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기에 제대로 책들을 읽지 못했다.

 

 

 

대한민국史 .

 좋은 책이지만 굳이 다른 사람에게 권할 만한 책은 아닌 것 같다. 우연히 눈에 띈다면 집어들고 읽어보길 바라지만 말이다. 저자의 이력이 앞날개에 실려있는데, 어느 정도 진보 성향에 가까운 저자이다. 내용도 진보 쪽에 (굳이 보수와 진보로 책 내용을 구분하자면) 가깝다. 책 내용은 왼쪽의 숫자가 가리키듯이 저 사이에 일어난 정권들 모두를 끊어서 다루고 있다. 이승만, 장면(엄밀히 말하면 총리일테고 대통령은 윤보선으로 기억한다.), 박정희, 유신,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 까지를 다루고 있다. 얼핏 보면 진보 성향의 저자이기에 당연히 박정희, 이승만 등을 강하게 비판할 것이 예상되는데, 물론 그 예상은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의외로 이 저자가 가장 강렬하게 비판을 하는 정권은 김영삼 정권이다. 비판의 강도가 저 정권에서 그렇게 강한 것은 저자의 민주화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극점에 올라갔다가 모조리 실망의 나락에 떨어져서 그런 것일까? 전두환 정권 때 일어난 '서울회군사건' 을 가장 강하게 비판할 거라고 여겼던 나로선 의외인 부분이었다. 아직 어떤 정권에 대해서 역사의 심판, 을 내리기에는 좀 시간이 모자란 감이 있고, 저자도 그 점을 여러 번 책에서 강조한다. 그렇기에 이 책의 내용은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확실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근현대 관련하여서 우리 대한민국이 어떤 발자취를 거쳐왔는지 알고 싶다면 한 번쯤 살펴볼만하다.

 

다만 근현대사의 특성상 책의 보수가 몇 번이고 필요할 것이다. 개정판을 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엽적인 부분에서 좀 잘못된 부분이 보이고,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의견과 연구를 실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는 1988년 우리나라가 올림픽을 개최했을때의 메달 수를 잘못 기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줄로 넘어가고는 있지만 박종철 열사에 관한 글에서 오연상 교수와 안상수 검사의 활약으로 그 진상이 밝혀졌다고 쓰고 있는데 2011년에 박종철기념사업회는 거기에 대하여 다른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울회군사건' 이라고 일컫어지는, 전두환 정권 당시에 갑자기 학생 시위가 잠깐 멈춰진 사건에 대하여 이 책에서는 대수롭지않게 넘어가고 있지만 어떤 이는 그 사건 때문에 민주화의 시점이 매우 늦어지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나의 경우에는 이 책에서 이야기하듯이 계엄령을 내릴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하여 자발적 해산을 하였다, 라는 쪽을 더 지지하고 싶지만 다르게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는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책을 쓴 시점이 시점이니만큼 이런 부분을 모두 고려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자료를 인용하는데에서는 잘못된 곳들이 없어야 할 것이리라고 여겨진다.

 

 

 

아발론 연대기.

난 사실 이런 책이 있다고는 생각도 못했다. 너무 늦게 알게 된 것 같다. 혹시나 나처럼 모르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이렇게 끄적여둔다. 이제 겨우 1권에서 머물고 있는 주제에 전체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란 어려운 일이고, 그저 책의 문체나 표지, 구성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문체를 이야기하자면, 사실 정말 이야기책같은 문체를 사용하고 있다. 보통 신화를 다루는 책들을 보면 이러이러이러하니 그렇다. 이랬다. 이런 식으로 문장이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책은 마치 소설책 읽듯 글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다음 부분을 궁금하게 만든다. (이건 역자에게 공을 돌려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구성상으로 볼 때 개인적으로 역자 주를 바로 확인할 수 있게 아래에 놓아둔 것도 좋다고 여긴다. 이는 물론 개인 취향차이가 있을테지만 주를 확인을 하면서 읽어나가는 것을 좋아한다면 거슬리지는 않을 것이다. 표지는 판타지 소설과 비슷하달까. 아발론 연대기라는 이름이 상징하듯이 이 책은 아서 왕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법사 멀린과 아서 왕, 원탁의 기사에 대하여 깊게 알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밤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이 책도 겨우 반정도 읽은 상태라 좀 부끄럽지만, (변명을 하자면 너무 바쁘니 읽지를 못하고 있다.. 라기 보다는 어차피 책 잡담 글이니...)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을 제법 즐겨 읽었던 나로서는 너무 따뜻한 이야기들이 많아서 내가 알던 그 히가시노 게이고인가 같은 의문을 띄웠었지만 말이다. 가끔은 이런 따뜻한 이야기도 괜찮은 것 같다. 하지만 다음 작품에서는 차갑고 비정한 스릴러의 세계로 다시 돌아와줬으면 좋겠다.

 

 

 

 

 

 

 

 

이전에 폴 오스터의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을 봤는데 솔직히 말을 걸고 싶었다.

난 폴 오스터에 대하여 아는 게 하나도 없지만 너무 이름을 많이 들어서

어떤 책을 쓰고 어떤 스타일이며 어떤 감정을 주는지 묻고 싶었다

만약에 여자가 아니었다면 훨씬 쉽게 물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남자다 보니 괜스레 그런 걱정을 사서 하기도 한다.

아니, 남자한테 물으면 더 이상한걸까?

 

물론 만에 하나 하루키의 책을 들고 읽고 있는 사람을 본다면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바로 가서 물을 것이다.

하루키 좋아하세요, 라고.

 

아마 이상한 사람처럼 나를 쳐다보겠지만.. 그래도 난 하루키의 작품을 정말 좋아하니까.

젠장, 하루키의 작품은 너무 좋다.

전혀 면식이 없는 사람에게 말을 걸게 만들 정도로.

 

머리가 짧으니 내 자신감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달까.. 빨리 머리가 자랐으면 좋겠다.

며칠 전에 결혼정보회사에서 회원가입하라고 전화가 왔는데 (선생님, 외로우시죠?)

솔직히 솔깃했..지만 거절했다. (괘, 괜찮아요.)

 

아직은 괜찮아요, 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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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4-24 21:15   좋아요 0 | URL
아 내일부터 지하철에서 하루키를 읽어야겠네요 ㅋㅋ 그리고 저도 아직은, 쿨럭, 괜찮아요. 킁킁.

가연 2013-04-24 21:28   좋아요 0 | URL
방금 다락방님의 서재에 댓글을 달고 왔어요, 풋. 실시간이네요. 그런데 정말 아쉽게 저는 이제 서울을 떠나 지하철이 없는 도시로 와서.. 어헝헝... 하루키를 읽는 다락방님을 못뵙겠네요ㅠㅠㅠ 서울 가게 되면 지하철을 꼭 탈께요, 우연히 만나도록 합시다, 쿡.

희선 2013-04-25 00:45   좋아요 0 | URL
히가시노 게이고는 아주 드러나지는 않지만 늘 글 속에 사람이 가진 따듯한 마음을 집어넣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가운데 <도키오>는 분위기가 비슷하기도 합니다(아시고 있을지도...)

폴 오스터 책을 보던 사람이 처음으로 그 책을 읽은 것이라면, 하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는군요 저는 그런 말을 잘 못하겠어요 뭐냐 하면 작가에 대한 말이라고 해야 할까, 제대로 알고 보는 게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작가의 책을 많이 봐도 그래요 지금까지 너무 대충 봐왔다는 생각이... 앞으로라고 많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지만,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폴 오스터 책은 예전에 좀 보기도 했는데, 생각나는 게 별로 없군요 책 제목만 떠오릅니다

하루키, 하니 예전에 나왔던 광고가 떠오르는군요


희선

가연 2013-04-28 17:56   좋아요 0 | URL
폴 오스터 책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ㅎㅎ 한 번 읽어보고는 싶은데 잘 기회가... 예전처럼 서점에 마구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비로그인 2013-04-25 12:06   좋아요 0 | URL
지하철에서 하루키 읽는데 누가 말 걸어오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반갑게 대화를 나눌 거예요~ㅎㅎ
서울 갈 때마다 가연님이 떠올라요
결혼정보회사 가연.이란 광고가 가끔 눈 앞을 왔다갔다 하거든요ㅋ~

가연 2013-04-28 17:55   좋아요 0 | URL
풋, 특히 강변역에 그런 광고가 있지요. 저도 볼때 어라, 내 닉이랑 같네, 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답니다.
 

 

 

 

  당신에게 3만원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그 3만원에서 만원을 넘지 않는 수준으로 더 돈을 쓸 수 있다고 하자. 그렇게 돈을 쓴 뒤에는 한동안 수입도 없고 더 돈을 쓰지 못한다. 그런 당신의 눈 앞에 책 두 권이 있다. 각 권은 모두 3만원보다 가격이 비싸지만 어떻게 겨우 구입할 수 있을 정도의 가격이다. 물론 앞서 말한 것 처럼 돈이 없기 때문에 두 권 모두 사지는 못한다.

 

 

 

 

 

 

 

 

 

 

 

 

 

 

엄밀히 말하면 두 권이 아니라 세 권이다. 스노볼은 두 권을 묶은 것이고, 좀 더 첨언시 가격상으로 스노볼은 자그마치 50퍼센트나 할인 행사중이다. 곰브리치 서양미술사야 대학교재로도 쓰일 정도의 수준의 책이니 쉽게 절판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스노볼은 물론 훌륭한 전기일테지만 절판이 된다거나 할인율이 다시 오른다거나 하는 일이 생기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 물론 책을 사는, 그러니까 고르는 기준이 아니라 사는 기준은, 가장 필요한 책을 구입하여라, 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둘 다 필요로 하는 책은 아니다. 그러다보니 천칭은 스노볼 쪽으로 흔들리는데..

 

그렇다면 당신은 스노볼을 선택하는 것이 이득일 것인가?

 

하지만 곰브리치 그 사람이 쓴 책을 포기하기도 아깝다. 어차피 필요로 하는 책이 아니라면 더 재밌는 책을 고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저 왼쪽의 책을 읽었을때에 당신은 등줄기에 전기충격을 느꼈다. 엊그제 어깨를 다쳐서 병원에서 전기로 치료를 받았을 때의 그 느낌에 당신은 온몸을 뒤틀며 말했다

 

'이, 이 책은 사야돼'

 

과연 당신은 무엇을 고를 것인가? 워렌 버핏의 저 인자한 미소를 고를 것인가, 곰브리치의 해학을 고를 것인가, 선택은 당신에게 달렸다.

 

 

 

..처럼 고민하고 있는 요즘.

 

 

 

사실 너무 바쁘다. 일주일 내내 서울 대전 대구를 찍으며 돌아다니는 중이다. 곧 또 서울에 가야만 한다. 그 틈새를 써서 몇 가지 봐둔 책에 대하여 끄적여 둔다. 물론 이 중에는 앞으로 곧 구입할 책도 포함될거다. 아무래도 책을 읽으면 이 책은 꼭 구입하여야지, 싶은 책들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서양미술사.

이 책과 위의 스노볼 중에서 고민중이다. 과연 어떤 책을 사야할 것인지 말이다. 그동안 누군가가 미술사에 대해서 물어오면 '음, 나는 안읽어봤지만 곰브리치가 쓴 책이 좋다고 그러더라구' 라고 대답을 하는게 질려서 직접 읽어보기로 했는데, 과연 대단한 책이다. 끝까지 읽지는 못했지만 도서관에서 읽은 결과 칼라 도판도 충실히 크게 실려서 그림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게 하면서, 그 아래 설명도 잘 실려져 있다. 때로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대부분은 두 그림 중 A가 더 멋지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둘 다 멋지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그림이든지 그림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으며, 본인이 비전문가의 위치에 있고, 비전문가들을 위해서 이 책을 쓴다, 며 겸손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토머스 페인 유골분실사건.

사실 나 또한 다른 사람들 처럼 으스스한 제목에 무슨 소설인가, 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는데, 아니 예상과는 전혀 다른 책이 아닌가? 토머스 페인, 이라는 사람의 생애를 추정하면서 앞으로 나가는 책인데 상당히 뛰어난 책이다. 단순히 일대기를 그려낸다면 전기가 될 것이고, 작가 자신의 판단에서 자유롭지 못한다면 평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과거와 현재를 교차해나가면서 그런 전기와 평전 사이의 그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나는 소책자 '상식' 이라는 책에 대하여, 그리고 중심 인물인 토머스 페인에 대하여 전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이 쓰여진 방식은 굳이 토머스 페인이 누구인지도, 상식이 무엇인지도 모르더라도 그냥 따라갈 수 있도록 쓰여져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과거와 현재를 한 장소에 맞춰서 동시에 서술을 드러낸다고 했는데, 모두 미국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미국에 한 번도 가본적 없는 나로서는 어떤 장소인지 모른다는 점이다. 

 

 

 

융합학문, 어디로 가고 있나?

우연히 몇 부분 읽게 된 책인데, 여기에 담아둔다. 마찬가지로 도서관에서 조금 더 훑어보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부분인 프리모 부분을 다루고 있기에 더 훑어보게 되었다. 프리모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지만 북한의 봉한관에서 시작되는데, 일종의 경락이라고 추정된 관이다. 서울대학교에서 다루고 있는데, 물론 정말 경락 자체와 동일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완전히 또다른 신체 내의 체계라고들 한다. 생명과학쪽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 친구의 말에 의하면 정말 좀 특이하다고는 하는데, 사실 아직은 너무 정보가 부족한 상황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프리모에 관한 이야기도 특별히 이전에 비하여 더 나아간 부분은 없는 듯 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 서점에서 조금 훑어본 책이다. 세 챕터 정도 읽었기 때문에 정확한 평을 내리기는 어렵겠지만, 상당히 잘 쓴 책이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유시민의 책들을 서너권 읽은 것 같은데, 이 책은 그 책들 중 가장 잘 쓴 게 아닐까, 하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잘 썼다, 라는 말이 좀 애매하긴 한데, 물론 지금껏 유시민의 책들인 국가란 무엇인가, 청춘의 독서, 경제학 카페 등과 같은 책들이 못썼다, 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국가란 무엇인가, 처럼 어딘가 급한 느낌을 주지도 않고, 청춘의 독서처럼 어딘가 부족한 느낌을 주지도 않는다. 다만 진솔하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고백하는 모습에서 무언가, 혹은 무엇이든지, 무엇이라도 내려놓은 유시민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잘 쓴 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유시민은 여기서 이 책을 기점으로 자신의 삶을 다시 시작할 생각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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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4-13 00:33   좋아요 0 | URL
사고 싶은데 두 가지 가운데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무엇을 골라야 할지 망설여지겠습니다
지금은 그렇더라도 시간이 가면 마음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죠
하지만 시간이 가면 한권은 책값이 지금과 달라질 수도 있겠군요 잘 고르시길...


희선

가연 2013-04-13 11:20   좋아요 0 | URL
스노볼을 살 것 같아요, 하하하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지음, 전미옥.김윤희 옮김 / 느낌이있는책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다자이 오사무, 의 이름은 정말 많이 들어보았지만, 실제로 그의 작품을 읽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늘 하던대로 서점에서 이곳 저곳을 둘러보다가 책을 한 권 집어들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책이 바로 이 인간실격, 이라는 책이었지요. 더군다나 한 번은 접해봐야지, 라고 생각했었던 다자이 오사무의 책이라니. 바로 챙겨서 서점을 나갔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느긋히 즐길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고, 이런 저런 일들 중간에 틈틈히 읽어나가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원래 한 번에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것을 선호하던 저로서는 고역이었지요. 하지만 틈틈히 읽어나가는 것에 장점은 있었습니다. 그 장점이란 중간에 장면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이 장면은 왜 주인공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일까, 그런 것들을 고민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 글은 그런 고민들을 일부나마 풀어놓는 그런 장이 될 것입니다.

 

먼저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키워드를 잡아보겠습니다. 저는 감히 세 개의 키워드를 선택하겠습니다. 먼저 익살, 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요조, 는 어쩌면 다자이 오사무, 그 자신의 생애를 그대로 그린듯한 삶을 살아가는데, 이 요조가 택하는 사회적 생존방식이 바로 익살, 입니다. 좀 더 부연한다면 이런 것입니다. 요조는 작중에서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사람이 두렵다고, 도대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모른다고. 그렇기에 스스로 이렇게 평가합니다.

 

나는 무다, 바람이다, 허공이다. 

 

하지만 사회에 속해진 이상 (우리는 사회와 연관을 맺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 연관이 어떠한 방식일지라도.) 그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어떻게든지 교류를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약간 말을 바꾸자면, 나는 다른 사람과 어떻게든지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철학자 샤르트르의 말을 조금 빌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샤르트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을 했는데, 그 첫째는 가학적인 관계, 그 둘째는 피학적인 관계라고 하였으며 마지막은 무관심이라고 나누어 놓았지요. 그러나 샤르트르는 여기에 덧붙이기를 이 세 가지 관계 중 그 어느 것도 결과적으로는 모두 실패할 것이다, 고 이야기합니다. 즉, 어떤 관계든 그 관계가 나와 다른 사람을 이어주는 관계 중 하나라면, 그 관계는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끝날 것이라는 무서운 예언이지요.

 

 저 말에 따른다면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맺은 모든 관계는 이윽고 실패할 것이고, 그 관계를 맺고자 발버둥치는 몸부림조차 모두 헛된 짓이 될테니깐요. 그렇기에 실제로는 다르다, 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허나 여기서 말하는 관계, 는 상대방과 나와의 피상적인 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상대방과 나의 진정한 상호이해를 통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샤르트르가 저렇게 부정적인 발언을 했던 것도 알만합니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진실로 이해할 수는 없을테니깐 말입니다. 결국 대개는 원활한 관계를 위해 서로가 일정 부분 양보해가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혹자는 자신을 희생해가며 살아가게 되겠지요.

 

위의 샤르트르의 말을 따른다면 이 인간실격, 의 주인공 자신의 경우도 그 결말은 실패로 끝이 날 것입니다. 주인공인 요조, 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때 쓰는 기본 전략은 익살, 입니다. 그러니깐 자신이 광대가 되어 다른 사람을 웃기는 것입니다. 요조, 는 자신을 이상하게 꾸미거나, 잘 할 수 있는 것을 일부러 잘 못한다던가, 혹은 장난을 치는 등의 전략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다가갑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요조, 를 보면서 웃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적어도 요조, 가 생각하기에는) 요조, 에 대해서 이렇게 판단할 것입니다. 아, 요조, 라는 인물은 무해한 인물이구나,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전략은 결국 피학적인 인간관계에 속한다고 볼 수 있으며 결국 실패가 예견됩니다. 그리고 소설이 진행되면서 그 예견은 그대로 맞아떨어지지요.

 

둘째로 제가 내세우는 키워드는 여성입니다. 어떤 상징 체계에서의 여성을 살펴볼 경우 여성은 다음과 같은 역할을 수행합니다. 대지, 생산력, 재생 등 같은 역할들 말입니다. 보통 대지, 의 상징을 가지는 경우가 많지요. 그리스 신화의 지옥의 여왕 (하데스의 아내가 된) 페르세포네와 대지의 신 데메테르 숭배 신앙과 거기에 따르는 엘레우시스 비의가 그랬고, 그 이전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의 지옥의 여왕이었던 에레쉬키갈이 그러했었던 것 처럼 (물론 특이하게도 이집트 신화에서는 천공을 다스리는 신이 여신이었습니다.) 그러한 이미지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대지라는 이미지는 방금 전 예로 든 여신들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든 죽음과 자애, 두 가지의 모습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이미지는 인간 실격, 에 나오는 여성들과도 어느 정도 일치합니다. 주인공이 처음 겪게 된 여자들은 일종의 창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 창녀들에게 안기면서 다음과 같이 독백합니다. 그녀들에게 안길 때 만큼 포근했었던 적은 없었다고. 주인공은 정말 많은 여성들의 호의를 얻습니다. 하숙집 딸들이라던가 같은 서클서 활동을 하던 선배 그리고 여러 술집의 마담 등과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주인공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데 익살, 을 떨었고 결국 그 익살로 맺어진 관계는 실패하리라, 라고 앞서 언급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실패한 관계는 무엇으로 보상받아야만 할까요? 바로 여기서 여성이 그 해답이 됩니다. 자애로서의, 무한히 끌어안아주는 그런 상대로서의 여성. 주인공 본인은 여성들에게 호의를 받는 자신에 대하여 이는 일종의 저주와 같다, 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저주마저도 없었다면 주인공 자신은 이미 소설의 초반부에서 인간이 아니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여성들 중에서 특히 살펴보아야 할 인물이 둘 있는데, 한 명은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여급이었던 쓰네코, 라고 하는 인물이고 다른 한 명은 뒤에 다룰 요시코, 라는 인물입니다. 쓰네코는 주인공 요조, 보다는 연상이었는데 카페에서 여급으로 있다가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마치 온 몸에 쓸쓸함, 이라는 기류를 감고 있는 듯했던 그녀는 그 기류에 끌려온 주인공과 마음이 맞게 되고 결국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되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늘 피학적이었고, 그렇기에 결국 실패해왔던 주인공은 무서워져서 도망치게 됩니다. 우연스럽게 서로는 다시 재회하고 이윽고 현실에 지친 나머지 둘 다 죽음을 결심하게 되지요. 결국 쓰네코는 죽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끝끝내 살아남고 맙니다. 이 과정을 드러내는 부분은 이 소설 전체를 통틀어서 손에 꼽힐만한 장면이라고 여겨집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쓸쓸함, 그리고 죽음의 이미지, 마지막으로 사랑 (쓰네코가 죽은 뒤 주인공은 쓰네코에 대하여 내가 그녀를 사랑했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으로 변주되는 장면이기에 더욱 그렇지요. 여기서 이 이미지는 앞서 여성에게 주어진 두 상징성들과 합치됩니다.

 

셋째로 신뢰입니다. 이 신뢰라는 개념은 인간에게서 두려움을 느낀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모든 기대를 걸었던 개념입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익살을 부리다 결국 도망만 쳤던 주인공은 결국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고, 어느 누구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바로 그때 다가온 사람이 앞서 언급한 요시코, 입니다. 요시코는 무조건적인 신뢰를 주인공에게 베풀며 주인공이 새 지평을 바라 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부연하자면 구원의 실마리를 발견했었던 겁니다.

 

우리는 종교를 언제 진심으로 믿게 될까요? 저는 모든 절망을 다 겪고 바닥까지 떨어진 사람만이 진정으로 종교를 믿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종교라는 것은 믿음입니다. 사람은 이성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지만, 이 세상에서는 아직도 이성의 힘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있기도 합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는가? 내가 지금 행동하는 것이 내 자신의 자유의지로 행하는 일인가? 왜 이 세상에는 부조리가 존재하는가, 등등의 담론들 말입니다. 이성은 이러한 영역에서 점차 그 영향력을 넓혀가고는 있지만 아직도 완전한 답을 내리기에는 부족합니다. 결국 왜? 라는 질문에는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지요. 이렇게 잘 모르는 것은 두려움을 낳습니다. 바로 이럴때 사람은 이성을 잠깐 제쳐두고 믿음, 에 귀의합니다. 대개의 경우 여기서 자신을 이끌어주는 무엇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는 종교에 대한 믿음을 낳습니다.

 

스콜라 철학의 이야기를 잠깐 빌리자면, 토마스 아퀴나스를 위시한 스콜라 철학에서는 크리스트교의 세 가지 교의인 믿음, 소망, 사랑은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닌 하나의 뿌리를 가지며 각각에서 서로가 나온다, 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는 후대에 단테의 신곡에 영향을 미치기까지 했었었지요. 신곡의 천국편에서 단테는 '믿음에서부터 소망이 나오고, 거기서 사랑이 나온다.' 라는 말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가 올 것이라는 믿음' 이지요. 그리스도는 어떨 때 올까요? 인간이 절망에 빠져서 구원을 요청할 때에 바로 그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등장합니다. 결국 어떠한 어려움에 빠져도 나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인간실격의 주인공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대상이 그리스도가 아닌 요시코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절망 속에서 그는 자신을 누군가가 구원해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요시코는 그런 그를 구원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를 향한 무한한 긍정과 신뢰를 가지고 있기에. 그 믿음은 소망, 요시코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다, 을 낳게 되고 결국 주인공과 요시코들은 사랑을 가지고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방금 말했다시피 요시코는 (이중적인 의미로)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주인공은 요시코에게 보고 싶은 것만 보았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그 신뢰자체가 독이 되어 주인공을 파국으로 몰아넣어버리지요.

 

어느날 잠깐 밖에 나갔다온 주인공 요조, 의 눈에 비친 광경은 요시코가 어느 장사꾼에게 능욕당하는 광경이었습니다. 요시코는 그런 일을 당한 뒤 주인공에게 말합니다. '아무 짓도 안한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는 신뢰는 그런 식으로 배반당합니다. 요시코는 현실에 고정된, 피와 살을 가진 여성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이미 정신적인 존재가 되어 만인의 구원을 보장하는 그리스도와 달랐습니다. 그녀가 줄 수 있는 구원은 얇은 유리막 위에 지어진 집과 같았던 것이지요. 그녀의 의심할 줄 모르는 마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했찌만, 그것은 주인공 뿐이었고, 그런 무조건적인 신뢰가 다른 인간들마저 구원해주지는 못했던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충격을 받은 주인공은 절대자에게 묻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

 

이제 제목인 인간실격, 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봅시다. 이 인간실격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첫째는 일종의 반항적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체념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의미를 살피면 주인공 요조, 는 소설 초반부터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두렵다. 인간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모른다. 인간이 얼마나 위선적 존재인지 모른다. 인간은 자신의 아버지의 연설을 들으며 뒤에서 욕하고 앞에서 칭찬을 하는 그런 위선적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어서 마구 화를 내는 그런 무서운 존재입니다. 인간은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에는 무시무시한 분노와 악의로 가득찬 그런 괴물들입니다. 주인공으로써는 그런 존재가 인간이라면 나는 차라리 인간이 되지 않겠다, 라는 그런 마음으로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인간실격입니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주인공의 속마음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겠지요.

 

그런 것이 인간이라면 인간이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는 둘째 의미에 더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체념적 의미로서의 인간실격말입니다. 설명하자면, 인간은 어떨때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스페인의 민담을 보면 인간은 수치심을 가지기에 인간이리라, 라는 말을 합니다. 맹자는 수오지심, 시비지심, 사양지심, 측은지심과 같은 사단, 이 인간이 본래 가지는 성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저는 좀 더 단순히 접근하고 싶습니다. 인간은 믿음과 사랑이 있기 때문에 인간일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인간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믿음이 없는, 상대방과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없는 인간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극단적으로 말하여 이 세상에 인간이 나 혼자 남게 된다면 그때 나는 스스로 인간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까요? 내가 인간일 수 있는 것은 타인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릴 수 있는 것이고 타인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별 수 없이 그 타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사랑과 신뢰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사랑과 신뢰를 가진 존재, 바로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소설의 주인공은 사랑 - 쓰네코, 신뢰 - 요시코, 모두를 잃고 말았습니다. 이윽고 신뢰는, 무조건적인 신뢰는 죄인가? 라는 물음에 이르고 맙니다. 아닙니다. 감히 말하건데 신뢰는 죄가 아닙니다. 신뢰를 신뢰답지 못하게 만드는 환경에 그 죄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와 그 환경은 너무나 크기에 죄를 제대로 묻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주인공은 체념에 빠지게 되고, 본인은 인간으로서 갖추어야할 사랑, 신뢰 모두를 잃었기에 인간이 아니다, 나는 인간이 아니고 그렇기에 인간실격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해석들보다도 오늘날 더 이 소설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마 저 위에 잠깐 언급한 주인공의 독백부분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무다, 바람이다, 와 같은 부분말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현실을 살아가면서 스스로의 존재감이 희석되는 듯한 느낌을 종종 받기도 합니다. 사회 환경은 복잡해져가면서 다양한 생활방식을 낳으며 사람들은 그 환경을 살아가면서 정말로 다양한 생각을 가지며 살아갑니다. 옛날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현재는 더욱 더 그런 경향이 심화되어가기만 합니다. SNS와 같은 새로운 의사소통수단이 생기면서 개인과 개인의 거리는 가까워진듯하면서도 더 멀어져 가기만 합니다. 이 사람은 이러한 사람일거야, 라고 생각해보지만 실제로 만났을 경우 너무나 다른 사람인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여기 있는 내가 인터넷의 군집지성으로서의 나인지, 아니면 개별적 의미로서의 나인지 아리송해져만 갑니다. 결국 옛날이나 지금이나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 것은 어려운 것이지요. 그러면서 마치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혼잣말을 하는 겁니다. 나는 무다, 어쩌면 고독이다, 라고.

 

하지만 소설에서는 - 비록 소설에서는 실패했지만 조금이나마 해결책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결국 신뢰와 사랑의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이 해결책은 이상적이기에 분명 몇 번이고 실패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만둘 수도 없습니다. 그만두는 순간 무에 사로잡힐테니깐요. 그렇다고 해서 실패가 두렵지 않은 것은 또 아니겠지요. 실패하게된다면 우리는 자조적으로 인간이 아니다, 와 같은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깐요. 끝없는 고독과 무에 사로잡힐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든지 저런 해결책을 발전시켜나갈 것인지, 이 딜레마는 계속될 것 입니다.

 

 

 

 

 

p.s.  오랜만입니다 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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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4-08 12:16   좋아요 0 | URL
오! 오랜만이에요, 가연님!

가연 2013-04-12 10:39   좋아요 0 | URL
오! 오랜만이에요, 다락방님! ㅎㅎ 방금 다락방님 서재에 들렀었는데 (물론 폰으로 접속을 하기는 하지만 덧글은 언제나 컴퓨터 접속시에만 남긴답니다) ㅎㅎㅎ

테레사 2013-04-08 12:20   좋아요 0 | URL
와우, 가연님은 남자셨군요!!

가연 2013-04-12 10:41   좋아요 0 | URL
아하하.. 음... 네, 전 남자랍니다.. 랄까, 이 글에서 제가 남자라는 것이 드러나나요?? 좀 궁금하네요, 쿡.

물론 다른 글 몇 개만 읽어보시면 제가 남자라는것이 아주 잘 드러나겠지만.. (이봐)

여하튼 테레사님께서 이렇게 댓글 남겨주신건 오랜만인것 같아요, 풋.

희선 2013-04-09 23:44   좋아요 0 | URL
인간실격에 나온 요조가 익살스러운가요
이것을 읽었는지 다른 것을 읽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군요
그래도 다른 데서 보기는 했는데, 요조가 익살스러웠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거기에서는 어두웠던 것 같은데... 제대로 못 봤던 것인지도 모르죠
여자하고 죽으려고 했던 것은 생각나기도 하네요

요조가 사람을 잘 몰라서 괴로워했군요 이것은 누구나 다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정말 요즘은 더 알 수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본래부터 잘 몰랐지만...
신뢰와 사랑이라, 좋은 말이군요 그것을 믿어야 하겠네요

실제로 만난 것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요
어깨를 다치시다니, 아주 심한 게 아니기를 바랍니다


희선

가연 2013-04-12 10:46   좋아요 0 | URL
전체적으로는 말씀그대로 요조가 어둡고 음울히 그려집니다. 요조가 소설 내부에서 취하는 삶의 방식을 요조 스스로 말하길 '익살' 을 부린다, 라고 언급하지요. 그 부분에 대한 제 설명이 부족한 것 같네요, 하하.

신뢰와 사랑이라고 저도 저렇게 써놓긴 했는데.. 한편으로는 믿는 것, 과 신뢰는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 막상 저 스스로도 이런 말을 내가 믿을 수 있나? 싶은 생각도 들고, 풋.

어깨는 거의 다나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오랜만에 뵙죠? 저도 반갑습니다, 풋.
 

 

 

 

  어느 새 3만명이 넘었는데 마땅히 쓸 소재가 없다, 풋. 그동안 찾아와주신 분들께 그저 감사의 인사를 전할 뿐이다. 연애를 해야 달다구리한 이야기를 적을텐데 연애는 커녕 여학생을 만날 일자체가 거의 없으니 무슨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 소재가 없는 것은 둘째 치고 사실 요즘 여유가 없다. 정신의 여유도 없고 앞으로는 잠시간이지만 육체의 여유도 없을 예정이다. 한 달 정도는 서재에 들르지 못할 것 같으니 그 전에 간단하게 읽은 책들에 대해서 끄적거리고자 한다. 역시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것은 책에 대하여 이야기를 끄적거리는 것이다.

 

체 게바라 평전, 체 게바라 혁명적 인간.

체 게바라 평전은 왼쪽의 평전이 제법 유명하다. 한 번 개정판으로 나온 것 같은데, 구판으로 옛날에 대충 훑어보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권하고 싶은 책은 오른쪽의 체 게바라, 혁명적 인간, 이다. 둘 중 한 권만 산다면 오른쪽의 책을 고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분량과 가격은 오른쪽의 책이 더 비싸고 두꺼울테고 들고다니기도 부담스럽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자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수 없을런지도 모른다. 왼쪽의 책에선 체 게바라의 발자취만 쫓으며 쓰여져 있기에 통일된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혁명적 인간, 이라는 책에서는 주변 상황 전부를 포괄하면서 다루기 때문에 얼핏 읽다가 산만한 느낌을 분명 받게 될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기 때문에 읽다가 이 인물이 어디서 나왔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상황이 생기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른 쪽의 책이 더 체 게바라를 잘 그려내어준다, 라는 생각은 변함없다. 그다지 완벽하지도 않고 (샤르트르는 체 게바라를 보고 우리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 이라고 지칭했다.) 강박적이지만 본인스스로에게도 엄격하고 그렇기 때문에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그런 인간, 의 모습을 오른쪽의 책은 잘 그려내고 있다.

 

뇌 생각의 출현, 브레인 스토리.

사실 나는 브레인 스토리를 제대로 읽지는 않았고 동명의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책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만약에 그 다큐멘터리 대로 책에 담아내었다면 왼쪽의 책보다는 브레인 스토리를 훨씬 추천한다. 가장 좋은 것은 그냥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이다. 이런 류의 책은 시청각 자료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다. 아무리 책이 컬러로 되어있다고 할지라도 부족할 것이다. 사실 왼쪽의 책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는 복잡한 기분인데, 내용의 경우엔 문과 계열에서 오래 지냈던 사람에게는 분명 까다우리라. 교양서와 교과서 위치의 중간에 존재하는 책이다. 그런데 엄밀하다는 점에서는 좋을지 모르겠지만 뇌에 대한 지식을 알고자 생화학 등의 교과서를 읽어야 한다면 과연 누가 뇌에 대해서 공부를 하려고 할까? 교양 수준의 지식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내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전공자들에게는 도움이 될까? 나의 경우 생물학 계통을 배웠었는데 예전에 배웠던 내용을 다시 읽게 되니 기분이 묘한 정도였달까, 그 이상의 감정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 다른 전공자들에게도 그다지 확 끌리는 책은 아닐 것이다. 정 궁금해지면 있는 교과서를 보는게 더 빠를테니까. 

 

단테 신곡 강의.

이 책은 그냥 강력 추천하는 책이다. 그냥 사서 읽으라. 최근 읽은 책 중 최고의 책이다. 절대 후회는 안할 것이다.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 외에도 이런 저런 책들을 읽고 읽었는데, 아무래도 마음의 여유가 없다보니 느긋하게 자판을 두드리기가 좀 힘들다. 당분간 맹자, 나 읽어볼 생각이다. 그럴 시간이 있을지조차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 여러분, 잠시동안은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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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3-06 19:01   좋아요 0 | URL
밑에 '단테 신곡 강의'에 대한 설명에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의 단호함에 웃고 갑니다(이 멘트를 여기에서 볼 줄이야). 더구나 저 책은 현재 반값으로 팔리고 있다는..저도 처음에 받아봤을 때, 이게 반값이라니,라며 허거걱..읽고나서 이게 반값이라니, 라며 두번째 허거걱..

가연 2013-04-08 12:14   좋아요 0 | URL
ㅋㅋㅋ 좋은 책이지요. 게다가 반값이라니ㅎㅎㅎ

희선 2013-03-07 02:29   좋아요 0 | URL
체 게바라 두번째 책은 1176쪽이나 되는군요 평전도 두껍다고 생각했는데...
평전은 몇 해 전에 읽고, 그냥 봐서 거의 잊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오른쪽 책을 쓴 사람은 체 게바라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보고 썼겠습니다
단테 신곡 강의를 먼저 보고, 나중에 신곡을 보면 더 좋겠군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아직 한번도 해본 적 없지만...
가연 님은 사서 읽으라고 했지만, 저는 제가 다니는 도서관에 책이 있나 찾아봤습니다
언제 한번 빌려다 보고 싶군요 잘 볼 수 있으려나

바쁘시더라도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희선

가연 2013-04-08 12:15   좋아요 0 | URL
건강.. 챙기고 싶은데 어제 어깨를 또 다쳐버렸네요. MRI찍으라는 것을 너무 비싸서 못찍겠더군요, 큭... 잘 지내시나요

프레이야 2013-03-07 11:38   좋아요 0 | URL
단테신곡강의, 퐁당 담아갑니다.
가연님의 단도직입적 화끈한 추천으로 무조건^^
체 게바라, 왼쪽 것으로 예전에 읽었는데 오른쪽 것이 더 좋다니 슬쩍 궁금해요.

가연 2013-04-08 12:16   좋아요 0 | URL
더 좋은 것 같은데 사실 개인차랄까.. 신곡 저 책은 진짜 추천드릴께요오
 

 

 

 

 개인적으로 철학자들중에 루소를 좋아한다. 루소를 엄밀하게 철학자, 라고 부를 수 있는가, 에는 이견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만큼 활동한 분야가 많았고 다채로운 업적을 남겼으니 말이다. 루소 본인도 자신을 사상가나 철학자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는 스스로가 음악가이기를 간절히 바란 사람이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식물학자로 알려지기를 바랬다. 하지만 우리가 그를 떠올릴때에는 인간 불평등을 인식하고 그것의 극복 방법을 고뇌한 사람, 이라는 것을 가장 먼저 생각할것이다. 또한 칸트에게 끼친 영향과 마르크스, 프로이트의 탄생을 예고한 점들을 간과할 수 없다. 그렇기에 아마 철학자, 적어도 사상가로 부르는 것도 괜찮으리라.

 

철학자로서 루소를 본다면, 사실 루소의 저서들은 머리아플정도로 여러 개념들을 정의한 책들과는 달리 매우 뚜렷한 편이다. 우리는 루소의 저서를 읽을때 초월적, 이나 상징계, 기표라던가, 코나투스, 엔텔레케이아, 코라와 같은 현학적인 개념을 굳이 알 필요는 없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런 용어들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여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용어들의 장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적절한 순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다만 '일반의지' 라는 개념이 하나 나오기도 하는데, 이 또한 적당히 즐기는 선에서 해석할 수 있다. (루소 본인의 일반의지, 에 대한 개념규정이 명료하지 않기에 깊이 파고든다면 좀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으리라.) 그 외에는 루소의 감정을 그대로 따라 읽어나가면 된다. 루소는 말한다. '내 감정을 따라 생각하다보면 어느 새 그 감정이 떠오른 상황이 뚜렷하게 자신에게 다가온다' 고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감정을 따라 읽다보면 루소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약간 오해를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루소가 그냥 별다른 일관성없이 그냥 즉흥적으로 자신이 하고싶은 이야기들만 잔뜩 했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오해는 루소를 좀 더 읽고 또 읽다보면 바뀌게 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루소의 사상은 거대한 하나의 체계를 만들고 있다. (물론 루소를 읽는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루소의 저작들을 읽어나가면서, 어떻게 행복과 평등, 이 그의 전 작품에서 구현되며, 어떻게 그의 광증과 외부의 적이 그를 괴롭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원론적인 선과 악의 대비는 아니다. 마을의 점쟁이, 로 돈을 번 루소도 루소며 광증을 가진 루소도 루소며, '실패의 예감' 으로 기어코 헛된 일을 저지르는 루소도 루소다. 결국 루소는 그 자신을 그대로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킬 수 밖에 없었다. 

 

루소 평전.

루소를 읽을때는 먼저 이 책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 사람의 생애로부터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생애와 저작들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책은 평전이다. 이 책은 매우 꼼꼼하게 생애와 저작들에 관하여 잘 소개해두었다. 특히나 이 평전이 빛을 발하는 특징이 있는데, 루소가 그 자신에 대해서 쓴 고백록을 세밀하게 비교해서 과연 그 고백록이 옳은가, 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이다. 고백록 뿐만 아니다. 연이은 대화, 에서도 수많은 내용을 참조한다. 아마 이렇게 정리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자료가 필요했으리라. 또한 각종 저작들이 나왔을 당시의 상황도 잘 전해주고 있다. 신 엘로이즈, 를 썼을때는 루소가 받은 편지들의 내용도 알려주는 등 어느 정도로 루소의 책들이 인기가 있었는지 잘 드러내주고있다. 또한 루소의 글들을 읽다보면 사전지식이 필요한 부분들이 있다. 장세니즘, 제수이트 등의 용어는 분명 낯설 것이다. 그러나 각주를 다 읽고 확인한다면 적어도 우리가 읽기에는 크게 문제가 없을 수준으로 배경지식들을 쌓게 만들어준다. (꼭 위의 장세니즘이나 제수이트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아무리 루소처럼 흥미로운 인물을 다루더라도 페이지가 700페이지를 넘어가기에 읽기가 그리 쉽지많은 않을 것이다.

 

고백.

위의 평전을 읽고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루소의 저작들을 읽어볼 차례다. 루소의 저작을 읽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여긴다. 첫번째는 그의 인생을 따라서 그대로 따라서 읽어나가는 것이고, 두번째에는 그의 학문적인 성취를 따라서 읽어나는 것이다. 세번째에는 그의 문학작품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두번째의 경우에는 인간불평등기원론, 사회계약론 정도만 읽어도 초기 목표는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고, 마지막의 경우에서는 에밀, 신 엘로이즈 정도만 읽어도 초기 목표가 달성된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그의 사상은 거대한 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여겨지기에, 설령 그런 책들을 읽었다고 할지라도 루소 본인의 고백으로부터 이어지는 삼부작, 을 참조하지 않는다면 피상적인 지식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그의 인생을 따라서 읽어나가는 방법을 취하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고백, 이 된다. 우리나라에는 고백록, 참회록, 고백 등 다양한 이름으로 번역되어있는데, 몇 가지 저서가 있다. 왼쪽 위의 박영률출판사에서 나온 책이 있고, 나남 출판사에서 나온 책도 있다. 또한 동서문화사에서 참회록, 이라는 이름으로 번역이 되어있는데, 셋 중에 어떤 책이 좋은가, 라고 질문을 받는다면 개인적으로는 박영률 출판사, 의 번역을 권하고 싶다. 하지만 몇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는데, 박영률 출판사의 판본은 크기가 포켓북 사이즈이다. (상품정보에서는 A5크기라고 되어있는데 적어도 내가 본 바로는 아무리봐도 A5보다는 작은 듯 하다.) 그리고 글씨가 좀작다. 다른 두 책은 적당한 크기에 활자도 괜찮다. 가격만 따진다면 참회록이라는 이름의 동서문화사판본도 괜찮은 선택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무래도 나남이나 박영률출판사에서 나온 번역이 나로서는 더 읽기에 좋았다. 제목을 보면 고백, 이라는 번역이 더 제목에 어울린다고 여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데, 첫째, 루소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저지른 나쁜 일들도 같이 이야기하는데, 초점을 참회보다는 자신의 진실함(나는 이런 것 까지 당신들에게 알린다)에 더 두고 있다. 둘째, 원래 이 책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낭송을 목적으로 한 원고를 바탕에 두고 있으며, 이를 보여주는 부분인 마지막 부분을 보면 '오직 침묵만이 남았다' 라는 이야기를 한다. 고백록, 이라고 묶인 원고라면 이 부분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고백, 이라는 제목을 취함으로써 이런 문장 하나하나에 다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가? 바로 이런 것이다. 루소 자신은 진실하게 사람들에게 털어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끝끝내 사람들은 자신을 밀어내었다.

 

대화.

이 책은 먼저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 책의 번역이 적합하게 된걸까? 원문을 읽을 줄 모르는 나로서는 번역의 적합성을 그저 가독성이 얼마나 좋은가, 직역체가 얼마나 없는가,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 명료하게 드러나는가, 정도에 둘 수 밖에 없고 따라서 한계점을 분명 가진다. 누군가 원문을 읽을 수 있는 분이 한번쯤 확인해주었으면 좋겠다, 라는 심정이다. 번역이 적합하게 된 책이라면, 이 책은 좀 이해하기 까다로운 책이다. 고백 삼부작은 이제 고백, 을 거쳐 대화, 로 넘어왔다. 앞으로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을 향해 달려나갈 것이다. 사실 좀 당황스러운게, 앞의 고백과 뒤에 언급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은 상당히 쉽게 읽힌다. 유독 이 책만 어렵게 읽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책의 번역이 올바르게 되었다면 저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아무래도 루소에 대한 비난들 중 일부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될지도 모르겠다. 정말 루소가 좀 편집증적인 모습을 가지기는 했었다, 라는 것과 이 책의 일부분은 분명 그런 부분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라는 부분을. 하지만 편집증으로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이 책에서 장 자크 루소는 자신을 장 자크, 라는 사람과 루소, 라는 사람으로 분리시켜서 대화, 를 진행한다.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렇게 된다. 장 자크 루소라는 아주 사악한 놈이 있는데, 그 놈은 사실 좋은 놈이었어, 라고. 어찌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남에게 비난받는 것을 대부분 두려워할 것이다. 그러다보면 남이 비난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비하하는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 태도를 취하면 당연히 상대방이 나에게 온정적으로 대하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안고서. 아마 루소 또한 그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루소가 처해진 상황은 슬픈 상황임에는 틀림없다. 그가 자신을 솔직하게 말한 위의 고백, 은 흥미 위주의 부분만 보게 되는 상황이 생기는 등 생각과는 달리 오해가 쌓였다. 하지만 그 상황이 루소 자신이 자처한 부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뒤에 설명하겠지만 루소 자신은 그렇게 자처할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니 루소는 자신에 대해 먼저 '심판' 을 내리고 복권을 꾀하는 것이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오른쪽의  동서문화사에서 나오는 책은 제목에는 적혀있지 않지만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을 포함한다. 동서문화사의 번역도 전반적으로 괜찮은 편이다. (누누히 말하지만 나로서는 원문과 대조할 방법이 없다.) 왼쪽에 있는 책 또한 읽기에 좋고 흥미로운 책이다. 루소 고백 삼부작을 장식하는 마지막 책인 이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은 고독한 산보자의 몽상, 혹은 꿈, 이라는 제목으로도 번역이 되어있다. 아래의 범우사 번역이 바로 그렇다. 루소는 저 대화편 이후에 몇 가지 풍파를 겪고는 다시금 홀로 틀어박혔다. 세상을 아주 등지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주로 이 책의 내용은 루소가 산책을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이나, 혹은 생각한 것에 대해서 적은 글들이다. 여기서도 루소는 괜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듯한 서술을 할때가 있지만 (오늘 산책을 했는데 어제는 웃으며 맞이하였던 사람이 오늘은 괜히 얼굴을 찌푸리고 자신을 쳐다보는것 같다, 처럼) 한편으로는 그의 글의 원숙미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글들이 많이 있다. 식물학에 대한 애정 또한 여전하다. 그러고보면 루소가 대화편에서 그의 생계를 꾸리기 위하여 행했던 일은 필경사, 음악 악보를 베끼는 일이다. 어찌 보면 단순작업에 지나지 않지만 루소는 매우 마음에 들어했던 일이다. 직업으로는 음악 악보를 베끼고 (엄밀하게 말하자면 사실 루소는 악보를 굳이 베끼지 않아도 연금과 출판 서적의 수입으로도 삶을 어느 정도 영위할 수는 있었으리라 -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겠지만) 취미로 여러 풀들의 모습을 밝힌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음악 악보를 베끼는 것과 풀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인간불평등기원론, 같은 저서와 너무 동떨어져 보인다. 그러면 그런 그의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길러진 것일까? 아무리 직업과 어떤 생각을 발전시키는 것과는 별개여야만 한다, 라는 말이 있더라도 말이다. 비슷한 경우로 스피노자, 를 들 수 있을 것이다.스피노자 또한 직업적으로 사색을 진행시킨 것도 아니면서 오늘날 독창적인 사상을 전개한 학자라 일컫어지고 있다.  (스피노자 또한 광학 렌즈를 가공하여서 그걸로 돈을 벌었다고 하는데, 사실 스피노자도 연금을 모두 합치면 그런 일을 하지 않더라도 살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스피노자의 경우에는 뭐라 단정지을 수 없지만 적어도 루소에 대해서는 이런 모습이 이상하지는 않다. 그에게는 몽상이 일종의 사색이었기 때문이었다. 빅토르 위고는 말한다. 사색은 정신의 노동이지만 몽상은 정신의 쾌락이다, 라고. 그렇기에 지식인들은 몽상을 멀리하고 사색을 해야만 한다, 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루소는 그런 말과는 정반대에 있었다. 루소에게 있어서 사색은 자신을 방해하는 것이었고, 이성 또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었으며 격식마저도 자신을 괴롭히는 가면과 같은 것이었다. 이 세계에 그를 새기는 것은 몽상이었다. 그리고 그 몽상을 거닐며 자신의 생각들을 자유로워지게 만든 것이다.

 

신 엘로이즈

그렇다면 그 몽상의 힘을 확인할 차례다. 그 힘은 문학작품으로 구현이 많이 되었는데 특히 지금 소개하는 신 엘로이즈, 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루소는 그의 고백, 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산책을 다니다가 어느 호숫가에서 몽상에 잠겼는데, 그때 사랑스러운 두 아가씨를 떠올렸다고 말이다. 실제 인물은 아니지만 루소의 머릿속에서는 그들은 실제보다 더 실제같은 생명력을 획득했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이 신 엘로이즈의 창작에 도움을 주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상상이 그대로 이용된 것은 아니다. 루소와 두 여인은 신 엘로이즈, 에서 쥘리와 생프레, 그리고 볼마르로 변용된다. 여자 한 명과 두 남자의 이야기로 바뀐 것이다. 그 본바탕을 루소 자신의 몽상에 두고 있어서일까, 루소는 신 엘로이즈의 앞부분에서 신 엘로이즈가 창작아 아니냐는 질문에 다소 신경질적으로  대답한다. 창작이면 어떻고 창작이 아니면 어떻단 말이냐. 중요한 것은 이 신성한 사랑에 그대들을 맡기는 것이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엘로이즈, 라는 말이 일컫듣 순수하게 루소의 몽상에만 바탕을 둔 이야기는 아니다. 엘로이즈는 실제로 있었던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일에서 그 모티프를 가져왔다는 것을 밝히는 이름이다. 철학자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의 가정교사로 있다가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아벨라르는 그 사랑의 대가로 거세당하고 쫓겨나가게 되고 엘로이즈는 수녀원에 들어가게 된다. 이런 비극적인 이야기가 루소의 손에서 변모한 것이다. 가정교사 생프레와 쥘리의 사랑으로. 원본대로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쥘리는 볼마르, 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생프레가 그들 사이에 다시 찾아오는데..

 

이 작품은 매우 중요하다. 이 작품 중간에 마치 단테의 신곡처럼 등장인물의 말을 빌어서 루소는 하고픈 말들을 한다. 특히 일반의지를 이해하는 실마리도 이 책 안에 담겨있다. 마을의 축제가 있던날, 모두가 어울리는 풍경을 그려내면서 루소는 일반의지가 어떠한 것인가 간접적으로나마 밝힌다. 얼핏 내용 줄거리만 보자면 사실 우리나라의 아침드라마의 줄거리 일부와 '아내가 결혼했다' 라는 영화의 내용을 섞은 것 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도 얼개가 비슷하다. (그리고 이런 삼각관계가 보통 인기가 높듯이 - 우리도 욕하면서 드라마를 보는 것 처럼 - 당시에 이 책의 인기가 매우 좋았다) 하지만 이 신 엘로이즈가 그 얼개를 뛰어넘는 부분은 바로 이부분이다. 보통 드라마의 경우 볼마르는 생프레와 쥘리의 사이를 의심하고 결국 가정이 붕괴될 것이다. 하지만 볼마르는 생프레에게 이야기한다. 내 앞에서도 내가 없는 것 처럼 행동하든지, 아니면 내가 없더라도 내가 있는 것 처럼 행동하라고. 결국 세 명은 서로의 방식대로 그들을 보듬어안는다. 루소의 고백, 을 보면 이와 비슷한 상황을 루소 자신이 이미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자신의 바랑부인과의 경험이 녹아들어있기에 이 책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에밀

신 엘로이즈에서 쥘리는 아이들을 훈육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생프레는 누가 가정교사였던 사람이 아니랄까봐 아이들을 일찍부터 교육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쥘리는 그 말에 반대한다. 여기서 쥘리의 말이 루소의 생각과 동일한 면모를 보여준다. 무엇이 옳은 일인가? 어떻게 하면 옳은 교육을 할 수 있을까? 옳은 교육을 통하여 개인은 어떻게 발전해 나갈 수 있을까? 쥘리는 아이들에게 지나친 교육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자연과 합치되는 성향을 그대로 따라가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자연스럽게 세계의 사물을 인식하고 흥미를 가지며 깨닫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은 이 에밀, 이라는 저서에 그대로 나타나있다. 에밀에서는 교육에 대하여 자연성을 주장하고, 스스로 흥미를 가지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책을 버리고 직접 사물을 보라고 독자들에게 말한다. 의사에 대한 불신도 조금 드러난다. (대화편에서는 의사에 대한 불신을 매우 강하게 드러낸다. 이 관점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벼운 병은 스스로 낫도록 약초술에 대한 언급도 있다.(고백, 의 바랑 부인이 약초술을 공부하였다는 것을 잊지말라)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왼쪽의 한길 그레이트 북스에서 나온 에밀이 완역본판으로 알고 있다. 제대로 다 읽지는 못했지만 에밀을 읽고자 한다면 저 책을 고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오른쪽의 범우사 책은 내가 처음으로 접한 에밀, 이다. 사실 에밀은 끝까지 읽지를 못했다. 생각보다 쉽게 읽히지는 않는 책이다.

 

루소의 개.

한걸음 물러나 루소의 문학작품들을 살펴보면 위의 세 가지, 고백 3부작에서의 각 요소를 문학작품으로 배열시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는 마치 움베르트 에코를 떠올리게 한다. 에코는 말한다 : 자신의 작품은 자신이 창조한 것은 없고 기존의 저작물들의 짜집기라고. 루소의 문학작품도 비슷한 면모가 있는데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의 생애의 짜집기라는 측면이 다르다. 생애를 살아가면서 강하게 느낀 감정들의 짜집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감정을 중시하던 루소는 이성을 자신의 근본으로 삼던 철학자들과는 많은 차이를 보였다. 그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데이비드 흄, 과의 엇갈림이었다. 그리고 그 일화를 다룬 것이 바로 왼쪽의 책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왜?, 라는 제목의 책을 본 적이 있는가? 비트겐슈타인과 칼 포퍼의 부지깽이 다툼을 둘러싼 일화에 대해서 극적으로 그려낸 책말이다. 그 책의 저자들이 다시 뭉쳐서 이번에는 루소와 흄에 관한 일들을 파헤쳤다. 한 번에 두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다만 좀 더 깊은 내용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런 류의 책 중 개인적으로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 라는 긴 이름의 책을 추천한다) 루소는 편집증에 시달려(실제로 그의 주위에 어느 정도는 루소를 음해하는 사람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영국으로 일종의 도망을 가게 되지만, 그 영국에서 흄과 다툼을 벌이게 된다. 루소는 흄이 자신을 음해하는 세력들과 이어져 그들의 지령을 따른다 여겼다. 하지만 흄으로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고 (위의 평전에서도 다루는 일이지만 약간의 의혹이 있기는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당황스러울 것이다.) 결국 루소는 다시금 도망쳐버린다. 바로 그 부분을 이 루소의 개, 가 다룬다. 그 이후에 루소와 흄은 각자의 생을 살게 된다. 이건 퀴즈인데, 위의 삽화에서 누가 장 자크 루소이며 누가 데이비드 흄일까?

 

사회계약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

사실 나는 이 책을 범우사에서 나온 책으로 읽었다. 그래서 그 이후에 나온 번역들에 대해서는 이 동서문화사판본밖에는 모른다. (찾아보니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된 책들이 많다.) 개인적으로 범우사에서 나온 책과 이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책을 비교하면서 읽은 결과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이 책이 읽을만하다, 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한 두 군데 문장이 명료하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을만하다. (동서문화사의 번역에 대한 말이 많다고 하는데 잘 찾아보면 읽을 만한 책들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를 묶은 책도 '논리철학논고' 는 괜찮은 것 같다. 언젠가 시간이 나면 번역에 관한 글을 한 번 써 볼 생각이다.) 루소의 이 두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일종의 자유다. 무슨 자유인가? 그것은 그가 고독한 몽상가의 산책, 에서 말하듯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 다. 얼핏 보면 같은 말처럼 느껴지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와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는 자유는 전혀 다른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서 살아가는가? 그것은 인간은 불평등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법과 제도가 우리 인간을 갈라놓기 때문이다. 어째서? 인간이 서로 가진 재산이 다른데 가진 사람들은 재산을 보호하려고 법과 제도를 공고히 하려고 한다. 어째서? 재산이 달라진 이유는 소유물을 어떤 사람은 더 쉽게 획득하였고 어떤 사람은 덜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어째서? 사람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남는 물품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째서? 사람들이 모여서 살게 되었기 때문에 잉여 생산물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사람들이 모여서 살게 된 (사회를 이룬다) 것이 만악의 근원이었다.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루소는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자연이라는 말이 정말로 노루가 뛰놀고 새들이 노래하는 '자연'일까? 정말 그가 예찬하는 야만인들처럼 우리는 숲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까? 여기에 대해서 루소는 사회계약론, 을 내놓으며 말한다. 이미 사회가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대한 자연에 맞게 사회를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즉, 합리적인 사회를 이루어 사는 것이 가장 좋다, 라고 말이다. 사회계약으로 형성된 사회가 바로 그런데 이는 그 사회구성원들의 합의가 기저에 깔려져 있다.

 

그런데 인간불평등기원론과 사회계약론의 관계가 이렇게 연이어지는지에 대한 논의는 아직 명확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혹자는 사회계약론이 인간불평등기원론서 말한 자연법을 지양하고 새로운 사회계약이라는 사회체제를 인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신 엘로이즈나 에밀을 보면 여전히 자연법을 높게 - 신이 주신 위대한 것 - 평가한 것으로 느껴지기에 이 글에서는 이어진다고 보았다. 사회계약론은 특히 일반의지라는 개념으로 매우 유명한데, 이 일반의지는 파괴되지 않는 그 어떤 것으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다. 국가를 하나의 인간으로 생각해보자. 이 국가씨가 나아가는 방향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국가는) 자신의 의지를 따라서 걷는 것이다. 이를 국가의 의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국가에는 사는 사람들이 많다. 국가씨 내부의 A씨와 B씨, C씨는 국가가 걷는 길에 만족하고 있을까? 일반의지 개념에서는 이들 각자가 국가씨의 의지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반대로 말해서 이들이 국가씨의 의지를 형성할 때에 일반의지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각 사람은 멋대로 춤추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일반의지가 발현된 상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철학자들과 비교해보고 싶은 사람은 나 또한 제한적인 부분밖에 모르지만 헤겔이 이야기하는 구체적 보편자, 혹은 국가의 인격화, 같은 것을 떠올려보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런 일반의지가 구현될 수 있는 곳은 그리스의 폴리스국가만 남을 것이다. 직접 민주주의가 정착해있어야만 가능할 것 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는 그렇지 않다. 위의 정치가들을 뽑아서 정치를 전담하게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성의 문제가 생긴다. 정치가들의 이성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나? 소수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국가를 움직인다면 국가를 움직이는 것은 더이상 일반의지가 아니다. 해석하는 방향에 따라서 무한한 방향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개념이다. 일반의지로 제도가 형성된다고 여기고, 일반의지가 국민들의 밖에 있다고 가정한다면 라캉의 이론(상징계 - 기호의 체계, 실재계 - 상징계 너머의 불안)과 접점이 생기는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라캉에 대해서 그리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않기에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방향으로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투명성과 장애물.

여기까지 루소의 책들을 읽어왔다면 이제 이 책을 읽으면 된다. 이 책은 매우 뛰어난 루소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책을 읽기에는 좀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다 읽고 나면 이 책이 얼마나 뛰어난 책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루소의 사상에서의 일관성을 언급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책은 두 가지로 그의 사상과 저서 그리고 생애를 분석하는데 그 두 가지는 제목에 있다시피 투명성과 장애물, 이라는 것이다. 책을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다. '평생을 투명성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루소는 매번 장애물을 만난다.' 그 장애물은 루소 본인의 광증일수도 있고, 주변의 음해일수도 있고, 때로는 그에게 찾아온 행운일때도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루소는 고백, 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투명성) 하지만 그것은 결벽증으로 오해받기도 하였고 (장애물) 이윽고 루소는 틀어박힐 수 밖에 없었다. (투명성의 확보를 위해서) 하지만 그가 쓴 글이 인기를 얻게 되고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오자 (장애물) 루소는 더욱더 사람들을 피해서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였다(투명성) 왜 루소는 스스로의 내면에 침잠할 수 밖에 없었나? 앞서 말했다시피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했었지만 다시 살펴보면 그가 말하는 '자연'은 외부에는 이미 없었다. 이미 외부에서는 사회에 의하여 자연은 사라져있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 자연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리를 옮긴 것이었고 바로 내면에 있었다. 내면 깊숙히 자신을 인도해주던 세계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서 루소의 자유에 관한 말이 근거를 얻는다. 자기가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을 자유 : 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말인가. 그리고  왜 루소가 이성보다 감정을 더 중시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된다. 당장 자신의 내면을 보라. 내면세계까지 이성적으로 만들어져버린 사람은 없을테니까. 그 내면에 따라서 움직인다면 당연스럽게도 감정이 앞서야 하리라. 이 책의 뒤에 실린 논문들도 읽어본다면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루소사용설명서와 같은 거창한 제목이 붙었긴 하여도 이 글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천에 지나지 않는다. 본인의 성향을 잘 파악해서 좋아하는 방식대로 읽어나가기를 바란다. 이는 다른 학자들의 책을 읽을때에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수학과 물리에서 뛰어난 업적을 보인 로저 펜로즈, 의 이야기를 빌리고 싶다. 로저 펜로즈는 자신의 저서에서 자신의 집안은 모두 체스를 좋아하고 잘하지만 자신은 체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예술 감상품 보듯이 마스터들이 판 위에서 불꽃튀는 다툼을 벌이는 모습과 그 수읽기를 보면 흥미로웠고 재미있었다고 한다. 어떤 철학이나 인문계열의 책들을 읽는 방법도 초기에는 분명 이런 방법을 따라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철학개념들은 요즘은 이제 인터넷 검색만 하면 대충 알 수 있다. 혹은 그런 개념을 쓴 사람에게 '여기가 잘 이해가 안가는데 무슨 의도로 쓴 겁니까?' 라고 물으면 된다. 그런 개념을 상황에 맞게 제대로 설명못한다면 그 개념을 쓴 사람도 사실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니다. (맞게, 라는 용어가 부적절하지만, 이는 상대방의 양심에 맡길 수 밖에 없다. 설마 잘 알지도 못하면서 천연덕스럽게 설명을 하겠는가? 설명을 하다보면 막히는 부분이 있을 것이고, 그 부분은 바로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뭐, 그다지 잘 알지 못하면서 자신의 설명이 맞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항상 물음표를 띄우기 바란다.) 그리고 그 상대방이 제대로 설명했다면, 그 설명한 내용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문제는 책을 읽으면서 갸웃거리더라도, 그 설명을 해줄 상대방이 이 세상에 없다, 가 될테지만, (몇 년 전에 자크 데리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럴 경우라면 앞서 말한듯이 자신감을 가지고 예술작품을 보듯이 한번 훑어보라. 그리고 스스로의 감식안을 기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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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7 2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20 2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