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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다!

신간평가단의 일원으로 활동을 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봄날의 새순처럼 여린 슬픔이 뾰족 고개를 내밀 듯하다.  겨울이 걷힌 봄하늘에 습관처럼 '희망'을 다짐하듯 다가올 계절과 나의 미래에 작은 미소를 보낸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도서관을 멀리하는 사람은 드물지 싶다.  내가 사는 곳에도 시립 도서관이 있고, 나도 물론 시도 때도 없이 '팥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한다.  공공 도서관이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고 이런 저런 일을 겪게 되지만 며칠만 발을 끊어도 금단증상처럼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른다.  누가 나를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교도소라는 폐쇄된 공간에서도 우리네 사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싶다. 

 

 

 

 

 

 

 

2003년의 봄을 기억한다.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이 바그다드 상공에 불꽃놀이를 하듯 폭탄을 투하하던 장면.  세계 각국은 마치 축구 경기를 중계하듯 히히덕거리며 21세기의 희안한 전쟁을 실시간으로 중계했다.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살던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우리는 불구경 하듯 전쟁 구경을 했다.  아직도 나는 그 순간의 내가 인간이 아닌 듯 느껴진다. 그리고 그때의 죄책감이 지워지지 않는다. 김영미 PD의 이 책을 읽으면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아물던 마음에 다시 생채기를 내겠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만큼이야 하겠나.

 

 

 

 

 

'알랭 드 보통'을 알게 된 것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럴 테지만 나 역시 "여행의 기술"을 통하여 이 특이하고 신선한 작가를 만났다.  그 후로 많지는 않았지만 작가의 작품들을 찾아 읽게 되었고, 작가의 문체와 사색의 즐거움에 서서히 매료되었다.  더러 리뷰를 남긴 적도 있지만 내 사유의 힘이 약해서인지 '알랭 드 보통'의 작품을 읽고 리뷰를 쓴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는 나에게 작가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기대된다.

 

 

 

 

 

 

지방으로 발령을 받고 가족을 떠나 나 혼자 살게 되었을 때, 공부 때문에 혼자 살게 되었던 학창 시절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나는 한동안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렸고, 회사를 그만둘까 하는 극단적 선택을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세월이 흐르고 나는 점차 누군가에게 등떠밀린 고독이 아니라 내 스스로 선택한 '고독'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장석주 시인의 이 책을 읽는다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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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그늘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 신경숙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문학'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현실이라는 원반 위에 올려진 작은 찻잔처럼 활자어가 갖는 이질감.  붙어있으나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그 거리감을 작가는 한순간에 녹이곤 한다.  마그네틱 카드를 주머니에 넣은 채 MRI실에 들어가곤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깜박 깜박 잊게 된다는 어느 MRI 기사의 고백처럼 작가가 쓴 활자어는 나의 상념을, 익숙함을, 때론 뭉뚱그린 현실을 자석처럼 빨아들인다.  그녀의 글이 일순 현실과 활자어의 괴리를 파고들 때, 친숙함이란 단어로는 뭔가 설명이 미심쩍은 어떤 순간이 올 때, 나는 현실을 조금 밀어내고 활자어 쪽으로 한발 다가서 있음을 느낀다.

 

어제는 책을 빌리러 사무실 근처의 도서관에 들렀다.  조금 늦었다 싶은 저녁을 도서관 식당에서 해결하고는 멀뚱히 앉아 점멸하는 가로등 불빛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라흐마니노프의 2번 교향곡이 쓸쓸함을 더하는 식당에는 신학기를 맞은 학생들의 재잘거림이 밤의 고요를 깨고 있었다.  조금 안면이 있는 식당 주인이 인사를 하며 내 앞에 앉기 전까지는.  그는 잡히지 않는 주제의 여러 이야기들을 소반 위의 밀가루처럼 뿌려놓고는 도서관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던 스물아홉 살의 청년이 어제 백혈병으로 쓰러져 죽었다는 소식을 마치 지나가는 시간처럼 툭 하고 던졌다.  밤의 정적을 뚫고 스물아홉의 청년이 죽었다는 소식과, 라흐마니노프의 2번 교향곡과, 커피 한 잔의 간절함과, 무심히 지나가는 일상의 연관성을 생각했다.  모래알처럼 흩어졌던 여러 사건들이 순간이라는 응축된 한 점으로 모여 내 의식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나는 그때 정신분열 또는 시간분열을 생각했다.  각각의 사건들이 한 순간 약속이나 한 듯 어느 시점에 물방울처럼 모이는 데는 분명 그 까닭이 있을 거라고.

 

신경숙의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을 빌려 도서관을 나섰다.

미리 슬픔을 준비하지 못한 이야기들은 내 의식에 들어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 채 잠시 헤매다가 봄비 속으로 스러졌다.  시가 운영하는 도서관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던 스물아홉의 청년은, 그제까지만 해도 생기를 잃지 않았던 건장한 청년은 그를 기억하는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속절없는 슬픔만 남긴 채 연기처럼 사라졌다.  사람이 가고 없어질 때 남기곤 하는 그 부질없는 기억.  두세 쪽 또는 그보다 훨씬 못 미치는 한 줄의 기억만으로도 생생히 되새김질할 수 있을 듯한 어제를 현재에 비춰보면서 터벅터벅 집으로 향했었다. 

 

계절은 개개인의 내면생활과는 상관없이 어김없이 왔다가 머물다가 지나간다.  나라고 제외될 수는 없다.  저 덩치 큰 냉장고를 이끌고 이사를 왔든 아니든 봄이 올 것이다.  지천에 꽃이 필 것이고 향기들은 명랑히 시시덕거리며 대기를 껴안을 것이다.  삼월이면 괜한 사람도 길을 떠나고 싶어진다는데 나는 아예 살던 곳을 옮기게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이야.  피식, 웃음이 나온다.  창 밖으로 개가 한 마리 골목으로 걸어간다.  개는 곧 시야 속에서 사라진다.  시간도 저렇게 지나갈 것이다.  달라진 건 풍경일 뿐이다.  시계탑을 만들고 종을 쳐야지.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P.302)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작가의 경고.  물 먹은 스웨터처럼 밤이 늦었다.  조금 있으면 새벽이라는 바닥에 닿아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해야 할 일'들은 스웨터를 타고 올라 가물거리는 내 의식에 도달할 것이다.  작가는 어둠의 저편 어드메쯤에서 추억의 어장이라도 만난 듯, 이 밤만으로는 모자랄 듯한 이야기를 쏟아내는데 나는 벌써 신새벽을 만나고 있다.

 

작가의 고향은 정읍이라 했다.  위로는 오빠가 셋이나 되고, 여동생이 자신보다 먼저 시집을 갔고, 부부 둘만 남은 부모님은...  작고한 박경리 여사를 만났던 추억과 오정희 작가에 대한 회상.  그리고...  자꾸 멀어지려는 현실과 손을 놓아주지 않는 작가의 활자어가 실랑이를 벌이는 밤에 나는 죽은 듯이 앉아 신경숙 작가의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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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좋았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지라 집에도 가지 못하고 숙소에서 머물렀다.  참 오랜만에 맞는 하루의 자유.  오전 내내 꼼짝도 하지 않고 번데기처럼 소파에 누워 꼬물거렸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때때로 내 성격에 대해 나조차도 의아할 때가 있다.  바지런을 떨 때는 뭐에 물린듯이 악착을 떨다가도 한번 느러지기 시작하면 방바닥에 벗어 놓은 빨랫감처럼 널부러지곤 한다.  그럴 땐 대책이 없다.  '이러면 안 되는데'하는 생각이 장난감 비행기처럼 내 머릿속에서 몇 번인가 선회를 하고 느즈막히 한 술 뜨는 점심.  입 안이 소태를 씹은 것 같이 칼칼하다.

 

작년에 내가 가르쳤던 중학생 몇몇에게 전화를 했다.  손쉽게 말벗이 될 수 있는 아이들.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을까 하고 기대에 부푼, 잘 숙성된 빵반죽 같은 얼굴들이 내 방으로 굴러 들어오자 칙칙했던 공기는 금세 짜르르 윤기가 흘렀다.

 

여전히 볕이 좋은 오후에 아이들 세 명을 데리고 숙소 근처의 산을 올랐다.       

이 길과 저 길 사이에서 만난 봄기운이 발 밑에서 폭신폭신 밟힌다.  꼭 쥐고 있던 겨울이, 그 쥠 때문에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던 봄이, 그렇게 하염없던 봄이 기어코 오고야 말았나 보다.  아이들 재잘거림과 지즐대는 묏새 소리에 산은 온통 포롱포롱 날을 듯한 봄이다.  쏟아지는 햇살 때문이었는지 까무룩 졸음이 쏟아질 것 같다.  기분 좋은 땀이 등줄기에 배이고 아이들 잰 걸음에 보조를 맞추느라 헉헉 숨이 가빴다.

 

도시에 있는 산은 한겨울에도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나 보다.  새봄에 오르던 소롯한 고향 산길을 기대했던 나는 짓이겨진 낙엽과 속살이 다 드러난 등산로를 보며 일순 암담해졌다.  소소리바람이 쳤다.  땀이 마르는지 오소소 소름이 돋고 아이들 재잘거림도 멀어질 즈음 깍깍 까치가 울었다.

 

오가는 등산객을 만날 때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는 내가 아이들 눈에는 이상했나 보다.  아는 사람이냐고 묻는다.  아니, 전혀 모르는 사람인걸, 하자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 봐, 인생에서 딱 한 번밖에는 볼 수 없는 사람과 자주 볼 수 있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더 소중할까? 하고 되물었다.  그야 한 번밖에 볼 수 없으니까 그 사람이 더 소중하죠, 한다.  그렇지? 지금 산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쩌면 내 인생에서 더는 만나지 못할지도 몰라, 그래서 소중한 인연이고.  에이, 그래도 아까 보니까 인사도 받지 않고 그냥 가는 사람도 있던데요? 한다.  그럼 그러라지,했다.

 

공부방을 다시 할까? 하고 물었다.

회사원으로서의 할 일과 퇴근 후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병행하던 작년의 기억이, 그 힘들었던 피로감이 내 목소리를 붙잡았다.  기어들어가는 내 목소리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아이들 귓볼에 앉았다. 정말요? 한다.  그래, 하지만 매일은 아니고 일주일에 삼 일만,했다.  봄 햇살이 산을 타고 떼구르르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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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하면서 이벤트에는 딱히 관심도 없었고, 워낙 게으른 탓에 마음먹은 바를 제대로 실천도 못하는지라 매번 '소 닭 보듯' 지나쳤던 내가 최근 며칠 동안 한 사이트에서 주관하는 리뷰 대회에 세 권의 책을 읽고 리뷰를 올렸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연유가 있었다.  하루 종일 직장에서 숫자를 갖고 씨름하는 나의 업무상 점점 정서가 메말라간다는 자각을 아니할 수 없었고, 그래서 블로그를 일종의 '영혼의 방부제' 역할로 삼아 숨통을 틔워보자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므로 이벤트는 자연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그랬던 내가 갑자기 세 개의 이벤트를 연달아 참가하다니...

 

지난 달의 어느 날, 직장의 후배와 저녁을 같이 먹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후배가 뜬금없이 리뷰대회 얘기를 꺼내며 한번 참가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평소에 후배나 나나 직장에서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후배의 말은 전혀 뜻밖이었고 난데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직장내에서는 블로그 접속을 금하는 까닭에 후배가 왜 갑자기 그런 제안을 하게 되었는지 그 출처가 궁금했다.  후배는 내가 블로그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듯했다.

 

후배의 감수성이 미덥지 않았던 나는 왜 그런 제안을 하였는지, 그리고 그 대상이 왜 나였는지 다그치듯 물었다.  한참 동안 뜸을 들이던 후배가 식은 숭늉처럼 내뱉은 대답은 사는 게 재미없다는 것이었다.  마치 어제까지는 참 재미있게 살았는데 오늘 갑자기 있던 재미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는 식이다.  여우비에 맑게 드러난 하늘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과 전공자가 대부분인 우리 부서에서 문과 전공자를 찾다 보니 내가 눈에 띄었고, 나라면 이런 제안을 해도 자신을 '미친 놈' 취급은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단다.  그냥 재미삼아 하자고 하면 안 할지도 모르니 내기를 하자는 말도 덧붙였다.  둘 중 하나가 당선이 되면 떨어진 사람이, 둘 다 당선되면 그 순위에서 밀린 사람이, 둘 다 떨어지면 각자 돈을 내어 저녁을 먹기로 하자는 제안.  그래야 적극적으로 글을 쓰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책도 읽고 가끔 글도 쓸 수 있지 않겠냐며 떨떠름해 하는 나를 부추겼다.

 

때로는 아무 이유도 없이 따라 나서는 경우가 있다.  미적거리던 겨울이 당연하다는 듯 자리를 내주고 물러나는 것처럼.  그 다소곳함에 이유를 묻는 것은 참 부질없다.  나는 후배의 제안에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승낙을 했고. '배신자'의 낙인이 두려워(?) 글을 올렸다.  아직은 젊디 젊은 후배는 이제 사는 게 재미없단다.  그러나 조금 더 세월이 가면 곁에 뉘를 두지 않아도 지난 세월의 숱한 경험을 떠올리며 종일이라도 심심치 않게 보낼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수북한 경험들을 닳을새라 아껴가며 떠올리는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오고야만다는 것을 후배는 아직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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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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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것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시간이 지우고 가는 온갖 자질구레의 번잡을, 고민을, 지워졌다는, 기어코 다 지워졌다는 안심의 시기에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은 그저 행복한 것, 살짝 미소짓게 하는 그런 것들만 남는다.  하마터면 망각의 세계로 진입하여 영영 지워질 뻔한 저만큼의 추억을 어떤 매개물로 인해 레테의 강가에서 간신히 붙잡았을 때, 아직도, 하며 안심하게 되는 그런 것들이 있다.  가령, 오래 전에 자주 불렀던 노래나 자주 들르던 찻집, 지금은 아무거나가 되어 관심 밖의 영역으로 간주되는 음식들, 그리고 유독 나의 기억에 착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책이나 그때 읽었던 문장들, 그 분위기들.  그리움이 있는 한 사람은 메마른 삶 속에서도 제 속의 깊은 물에 얼굴을 비춰본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나이가 된 나는. 나는 한 치 앞의 지척에 책을 펼친 채, 나의 청년과 유년을 향해 달음박질을 치고 있었다.  소리가 없으면 심심해지던 시절, 어쩌면 소리없음의 고요가 노년과 죽음의 등가물로 취급되던 그 시절에 침묵은 곧 참을 수 없는 두려움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소리많음의 청년기에 또는 유년기에 군중 속의 또 다른 고독을 끝없이 반복하다 보면 속이 텅 비어 내 가녀린 목소리에도 웅웅 울리던 항아리의 울림처럼 가슴에는 밑도 끝도 없이 허무한 설움이 몰려왔다.  그리고 나는 차츰 혼자 있는 법을 배우고, 그래도 심심하지 않은 일을 찾고, 바스락거리지 않아도 안심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곁에는 늘 봄볕에 나선 햇병아리의 삐약거림이라도 듣고 있어야만 안심이 되던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었다.

그때의 나는 번잡한 일상의 수선거림 속에서 미래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이 책을 읽었을 터였다.  고요가 머무는 언저리에서 잠시의 서성거림도 참지 못하던 시절.  그러나 시간이 지운 그 순간의 장면은 아무런 북적임도 없이, 볕이 잘 드는 창가에 홀로 앉아 묵묵히 침묵을 견디는 나를 겨냥하고 있다.  안개가 내린 시간의 이편과 저편을 비오는 날의 와이퍼가 부산하게 움직이듯 선명한 장면을 찍어낼 때까지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 읽은 책을 여러 번 뒤적였다.  책 속의 산티아고처럼 혼잣말을 하고, 반지르르 윤기가 흐르던 유년 시절의 동요를 부르며 그때의 북적거림을, 수선스러움을 화면에 담으려 졸린 눈을 깜박이며 머리를 주억거렸다.  아기 울음을 흉내내는 밤고양이의 기척에 황망히 책을 덮었다.  그 어린 시절에 나는 대양을 미끄러지듯 미래를 염원했는지도 모른다.  되려 오늘처럼, 밤고양이의 울음마저 성가신 이 밤처럼, 먼 과거를 너무도 쉽게 그리워할 것이라곤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절대 고독과의 대화

노인 산티아고는 언제부턴가 혼잣말을 한다.  오래 전부터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과의 대화.  늙는다는 것은 침묵에 길들여지는 일이다.  내가 던진 말에 누군가 대답해야 하는 어설픈 규칙에 반항하는 일이다.  그리고 죽음처럼 고요에 익숙해지는 일이다.  젊은 사람의 시선으로 읽는다면 너무나 단순한 플롯과 다소 쓸쓸함을 느낄 정도로 적은 등장인물.  그러나 그 반대였다면 노인 산티아고는 더 이상 노인이 아니다.  사랑하는 여인과도 같은 바다와 바닷새, 그를 지켜주는 태양과 별들,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그가 감당해야 할 어부로서의 삶과 수많은 바닷고기들.  노인은 이제 자신의 젊은 시절에는 존재했으나 없었던 그 모든 것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그의 앞에는 하데스의 형벌을 받는 시지프스처럼 헤아릴 길 없는 영겁의 시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시간의 연장과 닿을 수 없는 희망

망망대해에 나간 산티아고는 청새치와 싸우면서 내내 소년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평생을 어부로 살아가야 할 소년 마놀린을 걱정한다.  마침내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만능 야구선수로 명성이 높았던 디마지오를 생각한다.  산티아고는 소년을 통하여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고, 디마지오를 통하여 닿을 수 없는 희망을 꿈꿨는지도 모른다.  노인 산티아고는 침묵에 익숙해지는 자신과 스러지는 시간 앞에서 살아있음음 끝없이 확인해야 했다.  청새치와의 사투, 상어의 습격, 그리고 살을 파고 드는 낚싯줄.  산티아고는 밤바다에 피 묻은 자신의 손을 담그며  시간 앞에서 생명의 무망(無望)을, 그야말로 사는 것의 부질없음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더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그 무엇이 되어 가슴 언저리에 모래알처럼 싸르르 싸르르 흩어지는 일이다.  별것 없음이 별것 있음으로 변하는 그 경계는 시간이 지운 과거의 추억을 한순간에 붙잡는 일이다.  한 권의 책으로 인해.  어떤 정적이 밤고양이 울음으로 선잠을 깨우는 그 살그머니의 긴 밤을 지새는 일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영겁의 시간이 흐르는 망망대해에 해초처럼 일렁이던 몸짓이었다.  푸를 달빛이 그린 한 편의 시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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