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199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자석의 N극과 S극이 서로에게 끌리듯이 극단적으로 다른 서로에게 끌린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에게 있어서도 다르지 않다.  나는 그것을 일종의 지적 호기심, 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궁금증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남자와 여자가 너무나 다른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가령 남자의 사고방식과 행동양태가 여자와 하나도 다를 게 없다면 여자는 결코 남자에게 추파를 보내거나 그들의 세계를 궁금해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자들에게 남자는 자신들과는 외모적으로 조금 다른, 같은 성(性)으로 보이는 돌연변이쯤으로 인식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때로는 비이성적으로 보여지기까지 하는 상대방에게 마음이 끌린다는 것은 신이 남녀를 다르게 빚어놓음으로써 영원히 서로의 관심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만든 오묘한 섭리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다름'도 세상이라는 용광로에서 용해되고 나면 선천적이고도 개별적인 '다름'이 집단적 '다름'으로 전이되고 만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통일성을 갖춤으로써 잃게되는 집단적 망각, 또는 구분짓기에 실패한 개인들의 혼돈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서 외따로 떨어져 사랑하는 두 존재, 그건 아주 아름답지.  하지만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이 아무리 경멸할 만한 것일지라도 그들에겐 이 세계가 필요해.  서로 대화를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침묵할 수도 있을 텐데요."

"옆자리에 앉은 저 두 사람처럼?"  하고 장-마르크가 웃었다.

"아니야, 어떤 사랑도 침묵에 배겨날 순 없어."   (P.88)

 

밀란 쿤데라의 소설이 인기 있는 이유는 작가의 예리한 눈으로 세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사고를 통하여 사물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본다는 것은 그 사물에 대한 철학적 인식일 수 있고, 더구나 독서를 통한 세상 읽기는 결국 작가의 사상적 흐름을 읽는 것과 다르지 않다.  괜히 번거롭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작가의 의식을 그 뒤에 숨기는 것은 오히려 독자에게 혼란만 야기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밀란 쿤데라는 독자에게 친절하다.

 

이 책에서 작가는 인간이 자신이 속한 세상을 경멸함으로써, 또는 그곳으로부터 배제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다섯 살 나던 해 죽고 말자 샹탈은 시댁 식구들의 임신 종용과 이에 동조하는 남편에게 화가 나 이혼을 했다. 그리고 경제적 자립을 위해 광고회사에 취직했고 애인을 찾았으며 지금 그녀보다 네 살이나 어린 애인 장-마르크와 살고 있다. 어느날 샹탈은 문득 더이상 어떤 남자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느끼고 이를 장-마르크에게 이야기한다. 이것이 샹탈의 육체가 점진적으로 소멸될 것임을 알리는 경고라는 것을 알아챈 장-마르크는 의기소침해진 샹탈을 즐겁게 해주고 싶어 익명으로 편지를 보낸다. 그녀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불어넣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익명의 남자가 보내오는 편지를 읽으며 샹탈은 열예닐곱살 무렵 가슴에 품고 살았던 장미향이 되살아남을 느끼지만 얼마되지 않아 편지의 발신인이 장-마르크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의도를 생각하다가 샹탈은 장-마르크가 자신을 떠날 구실을 찾고 있었던 것이라고 결론짓고 혼자 런던으로 떠난다. 처음에 화가 났던 장-마르크는 샹탈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고 역시 런던행 기차를 탄다. 이제 런던에 온 샹탈도 자신에게 장-마르크가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는다. 잃어버린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쳐줄 사람은 장-마르크 뿐임을 안 것이다.

등장인물들 간에 극적인 갈등도 없고 흥미진진한 스토리 전개 따위도 찾아 볼 수없다.  한 사건이 두 주인공의 시점에 따라 다른 모습과 의미를 띠면서 일으키는 긴장감이 독자를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할 뿐, 독자를 유혹하기 위한 어떤 작위적 구조나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등장인물도 작품구조도 단출하기 그지없다.  군더더기를 제거한 것이 이작품의 묘미라고나 할까. 49장까지 그(장-마르크)와 그녀(샹탈)가 화자로 나오다가 50장에 이르면 느닷없이 `나' 즉 작가가 화자로 등장한다.  밀란 쿤데라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색깔로 자신을 드러낸다.  마성과 같은 그의 매력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쉽사리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아들의 무덤 앞에서 샹탈의 독백은 인상적이다.

 

"아기를 갖고 동시에 이 세계를 경멸하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를 내보낸 곳이 바로 이 세계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계에 집착하는 것은 아기 때문이며, 아기 때문에 세계의 미래를 생각하고 그 소란스러움, 그 소요에 기꺼이 참여하며 이 세계의 불치의 바보짓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란다.  너의 죽음을 통해 너는 나로부터 너와 함께 있는 즐거움을 앗아갔지만 동시에 너는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지.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도록 나는 자유로워졌단다."   (P.64) 

 

인간존재의 이면에 존재하는 속물성과 위선을 예리한 시선으로 파고드는 밀란 쿤데라는 이 소설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 시대 남녀간의 사랑이 존재할 수 있는 양태의 극한을 추구했다고 말하는 작가.  그가 의도하는 철학적 주제는 언제나 독자의 몫이겠지만, 그의 시선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끌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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