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던 소설 토지학교 수학 여행의 날, 새벽 5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4시부터 일어나 수선을 떨었다. 6학년 딸아이가 학교에 체험 학습을 신청하고 함께 따라나서서 준비할 것도 더 많았다. 학생들이 얼마나 모범생인지 지각생 한 명 없어 정각 5시에 출발했다. 이른 시간인데도 학생들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은커녕 설레임만 가득해 보였다. 대부분 학교라는 공간을 떠난 지가 오래된 이들에게 수학 여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기대감마저 있어 한껏 들뜬 분위기가 아니었나 싶다.  

소설 토지학교 학생들답게 차를 타고 가는 중에도 준비된 자료를 읽으며 공부를 했고, 다섯 시간 만에 통영에 도착했다. 그동안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시조시인), 윤이상 등을 비롯해 통영 출신의 문학 예술인들이 유난히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내게 특별한 도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젠 박경리 선생이 잠들어 계신 곳이기에 통영이라는 지명만으로도 큰 의미로 다가왔고, 시내가 보이는 곳에서부터 눈을 크게 뜨고 창밖을 내다보게 만들었다. '아, 이곳에서 선생이 태어나고, 학교를 다니면서 일본인 선생 몰래 책을 읽고 수예점을 하신 곳이로구나' 하는 마음에...  
 
지난 5월 통영 미륵산 기슭에 문을 연 박경리기념관. 




통영을 배경으로 한 <김약국의 딸들>에 관한 자료 등이 있었지만 원주 시절 흔적이 너무 많아서 원주에 와 있는 착각이 들었다. 

선생이 <토지>를 쓰던 책상을 원주 단구동 옛집의 모습대로 재현해놓았다.   






기념관을 끼고 산기슭을 올라가면 선생의 묘지가 나온다. 묘지 자리는 원래 펜션이 있는 농원(양지농원)이었다. 지금도 주변은 농원이다. 몇 년 전 통영을 찾으셨던 선생이 펜션에 머물며 이곳에 살고 싶다고 한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던 농원 주인이 선생의 묘지로 기증했다고.


직선으로 올라갈 수도 있는 길을 지그재그로 길게 만들어놓아 천천히 오르면서 선생에 대한 추억을 하도록 했다. 


길 중간중간 자연석에 선생의 시나 말씀을 새겨놓아서 이야기거리를 만들어준다. 


드디어 묘지에 도착. 선생은 푸른 바다와 한산섬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누워 계셨다. 앞으로는 남해 바다가 보이고 뒤로는 미륵산이 지키고 있는 이곳은 왕후장상의 묘자리라고 한다. 그래서 땅주인마저도 감히 묘를 쓸 수가 없는 자리였다고. 


아주 작은 묘비며 소박한 묘지에서 번잡하고 화려한 것을 싫어하던 선생의 생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의 묘지보다도 더 소박하다.


딸아이와 함께 절을 드리며 마음이 울컥했다. 


죽음마저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고 하셨던 선생, 나는 묘지 주변을 서성대기도 하고 옆에 앉아 묘비의 먼지를 닦아내기도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이 행복하시길 빌었다. 1박 2일 여행을 함께했던 딸아이는 체험학습 보고서에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박경리 선생님으로 바꼈다고 쓰기도 했다.


이름 석 자와 생몰 연대만 적은 아주 작은 비석.
  

묘지 주변에 있던 감나무. 


묘지 아래 정자에 앉아 있다 보니 소나무 두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돌계단 몇 개를 오르면 선생의 묘지가 나오는데 꼭 묘지를 지키는 문지기 같다.    

통영 사람들도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박경리 선생의 고향이 통영이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어린 시절 통영을 떠난 후 오간 적이 없다고 한다. 원주 사람들의 무심함이 선생을 통영으로 가시게 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무스탕 2010-06-07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님까지 같이 나선 수학여행이라니..
박경리선생님의 묘지는 정말 소박하네요. 저렇게 단촐하여도 많은 울림을 주셨던 분이시라 좋은 기운이 주변에 그득할거 같아요 ^^

소나무집 2010-06-08 09:31   좋아요 0 | URL
딸이랑 같이 가서 더 추억거리가 될 것 같아요.
묘지가 너무 소박해서 울림이 더 컸고 감동이었어요.

프레이야 2010-06-07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의 묘지에 이제 작은 비석이 섰네요.
두해 전인가 갔을 땐 묘만 뎅그러니 있더구만요.
통영에 가게 되면 꼭 다시 가보고 싶어요.
기념관도요.

소나무집 2010-06-08 09:41   좋아요 0 | URL
님도 다녀오셨군요.
작은 비석이 마음에 들더라구요. 박경리라는 대작가의 그릇을 보는 듯했어요.
돌아가신 지 2년이 되다 보니 이젠 공원으로 자리잡아 가는 듯... 저곳을 박경리 공원이라고 이름 지었더라구요.
기념관은 원주를 옮겨놓은 듯했해서 원주 단구동 집을 다녀가신 분들은 실망할 수도 있겠더라구요.
꼭 다녀오세요.

순오기 2010-06-08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통영 선생님의 소박한 묘소에 다녀왔군요.
나도 언젠가는 가뵈어야 할 곳이라~~~ 고마워요, 소나무집님!
농원 주인이 기증했군요. 앞이 탁 트이고 정말 좋은 자리네요.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박경리 선생님으로 바뀌었다는 선우~ 그 자체로 감동이에요.

소나무집 2010-06-08 09:42   좋아요 0 | URL
네, 이름하야 수학여행...
묘지는 누가 봐도 명당이었어요. 농원 주인이 기증했다는데 그 사람은 박경리 선생 덕분에 대대손손 먹고 살게 생겼더라구요. 묘지 입구에 펜션이 열 동 정도 있었는데 늘 북적이나 봐요.
딸내미는 어른들과 빡빡한 일정에 동참하느라 힘들어서 짜증도 많이 내더니만 집에 와서 내린 결론은 그랬어요.^^

세실 2010-06-08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여름 휴가로 통영에 갈 예정인데 이곳에도 다녀와야 겠습니다.
비석이 참 소박하네요.

소나무집 2010-06-08 09:40   좋아요 0 | URL
통영엔 가볼 곳이 참 많았어요. 제가 시간 되는 대로 갔던 곳 사진 올릴게요. 김춘수 기념관, 유치환 거리와 청마문학관, 윤이상 공원, 동피랑 마을, 이순신 공원...

꿈꾸는섬 2010-06-18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통영에 갔을때 미처 찾아가보질 못했어요. 김춘수기념관이랑 유치환거리, 윤이상공원등은 다녀왔는데 말이죠. 다음에 다시 꼭 가보고 싶어요.^^

소나무집 2010-06-20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통영은 정말 문학 예술인들이 많더라구요. 복 받은 동네예요. ^^
윤이상 공원은 시간이 없어서 못 들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