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그늘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 신경숙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문학'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현실이라는 원반 위에 올려진 작은 찻잔처럼 활자어가 갖는 이질감.  붙어있으나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그 거리감을 작가는 한순간에 녹이곤 한다.  마그네틱 카드를 주머니에 넣은 채 MRI실에 들어가곤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깜박 깜박 잊게 된다는 어느 MRI 기사의 고백처럼 작가가 쓴 활자어는 나의 상념을, 익숙함을, 때론 뭉뚱그린 현실을 자석처럼 빨아들인다.  그녀의 글이 일순 현실과 활자어의 괴리를 파고들 때, 친숙함이란 단어로는 뭔가 설명이 미심쩍은 어떤 순간이 올 때, 나는 현실을 조금 밀어내고 활자어 쪽으로 한발 다가서 있음을 느낀다.

 

어제는 책을 빌리러 사무실 근처의 도서관에 들렀다.  조금 늦었다 싶은 저녁을 도서관 식당에서 해결하고는 멀뚱히 앉아 점멸하는 가로등 불빛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라흐마니노프의 2번 교향곡이 쓸쓸함을 더하는 식당에는 신학기를 맞은 학생들의 재잘거림이 밤의 고요를 깨고 있었다.  조금 안면이 있는 식당 주인이 인사를 하며 내 앞에 앉기 전까지는.  그는 잡히지 않는 주제의 여러 이야기들을 소반 위의 밀가루처럼 뿌려놓고는 도서관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던 스물아홉 살의 청년이 어제 백혈병으로 쓰러져 죽었다는 소식을 마치 지나가는 시간처럼 툭 하고 던졌다.  밤의 정적을 뚫고 스물아홉의 청년이 죽었다는 소식과, 라흐마니노프의 2번 교향곡과, 커피 한 잔의 간절함과, 무심히 지나가는 일상의 연관성을 생각했다.  모래알처럼 흩어졌던 여러 사건들이 순간이라는 응축된 한 점으로 모여 내 의식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나는 그때 정신분열 또는 시간분열을 생각했다.  각각의 사건들이 한 순간 약속이나 한 듯 어느 시점에 물방울처럼 모이는 데는 분명 그 까닭이 있을 거라고.

 

신경숙의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을 빌려 도서관을 나섰다.

미리 슬픔을 준비하지 못한 이야기들은 내 의식에 들어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 채 잠시 헤매다가 봄비 속으로 스러졌다.  시가 운영하는 도서관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던 스물아홉의 청년은, 그제까지만 해도 생기를 잃지 않았던 건장한 청년은 그를 기억하는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속절없는 슬픔만 남긴 채 연기처럼 사라졌다.  사람이 가고 없어질 때 남기곤 하는 그 부질없는 기억.  두세 쪽 또는 그보다 훨씬 못 미치는 한 줄의 기억만으로도 생생히 되새김질할 수 있을 듯한 어제를 현재에 비춰보면서 터벅터벅 집으로 향했었다. 

 

계절은 개개인의 내면생활과는 상관없이 어김없이 왔다가 머물다가 지나간다.  나라고 제외될 수는 없다.  저 덩치 큰 냉장고를 이끌고 이사를 왔든 아니든 봄이 올 것이다.  지천에 꽃이 필 것이고 향기들은 명랑히 시시덕거리며 대기를 껴안을 것이다.  삼월이면 괜한 사람도 길을 떠나고 싶어진다는데 나는 아예 살던 곳을 옮기게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이야.  피식, 웃음이 나온다.  창 밖으로 개가 한 마리 골목으로 걸어간다.  개는 곧 시야 속에서 사라진다.  시간도 저렇게 지나갈 것이다.  달라진 건 풍경일 뿐이다.  시계탑을 만들고 종을 쳐야지.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P.302)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작가의 경고.  물 먹은 스웨터처럼 밤이 늦었다.  조금 있으면 새벽이라는 바닥에 닿아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해야 할 일'들은 스웨터를 타고 올라 가물거리는 내 의식에 도달할 것이다.  작가는 어둠의 저편 어드메쯤에서 추억의 어장이라도 만난 듯, 이 밤만으로는 모자랄 듯한 이야기를 쏟아내는데 나는 벌써 신새벽을 만나고 있다.

 

작가의 고향은 정읍이라 했다.  위로는 오빠가 셋이나 되고, 여동생이 자신보다 먼저 시집을 갔고, 부부 둘만 남은 부모님은...  작고한 박경리 여사를 만났던 추억과 오정희 작가에 대한 회상.  그리고...  자꾸 멀어지려는 현실과 손을 놓아주지 않는 작가의 활자어가 실랑이를 벌이는 밤에 나는 죽은 듯이 앉아 신경숙 작가의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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