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지만 힘껏 인생을 건너자, 하루키 월드
장석주 지음 / 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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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억이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뉜다면 의식 또한 타인에게 언제든 밝힐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눌 수 있겠다. 굳이 명명하자면 '백색 의식'과 '흑색 의식'쯤으로 말할 수 있으려나. 그것이 어떻게 이름 붙여지든 간에 '흑색 의식'은 내 기억은 또렷하지만 타인에게 밝힐 수 없거나 밝힐 필요가 없는 것들, 이를테면 타인에게 밝혔을 때 나나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실익이 없는 것들은 우리의 삶에서 생각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것은 마치 우주의 구성 물질로 추정되지만 아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른바 암흑 물질의 존재와 크게 닮아 있다. 나의 의식에서도 그러한 기억들은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불필요한 것들이니 차라리 무의식의 영역으로 자리 이동을 했으면 싶지만 그게 어디 내 뜻대로 쉽게 옮겨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란 입이 방정인 경우가 많은지라 의식의 세계에서 떠도는 기억들은 언젠가 실익도 없이 누군가에게 떠벌려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수시로 들게 마련이고.


"하루키 소설은 우리 안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 노스탤지어는 기억의 내밀한 삶에 가닿으려는 불가능한 욕망이고, 혹은 욕망이 품은 욕망의 불가능함이다. 노스탤지어는 잃어버린 것을 향한 오마주이다. 따라서 그것은 감미로운 슬픔을 동반한다. 노스탤지어는 가리키는 최종 목적지가 과거 - 미래이고, 예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장소이다. 사라진 시간과 없는 장소에 가닿으려는 불가능으로 부풀어오른 욕망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늘 좌절의 슬픔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p.54)


시인이자 장서가로 잘 알려진 장석주 작가의 책 <외롭지만 힘껏 인생을 건너자, 하루키 월드>는 꽤나 매력적이다. 물론 하루키의 책에 관심이 없거나 하루키가 쓴 어떤 소설이나 에세이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 책 역시 따분하기 짝이 없는 그런 책일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이상하게도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하루키에 대한 평은 극과 극으로 나뉜다. 하루키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종종 하루키 소설의 선정성이나 가벼움 등을 들어 공격하곤 한다. 반면에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설의 내면에 깔린 독자적인 세계, 즉 '하루키 월드'에 대해 열광한다. 양자 사이의 접점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루키의 작중인물이 보여주는 비사회성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사회에 편입되지 못한 채 혹은 편입되기를 거부하며 바깥으로 미끄러지며 익명으로 떠돈다. 그들은 메마르고 사악한 현대사회를 떠도는 익명의 표류자다. 고도자본주의 세계는 잃어버린 낙원의 대체물이다. 그것은 매혹이자 혐오의 세계다. 어느 날 예기치 않게 평범한 일상성의 바깥으로 한걸음 내딛는 그들은 이내 엄청난 수상한 사건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때 펼쳐지는 비현실적 모험의 연쇄는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회귀의 여정이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일은 바로 자아로의 회귀의 여정을 되짚어보는 일이다."  (p.131)


나는 딱히 읽고 싶은 책이 없거나 독서 권태기에 접어들 때마다 하루키의 책을 읽곤 한다. 하루키의 책이 좋은 이유는 여러 가지로 많지만 그중 하나는 아무 생각 없이 책에 빠져들 수 있다는 점이다. '레드썬' 하고 외치면 금세 최면에 빠져드는 것처럼 말이다. 장석주 시인은 '봄날 햇볕 아래서 무릎 위에 책을 올려놓고 읽으면 행복해질 작가를 꼽자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하루키를 꼽겠다.'고 한다. '하루키 소설을 맛있는 빵을 조금씩 떼어먹듯 읽었다'는 시인의 심정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도 마음만 먹는다고 뚝딱 내놓을 수 있는 게 소설이 아니다 보니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은 언제나 목을 빼고 기다리게 되는 법이다. '테드 창'이 그렇고 앤드루 포터'가 그렇다. 너무 아쉬워서 아껴가며 읽다 보면 때로는 감질이 나서 참지 못하고 후루룩 다 읽어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럼에도 다음 작품에 목이 마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소설에 맛이 있다면 하루키 소설은 봄날 햇빛의 맛이다. 그것은 상큼하고, 아릿하고, 슬프고, 허무하고, 웃음을 짓게 하는 복잡한 맛이다. 반쯤 감은 눈의 속눈썹에 엉기는 햇빛 알갱이의 찬란함! 하루키 소설의 인상은 그런 것이다. 그의 소설엔 살아 있음이 주는 기쁨과 상실로 빚어진 비애, 그리고 적당량의 멜랑콜리가 버무려져 있다. 그것은 밝되 슬프게 빛난다."  (246)


1979년에 쓴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나오는 한 구절 "모든 건 스쳐지나간다. 누구도 그걸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를 가만가만 되뇌다 보면 저 너른 벌판을 건너온 바람이 나의 빈 가슴속을 통과하여 영원의 품으로 안길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살면서 용서하지 못할 것도, 굳이 내려놓지 못할 욕심도 하루키의 책을 읽는 이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다. 사는 게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무작정 들었던 것도 하루키 소설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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껑충하게 큰 개망초의 여린 꽃대가 바람에 흔들린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듯 흔들릴 때마다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듯 서글픈 마음이 북받친다. 고향, 어머니, 소식도 없는 어릴 적 친구... 바람은 그렇게 꽃대 무성한 개망초의 군락에서 장난꾸러기 어린애처럼 한참을 머물다가 가겠노라는 인사도 없이 조용히 스러지곤 했다. 비가 예보된 하늘에는 서서히 먹구름이 몰려들고 산책을 나온 사람들은 서둘러 비를 피하려는 듯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끈적끈적한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어제보다는 한결 낮아진 기온.


조지 오웰이 쓴 <카탈로니아 찬가>를 다시 읽고 있다. 조지 오웰은 사실 소설보다는 신문기사와 논평에 더 특화된 인물인 듯 생각되지만 <동물 농장>이나 <카탈루니아 찬가>에서 보이는 그의 문학적 재능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조지 오웰을 좋아하는 독자 중에는 나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많겠지만 말이다. 둘러치든 메치든 조지 오웰의 탁월한 글솜씨가 나와 같은 사람의 평가에 의해 달라지는 건 전혀 없겠지만, 아무튼.


내가 <카탈루니아 찬가>를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유엔 국제사법재판소(ICJ)가 24일 이스라엘에 가자지구 최남단 라파 공격을 즉각 중단하라고 명령하고 가자지구에 대한 대규모 인도적 지원이 가능하도록 이집트와 통하는 라파 검문소를 개방하는 한편 현장 상황 조사를 위한 제한 없는 접근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공격은 멈추지 않고 있다. 25일 가자지구 북부 자발리야 인근의 대피소가 드론 공격을 받아 어린이를 포함해 최소 10명이 숨졌다는 CNN 방송의 보도도 있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잔인성은 히틀러를 능가하면 능가했지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국제 사회는 이스라엘에 대한 제재를 가하지 않고 있다.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겠다는 몇몇 나라가 등장했을 뿐이다. 노르웨이, 아일랜드, 스페인이 그들 국가이다.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3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학살했음에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있는 이 현실에 대해 미국의 대학생과 유럽의 시민들이 시위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의 지진? 중국의 기근? 멕시코의 혁명? 걱정 말라. 내일 아침이면 현관에 우유가 놓여 있을 것이고, 금요일에는 <뉴 스테이츠먼>이 나올 것이다. 산업 도시는 멀었다. 연기와 궁핍의 얼룩은 지구 표면의 완만한 곡선에 감추어져 있었다. 이곳은 내가 어린 시절 알던 영국 그대로였다. 철로 때문에 파헤친 곳은 야생화로 덮여 있다. 외진 풀밭에서는 윤택한 빛을 발하는 준마들이 풀을 뜯으며 생각에 잠겨 있다. 천천히 흐르는 냇가에는 버드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느릅나무의 녹색 가슴, 오두막 정원의 참제비고깔, 이윽고 런던 외곽의 드넓고 평화로운 광야, 진창 같은 강물 위의 짐배, 낯익은 거리, 크리켓 시합과 왕족의 결혼을 알리는 포스터, 크리켓 투수 모자를 쓴 남자들, 트라팔가 광장의 비둘기, 빨간 버스, 파란 제복의 경찰관. 모두가 영국의 깊고 깊은 잠을 자고 있다. 나는 때때로 우리가 폭탄의 굉음 때문에 화들짝 놀라기 전에는 결코 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카탈로니아 찬가' 중에서)


껑충하게 큰 개망초의 여린 꽃대가 여전히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견해 자체도 하나의 정치적 태도'라고 썼던 조지 오웰의 판단은 현대의 작가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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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게이하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2
윌라 캐더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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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몇 마리가 낮게 날고 있다. 먹이를 찾아 공원의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는 비둘기. 그 사이로 이제 막 걸음마를 습득한 듯한 아이가 비둘기를 쫓아 뒤뚱뒤뚱 걸음을 옮기고 있다. 잔디밭에 사뿐히 내려앉는 비둘기. 비둘기를 붙잡으려는 듯 한 손을 길게 뻗고 잔디밭으로 향하는 아이의 손을 젊은 엄마가 낚아채고 있다. 아이는 제 뜻에 반하는 엄마의 손길을 뿌리치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떼를 쓰는 일이다. 아이는 보도블록이 깔린 인도에 털썩 주저앉는다. 젊은 엄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아이를 들쳐 안는다. 흐린 하늘은 손에 잡힐 듯 낮게 드리웠고, 아이의 관심이 부담스러운 비둘기 떼는 인적이 드문 곳을 향해 가벼운 날갯짓을 한다. 비둘기의 날갯짓 때문인지 시간이 부드럽게 흐른다.


윌라 캐더의 소설 <루시 게이하트>를 읽었던 건 어젯밤, 나는 그때의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곰곰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한 사람의 이름이 소설의 제목으로 올랐을 때, 소설은 결국 비극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 이후 그 비극의 강도는 점차 약해지고 소멸하여 현대인에게 비극의 서사는 그닥 인기 있는 장르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 책을 읽어볼까' 하고 가볍게 마음먹는 단계까지도 꽤나 오랜 시일이 걸렸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책은 나의 선입견이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밀어 제친 후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단 한 번도 개입하지 못하게 했다. 책의 두께가 얇았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깊은 사유가 깃든 문장들이 소설 곳곳을 장식하여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루시는 생의 진실을 알게 되었고, 사랑은 그저 말랑말랑한 감정이 아니라 비극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카만 물처럼 인간을 집어삼키는 열정을 발견했다. 이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바깥세상이 어둡고 끔찍한 곳인 것만 같았다. 세상이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제대로 깨닫게 된 것 같았다."  (p.36)


사람은 본디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것, 이를테면 외모, 건강, 부모의 재산 등은 단지 자신의 운에 의해 취득된 것일 뿐 개인의 노력에 의한 정당한 대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다양한 혜택으로 인해 오만해지거나 타인의 노력을 무시하는 등 주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나라 모 재벌의 2세가 소위 '멸콩' 놀이를 하며 재산을 탕진하고 기업 경영을 어렵게 만들었음에도 반성은커녕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들을 향해 '너나 잘하세요. 별 미친놈 다 보겠네' 하는 말로 대응을 하지 않던가. 이 책의 주인공인 루시 역시 다르지 않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명랑하고 예쁜 외모의 루시는 여섯 살 때 엄마를 잃고 12살이나 많은 언니 폴린의 손에서 컸다. 그런 루시를 아빠는 마냥 예뻐만 했던 터라 루시는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 버릇이 남아 있었다. 생업으로 시계 수리를 하면서 동네 음악대를 지휘하고 클라리넷 교습도 하는 루시의 아버지. 고향을 떠나 시카고에서 피아노를 공부하던 루시는 성악가 서배스천의 보조 피아니스트가 된다. 그것은 어쩌면 아내가 있는 서배스천을 사랑하게 된 루시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같은 고장에서 성장한 해리 고든의 사랑을 뿌리친 것도, 사랑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와 젊은 나이에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도 결국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삶이자 운명이었다.


"열정과 맹렬함, 앞뒤 살피지 않고 하나의 충동에 자신의 온 존재를 오롯이 불태우는 성정, 바로 그것이 그가 루시에게서 발견한 경이였다. 루시는 감정의 불씨가 붙으면 불화살이 되어 끝까지 날아가는 사람이었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세월이 흐르자 그는 마음속 어둠에 익숙해졌다. 다리를 잃은 사람이 의족을 달고 살아가는 삶에 익숙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p.227)


정의롭거나 우직한 것은 아니지만 불행으로부터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니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삶을 되짚어 보면 그런 순탄한 삶의 이면에는 위험을 회피하고자 하는 본인의 성향과 자신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적당한 행운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주인공 해리 고든의 운명이 그러했다. 루시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의 결실을 맺기 위해 불행을 향해 돌진하지는 않았다. 루시가 죽고, 그녀의 언니 폴린이 죽고, 시계 수리공이자 해리의 유일한 체스 상대자였던 루시의 아버지마저 죽은 후에야 비로소 해리 자신의 삶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동경하기를 그만두고 기억하기를 시작하자 삶이 시작되었다."라는 캐더의 유명한 문장처럼 말이다. 해리는 이제 동경을 멈추고 기억하는 삶으로 접어든 것이다. 현실에서 그것은 무력한 듯 보이지만 결코 위험하지 않은, 해리와 같은 사람에게는 꽤나 어울리는 삶의 방편일지도 모른다.


"'고향'이 무엇이겠나, 결국 실망을 겪고 참아내는 법을 배우는 곳 아니겠나? 게이하트 가족이 살던 집을 떠나는 길, 그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로 잠시 보도에 멈춰 서서 지금껏 수천 번은 족히 그랬던 것처럼 세 개의 작은 발자국을 바라보았다. 달아나려는 발자국을."  (p.236)


비둘기를 쫓던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를 제지하던 젊은 엄마도 보이지 않는다. 비둘기의 날갯짓 때문인지 시간은 부드럽게 흐르고, 흐린 하늘은 여전히 정자세를 고수하고 있다. 공원에는 여전히 산책을 나온 사람들로 붐비고, 주인이 던진 공을 쫓아 강아지 한 마리가 사력을 다해 내달리고 있다. 삶에서 의미를 찾는 일은 공을 쫓아 무작정 잔디밭을 내달리는 저 강아지의 삶보다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비둘기를 잡으려던 아이는 어디로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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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타래처럼 풀리는 게 시간이라고 다들 말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잘못된 생각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어둠 속에 있는 누군가와 내가 시간의 밧줄을 사이에 두고 줄다리기를 하듯 팽팽하게 당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정신과 육체가 온전할 때, 나는 내 쪽으로 시간을 최대한 끌어당겨 오롯이 나의 삶을 살게 되지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온전하지 못할 때, 이를테면 어느 한쪽이 무너졌을 때, 그 시간 동안 도대체 내가 어찌 살았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나의 시간이 어둠 속의 존재에게 하릴없이 끌려갔거나 완전히 빼앗겼던 게 아닐까. 그렇게 나는 시간의 밧줄을 어둠 속의 누군가와 서로 밀고 당기다가 힘이 다하여 나도 모르게 툭하고 놓쳐버리거나, 시간의 밧줄이 닳고 닳아 제 수명을 다한 듯 맥없이 끊어지는 순간 나의 삶도 끝이 나는 게 아닐까.


이미 예상한 일이지만 '채상병 특검법'에 대해 대통령의 거부권이 행사되었다. 참으로 뻔뻔하기 그지없는 대통령이다. 나의 아들도 7월에 공군 입대가 예정되어 있기에 순직한 채상병의 일은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부모 된 입장에서 입대를 막을 수만 있다면 막고 싶은 심정이다. 군대에 보낸 아들이 이유도 모른 채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의 통수권자라는 자가 사병의 사망 원인을 낱낱이 밝히기는커녕 지휘자의 잘못을 덮기 위해 자신이 가진 재량권을 남용한다면 대한민국의 어떤 부모가 제 자식을 군에 보내고 싶겠는가. 부동시나 담마진 판정을 받아 군 입대를 면할 수만 있다면 뭔 짓인들 마다하겠는가.


굥교롭게도 일명 줄리 혹은 김명신이라는 자도 자신을 수사하던 수사부를 전면 교체하자마자 공식 활동에 나서고 있다. 보란 듯이 말이다. 국민들에게 어떤 해명이나 사과도 없이. 그동안 자숙했던 것만으로도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는 다 치렀다는 듯 거침이 없다. 일말의 양심도, 일체의 두려움도 없는 것은 부부가 서로를 빼다 박은 듯 닮아 있다. 유튜브에 올라온 버닝썬 사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썩었는지 실감했다. 그것도 결국 권력자와의 유착 관계에서 비롯된 도덕성 상실의 결과였다. 작금의 대통령실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권력을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용했다면 그 결말은 버닝썬 사건처럼 만천하에 드러나고야 말 것이다. 구린내를 풍기면서 말이다.


요즘 보도되는 뉴스를 보면 '세상은 겉보기와는 참 많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개통령이라고 불리던 사람도 온갖 구설에 오르내리고, 민주당의 국회의원 당선자들은 초등학교 반장 선거인 양 국회의장을 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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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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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사나 과학사를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에 대한 인류의 지배력이 가장 강하고 그로 인하여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20세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하고 묻는다면 글쎄요? 하는 물음표가 달릴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주식 격언에도 있는 것처럼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이니까요. 인류의 힘이 가파르게 상승했던 20세기를 지나쳐 온 우리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의 위기를 직접적으로 맞닥뜨릴 시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은 물론 AI와 같은 초자연적인 과학의 힘 앞에서 무력하게 퇴장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며칠, 고인이 되신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를 읽는 내내 나는 문득 지난 1세기의 의미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크고 작은 분쟁도 많았고, 지역에 따라 생존의 위기에 처한 나라도 있었지만, 지구 전체로 볼 때 우리는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안정된 시기를 보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와 같은 힘의 밑바탕에는 어쩌면 다정함이나 사랑과 같은 아날로그적 감성이 깔려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불쑥 들었던 것입니다.


"다만 깊이 사랑하는 모자 모녀끼리의 눈치로, 어느 날 내가 문득 길에서 어느 여인이 안고 가는 들국화 비슷한 홑겹의 가련한 보랏빛 국화를 속으로 몹시 탐내다가 집으로 돌아와 본즉 바로 내 딸이 엄마를 드리고파 샀다면서 똑같은 꽃을 내 방에 꽂아 놓고 나를 기다려 주었듯이 그런 신비한 소망의 닮음, 소망의 냄새 맡기로 내 애들이 그렇게 자라주기를 바랄 뿐이다."  (P.381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중에서)

그렇습니다. 20세기를 주로 살았던, 말하자면 20세기 토박이 작가인 박완서는 그녀가 썼던 어떤 글에서도 어머니 손길과 같은 다정함이 묻어나곤 합니다. 어쩌면 작가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주된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따뜻함의 온도를 가장 섬세하게 포착한 작가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화려한 수사나 기발한 표현이 눈에 띄지는 않지만 시대의 정서를 잘 포착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기 작가가 갖추어야 할 최대의 덕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까닭에 작가는 불혹이라는 늦은 나이에 등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판단이 비단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닐 테지요.

"나는 용감하게 인도에서 차도로 뛰어내리며 그를 향해 열렬한 박수를 보내며 환성을 질렀다. 나는 그가 주저앉는 걸 봄으로써 내가 주저앉고 말 듯한 어떤 미신적인 연대감마저 느끼며 실로 열렬하고도 우렁찬 환영을 했다. 내 고독한 환호에 딴 사람들도 합세를 해 주었다. 푸른 마라토너 뒤에도 또 그 뒤에도 주자는 잇따랐다. 꼴찌 주자까지를 그렇게 열렬하게 성원하고 나니 손바닥이 붉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P.172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중에서)

박완서 작가의 애독자 중 한 사람으로서 작가의 삶을 비교적 길게 지켜보았던 나로서는 그녀의 글을 예사로 읽기 어려울 때가 많았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일찍 떠나보내고 하나뿐인 아들마저 허망하게 잃었던 작가가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보였던 절절했던 심정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천주교 신자인 작가가 '온종일 신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 번 고쳐 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 내 살의를 위해서라도 당신은 있어야 해.'라고 썼던 당시의 피폐했던 삶과 끝내 그것을 극복하고 '이 세상을 다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썼던 작가의 고백을 나는 마치 내가 겪은 일인 양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작가의 글에는 언제나 사랑이 넘쳤습니다.

"궁극적으로 작가는 사랑이 있는 시대, 사랑이 있는 정치, 사랑이 있는 역사를 꿈꾸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고로 우리는 사랑이 있는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어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 역사에 사랑이 개입해 본 적이 있나요. 우리 정치사에 사랑이 있어본 적이 있나요?"  (P.158)


21세기를 갓 시작한 우리는 정말 주변의 사랑을 모두 잃은 채 엄혹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뭐니 뭐니 해도 정치권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 시대의 작가들 중 많은 이들이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사랑을 잃고 극단적인 편가름과 서로에 대한 증오만 키우는 게 작금의 현실입니다. 국민을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그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 대 '자유주의 세력과 동료 시민'으로 양분하여 내 편이 아닌 자는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학계나 예술계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박완서 작가는 어쩌면 사랑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스스로를 사랑의 장으로 이끌었던 21세기의 마지막 작가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는 순간,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오직 증오와 파멸뿐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서막은 그렇게 열리고 있습니다. 사랑은 이제 현실이 아닌 교과서에서나 배울 수 있을 듯합니다. 단지 한 권의 책을 통하여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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