국 시민권을 얻었고 버그만의 권유로 잠시 할리우드에서 영화 일에 관여하기도 했으나 곧 회의를 느끼고 영화에서 손을 뗀다.

1947년 카파는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세이무어 등과 함께 보도사진 통신사인 매그넘(Magnum)을 설립했다. 1948~1950년 중동전쟁을 취재했고, 1950년 파리로 돌아온 뒤로는 3년간 매그넘사 대표로 일했다. 1949년과 1951년에는 피카소의 사생활을 보도하기도 했는데, 이때가 카파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
1954년 카파는 일본을 방문하고 있던 중 ‘라이프’지로부터 인도차이나 전쟁을 취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카파의 친구들은 베트남행(行)을 만류했다. 이미 낙하산 침투 취재까지 한 경험이 있는 카파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삶과 죽음의 확률이 반반이라면 나는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려 사진을 찍겠네.”
카 파는 1954년 5월 24일 북베트남에서 프랑스전투 부대원을 따라 취재하던 중 타이빈에서 지뢰를 밟아 폭사한다. 1차 대전의 전운(戰雲)이 감돌던 1913년에 태어나 종군기자로 다섯 전장에서 10년 이상 최전선을 지켰던 카파. 그의 마지막은 그의 생애만큼 영웅적이었다. 카파는 전쟁 혐오를 사진으로 보여주는 것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죽음으로 그 피날레를 장식했다.


/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mapl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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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잡이 바다체험



바다는 더 이상 바라만 보는 곳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제 바다를 느끼기를 원한다. 바다를 즐기고 체험하면서 거기에 뭔가 얻고 싶은 사람이라면 완도의 고기잡이 바다 체험장으로 떠나시라!

소안도 월항리 해변은 고기잡이 바다 체험장을 마련바다를 몸으로 느끼고 싶어 하는 당신을 안아 줄 것이다. 원시적이면서도 가장 손쉬운 방법인 개매기 어로 체험에 참여하면 숭어, 농어, 갯장어를 잡으며 누구든 한나절은 어부가 될 수 있다.

고기잡이는 물 빠진 갯벌에서 미처 숨을 곳을 찾지 못한 바지락, 게 등을 잡으러 갯벌을 이리 저리 뛰어다니다 보면 바다가 이미 몸과 마음 가득히 들어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오염되지 않은 갯벌 위에서 소중한 사람과 함께 맨손으로 큰 고기를 잡아 보는 고기잡이 바다 체험장!

여러분에게 자연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색다른 추억이 될 것입니다.

<일 정>

ꋮ 기 간 : 2007. 7월 ~ 9월

ꋮ 장 소 : 완도군 소안면 월항리 갯벌

ꋮ 대 상 : 제한없음(※가족단위 참가자 환영)

 ꋮ 주 최 : 소안 월항리 마을회

ꋮ 주요내용 : 맨손으로 고기잡는 바다체험

ꋮ 참 가 비 : 초등학생 이상 5천원, 유아․유치원생 3천원임

ꋮ 준 비 물 : 참가비, 갈아입을 옷, 고기를 담을 그릇 등

ꋮ 문 의 처 : 소안 월항리 마을회 이제왕(061-553-7294, 010-4611-3319)

                      소안면사무소(061-550-5609)

                      완도군 관광안내소(061-550-5152, 5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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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집 2007-04-11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도에서 배 타고 30~40분 걸리는 소안도라는 섬에서 매년 여름 물때에 맞춰 한 달에 두 번 정도 한다는군요.
완도로 이사 온 덕에 한 번 가 보려고요.

씩씩하니 2007-04-11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님 진짜 신나시겠다,,
맞아요,,바닷가에 사시는 동안,,,그 혜택 충분히..넉넉히..누리세요...
저는 고기잡는 행사 살짝 징그럽드라구요,,ㅎㅎㅎ
지난번에 여수가서 배타고 낚시하러 가자구 울 남푠 엄청 꼬셨는데..제가,,,멀미를 핑계삼아,,,안갔답니다,,왠지 징그러워요..ㅎㅎㅎ

홍수맘 2007-04-1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저도 가능성을 열아두고 퍼 가요 ^ ^.
 

완도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영암 월출산에 다녀왔습니다.

진달래, 동백이랑 생강나무꽃이 활짝 피어 있더군요.


우리 가족 중 가장 가볍게 산을 오른 이는 다람쥐 같은 아들이었답니다.

가장 힘들어한 사람은 저였고요.



경사가 심하고 바위가 많아 뒤돌아보면 아찔했던 월악산.

딸아이는 오르는 내내 무섭다고 징징대더니 막상 구름다리 건너고는 살짝 미소를 짓네요.



지상 500미터  계곡 위에 아슬아슬 걸려 있는 구름다리.

한번 건너 보세요. 다리가 약간 후들거리던데요.

 

휘파람새 소리를 들으며 즐거워하던 아이들,

다람쥐가 쪼르르 달려갈 때마다 어찌나 좋아하던지...

산을 내려오면서 역시 국립공원이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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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7-04-12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출산 바라만 봐도 너무 멋진 곳이지요?/
전 한번도 못 올라가보았는데 꼭 한번 올라가보고 싶어요..
가족 모두 즐거운 시간이었겠어요..

소나무집 2007-04-12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엄청 많았어요.
저도 서울 살았다면 꿈도 못 꾸었을 곳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