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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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것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시간이 지우고 가는 온갖 자질구레의 번잡을, 고민을, 지워졌다는, 기어코 다 지워졌다는 안심의 시기에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은 그저 행복한 것, 살짝 미소짓게 하는 그런 것들만 남는다.  하마터면 망각의 세계로 진입하여 영영 지워질 뻔한 저만큼의 추억을 어떤 매개물로 인해 레테의 강가에서 간신히 붙잡았을 때, 아직도, 하며 안심하게 되는 그런 것들이 있다.  가령, 오래 전에 자주 불렀던 노래나 자주 들르던 찻집, 지금은 아무거나가 되어 관심 밖의 영역으로 간주되는 음식들, 그리고 유독 나의 기억에 착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책이나 그때 읽었던 문장들, 그 분위기들.  그리움이 있는 한 사람은 메마른 삶 속에서도 제 속의 깊은 물에 얼굴을 비춰본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나이가 된 나는. 나는 한 치 앞의 지척에 책을 펼친 채, 나의 청년과 유년을 향해 달음박질을 치고 있었다.  소리가 없으면 심심해지던 시절, 어쩌면 소리없음의 고요가 노년과 죽음의 등가물로 취급되던 그 시절에 침묵은 곧 참을 수 없는 두려움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소리많음의 청년기에 또는 유년기에 군중 속의 또 다른 고독을 끝없이 반복하다 보면 속이 텅 비어 내 가녀린 목소리에도 웅웅 울리던 항아리의 울림처럼 가슴에는 밑도 끝도 없이 허무한 설움이 몰려왔다.  그리고 나는 차츰 혼자 있는 법을 배우고, 그래도 심심하지 않은 일을 찾고, 바스락거리지 않아도 안심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곁에는 늘 봄볕에 나선 햇병아리의 삐약거림이라도 듣고 있어야만 안심이 되던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었다.

그때의 나는 번잡한 일상의 수선거림 속에서 미래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이 책을 읽었을 터였다.  고요가 머무는 언저리에서 잠시의 서성거림도 참지 못하던 시절.  그러나 시간이 지운 그 순간의 장면은 아무런 북적임도 없이, 볕이 잘 드는 창가에 홀로 앉아 묵묵히 침묵을 견디는 나를 겨냥하고 있다.  안개가 내린 시간의 이편과 저편을 비오는 날의 와이퍼가 부산하게 움직이듯 선명한 장면을 찍어낼 때까지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 읽은 책을 여러 번 뒤적였다.  책 속의 산티아고처럼 혼잣말을 하고, 반지르르 윤기가 흐르던 유년 시절의 동요를 부르며 그때의 북적거림을, 수선스러움을 화면에 담으려 졸린 눈을 깜박이며 머리를 주억거렸다.  아기 울음을 흉내내는 밤고양이의 기척에 황망히 책을 덮었다.  그 어린 시절에 나는 대양을 미끄러지듯 미래를 염원했는지도 모른다.  되려 오늘처럼, 밤고양이의 울음마저 성가신 이 밤처럼, 먼 과거를 너무도 쉽게 그리워할 것이라곤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절대 고독과의 대화

노인 산티아고는 언제부턴가 혼잣말을 한다.  오래 전부터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과의 대화.  늙는다는 것은 침묵에 길들여지는 일이다.  내가 던진 말에 누군가 대답해야 하는 어설픈 규칙에 반항하는 일이다.  그리고 죽음처럼 고요에 익숙해지는 일이다.  젊은 사람의 시선으로 읽는다면 너무나 단순한 플롯과 다소 쓸쓸함을 느낄 정도로 적은 등장인물.  그러나 그 반대였다면 노인 산티아고는 더 이상 노인이 아니다.  사랑하는 여인과도 같은 바다와 바닷새, 그를 지켜주는 태양과 별들,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그가 감당해야 할 어부로서의 삶과 수많은 바닷고기들.  노인은 이제 자신의 젊은 시절에는 존재했으나 없었던 그 모든 것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그의 앞에는 하데스의 형벌을 받는 시지프스처럼 헤아릴 길 없는 영겁의 시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시간의 연장과 닿을 수 없는 희망

망망대해에 나간 산티아고는 청새치와 싸우면서 내내 소년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평생을 어부로 살아가야 할 소년 마놀린을 걱정한다.  마침내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만능 야구선수로 명성이 높았던 디마지오를 생각한다.  산티아고는 소년을 통하여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고, 디마지오를 통하여 닿을 수 없는 희망을 꿈꿨는지도 모른다.  노인 산티아고는 침묵에 익숙해지는 자신과 스러지는 시간 앞에서 살아있음음 끝없이 확인해야 했다.  청새치와의 사투, 상어의 습격, 그리고 살을 파고 드는 낚싯줄.  산티아고는 밤바다에 피 묻은 자신의 손을 담그며  시간 앞에서 생명의 무망(無望)을, 그야말로 사는 것의 부질없음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더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그 무엇이 되어 가슴 언저리에 모래알처럼 싸르르 싸르르 흩어지는 일이다.  별것 없음이 별것 있음으로 변하는 그 경계는 시간이 지운 과거의 추억을 한순간에 붙잡는 일이다.  한 권의 책으로 인해.  어떤 정적이 밤고양이 울음으로 선잠을 깨우는 그 살그머니의 긴 밤을 지새는 일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영겁의 시간이 흐르는 망망대해에 해초처럼 일렁이던 몸짓이었다.  푸를 달빛이 그린 한 편의 시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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