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덩이 창비청소년문학 2
루이스 새커 지음, 김영선 옮김 / 창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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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농사를 짓던 우리집에선 굴을 많이 팠다. 깊이도 꽤 깊어 사다리를 놓아야 들어갈 수 있었고, 아래로 내려가면 양 옆으로 파놓아 생강이나 고구마 같은 걸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그런데 그게 아이들에겐 아주 좋은 놀이 장소였다. 특히 남자 아이들에게는. 어린 시절 나도 오빠를 따라 한두 번 들어가 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깜깜한데다 뭔가 나올 것 같은 오싹함 때문에 굴 속에 오래 머물러 있기는 싫었다. 그리고 재미있는 건 겨울이면 노루나 살쾡이 같은 동물들이 빠졌다가 밖으로 나오지 못해 굶어 죽는 일이 가끔씩 생기기도 했다. '구덩이'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갑자기 어린 시절의 그 굴이 떠올랐다.

'구덩이'라는 제목에선 뭔가 부정적인 냄새가 난다. 그래서 처음엔 제목을 뭐 이렇게 번역했을까 싶었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니 '구덩이'라는 제목이 아주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비밀을 숨겨놓기에는 구멍이나 틈보다는 구덩이가 훨씬 좋을 듯했기 때문이다. 불운하기 짝이 없는 주인공 스탠리가 끊임없이 구덩이를 파야 하는 이유가 황당하기도 하지만 결국 필연적인 운명이었음을 책을 다 읽을 즈음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이게 추리 소설을 읽는 맛일까?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자꾸만 앞으로 다시 책장을 넘기는 일이 많아졌다. 지독하게도 운이 없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소년원에 들어온 스탠리, 그리고 가족들은 모든 잘못을 이름이 같은 고조할아버지의 탓으로 돌린다. 고조할아버지가 약속을 안 지켜 집시 할멈 제로니의 저주를 받은 탓에 대대손손  불운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고조할아버지가 못 지킨 약속을 스탠리가 지켜낼 수 있을까?

하늘에서 떨어진 운동화 한 켤레가 데려다준 '초록 호수 캠프'. 소년원의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예쁜 이름이다. 결말이 다시 밝은 느낌의 초록 호수로 돌아올 거라는 암시가 아닌가 싶다. 갑자기 등장하는 백 년 전 흑인 양파장수 쌤과 백인 여선생 케이트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는 또 어떤 사연이랑 맞물리는 건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왜 하필이면 양파 장수인지...

힘들게 구덩이를 파며 나누는 제로와의 눈물겨운 우정이 집시 할멈과 관계 있다는 것을 캠프를 탈출해서 엄지손가락 산을 다 오를 때쯤에야 알아채고는 손바닥을 쳤다. 케이트 바로우가 사랑한 사람이 양파 장수일 수밖에 없는 사연은 또 얼마나 교묘한지 모른다. 고조할아버지의 전재산이 든 가방을 훔쳐간 이가 케이트 바로우이고, 그 가방이 초록 호수 마을에 묻혀버린 사연을 알기까지 한순간도 긴장을 멈출 수가 없었다. 스탠리가 죄없이 끌려와 이유도 모른 채 구덩이를 파야 하는 까닭. 이 모든 것에 대한 궁금증은 책장을 덮을 때쯤에야 풀리니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4대에 걸쳐 불운에 불운을 거듭하던 스탠리의 가족은 모든 매듭을 푼 스탠리 덕분에 비로소 행복해진다. 크게 세 덩어리가 하나로 연결된 이야기지만 그 중 나는 스탠리와 제로니의 우정 이야기에 흐뭇했고, 흑인 양파 장수와 백인 여선생의 사랑 이야기에는 덩달아 마음이 설레이기도 했다.

결국 구덩이에는 소중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 우정, 희망과 행복. 그런데 그런 것들은 내가 직접 나서서 애쓰지 않으면 결코 얻을 수 없는 것들이란 사실도 아이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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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맘 2007-09-05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모든 얘기가 함축되어 있군요.
음~. 오늘도 좋은 책 소개받고 갑니다. ^^.

소나무집 2007-09-06 10:06   좋아요 0 | URL
어른들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네요.

비로그인 2007-09-05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추천 ^^

소나무집 2007-09-06 10:06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하늘바람 2007-09-06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창비 새책이인가요?

소나무집 2007-09-06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추리 소설인데 재미있어요.

프레이야 2007-09-06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비 청소년 추리소설이군요, 재미나 보여요^^

소나무집 2007-09-20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편도 읽더니 재미있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