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에 글을 남기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바쁘기도 했지만, 딱히 그 이유만으로 블로그 접속을 기피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끔 시답잖은 글을 블로그에 올리면서도 나도 모르게 댓글과 방문객 숫자에 눈길이 가는 내 자신이 언제부턴가 참 한심하다고 느껴졌다.  블로그를 팽개친 것도 아마 그때부터였을 게다.

 

블로그 접속을 끊으면서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교회의 작은 공간을 토요일 저녁에 두 시간만 쓰기로 하고 빌렸다. 나는 그 공간에서 교회에 나오는 중고생들을 대상으로 내가 갖고 있는 책도 빌려주고, '세상 사는 이야기'도 그들과 함께 나눌 작정이었다.  달리 마땅한 공간도 없었지만 내가 굳이 교회에 딸린 공간을 빌린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천주교 세례를 받았지만 종교적 믿음이 강한 것도 아니요, 사상적 기반은 오히려 불교에 가까운 내가 그닥 인연도 없는 교회라니...   나는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개신교를 믿는 아이든, 천주교를 믿는 아이든, 혹은 불교를 믿는 아이든 간에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모든 아이들이 바르고 건전한 사고와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 중 교회를 선택한 것은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가장 많은 비난과 욕설을 들었던 종교가 바로 개신교이고, 그렇다면 그 종교를 믿는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있는지 내심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도 아니요, 잘 알려진 유명 강사도 아닌데 내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시간을 내어줄 아이들이 많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많았었다.  그러나 나의 예상과는 달리 꽤 많은 아이들이 참석했고, 나는 그 아이들에게 선심쓰듯 책 한 권씩을 안겼다.

 

주중에는 아이들에게 영어, 수학을 가르치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신자유주의 경쟁 논리에 밀려 공부 좀 못한다고 자신이 가치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아이를 보았을 때는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솟구치기기도 했고, 그렇지 않다고 느낄 수 있도록 설득하고 다독여주지 못하는 내 자신이 답답하기도 했다.

 

나는 종교적 틀을 깨지 못하면 진리탐구는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예수가 기독교를 만든 것도 아니요, 부처가 불교를 만든 것도 아니다.  진리탐구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경외를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종교라는 틀을 짰고, 현대의 사람들은 그 틀에 갖힌 애완용 새가 된 느낌이다.  나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새장 밖의 세상을 보여주고 그들에게 인간의지의 자유와 행복할 권리를 주고 싶었다.

 

지난 주말까지 기껏해야 세 번 강의를 했는데 쓰다보니 너무 거창해졌다.  아무튼 아이들이 행복한 나라가 진정한 복지국가가 아닐까 한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모든 아이들이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휴일을 반납한들 그리 아깝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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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계절을 앞서 초여름의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행사도 많고, 돈 나갈 일도 많지만 왠지 가슴이 콩닥거리는 5월.  11기 신간평가단의 첫발을 내딛으며 설레는 마음으로 신간 에세이를 검색했다.  읽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아 좀체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마냥 서성거렸다.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 깊은 뜻을 곱씹어 생각하게 한다.  꽤 오래 전에 출간된 <용서>를 읽었을 때 나는 여러 이유로 흔들리고 있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책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어감을 느꼈었다.  같은 종교는 아닐지라도 나는 한 인간으로서 여전히 그의 팬이다.

 

 

 

 

 

 

 

 

 

프랭크 매코트의 글은 삶의 아픔을 유머와 위트로 아름답게 채색하곤 한다.  진실로 아파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삶의 고통, 그 정중앙에 평화가 놓여 있음을...   그래서 그의 글은 아름답다.

 

 

 

 

 

 

 

 

 

 

2009년 세상을 떠난 장영희님의 글은 언제 읽어도 가슴 따뜻하다.  더이상 그녀의 책을 읽을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새 책으로 만나니 살아서 다시 돌아온 듯 반갑기 그지없다.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신의 의사를 밝힌다는 이유만로 차별받고 비난을 받는다는 사실이 참으로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비이성적인 광기로 서로서로 반목하고 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소통과 공감을 갈구하는 한 사람의 목소리는 작은 메아리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함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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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평가단 10기 활동을 마무리합니다.

신간평가단 활동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갔구나, 하는 점이다.  월초가 되면 예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누군가가 보내준 선물인 양 두 권의 신간을 받아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어느 것을 먼저 읽을까 정하고, 리뷰 기한을 확인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책을 읽다가도 막상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미처 읽지 못한 부분을 의미를 곰삭이지도 못한 채 빠르게 읽고, 아~~ 막상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쓰고 싶었던 말들이 왜 그리도 약속이나 한 듯 한꺼번에 사라지던지...  똑 같은 일들을 6개월 반복하다 보면 마치 지난 달의 일인 듯 시간의 흐름이 까맣게 잊혀진다.

 

약속이나 물건 정리에 있어 약간의 결벽증이 있는 나는 마감일이 다가오면 조바심을 내며 발을 동동 구르기 일쑤였고, 어떤 내용이든 블로그에 올려지는 글은 내 자신의 얼굴이라 생각하던 나는 대충대충이 용납되지 않아 속을 박박 긁곤 했다.  그렇게 속을 끓이면서도 11기 신간평가단 모집에 응모를 했던 걸 보면 약간의 고통스러움과 책을 읽는 즐거움을 양팔저울에 올려놓고 달아 본다면 즐거움 쪽으로 살짝 기울었던듯.

 

과거는 언제나 즐거움의 등가물이라는 나의 확신은 10기 신간평가단으로 활동했던 지난 시간에 다시 한번 확인된 셈이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책들을 다시 떠올리며 내 맘대로 베스트5를 적어본다.

 

1.

 

16인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삶과 그들의 가치관을 읽으며 내 삶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2.

 

모름지기 책읽기는 즐거워야 한다.  성석제의 유쾌,발랄함은 읽는 이의 마음을 한껏 부풀게 한다.

 

 

 

 

 

 

 

 

 

 

3.

 

오랜 역사 속에서도 모든 사람이 만족하는 사회 구조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역사는 진보하는 쪽으로 나아간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던 책. 가슴이 절로 따뜻해진다.

 

 

 

 

 

 

 

 

4.

 

 

호주에서 어학연수로 1년을 보냈던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을 새록새록 일깨워주었던 책.  작가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보다 호주에 대하여 더 많은 지식을 내게 주었다.

 

 

 

 

 

 

 

5.

 

 

자연을 닮은 작가의 맑고 투명한 문체가 무척이나 인상깊었던 책.  학자로서의 시턴과 그의 글은 절묘하게 어울리는 듯했다.  화려한 수식이나 비유보다 솔직함이야말로 글이 갖는 힘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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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신간평가단 2012-05-21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다섯권 모두!! 정말 좋은 책들이죠.
고생 많으셨어요. 꼼쥐님~ :)

꼼쥐 2012-06-05 22:3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정체성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199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자석의 N극과 S극이 서로에게 끌리듯이 극단적으로 다른 서로에게 끌린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에게 있어서도 다르지 않다.  나는 그것을 일종의 지적 호기심, 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궁금증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남자와 여자가 너무나 다른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가령 남자의 사고방식과 행동양태가 여자와 하나도 다를 게 없다면 여자는 결코 남자에게 추파를 보내거나 그들의 세계를 궁금해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자들에게 남자는 자신들과는 외모적으로 조금 다른, 같은 성(性)으로 보이는 돌연변이쯤으로 인식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때로는 비이성적으로 보여지기까지 하는 상대방에게 마음이 끌린다는 것은 신이 남녀를 다르게 빚어놓음으로써 영원히 서로의 관심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만든 오묘한 섭리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다름'도 세상이라는 용광로에서 용해되고 나면 선천적이고도 개별적인 '다름'이 집단적 '다름'으로 전이되고 만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통일성을 갖춤으로써 잃게되는 집단적 망각, 또는 구분짓기에 실패한 개인들의 혼돈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서 외따로 떨어져 사랑하는 두 존재, 그건 아주 아름답지.  하지만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이 아무리 경멸할 만한 것일지라도 그들에겐 이 세계가 필요해.  서로 대화를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침묵할 수도 있을 텐데요."

"옆자리에 앉은 저 두 사람처럼?"  하고 장-마르크가 웃었다.

"아니야, 어떤 사랑도 침묵에 배겨날 순 없어."   (P.88)

 

밀란 쿤데라의 소설이 인기 있는 이유는 작가의 예리한 눈으로 세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사고를 통하여 사물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본다는 것은 그 사물에 대한 철학적 인식일 수 있고, 더구나 독서를 통한 세상 읽기는 결국 작가의 사상적 흐름을 읽는 것과 다르지 않다.  괜히 번거롭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작가의 의식을 그 뒤에 숨기는 것은 오히려 독자에게 혼란만 야기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밀란 쿤데라는 독자에게 친절하다.

 

이 책에서 작가는 인간이 자신이 속한 세상을 경멸함으로써, 또는 그곳으로부터 배제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다섯 살 나던 해 죽고 말자 샹탈은 시댁 식구들의 임신 종용과 이에 동조하는 남편에게 화가 나 이혼을 했다. 그리고 경제적 자립을 위해 광고회사에 취직했고 애인을 찾았으며 지금 그녀보다 네 살이나 어린 애인 장-마르크와 살고 있다. 어느날 샹탈은 문득 더이상 어떤 남자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느끼고 이를 장-마르크에게 이야기한다. 이것이 샹탈의 육체가 점진적으로 소멸될 것임을 알리는 경고라는 것을 알아챈 장-마르크는 의기소침해진 샹탈을 즐겁게 해주고 싶어 익명으로 편지를 보낸다. 그녀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불어넣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익명의 남자가 보내오는 편지를 읽으며 샹탈은 열예닐곱살 무렵 가슴에 품고 살았던 장미향이 되살아남을 느끼지만 얼마되지 않아 편지의 발신인이 장-마르크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의도를 생각하다가 샹탈은 장-마르크가 자신을 떠날 구실을 찾고 있었던 것이라고 결론짓고 혼자 런던으로 떠난다. 처음에 화가 났던 장-마르크는 샹탈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고 역시 런던행 기차를 탄다. 이제 런던에 온 샹탈도 자신에게 장-마르크가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는다. 잃어버린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쳐줄 사람은 장-마르크 뿐임을 안 것이다.

등장인물들 간에 극적인 갈등도 없고 흥미진진한 스토리 전개 따위도 찾아 볼 수없다.  한 사건이 두 주인공의 시점에 따라 다른 모습과 의미를 띠면서 일으키는 긴장감이 독자를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할 뿐, 독자를 유혹하기 위한 어떤 작위적 구조나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등장인물도 작품구조도 단출하기 그지없다.  군더더기를 제거한 것이 이작품의 묘미라고나 할까. 49장까지 그(장-마르크)와 그녀(샹탈)가 화자로 나오다가 50장에 이르면 느닷없이 `나' 즉 작가가 화자로 등장한다.  밀란 쿤데라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색깔로 자신을 드러낸다.  마성과 같은 그의 매력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쉽사리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아들의 무덤 앞에서 샹탈의 독백은 인상적이다.

 

"아기를 갖고 동시에 이 세계를 경멸하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를 내보낸 곳이 바로 이 세계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계에 집착하는 것은 아기 때문이며, 아기 때문에 세계의 미래를 생각하고 그 소란스러움, 그 소요에 기꺼이 참여하며 이 세계의 불치의 바보짓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란다.  너의 죽음을 통해 너는 나로부터 너와 함께 있는 즐거움을 앗아갔지만 동시에 너는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지.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도록 나는 자유로워졌단다."   (P.64) 

 

인간존재의 이면에 존재하는 속물성과 위선을 예리한 시선으로 파고드는 밀란 쿤데라는 이 소설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 시대 남녀간의 사랑이 존재할 수 있는 양태의 극한을 추구했다고 말하는 작가.  그가 의도하는 철학적 주제는 언제나 독자의 몫이겠지만, 그의 시선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끌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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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무실 주변에는 철쭉이 한창이다.

언젠가 아들녀석이 그 꽃을 가리키며 이름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내가 철쭉이라고 답하자 진달래와 어떻게 다르냐고 재차 물었다.  일순 말문이 막혔던 나는 진달래는 색깔이 연하고 철쭉은 그보다 진하다고 얼버무렸었다.  전혀 이치에 맞지도 않고 당치도 않은 대답이었다.  생각해 보면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그만큼 친숙한 것에는 그 구분을 말로써 설명하기 어렵다.

 

어렸을 적 내가 살았던 마을의 산들에는 진달래가 지천이었다.  수줍은 분홍빛이 온 산에 번질 즈음이면 배고픈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산에 올랐다.  막 피어나는 꽃잎을 한줌 따서 입에 넣으면 달착지근한 향기가 허기를 달래주곤 했다.  먹을 수 없는 꽃인 ‘철쭉’에 대하여, 먹을 수 있는 꽃이라는 뜻으로, ‘진달래꽃’을 우리는 '참꽃'이라 불렀다.  배고픔을 달래주는 것은 '참'이었고 그렇지 못한 것은 '거짓'이 되는 시절이었다.  '참머루'는 먹을 수 있는 것, '개머루'는 먹지 못하는 것, 그런 식이었다.

 

공부도, 놀이도 그랬던 듯하다.

즐겁고 재밌는 것은 '참'이요, 그렇지 못한 것은 모두 '거짓'이었다.  이렇듯 가장 밀접하고 현실적인 기준으로 우리는 참과 거짓을 구분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나도 따라 성장하면서 참과 거짓의 가장 가깝고도 명확했던 기준은 멀고 모호한 것으로 변했다.  지금은 현실로부터 이만큼 멀어진 그 무엇이 되었다.

 

손끝만 스쳐도 속이 확확 달아오르던 사랑도,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냥 행복했던 그때의 사랑도, 잠시의 이별도 이별로서 인식할 수 있었던 사랑과 이별의 명확한 기준도 이제는 그 경계마저 희미한 그 무엇이 되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스쳐가는 시간에 따라 현실로부터 저만치 멀어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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