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지나고 친정아버지께서 생신 기념으로 제주도에 가자고 하셨다. 비용은 모두 책임지겠으니 삼남매를 거느리고 여행을 가고 싶다는 말씀이셨다. 올해 남편은 아버님 병환과 경조사 때문에 제주에 여덟 번이나 다녀왔다. 가족 모두 다녀온 것도 세 번이고.
그러니 내 머릿속엔 친정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기보다 '또 제주도야!" 이런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그래서 친정 식구들과 떠나는 첫 여행이라는 기쁨보다는 귀차니즘으로 가득했으니 난 불효녀가 틀림없다.
남편이 제주를 잘 안다는 이유로 여행에 관한 일을 우리집에서 떠맡았다. 그리고 그게 내 일이 되고 말았다. 네 집 식구 15명의 스케줄에 맞춰 여행 날짜를 정하고 비행기 시간표를 잡아 예약하고 숙소를 챙기고... 가는 사람은 별거 아닌 일도 진행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만이 나올까 봐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제주에서 여행은 관광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승용차를 몇 개씩 렌트하고 운전하느라 신경 쓰느니 그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내린 결정이었다. 비용도 비슷했고. 여행사를 하는 남편의 사촌 부부가 항공권부터 숙소까지 예약하고 버스 운전까지 도맡아 해주었는데 여행지 선택, 입장료 할인, 식당 안내 등 여러 모로 신경을 써줘서 만족스러웠고 친정 식구들에게 우리 부부 얼굴이 좀 섰다. 덕분에 여행이 아닌 관광의 진수를 맛보고 왔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을이 여행 성수기라는 걸 실감했고, 제주를 즐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도 새삼 알게 되었다. 제주를 해마다 한두 번씩은 꼭 다녔지만 나의 제주는 여행이 아닌 시댁 방문. 이번엔 시댁에 들르지 않았으니 여행을 위한 첫 제주 방문인 셈.
집집마다 자기네 편한 시간에 가다 보니 비행기 시간이 다 달랐다. 아이들 수업 끝나고 원주에서 출발한 우리가 꼴찌로 도착해서 모두 모인 시간이 금요일 저녁 8시 30분. 공항으로 시어머니와 아주버님 부부가 마중을 나와서 대식구의 저녁을 사주셨다. 죄송하고 고맙고 그랬다.
농사를 짓는 친정아버지에게 15명의 여행 경비는 적은 돈이 아니다. 항공료만 320만원이 넘으니... 올해 마늘값이 비싸서 돈 좀 벌었다며 좋아하셨는데 그 돈을 이번 여행에 다 썼다. 친정아버지는 자식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말씀하셨다. "칠십이 넘어가고 올해 사돈 두 양반(동생네 시아버지. 우리 시아버지)을 보내고 나니 이제 내 인생도 많이 남지 않았구나" 싶었다고.
그래서 살면서 중요한 게 뭘까 생각해보니 자식들과 함께 하면서 추억을 공유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다. 많지 않은 자식들인데 다들 멀리 떨어져 사니 같이 모이는 것도 쉽지 않아서 이번 여행을 계획했는데 한 사람도 안 빠지고 와줬다며 무진장 고마워 하셨다. 자식들이 할 소리를 대신...
부모님은 농사일로 피곤에 지쳐 있었는데도 자식들을 바라보는 얼굴에 행복이 가득했다. 아이고 다리야, 아이고 허리야~ 하면서. 친정아버지는 더 젊었을 때 이런 여행을 못한 게 후회되신다고 했다. 꼭 여행이 아니어도 함께 있어만 드려도 행복해하시는데 다들 그걸 못하고 산다.
아버지, 엄마, 정말정말 고맙습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저희도 잘 살게요.
- 서귀포 앞 새섬까지 새로 놓인 다리 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