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이 좋았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지라 집에도 가지 못하고 숙소에서 머물렀다. 참 오랜만에 맞는 하루의 자유. 오전 내내 꼼짝도 하지 않고 번데기처럼 소파에 누워 꼬물거렸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때때로 내 성격에 대해 나조차도 의아할 때가 있다. 바지런을 떨 때는 뭐에 물린듯이 악착을 떨다가도 한번 느러지기 시작하면 방바닥에 벗어 놓은 빨랫감처럼 널부러지곤 한다. 그럴 땐 대책이 없다. '이러면 안 되는데'하는 생각이 장난감 비행기처럼 내 머릿속에서 몇 번인가 선회를 하고 느즈막히 한 술 뜨는 점심. 입 안이 소태를 씹은 것 같이 칼칼하다.
작년에 내가 가르쳤던 중학생 몇몇에게 전화를 했다. 손쉽게 말벗이 될 수 있는 아이들.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을까 하고 기대에 부푼, 잘 숙성된 빵반죽 같은 얼굴들이 내 방으로 굴러 들어오자 칙칙했던 공기는 금세 짜르르 윤기가 흘렀다.
여전히 볕이 좋은 오후에 아이들 세 명을 데리고 숙소 근처의 산을 올랐다.
이 길과 저 길 사이에서 만난 봄기운이 발 밑에서 폭신폭신 밟힌다. 꼭 쥐고 있던 겨울이, 그 쥠 때문에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던 봄이, 그렇게 하염없던 봄이 기어코 오고야 말았나 보다. 아이들 재잘거림과 지즐대는 묏새 소리에 산은 온통 포롱포롱 날을 듯한 봄이다. 쏟아지는 햇살 때문이었는지 까무룩 졸음이 쏟아질 것 같다. 기분 좋은 땀이 등줄기에 배이고 아이들 잰 걸음에 보조를 맞추느라 헉헉 숨이 가빴다.
도시에 있는 산은 한겨울에도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나 보다. 새봄에 오르던 소롯한 고향 산길을 기대했던 나는 짓이겨진 낙엽과 속살이 다 드러난 등산로를 보며 일순 암담해졌다. 소소리바람이 쳤다. 땀이 마르는지 오소소 소름이 돋고 아이들 재잘거림도 멀어질 즈음 깍깍 까치가 울었다.
오가는 등산객을 만날 때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는 내가 아이들 눈에는 이상했나 보다. 아는 사람이냐고 묻는다. 아니, 전혀 모르는 사람인걸, 하자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 봐, 인생에서 딱 한 번밖에는 볼 수 없는 사람과 자주 볼 수 있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더 소중할까? 하고 되물었다. 그야 한 번밖에 볼 수 없으니까 그 사람이 더 소중하죠, 한다. 그렇지? 지금 산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쩌면 내 인생에서 더는 만나지 못할지도 몰라, 그래서 소중한 인연이고. 에이, 그래도 아까 보니까 인사도 받지 않고 그냥 가는 사람도 있던데요? 한다. 그럼 그러라지,했다.
공부방을 다시 할까? 하고 물었다.
회사원으로서의 할 일과 퇴근 후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병행하던 작년의 기억이, 그 힘들었던 피로감이 내 목소리를 붙잡았다. 기어들어가는 내 목소리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아이들 귓볼에 앉았다. 정말요? 한다. 그래, 하지만 매일은 아니고 일주일에 삼 일만,했다. 봄 햇살이 산을 타고 떼구르르 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