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한명숙과 대한민국 검찰 - 한명숙 전 총리의 검찰과의 전쟁, 그 700일간의 기록
황창화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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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의 청렴도 평가에서 만년 하위권을 맴도는 기관이 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짐작하겠지만, 검찰청과 경찰청이 바로 그곳이다.  엄정한 법의 잣대로 국민의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는 그곳이 부패와 편법의 온상이 된 지는 꽤나 오래된 듯하다.  아니 제대로 된 검찰청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검찰은 많은 권한을 독점하고 있다.  법률 전문가가 아닌 내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수사권, 경찰 수사에 대한 수사지휘권, 구속영장 등 각종 영장에 대한 영장청구권, 피의자를 재판에 회부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소권, 법원 판결을 통해 확정된 형을 집행하는 형집행권 등으로 이 모든 권한이 검찰에 집중돼 있다. 기소 여부를 법규정이 아니라 검사 재량에 맡기는 `기소편의주의`가 형사소송법에 채택돼 있음도 간과하면 안 된다. 가히 세계 다른 나라에서 유사한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우리 검찰 권한은 막강하다.  어떤 권력이든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하게 마련이다.  이렇게 비대해진 권력은 자정능력과 자기 통제력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검사 개개인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고, 사석에서 만나면 예의 바르고 정중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분들이 많다.  그럼에도 시스템 내에서는 비열하고, 몰염치하며, 악날해지기까지 한다.  한마디로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현실에서 보는 듯한 느낌이다.  참여정부 초기에 일개 평검사가 대통령 앞에서도 할 말 다하던 그런 모습은 현 정부에 들어서 더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을 그렇게 순한 모습으로 잠재우기 위해서는 상응하는 반대급부가 있었겠지만 '정의와 양심'을 다른 무엇보다도 더욱 소중한 가치로 여겨야 하는 검찰이 권력에 기생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는 모습은 참으로 개탄스럽다.

 

한명숙 전 총리의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냈으며, 퇴임 후에도 지근 거리에서 그녀를 보좌하고 있는 저자 황창화 소장은 한명숙 전 총리가 기소에서부터 2번의 무죄판결을 받기까지의 길고 긴 과정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어쩌면 한 전 총리가 무죄판결을 받은 것이 당연한 귀결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일반인의 입장에서 그런 판결을 받은 것도 한 전 총리였으니까 가능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온갖 회유와 압박 속에서 돈도, 빽도 없는 사람이었다면 쉽게 포기하였을텐데 그나마 일국의 국무총리를 지내신 분이니 그들과 맞서 이길 수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물론 재판에서 이겼다는 사실만으로 완전한 승리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처음에 받은 인상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지 않던가.  첫사랑, 첫눈, 첫인상 등 처음이라는 느낌은 일반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하여, 한 전 총리가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되었을 때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된 부정적인 이미지는 무죄판결을 받은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일부는 한 전 총리가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검찰은 그런 면에서 잃은 것이 없다.  비록 재판에서는 졌지만 그들이 원하던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으니까.

 

민주주의는 결국 법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너무도 당연한 말이 우리 앞에서 사실로 인식되기 전까지는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말하기 어렵다.  언제까지 우리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모습을 한 검찰을 지켜보아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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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새해가 밝았다.

아침부터 간간이 내리는 눈.  새해 첫날의 서설이다.

작년 이맘 때쯤, '한 해를 살아내기 보다는 살아가게 하소서'하고 바랬다.

지나고 나면 성긴 추억이 한 줌 서릿발처럼 밟힌다.  실제로 지나온 시간 같지가 않다.

 

새벽부터 이어지던 휴대폰 문자음에 잠을 설쳤다.

어제와 오늘이 그닥 달라진 것도 없는데 이런 날이면 왠지 습관처럼 의미를 부여한다.

아이처럼 유치해지지 않으면 삶은 그저 밋밋할 뿐이다.

무뎌진 마음결에 새로이 무늬를 되새기는 날.  오늘은 그런 날이어야 한다.

닭살이 돋고 손발이 오글거려도.

 

아들과 함께 도서관을 찾았다.

평소의 주말이라면 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시끌벅적할 시간.  한산하다.

빈 자리가 오히려 자연스러운, '정숙'이라는 시간이 얼어붙은, 휑한 공간에 책장 넘기는 소리만 가끔 메아리처럼 들린다.

 

새로 장만한 2012년 다이어리에 없는 스케쥴도 몇 가지 적어 놓아야 할 듯한 압박감.

대체로 차분할 것.  서두르지 말 것.

그리고...

 

눈발이 굵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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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리얼 쇼크 - 이미지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가?
최효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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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뮬라크르의 이미지가 확대재생산되고 과잉 증식하면서 하이퍼리얼 속으로 빠져드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는 자본과 미디어, 관료제(국가, 정치권력)의 합작품이기도 하고 자본과 미디어의 합작품이기도 하다.  우리사회에는 이미 가짜 실재인 시뮬라크르가 자가증식해 온통 시뮬라시옹의 질서로 둘러싸여 있다."  (P.368)

 

말이 참 어렵다.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귀신 씨나락 까 먹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삶과 실존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지난 월요일에는 회사의 송년회가 있었다.  유난히 추운 날씨였다.  매섭게 몰아치는 칼바람을 뚫고 직원들은 독거 노인들의 난방을 위한 '사랑의 연탄 배달' 행사를 가졌었다.  다들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마지못해 나서는 모습이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시커먼 연탄을 들고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난방이 잘 되는 사무실에서도 춥다고 난리인데 하루 종일 영하의 추위에 오들오들 떨 생각을 하니 지레 겁부터 나는 것이었다.

 

연탄을 나르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골목 어귀에서 연탄을 리어카에 옮겨 싣고 끌고 당기며 비탈길을 오르는 일도, 몸조차 가누기 힘든 좁은 연탄광에 연탄을 쌓는 일도 우리 같은 도시내기들에겐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점심을 먹고 회사를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인원이 많으니 두어 시간이면 다 끝날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던 사람들도 일을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지쳐가는 눈치였다.  얼굴이고 옷이고 할 것 없이 시커먼 칠을 한 직원들이 길바닥에 널부러지기 직전에야 일이 마무리 되었다.  짧은 겨울해가 뉘엿뉘엿 서산을 넘고 있었다.

 

우리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커피라도 대접하겠다는 할머니 한 분이 있었다.

연탄 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방에 들어섰을 때, 발바닥에 시린 냉기가 전해졌다.  겨울 추위가 시작된 지 한참이나 지났건만 전기장판에 의지한 채 겨울을 나고 있는 모습이 짠하게 다가왔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킬 때마다 하얀 입김이 방안 가득 퍼졌다.

 

내가 어렸을 적에 우리집은 큰길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산중턱에 위치해 있었다.  매년 겨울이면 땔감을 구하는 것이 우리 형제들에게 주어진 하루 일과였고, 눈이라도 쌓여 이마저도 여의치 않을 때에는 연탄을 배달시키곤 하였다.  꽁꽁 언 연탄을 큰길에서부터 집까지 나르는 일은 나무를 하러 산에 오르는 일보다 더 힘들었다.  연탄의 가운데 구멍에 새끼줄을 끼워 양손에 한 장 또는 두 장의 연탄을 들고 눈 쌓인 비탈길을 오르노라면 칼바람에 손과 볼이 얼어 감각이 무뎌지곤 했다.  연탄 백 장을 나르려면 미끄러운 산비탈을 수십 번 오가야 했으니...

 

우리는 언제부턴가 석탄과 석유를 매개로 겨울 같지 않은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지금의 아이들에게 겨울은 그저  긴 겨울방학이 시작되는, 오래도록 기다렸던 스키 시즌 쯤으로 인식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의식 속에 추위로 인한 삶의 고통은 없다.  현실이 복제된 과잉 현실(하이퍼 리얼)은 이제 원본마저 까맣게 잊혀지고 있다.  원본이 없는 실재는 더욱 더 실제적이다.  어른들이 자신이 겪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을 들려주어도 아이들은 믿지 않는다.  이러한 과잉 현실, 즉 하이퍼 리얼의 모습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의식의 사고',  즉 우리가 실재하는 어떤 대상과 맺는 관계는 사실상 심볼릭한 룰(구조- structure)이 상당부분 지배하고 있다고 믿는 구조주의 학파는 언어학자 소쉬르에서 비롯되었고, 프랑스의 사상가인 장 보드리야르는 구조주의 학파에서도 대표적인 비관론자에 속한다.  사유의 주체가 내가 아닌 구조(또는 이미지)가 지배하므로 현대인은 소비 행태와 어떤 사건을 대하는 반응에 있어 일정한 패턴을 형성하고 정형화 되는 경향이 있다.  미디어와 자본에 의해 형성된 가짜 현실의 영상 이미지는 현대인을 미디어에 종속된 로봇처럼 만들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이러한 견해를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 사회가 몰두하고 있는 11가지 뜨거운 이슈들을 통해 현실보다는 ‘만들어진 현실’을 믿기 원하는 대중의 속성과 이를 이용해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는 자본과 미디어의 본모습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보드리야르에 의해 정립된 하이퍼리얼(hyper real)의 개념은 현대 철학에 있어 중요한 한 축이다.  그러나 구조주의 얼개와 구조주의 철학가의 사상을 모두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전통철학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독자가 과학과 철학이 융합된 구조주의 이론을 습득하여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하여, 이 책의 저자는 9·11 테러사건 이후 이슬람의 이미지, 광화문 촛불 시위, 타블로의 학력 위조 논란과 포르노그래피의 속성 등 우리사회를 뒤흔든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해, 우리 현실 깊숙이 침투해 있는 하이퍼리얼 개념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가인 자크 라캉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했다.  사고와 행동의 주체가 내가 아닌, 타인에 의해 조종되는 현대인의 모습은 비극적이다.  그렇다면 자본과 미디어에 종속된 현대인이 아닌, 미디어에 조종당하지 않는 당당한 사고의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미디어의 허구성을 제대로 간파할 수 있는 ‘미디어 독해력’을 조언한다.  외부의 구조와 룰에 지배되고 있는 현대인에게 보드리야르의 철학은 강한 울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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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꼼수다 뒷담화
김용민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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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꼼수다'의 고정 멤버였던 정봉주 전 의원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있었다.

대법원은 정 전 의원에 대한 상고심에서 상고를 기각하고 징역 1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로써 정 전 의원은 향후 10년동안 피선거권이 박탈되면서 출마 또한 무산되는 등 정치생명의 위기를 맞게 됐다.  그렇다면 현역 정치인이었던 그가 이런 결과를 예상 못한 바가 아니었을텐데 현 정부와 대척점의 위치에 있는 '나꼼수'의 고정 패널로 활동했는가 하는 문제와, 아무리 현 정부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이견이 있을 수 있는 문제의 판결을 이렇게 서둘러 종결지을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의문으로 남는다.  유불리를 떠나 서로에게 치명적인 오점으로 작용할 사안이기에 누군가는 분명 무리수를 둔 셈이다.

  

나는 아주 편한 사람과 만나 가벼운 대화를 나누 듯 이 글을 쓰려고 한다.  순서가 뒤바뀌어 혼란스러울 수도 있고, 의미를 파악하느라 진땀을 흘릴 수도 있지만 그게 뭐 그리 대단한 문제이겠는가.  어차피 나 혼자 쓰는 블로그이고, 얼떨결에 방문한 분이라면 대충 훑어보거나 숫제 읽지 않아도 될 일이다.

 

먼저 전제를 달아야겠다.  공격성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보았던 프로이드의 주장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이 글을 전개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격성의 표출 양상은 너무나 다양해서 모두 다룰 수는 없고, 오직 말과 글을 포함한 언어적 관점으로만 그 범주를 축소해야겠다.  즉, 현 정부가 출범 초기부터 내내 지향해 왔던 강압적 방법을 동원한 언어적 공격성의 차단과 정권의 말기에 등장한 '나꼼수'의 이상 열풍을 들어 대화에 대한 주관적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먼저, 강제적인 겁박이나 실효적 법리로 인간의 본능을 차단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가령 성욕이나 식욕과 같은 본능을 법으로 억제하거나 차단할 수 있을까? 하고 묻는다면 열이면 열 다들 코웃음을 날릴 것이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질문이기에 세살배기 아이도 헛웃음을 지을 만하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욕을 하고, 또는 이간질이나 뒷담화를 일삼는 등의 공격성 표출은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나 내재된 본능이라고 보아야 한다.  가뜩이나 그것을 분출할 다양한 수단을 확보한 현대인에게 원천적 차단을 강제하거나 시도하는 자체가 바보가 아닌 이상 불가능함을 잘 알 것이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하지마라'는 항목을 늘릴수록 아이는 '일탈행위'의 쾌감과 스릴에 목 말라 할 테고, 그 강도가 심할수록 반발하는 힘은 더욱 강해지지 않던가.

 

그렇다면 이러한 본능에 대응하는 현명한 방법은 무엇일까?

상대방의 말에 주관적 평가를 더하지 말아야 한다.  즉, 자기식 소설 쓰기를 금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가령 아내가 "인간아, 술 좀 작작 마셔라."라고 했을 때, 남편이 이 말을 듣고 '아, 내 아내는 이제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구나.'하는 식의 주관적 평가, 또는 소설 쓰기는 결국 그렇게 받아들이는 자신에게만 상처를 입힌다는 점이다.  단순히 그 말에 내포된 의미만 받아들인다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주관적 평가가 덧붙여지면 결국 대화는 차단되고 자신에게는 심각한 상처만 입히게 된다.  자신이 쏜 화살에 자신이 맞는 격이니 보통 심각한 자충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학습을 통하여 체득된 이런 식의 소설 쓰기는 마치 이것이 자기 방어적 수단이라도 되는 양 습관화 되어 고치기 쉽지 않다.

 

다음으로, 바람직한 대화는 맹목적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자들의 '수다'가 여기에 가장 잘 부합할텐데 남자들은 사실 이런 대화에 취약하다.  목적이 없는 대화는 그저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문제다.  대화에 목적이 개입되는 그 순간부터 대화는 강의나 훈계와 같은 일방적 떠들기로 변질되고 만다.  무릇 세상의 모든 수컷들이란 가오잡기를 좋아하지 않던가.  현 정권은 한낱 수컷들의 가오잡기에서 한 발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내가 보는 견지에서'나꼼수'의 열풍은 대화의 기본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대화의 맹목적성(그들의 대화가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더라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수컷들의 가오잡기가 없다는 점)과 청취자의 말을 그들 스스로가 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저자 김용민은 나꼼수의 제작 뒷담화와 흥행 비결에 대해 이 책에서 그 나름의 평가를 피력하고 있다.

 

오늘 정봉주 전 의원은 '나꼼수'의 고정 패널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화의 즐거움을 알게 된 '나꼼수'의 열혈 청취자들은 제2, 제3의 '나꼼수'를 이어갈 것이다.  즐겁자고 하는 것이 대화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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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 작고한 프랑스의 유명한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를 '하이퍼리얼(과도현실 또는 파생현실)의 시대'로 규정하였다.  우리에게는 그닥 친숙하지 않은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하이퍼 리얼 쇼크>와 <피고인 한명숙과 대한민국 검찰>을 읽고 있다.  얼핏 생각하면 이 두 권의 책 사이에는 하등의 공통점도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면 '그렇구나'하고 느낄 수 있다.

 

플라톤은 그의 후기저작인 '소피스테스'에서  이 세계를 원형(이데아), 복제물(현실), 복제의 복제물(시뮬라크르)로 정의하였다.  우리의 삶 자체가 이데아의 복제물인데, 복제는 언제나 원형을 그대로 담을 수는 없는 것이므로 복제하면 할 수록 원형과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시뮬라크르를 실재하지 않는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겼다. 반면에, 포스트 구조주의의 핵심 이론 중 하나인 시뮬라크르는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가 확립한 개념으로서 플라톤의 개념과는 다르게, 단순한 복제의 복제물이 아닌 독립성을 가진 개체로 보았다. 즉, 원형을 단순히 흉내낸 가짜가 아니라 원형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역동적인 존재로 여긴 것이다. 이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쟝 보드리야르의 책 <시뮬라르크와 시뮬라시옹(Simulacres et Simulation)>에서도 나온 바 있다. 여기서는 주로 대중과 미디어, 소비사회에 대한 개념으로 쓰였는데, 현대 사회에서는 모사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한다는 것이다.

 

머리가 딱딱 아프다.  철학을 기피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고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개념만 익히면 그 다음은 비교적 쉽다.  모든 일이 그렇지 않던가.  처음이 어려울 뿐 알고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정치를 예로 들면 이렇다.  정치가는 사회를 바르게 이끌어갈 올바른 철학과 탁월한 국정관리 능력을 갖추어야 하고, 국민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투표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이와 달라도 한참이나 다르다.  가령 후보자의 약력에서 '하버드 대학 졸업'이라는 문구만 보아도 그 사람이 뽑히면 마치 대한민국의 학생들 모두가 하버드에 입학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또는 모 방송국의 아나운서가 출마하면 우리나라 전체 국민이 그 사람의 이미지처럼 점잖고 바른 행동만 하는 덕치가 금방이라도 실현될 듯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평생 개그만 한 사람을 뽑아주면 웃을 일 없는 현실에서 매일매일이 즐겁고 행복한 날만 이어질 것같은 생각도 든다.

 

교환가치나 사용가치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이미지화 되고 기호화 된 세상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실존하는 사물을 소비하지 않고, 미디어에 의해 조작된 이미지, 또는 기호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배우 신세경이 광고하는 청바지만 입어도 그렇게 날씬하고 폼나는 자태를 갖게될 것만 같은 환상.  정치에 있어 하이퍼 리얼의 대표적인 희생자는 고 노무현 대통령과 한명숙 전 총리가 아니었을까?  검찰은 피의 사실을 언론에 흘리고, 언론은 다시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편집하여 사건을 보도하고,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국민들은 앞다투어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하거나 부풀리고...  그렇게 몇 단계만 걸쳐도 없던 현실이 실재 존재하는 가상의 현실, 현실을 지배하는 가상, 즉 시뮬라르크가 되는 것이다.

 

모처럼 편한 휴일을 맞았는데 이 두 권의 책이 나를 붙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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