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는 대륙의 합리론자였고, 다른 합리론자들처럼 당시의 수학적 세계관에서 인간의 본성에 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근원적인 욕구를 자기보존욕구라고 보았고, 이 자기보존욕구는 남에게 받는 수동적 성향과, 남에게 주는 능동적 성향 사이에서 마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앞날을 예견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가장 근본적인 제약 조건 하나를 두고, 그 제약조건에 수동적 조건을 빼고, 능동적 조건을 더한다. 이는 전형적인 수학의 방법이고, 그의 대표저서인 에티카가 그렇듯, 스피노자는 수학의 공리처럼 인간의 감정을 낱낱히 분석하고, 거기에서 법칙을 이끌어내려고 했다.

 

하나의 거대한 실체, 능산적 자연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그리고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신이라고 대표되는 조르주 브루다노에게서부터 내려온 범신론이라는 것. 모든 것은 신, 하나의 실체가 그 근원에 있고, 이 실체는 무한의 변양을 거쳐 각 양태로 나뉘게 된다. 그런데, 이 양태는 그 주변의 양태에 의하여 일정한 제한을 가질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우리는 우리 주변을 돌아볼때 굳이 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의 양태를 계산하면 되는 상황이다. 옆의 사람이 나에게 뭘했네, 저기 길이 있네. 등등.

 

스피노자는 옳았다. 만약에 우리 삶이 저런 수학적 법칙처럼 딱딱맞아떨어져서, 더하고 빼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감정이 계산되고, 이 감정으로 인하여 야기될 상황을 고려해보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미래를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시대에도 - 앞날이 모조리 계산할 수 있는 시대에도 - 그렇게 될 것 같다, 라는 것은 절대 그렇게 해도 좋다, 를 보장하지 않으니 윤리학이 여전히 필요하기는 할테지만, 우리 삶이 그야말로 굴레에 묶여있고, 우리는 그 극장에서 정해진 대본을 읊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그야말로 이성을 통하여 자신의 바른 양태를 찾아 그 길대로 걸아가는 사람이라면 무엇에 절망하고, 무엇에 슬퍼하겠는가.

 

당신이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졌다면. 이는 충분히 계산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서로의 마음이, 서로의 환경이 당신들은 원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감정을 그렇게 몰아갔을지도 모르고, 이윽고 스스로만 몰랐던 그런 파국이 당신들에게 닥쳐오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우리는 그저 미래에 모든 가능성을 걸 수 밖에 없다. 그 미래가 설령 엄청나게 멀어서, 몇 겁의 시간이 필요하더라도, 언젠가 인생아 다시 한번, 이라는 신의 외침속에 모든 입자가 뉴턴 역학적 세계관대로 그 자리가 계산되어 다시 지금 한번이 반복되는 푸앵카레 순환이 일어난다면, 그야말로 니체가 말했던 영원회귀처럼, 나는 당신을 만나서 다시 사랑을 할 수 있고, 그리고 그때는 - 똑같이 헤어질테지만 - 다시는 헤어지지 않겠노라고, 그녀를 품에 안고 외칠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틀렸다. 현대 물리학은 뉴턴 역학의 개념을 보완했고, 미시적인 세계에서는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여 한 입자의 위치와 운동을 계산해낼 수가 없다. 아니 더 나아가서, 벅키볼, 그러니깐 탄소 60개짜리 구형 분자의 실험 결과는 양자역학에서의 미시성과 거시성의 경계를 허물었고, 정보를 교환하지 않는 한, 거시세계에서도 충분히 불확정성 원리가 일어날 수 있다는 실험 결과를 보였다. 물론, 여전히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감정적 교류를 가지며 살아간다. 그런데 감정은, 근본적으로 감정의 분자는, 머리속에서 생산된 수많은 호르몬과 화학물질의 집합이고, 어쩌면 이 분자들이 고립되는 상황이 생긴다면, 이 분자들의 위치와 운동은 계산하기 어려울 것이고 - 영겁회귀가 일어나기 위하여 영겁의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 영겁의 시간 동안 한 분자가 다른 분자와 고립될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할터이니 아마 영영 지금 이 순간과 같은 화학물질의 균형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 시대에서 몰랐던 것을 근거로 그를 비판하는 것은 온당치않지만, 아마도 감정은 계산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감정을 계산할 수 없으니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더하거나 더 빼거나 할 수도 없으며, 이윽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비이성적인 존재인가, 라는 결론에 자괴감에 빠질 수 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아마,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한동안 계속 고통스러워할수밖에 없을것이다. 지금 그녀와 헤어진다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테니까. 다시는, 영겁의 시간이 지나더라도, 계산된 과정에 따라 걸을 수 없을거니까.

 

이런 생각에 접어들게 되면, 나는 너무 슬퍼서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게 된다. 헤어지고, 떼쓰며 매달리고, 그러나 결국 그녀는 아마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라는 명확한 - 다른 사람 눈에는 보였지만,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아니,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 그런 결론에 다다르게 되면, 그야말로 무너져서 쓰러져 오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어쩌면 나는, 그렇게 힘들었던 그녀의 등을 마지막으로 떠밀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그녀를 만나지 않았으면 서로에게, 더 좋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 어쩌면 자의식 과잉이겠지만 - 직장을 그만두고 올라가버리는 일도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그녀가 떠나더라도 전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할텐데.

 

수백권의 철학 서적. 수백권의 과학 서적. 수십권의 소설. 내 방 한켠에 놓여있는 인류 지식의 결정체들. 그녀와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났을때, 그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무엇때문에 이렇게 책을 많이 사냐고, 무엇때문에, 다 읽지도 못하는 책들을 이렇게 사냐고. 나는 그녀에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아마 - 좀 더 멋있어 보이려는 말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 책들의 높이는 나의 고독의 높이라고. 나의 고독함이 깊어질수록 책이 쌓여만 간다고. 그렇게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거의 무의식중에 나온 말이었지만, 그 말만큼 나의 상황을 드러내주는 말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마치 자신이 철학적 성과를 완수하도록 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양, 레기네 올센과 파혼을 했다고 한다. 그건 정말 멍청한 짓이다. 뒷날 파이힝거는 마치 ..의 철학, 이라는 논문에서 이런 명제를 분석하며, 이런 의제가 도리어 고차원적인 세계를 낳을 수 있다고 부연하지만, 마치 ..는 실제 현상을 절대 표현할 수 없고, 그저 가정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당신은 고차원적인 세계에 사는가? 그것은 사실 펜로즈의 견해에 따르면 '의식의 짐'이고 진화과정에서 생긴 것일지도 모르며, 어쩌면 진화심리학적인 사례가 아닌가? 결혼을 하고나면 - 마음의 안정을 찾고 나면 - 도리어 어떤 성과가 줄어든다던가. 일부러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 성과를 내려고 했던걸까, 그러나 반대로 말하자면, 사랑은 그 업적만큼이나 소중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본능에 새겨질정도로. 그 화학적 불균형과 호르몬의 분비가 천칭의 반대쪽에 놓여있다는 말이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좋아하게 되는 일은 저 수많은 인류 지식 따위들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훨씬 더 값지고, 훨씬 더 기적같은 일이다. 어쩌면, 신도 없고 운명도 없는 이 세계에 유일하게 믿을만한, 유일하게 가치있는 그런 일일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이 - 환원론적 사고에 따르면 그저 감정의, 호르몬의 불균형에 지나지 않더라도 스피노자가 앞서 자신의 세계관에서 여전히 윤리관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듯, 그런 불균형이 있다고 해서 그게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그 무엇보다도 가치가 있었던 것이고, 헤어지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나는 그저 무너져서 울음을 터뜨릴 뿐이다.

 

사실은 신이란 게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은 운명이라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수많은 논리적인 논증, 수많은 진화적 증거, 수많은 당위성 - 너 하나만을 위하여 우주를 움직여주는 존재가 있을 리 없다는 - 그런 논증이 수백개가 있더라도, 사실은 책을 집어던지고 싶을 뿐이다. 그녀가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면 그런게 무슨 소용일까?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도저히 할 수 없는 - 틀어질만큼 틀어지고, 멀어질만큼 멀어진 그 거리에서, 그야말로 광속으로 달려도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그 사건의 광원뿔 저편에서, 이럴때는 그저 체념을 하면될텐데, 그저 체념을 하면 될텐데, 그래도 아쉬워 기적을 바라고.

 

헤어진 것 까지가 운명일까?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헤어지는 것 까지가 정녕 운명인 것일까? 그렇게 체념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그렇게 살아가면 - 죽을만큼 힘들지만 - 그냥 영영 추억으로 남으면 되는걸까. 이렇게 복잡하게 이야기하느니 역시 운명이란, 신이란 없고. 그저 남는 것은 자기 합리화일뿐이다. 그러니깐 그냥 단순히 연애랑,사랑이랑, 결혼을 분리할 수 있으면 돼. 몇번씩이고, 가슴아프고, 상처주고, 상처받는 그런 과정들, 그냥 제외해버리면 마음이 편하잖아. 그렇게 쌓인 책더미들에게 물어봐도,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아마 영영 나는 이전과 같지 못하겠지. 아마. 사실은 행복하게 그녀와 살고 싶었다..

 

보고 싶다. 하지만 그때 내가 다리를 태웠다. 그저 멍청한 짓이었다. 한번만 되돌리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기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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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4 08: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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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0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