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이 내 생일인데 남편이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정으로 제주도에 갔어요. 요즘 아들 일 때문에 내내 마음이 불편해져 있는 상태인데 마누라 생일날도 잊고 제주도로 가버린 남편이 야속해서 잔소리를 마구마구 했더니 이런 편지 한 장 남겨놓고 떠났네요.
생일 축하합니다. 당신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얼마 만에 당신에게 편지를 보내는 건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난 가끔 우리가 원주에서 살 때 새해 첫날 해맞이 행사로 새벽녘 집을 나서던 길에 당신이 내게 보낸 편지를 생각합니다. 내 마음에 따뜻한 난로 하나를 품고 있는 것 같아 한 겨울 새벽, 산 정상을 몰아치던 칼바람도 그리 차게 느껴지지 않았으니까요.
생일날 외롭게 보낼지도 모를 당신을 생각하면 나는 왜 제주도 집에 와 있나 참 정신 나간 남편 아닌가 싶은 생각뿐입니다. 글쎄요? 어쩌면 이렇게 당신과 내가 바다 건너 편지를 쓰고 받으며 거꾸로 당신의 생일을 진심으로 생각해보게 된 건 아닐는지요. 그저 일 년 중 하루, 매년 찾아오는 똑같은 기념일이 아니라 소중한 우리 가족을 위해 공기와 물과 햇볕 같은 존재로서 당신을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달리기를 하면서 당신을 생각합니다. 당신이 있어 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마라톤을 즐길 수 있다고.
소주 한 잔 하면서 당신을 생각합니다. 당신이 있어 내가 이렇게 맘 놓고 회사를 다니고 동료 직원들과 웃고 떠들 수 있다고.
편지를 쓰면서도 당신을 또 생각합니다. 당신이 있어 내 마음을 담은 편지가 제 갈 곳을 찾는다고.
내 마음속 제주도는 늘 돌아가고픈 곳입니다. 그곳에 부모님이 계시고, 어린 시절을 함께 나눈 친구들이 있고, 내 귀에 익숙한 말과 풍경이 있습니다. 태안과 멀어지고 친구들과 떨어져 머나먼 남쪽 바다 끝자락에 내던져진 것 같아 당신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이지만, 완도로 오면서 가까워진 거리만큼이나 고향 제주도를 쉽게 갈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옛날 옛적 완도 사람들이 떠올리던 빙그레 웃을 '완'자 하나를 맘속에 품게 됩니다.
모처럼의 일 없는 외출입니다. 당신께는 미안하기 짝이 없는 염치없는 외출입니다.
'그냥 고향에 가고 싶었나 보다, 정말 아무 생각 없는 철부지 남편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쩌다 날짜를 잘못 택하는 바람에 더 못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실 미국으로 가기 전에 한번쯤 집에 다녀오고픈 편한 마음 하나만으로, 아버지 어머니 안녕하신가? 친구들도 다 잘 지내는구나, 고향은 늘 같은 걸 내 눈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그 일정에 마라톤 대회가 있기에 집어넣었습니다.
아마도 난 이번 제주도 다녀오는 길 내내 후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과 지우, 선우 없이는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출장도 부귀영화(!)를 누리는 여행도 모두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편한 맘으로 떠난 길, 그래도 무사히 다녀오겠습니다. (철없는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