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411 | 412 | 413 | 41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언제부턴가 초등 저학년 중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학생들이 급격히 증가했다.
이런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를 갖게 되지만 그 바람과는 반대로 아이는 자라면서 점점 더 안 좋아지기만 할 뿐 나아질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될 즈음이면 부모는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겼던 문제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하고, 그제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는 서둘러 정신과 병원을 찾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이제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었다.
옛날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부모들은 여전히 쉬쉬하는 분위기지만 한 집 건너 자신의 아이와 닮은 모습을 목격하게 되면서부터 그마저도 대수롭지 않은 일상이 된 듯하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에게서 다른 아이보다 나은 장점을 하나둘 발견하려 애쓰게 되고 그동안 크게만 보였던 문제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된다.  ’그래도 이것만은 00보다 나으니 다행이야’하고 자위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이러한 아이들이 늘어난 것일까?
내 생각은 이렇다.  인간이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우리 육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영양분을 땅으로부터 얻게 되고, 영혼도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적 토양에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신적 토양을 상실한 가정이 너무도 많다.  45억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우리가 사는 지구별의 토양이 형성되었듯 수만 년에 걸쳐 형성된 정신적 토양은 우리의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왔고, 그 토양 속에서 자신이 필요한 영혼의 자양분을 섭취해 왔었다.

불과 1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경사회의 특성상 내 부모가 아닌 공동체의 다른 이웃도 그와 같은 정신적 토양을 후대에 잘 전달해주었지만, 핵가족화 되고 이웃을 상실한 지금은 오직 부모만이 전달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맞벌이에 내몰린 현대의 부모는 전달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방관자로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마디로 지금의 아이들은 그들이 딛고 살아가야 할 정신적 토양을 상실한 것이다.  땅이 없는데 어찌 꽃을 피울 것이며, 어떻게 중심을 잡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게다가 땅에서 자라는 모든 생명체는 자연의 시간에 따라 성장해야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화석연료를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시계에 맞춰 속성으로 기를 때 지구 환경의 오염을 피할 수 없듯이 아이들을 어른들의 욕심에 맞춰 빠르게 성장시키다 보면 영혼의 토양이 무참히 오염되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  우리는 계절의 순환에 따라 흐르는 자연의 시간마저 잊은지 오래다.

어제는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중 한 명이 가출을 했다.
이런 현실을 마주하며 나는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통렬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아이들은 이제 성적의 순위가 아닌 생존의 문제에 점차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조금 더 진행된다면 대부분의 부모가 성적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아이들의 생존을 염려하게 될 날이 도래할 것임은 너무도 자명하다.  이 안타까운 현실 앞에서도 성적순으로 줄을 세우려는 기성세대에게 돌이라도 던지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뽀송뽀송 마른 옷을 입는 것까지는 좋은데 어찌나 더운지 옷을 입고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몸에 척척  감기는 느낌은 참기 어렵다.  남들보다 땀을 덜 흘리는 내가 이러니 살집이 있는 사람들은 오죽하랴.  한낮의 햇빛은 뜨겁다 못해 따갑다.  긴 장마 뒤에 온 더위는 그야말로 찜통이다.  오후 들어 아스팔트 도로는 절절 끓고, 뙤약볕 아래 세워 둔 자동차의 문을 열면 후끈한 열기가 한증막을 방불케 한다.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를 뚫고 퇴근을 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저만치 기울어가는 태양은 마지막 열기를 내뿜으며 지면을 달구는데 숙소로 향하는 길이 어찌나 멀어 뵈던지...  등을 타고 흐르는 굵은 땀방울이 졸라맨 허리띠를 넘지 못하고 바지며 셔츠를 축축히 적셨다.  시큼한 땀냄새가 걸을 때마다 가슴을 타고 올라와 코를 자극했다.  이 땡볕에 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천천히 걷자니 땀은 비오듯 흐르고...  오늘따라 신호등을 기다리는 시간도 왜 그리 길던지...

숙소에 도착하니 부지런한 아이들이 현관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나를 기다리고 있다.
시원하게 샤워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는 수밖에.  찝찝한 기분을 억지로 누르고 수업을 시작하려니 선풍기 하나로는 사람의 열기로 후끈 달궈진 방안 공기를 식히기 어려웠다.  아이들 성화에 에어컨을 켰다.  올 들어 처음 켜보는 에어컨 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중학생 아이들은 내가 내준 수학 문제를 풀면 곧 집으로 갈 것이다.
연이어 고등학생들이 들이닥칠테고 10시까지는 꼬박 자리를 지켜야 한다.  질문이라도 많은 날이면 더 늦어질지도 모르지만 아이들이 방학을 한 탓에 어제부터는 그나마 일찍 수업을 마친다.  방학임에도 보충수업을 받으러 여전히 학교에 오가는 아이들은 무에 그리 좋은지 혹서의 고통은 아랑곳 않고 연신 싱글벙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후흑학 - 승자의 역사를 만드는 뻔뻔함과 음흉함의 미학 Wisdom Classic 3
신동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일을 꼽으라면 ’대인 관계’가 아닐까 한다.  같은 종( 種)인 사람끼리 다른 동식물과의 관계보다 오히려 더 힘들어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오직 인간만이 나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하여 평가하고 호불호를 결정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아이를 키워본 부모라면 누구나 다 공감하듯이 어른과 어린 아이의 관계는 성인들의 그것과는 또 다르다.  대체로 아이들은 상대방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는다.  이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낀다.

상대방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사람들은 대인관계에 좀 더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그 반대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나를 싫어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커다란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을테고, 내 속마음도 고스란히 상대방에게 노출된다고 생각하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즐겁기보다는 오히려 꺼려질 것이다.

대인 관계에 있어 정답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맥 놓고 있을 수만도 없는 일이고 보면 처세를 다루는 책이 하루가 멀다하고 출간되는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이야 하루에 만나는 사람도 적고, 늘 만나던 사람만 만나거나 아주 가끔 새로운 사람을 만나니  크게 불안해 하거나 긴장할 일도 생기지 않지만 대중을 상대하는 정치인이나 연예인, 재벌의 총수쯤 된다면 사정은 매우 다를 것이다.

’승자의 역사를 만드는 뻔뻔함과 음흉함의 미학’이란 부제가 붙은 ‘후흑학’은 두꺼운 얼굴(면후·面厚)과 시커먼 속마음(심흑·心黑)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한 청말 이종오(李宗吾)의 기서 ‘후흑학(厚黑學)’에 대한 해설서다.  몇년전 이와 비슷한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측천무후 아래서 활약했던 악독한 관리 내준신이 지은 『나직경羅織經』(무고한 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기술을 담은 책)을 현대 감각에 맞게 새로 풀이한 책으로 중국인 작가 마수취안이 쓴 처세서이다.

나는 그 책을 읽다가 나의 성정에 영 맞지 않아 끝까지 읽지도 못하고 중간에 책을 덮었었다.  우리가 알고있는 기존의 도덕률에 반기를 든 이러한 종류의 책은 자신의 감정을 속속들이 들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네 일반인들에게는 내면적 갈등과 반감을 갖게 한다.  그때의 기억이 있었기에 이 책도 썩 내키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왕에 손에 잡은 책이니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오기도 함께 작동했다.  언제 써먹을지도 모르는 비기(秘技)라도 취할 양으로 다부지게 달라붙어 책을 읽노라니 내 모양이 참 우스웠다.

책의 구성은 <모략의 즐거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  후흑학의 탄생 배경을 다루는 1부와 중국 역사에 있어 후흑의 대가를 다루는 2부, 후흑술의 기본 내용을 다루는 3부, 오늘날 우리에게 후흑학이 필요한 이유와 현실에서의 적용을 다루는 4부로 나뉘어져 있고, 각각은 역사적 에피소드와 함께 엮어 가독력을 높였다.

 지난해 여름 당직자 인선문제를 놓고 갈등을 겪었던 당시 홍준표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기자간담회에서 “휴가기간 중 후흑론을 집중 공부하겠다”고 밝혀 화제가 됐었다. 그가 후흑론을 얼마나 공부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모래시계 검사’는 1년 후 우리나라 여당의 당대표가 되었다.  후흑을 연마한 그가 얼마나 승승장구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후흑학을 완성한 이종오가 ’후흑구국’을 기치로 내걸었듯이 후흑학의 요체는 역시 求國에 있다.  이종오의 후흑구국(厚黑救國)의 취지를 계승한 중국 수뇌부의 ‘도광양회(韜光養晦·어둠 속에서 은밀히 힘을 기른다는)’나 흑묘백묘론으로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끌었던 덩 샤오핑의 책략 덕택에 G2의 자리에 오른 중국을 볼 때 정치 지도자의 능력과 바른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저자는 마땅히 지켜야 할 9가지 처세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위기에 빠져나갈 퇴로를 만들라, 반룡부봉(攀龍附鳳·훌륭한 사람에게 붙어 출세하다)하되 역린(逆鱗)을 조심하라, 사람을 가려 때에 맞게 칭찬하라, 큰 인물로 포장해 신뢰케 하라, 귀머거리 흉내로 속셈을 감추라.  
정치 지도자 및 글로벌 기업의 고위직 임원들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반세기에 걸쳐 형성된 패거리 문화에서 탈피하여 자신과 생각이나 사상이 다르더라도 구국의 차원에서 능력만 있으면 과감히 기용하는 진정한 실용의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오직 자신과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중용되는 현 정부의 인사정책이나 기업의 악습을 비판하는 모든 사람들을 갖은 이유를 들어 해고시키는 케케묵은 행태는 이제 사라져야 할 때라고 본다.  

이종오의 후흑학은 낯짝만 두꺼워지고 마음만 검은 우리나라의 모든 지도자들에게 진정한 후흑의 정신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목적의 정당성이지 그 기술의 숙련도가 아니라고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블로깅을 처음 시작한 것도 벌써 만 2년이 다 되어간다.
얼리 어답터라기 보다는 슬로우 어답터에 가까운 내가 온라인 상의 작은 공간에 터를 잡고, 일상에서 벌어진 일들을 글로 옮기는 것에서부터 읽었던 책의 느낌을 기록하거나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끄적거리는 것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잊고 살았을 많은 것들을 놓치지 않고 모아 놓았다는 느낌이 든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들락거리는 인터넷 공간에 글을 올리는 것은 때로는 의무감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마치 골동품에 취미를 붙인 사람이 별 가치도 없어 보이는 쇠붙이에도 눈길을 주고는 끝내 그것을 구매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처럼  새로운 방문객의 시선을 의식해 가치도 없는 글을 급조하여 올려야만 안심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어느 정도 초보 블로거의 딱지는 뗀 듯 보이지만 여전히 초보 티를 벗지 못하는 것들도 많이 남아 있다.  사진의 편집이나 글의 구성만 보아도 그렇다.  그런 까닭에 가급적 사진이 들어간 글은 자제하고 있다.  남들이 보기에 한심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그만큼 블로깅을 했으면 달인 소리는 듣지 못해도 남들 하는 만큼은 쫓아가야 하거늘 처음이나 지금이나 별반 나아진 게 없으니 말이다.  아무튼 기계치에 가까운 내게는 넘지 못할 벽임에 틀림없다.

기술적인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생각이나 마음의 깊이가 좀체 나아지지 않는 것을 보면 내가 생각해도 구제불능이다.  원체 유약한 성격인 나로선 처음 블로그를 할 때만 해도 평소 가깝게 지내던 블로거가 어느 날 갑자기 블로그를 폐쇄하고 보이지 않으면 한동안 마음이 싱숭생숭 하여 블로그에 접속조차 하기 싫었던 적도 있었다.  혹은 거의 매일 거르지 않고 방문하던 블로거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아니면 내가 뭐 잘못한 일이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오만 걱정을 하기도 했었다.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블로그 세상도 우리네 현실 세계와 그닥 다르지 않은 듯하다.
서로 얼굴을 보지도 못하였고, 나이도 짐작만 할 뿐이지만 성격이 통하는 사람이 있고 자연스레 멀어지는 사람도 있는가 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블로그를 하면서 세상의 시름을 잊고 다른 블로거를 통하여 위로를 받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처음에 각별히 지내던 블로거 중에는 지금은 다른 사이트로 옮겨갔거나 아예 블로깅을 작파한 사람도 더러 있지만 지금은 나도 그분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직업이 없던 사람이 새로운 직업을 구했거나, 사업이 번창하여 바빠졌다거나, 능력을 인정받아 두루두루 바빠졌을 거라고.

나와 같이 블로그를 시작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가끔 그리울 때가 있지만 새로운 블로거가 그 자리를 어느새 메우고 있음을 발견할 때, 만나고 또 헤어지는 어길 수 없는 자연의 이치를 생각하곤 한다.  거꾸로 흐르지 않는 세월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톨스토이의 마지막 3부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상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유가 척척 묻어날 정도로 한가로이 책을 읽었던 것도 참 오랜만이다.
한동안 손에 책을 잡지 않았던 탓인지 마음은 금세 저 멀리 달아나고, 거듭 달아나려는 마음을 이리저리 돌려 세워 간신히 책에 집중해보지만 선잠 든 아가처럼 오래 가지 못한다.  가늘게 내리는 빗소리에도 시선을 빼앗기길 여러 번.  그렇게 어렵사리 읽은 책인데 가슴에 남은 귀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세상에서 단 한 권의 책만 가지라 하면 나는 주저 없이 톨스토이의 마지막 저서인 이 위대한 책을 선택할 것이다."라고 극찬했던 솔제니친의 평에서 알 수 있듯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에 담긴 잠언들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생이 얼마 남지 않았던 노작가 톨스토이가 들려 주는 말의 향연이요, 깨달음의 정수(精髓)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 글자 한 글자에 심혈을 기울인 듯한 글귀들을 읽어 내려가는 내내 서늘한 경건함을 느꼈다.

작가 자신이 서문에서 밝히 듯 인생의 손님들인 사랑, 행복, 신, 믿음, 삶, 죽음, 말, 행동, 진리, 거짓, 노동, 고통, 학문, 분노, 오만 등의 주제들이 반복되도록 씌어졌고, 이러한 반복성은 하루하루의 삶이 담아내는 의미들이 서로 연결성을 가지도록 배려하였으며, 모든 행동의 지침이 되는 총체적인 철학으로 완결성으로 끝을 맺고 있다.  생의 마지막에 이른 노작가는 병상에서나마 자신의 깨달음을 글로 남기는 것이 전 인류를 위한 마지막 의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이 책은 인류에 대한 나 자신의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다.  함께 읽는 독자들이 내가 책을 쓰면서, 또한 매일 반복해서 읽으면서 경험했던 감동과 흥분을 함께 느껴주었으면 한다."   (책의 서문)

 톨스토이는 자신의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이 책을 읽음으로써 삶의 진실을 향해 떠나는 순례자의 삶을 살았으면 하고 바란 듯하다.  계단을 오르 듯 삶의 단계마다 꼭 배워야 할 것들이 있다지만 인생이 어찌 정해진 순서대로만 진행되던가.  때로는 그때 이것을 알았더라면 하고 후회하는 일이 어디 한두번이었나.  나처럼 우둔한 독자는 노작가의 명철한 가르침을 반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두고두고 깨쳐 나갈 결심으로 작가에 대한 미안함을 덮는다.

"많은 책을 읽고 다 믿어버리는 것보다는 아무 책도 읽지 않는 편이 더 낫다.  책 한 권 읽지 않고서도 현명할 수 있다.  하지만 책에 쓰인 것을 다 믿는다면 바보가 되어 버린다."  (P.66)

장마의 끝무리에 만난 이 책은 흐린 하늘을 보면서도 청정한 사색의 세계로 향하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411 | 412 | 413 | 41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