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눈
딘 쿤츠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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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언제나 소설보다 더 잔인하다. 그것은 상상과 체험의 차이에서 비롯될 수도 있고, 디테일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 게다가 현실은 소설보다 더 공포스러우며 견디기 힘든 공간이기도 하다. 현실을 주관하는 신은 감정이 없는 반면 소설을 쓰는 인간은 다분히 감정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예컨대 자신이 상상하는 소설 속 한 장면을 글로 표현할 때, '이 정도면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 혹은 '이것보다 더 나아가면 과장된 거 아닐까?' 하면서 스스로 판단하고 뒤로 한 발 물러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인간의 가치판단이나 도덕적 양심, 혹은 신의 자비와는 무관하게 진행되곤 한다. 인간은 마지막 순간에선 대개 뒤로 한 발 물러서는 게 일반적이지만 신은 어떠한 순간에서도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쁨이나 행복, 또는 행운과 같은 긍정적인 장면은 현실보다 소설이 더 리얼하고 과장되게 마련이다. 현실에서 인간은 행복한 순간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으며 행복하다고 느끼는 찰나적인 그 순간은 너무나 빨리 흐르는 까닭에 현실에서 우리는 그 순간을 미처 감지할 수 없을뿐더러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행복했던 그 순간을 흐릿하게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행복은 언제나 과거형이다. 그러므로 소설 속에서의 행복은 마치 우리의 바람을 모두 옮겨 놓은 듯 길고 과장되게 마련이며 소설을 읽는 독자들을 유혹하면서 현실로 되돌리는 순간을 한없이 늦추곤 한다.

 

"그는 살인을 즐겼다. 세상에서는 비록 가면을 쓰고 다녀야 할지라도 스스로까지 속일 마음은 없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왜인지 설명할 수 없는 모종의 이유로 그는 죽음에 무척 매료됐다. 죽음의 형태와 본질과 가능성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연구하고 이론을 세우는 데 흠뻑 빠진 그는 자신을 죽음의 전령이자 신의 부름을 받은 사형집행자라고 여겼다. 살인은 많은 면에서 섹스보다 더 짜릿했다." (p.354)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딘 쿤츠의 초기작인 <어둠의 눈>은 외아들 대니를 사고로 잃고 힘들어하는 크리스티나 에번스(티나)가 겪은 4일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들이 죽은 지 1년이 넘었지만 길거리에서 아들 또래의 남자아이만 보아도 대니의 얼굴이 겹쳐 보이고, 시도 때도 없이 대니를 떠올리게 되고, 대니가 살아 있는 꿈을 수시로 꾸곤 했다. 1230일 화요일 새벽에도 다르지 않았다. 대니를 낳고도 쇼 댄서로 전전했던 티나는 5년 전 안무가로 전환했다. 그리고 대니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만 달러 예산의 쇼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새로운 쇼의 이름은 <매직!>. 그해 1230일은 <매직!>VIP 시사회가 열리는 날이기도 했다. 아들 대니가 살아 있는 심란한 꿈을 꾸던 티나는 집 안에서 나는 정체불명의 큰 소리에 잠이 깨고 만다. 그것은 어쩌면 아들을 잃은 상실감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가던 요즘 <매직!>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걱정하느라 불안감이 커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매직!>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티나가 아들 대니의 방에서 겪었던 이상한 경험은 청소를 도와주는 비비언에게도 이어진다. 멀쩡하던 옷장의 문이 열렸다 닫히는가 하면 손도 대지 않은 장난감이 스스로 움직이고 기온이 떨어진 방은 성에가 끼기도 한다. 그리고 대니의 방 칠판에 누군가 써 놓은 '죽지 않았어!'라는 글씨. 티나는 그것이 이혼한 전 남편 마이클의 짓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집안 전체의 자물쇠를 모두 바꾼 후에도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고 공포에 휩싸인 티나를 돕기 위해 <매직!> 시사회장에서 만났던 엘리엇이 나타난다. 사실 스카우트 캠프를 떠났던 대니는 캠프 버스가 전복되는 바람에 버스에 탔던 전원이 사망하는 참변을 겪게 되었고,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시신의 훼손이 심했던 대니는 시신 확인 절차도 없이 묻히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티나와 마이클은 아들의 사망 원이도 제대로 모른 채 아들의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대니의 방에서 발생한 이상한 일을 겪은 후 티나는 무덤을 열어 대니의 죽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나 변호사인 엘리엇을 향한 누군가의 협박이 이어지고, 대니에게 있었던 죽음의 진실을 찾기 위한 티나와 엘리엇의 분투가 이어지는데...

 

"점차 좁아지는 지역 고속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차를 몰자 위풍당당한 숲이 그들에게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티나는 그 압도감에 경외심을 느끼는 동시에 불안했다. 이 깊은 산속에 대니와 다른 스카우트 단원들의 죽음에 얽힌 비밀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저 신비하고 불안할 정도로 원시적인 숲은 경외감과 두려움을 자아냈으리라." (p.383)

 

아들 대니를 향한 티나의 헌신적인 사랑과 소시민의 희생쯤이야 눈을 질끈 감고 전개되는 정부의 비밀 프로젝트,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의와 이에 맞서는 소시민의 용기, 그리고 남녀 간의 진실한 사랑 등 어쩌면 한 편의 영화에나 담길 듯한 여러 요소들이 한 권의 소설에 절묘하게 버무려진 이 소설은 작위적인 느낌마저 진하게 풍긴다는 평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들의 사고가 죽음으로 은폐되었던 어두운 진실이 하나 둘 밝혀지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인간의 사랑과 용기 그리고 불의에 숨겨진 인간의 추악한 단면들. 소설은 늘 그렇듯 선과 악의 구도 속에 감춰졌던 진실은 언젠가 꼭 밝혀지고야 만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그 비슷비슷한 이야기들에 우리가 계속하여 빠져들고 몰입하는 까닭은 아마도 우리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선과 악의 대립을 끝없이 성찰하고 다스리려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내면의 탐욕을 세세히 알지 못하는 게 현실, 현실은 언제나 소설보다 더 잔인하고 공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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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가볍게 넘을 수 없는 힘든 고비 몇 개쯤은 겪게 마련이지만 하나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이번 위기만 무사히 넘기면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 말하자면 지금 겪고 있는 이 위기가 인생 전체에서 가장 큰 위기일 것만 같은, 앞으로도 없고 이전에도 없었던 절체절명의 위기쯤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위기는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고 그때마다 우리는 '이번 위기만 무사히 넘길 수 있다면' 하면서 그 순간을 이겨나가게 될 것이다. 습관처럼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나쳐 온 위기는 상대적으로 아주 작게 느껴지거나 그 시절이 몹시도 그립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코로나19 위기가 해외에서는 여전히 심각한 수준이지만 국내에서는 바야흐로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불안불안하다. 지금보다 더욱 심각한 코로나19의 확산이 재발한다고 하더라도 하등 이상할 게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라는 폭탄을 각자의 손에 쥔 채 불안한 평화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맥스 포터의 소설 <슬픔은 날개 달린 것>을 읽었다. 160여 페이지의 비교적 얇은 이 소설은 하나의 산문시와 같은 생소하면서도 난해한 형식의 작품이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하나의 느낌이 오롯이 남는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물론 읽는 이에 따라 각자 다른 경험을 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하나의 관념으로서의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는 건 멍청한 사람들이나 하는 생각이다. 지각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슬픔이 장기 프로젝트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서두르길 거부한다. 우리가 떠안은 이 고통은 그 속도를 늦추거나 올리거나 바로잡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p.144)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세계적인 대유행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누군가의 엄마였거나, 아빠였거나, 아들이었거나, 딸이었고, 며느리 혹은 사위였을, 혹은 누군가의 할아버지나 할머니였을 그 많은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전염'이라는 강력한 위협에 몸을 웅크린 채 제대로 된 작별 의식도, 슬픔이라는 장기 프로젝트에 대한 제대로 된 애도의 계획도 없이 우리는 그 모든 걸 '다음'으로만 미루고 있다. 달력 한 장을 넘기면 달력 상단에 5월이나 6월이 아닌 '다음'이라는 달이 등장할 것만 같은 작금의 시간 앞에서 우리는 치밀어 오르는 '슬픔'마저 유보해야 한다. 4월이 가면 '다음'이라는 막연한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동체의 불안을 우리는 그저 봄바람에 마음을 씻는 것처럼 요 며칠 거세게 불었던 봄바람에 기대고 있는 건 아닐까. 코로나19의 시간도 그렇게 훌쩍 지나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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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4-24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 님의 잘 정리된 글을 읽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꼼쥐 2020-04-27 17:39   좋아요 0 | URL
칭찬 댓글에 저 역시 기분이 좋아집니다. 감사합니다.^^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1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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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글을 쓴 지 꽤나 오래되었다. 책을 읽고 간단한 소회를 남기는 게 주목적이었으나 때로는 넋두리나 한탄에 가까운 글을 남기기도 하였고, 언론에 떠도는 온갖 잡다한 소식들에 대한 편향적인 찬사나 울분을 표하기도 하였고, 불현듯 떠오르는 추억이나 세상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그야말로 무익한 생각들을 두서도 없이 늘어놓은 적도 있다. 한마디로 글을 쓴 당사자인 나조차도 두 번 다시 읽지 않을 듯한 잡글들의 나열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 전보다는 글을 쓰는 횟수도, 쓰고자 하는 열정도 많이 줄어든 게 사실이지만 아무튼 나는 지금도 글을 쓰고는 있다. 그렇다면 왜? 어떤 목적으로 글을 쓰는가에 대한 질문을 아니할 수 없다. 그에 대한 마땅한 대답은 여전히 안갯속이지만 말이다.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 중 그 첫 번째인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는 여성학 연구자인 저자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끝없이 고민했던 흔적을 책으로 엮은 것으로 보인다. 글쓰기가 주업이 아닌 나와 같은 일반인은 '나는 왜 쓰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 수는 있으나 내 앞에 놓인 다급하고 산적한 일들을 처리하다 보면 그와 같은 질문은 그저 뜬구름처럼 여겨지기 일쑤이고, 그런 까닭에 몇 날 며칠을 두고 곰곰이 생각하는 경우는 숫제 없지 싶은 것이다.

 

"나는 글쓰기의 '세 요소'가 정삼각형 같은 형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상호보완적이거나 대립하지 않는다. 핵심은 윤리다. 소재에 대한 태도와 글쓰기 방식이 정치적 입장과 미학을 결정한다. 탈식민주의와 페미니즘 사상의 핵심은 재현의 윤리이다." (p.15)

 

소위 글쓰기의 '3대 요소'라고 하는 정치학(입장), 윤리학(방법), 미학(문장)에서 저자는 글쓰기의 윤리학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글을 쓰는 이의 자세와 맞닿아 있다. 자신이 '나쁜'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글을 쓰는 과정이 자신의 세계관, 인간관을 찾아가는 과정일 수밖에 없고, 글쓰기는 곧 자신을 끝없이 성찰하는 검열 과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글쓰기가 일종의 취미이자 유희인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도 글쓰기의 윤리는 다른 무엇보다 앞서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나는 대답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한 인간의 됨됨이는 윤리라는 보편적 논쟁 앞에서 언제나 자의적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로 간의 소통이 sns를 통한 문자의 영역으로 전환된 요즘, 글쓰기는 몇몇 특정인의 영역으로 국한되었던 과거와는 다르게 좋든 싫든 모든 이에게 강요되는 대중의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그 과정에서 글쓰기는 떠오르는 생각을 바로바로 문자화하는 이른바 '문자화 된 말'로서의 기능으로 전환되었다. 글을 쓰는 자신도 오타로 인한 웃지 못할 상황에 직면하기도 하고, 잘못된 문장 구성으로 생각지도 못한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글쓰기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소통 수단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의 글쓰기가 음성언어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만 끝없이 속도를 추구하다 보니 빠른 글쓰기의 부작용이 속속 드러나기도 하고, 과거 글쓰기의 장점이었던 깊이 있는 사고는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1'윤리학과 정치학은 글쓰기의 핵심이다', 2'당사자의 글쓰기는 혁명의 꽃이다', 3'글쓰기의 두려움과 부끄러움'의 총 3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가 읽었던 책을 중심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김형경의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를 필두로 제러미 리프킨의 <생명권 정치학>, 유시민의 <표현의 기술>, 기형도의 <기형도 산문집>, 켄트 너번의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 마사 너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크리스토퍼 레인의 <만들어진 우울증>, 일연의 <삼국유사> 등 이 책에 등장하는 책들은 주제와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하게 인용되고 있다. 책을 읽다가 문득 눈에 띄었던 <기형도 산문집>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희망을 부숴야 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여행기는 "희망에 지칠 때까지 지치고 지쳐서 돌아오리라"였다. 흔히 회자되는 루쉰의 말도 희망에 대한 긍정이 아니다. "땅 위에 길이 없는 것"처럼 원래 희망도 없다는 얘기다. 많은 사람이 걸어 다니면 길이 만들어진다는 실행의 고단함을 강조한 말이다. 희망은 삶에 대한 특정한 사고방식을 집약한다. 미래 지향, 긍정, 바람사람들은 이 말을 편애한다. 희망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표현 그대로 생각하면 절망(切望)이 희망적이다. 절망은 바라는 것을 끊은 상태, 희망은 뭔가 바라는 상태. 어느 쪽이 더 '희망적'인가?" (p.93)

 

나는 예전의 어느 글에서 '희망''생명이 유한한 자의 조급함'이라고 쓴 적이 있다. 용어에 대한 정의는 다분히 주관적이고 자의적이지만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영원히 산다고 믿는다면 '희망'은 존재할 수 없는 단어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희망이란 말 그대로 욕망에 대한 그리움 아닌가.'라고 썼던 기형도 시인의 정의와 '시는 어쨌든 욕망이었다.'는 그의 고백은 29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았던 시인의 입장에서 충분히 표현 가능한 정의이자 고백이었을 터, 삶은 이렇게도 다채롭다는 걸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읽었던 책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나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은 밀린 숙제처럼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무한반복의 질문지가 아니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길을 걷고 있거나, 누군가를 기다리며 카페 유리창 너머의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면서, 어느 시인의 산문집에서 읽었던 모호한 의미의 문장을 떠올리면서 나는 문득 '나는 왜 쓰는가?' 하고 생각할 뿐이다. 내 글을 읽는 누군가가 그 시간 동안 행복했었다는 고백을 댓글에 쓸 거라는 기대는 애시당초 없었지만 내 글로 인해 생각할 거리를 얻었다거나 내 글로 인해 어떤 주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고백은 듣고 싶기도 하다. 비가 내리는 초저녁의 바깥 풍경을 보면서 오히려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처럼, 그렇게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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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는 끝났지만 선거 결과에 대한 분석 및 뒷얘기로 가는 곳마다 비슷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코로나 정국에서 치러진 유례가 없는 선거였던 탓인지 후보자 개개인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고 당과 이념에 대한 이야기만 난무하는 무미건조한 대화이기도 했다. 대화 중간에 간간이 막말 인사로 지목되어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던 몇몇 의원들의 낙선과 여전한 지역 쏠림 현상에 대한 이야기가 안주처럼 등장하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작금의 결과에 놀라워하면서도 선거가 치러지기 훨씬 전부터 이런 결과를 예측했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그 어느 때보다 후보자 개인의 정보에 대해 무관심했던 깜깜이 선거로 치러지다 보니 선거가 끝난 후에도 지역 후보자에 대한 언급은 더 이상 없었고, 그럴 만하다고 다들 느끼는 분위기였다.

 

같은 결과이지만 더불어 민주당의 압승 원인을 분석하기보다는 경상도를 중심으로 하는 일개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미래 통합당의 참패 원인에 대한 분석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대개는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시사평론가들의 분석을 종합하여 전달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내가 옳다, 아니다 내가 옳다 하면서 이러쿵저러쿵 의견이 분분했다.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선거 전문가의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나라고 해서 미통당의 참패 원인에 대해 궁금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렇다고 선거 전문가들의 의견을 신뢰하지도, 그들의 분석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본 건 아니지만 미통당 지도부나 후보들이 세계사의 흐름이나 변화를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음은 물론 그것에 대해 완전히 귀를 막고 있었다는 게 내가 내린 나름대로의 결론이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민주주의가 보편화된 작금의 세계에서 빨갱이 운운하는 반공 이데올로기는 이미 구시대의 유물로 변한 지 오래되었고, 그와 같은 변화는 이제 남북 대치 상황인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에 기반한 서구 민주주의가 코로나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전혀 유용한 제도가 될 수 없음을 실제적으로 입증했다는 사실이다.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와 같은 개개인을 국가가 통제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에는 서구 민주주의 제도가 한계를 드러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일당 독재에 가까운, 일본과 같은 전체주의적 민주주의 제도 역시 정치인들의 과오를 숨기기에만 급급할 뿐 위기를 적절히 관리하고 해결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한 공산 체제가 바람직한가?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위기 시 일사불란하고 빠른 대처는 주목할 만하지만 정보를 낱낱이 공개함으로써 정부의 잘잘못을 국민들로부터 듣고 시정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부족하다.

 

전 세계가 우리나라의 코로나 대응 방식과 관리를 앞다투어 보도하고 칭찬하는 데는 두 가지가 전제되는 듯하다. 정보의 투명성과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이 그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른 측면이 있다. 국가 제도를 운용하는 현 정부도 열심히 잘하고는 있으나 그 저변에는 국민들의 성숙한 시민의식이 한몫하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평상시에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존중되지만 국가적 위기 시에는 공동체적 민주주의 또는 자기희생적 민주주의-또는 호혜평등적 민주주의-로 전환된다는 점이다. 이는 나로 인해 타인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음을 자각하고,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스스로 희생하고 배려함을 의미한다.

 

결국 세계사의 관점에서 코로나19에 대한 각국의 대응을 보면서 세계인은 과연 어떤 제도, 어떤 이념이 자신들에게 가장 적합한가를 묻게 되었다는 것이다. 좌와 우로 구분되던 서구적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고, 대한민국과 같은 공동체적 민주주의를 지지하느냐 아니면 일본과 같은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를 지지하느냐, 아니면 중국과 같은 독재적 이념이나 제도를 지지하느냐의 문제로 진화했다는 점이다. 미통당의 지도부와 구성원들은 오래전에 막을 내린 좌와 우의 구분, 개인의 욕망을 부추기고 자유주의만 강조하는 케케묵은 이념체계에서 단 한 발도 벗어나지 못했던 게 최대의 패착이었던 셈이다. 그 결과 경상도와 서울의 강남을 지역기반으로 하는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봐야 한다. 세계의 이념지도는 이제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미통당의 지도부도 인정해야만 하는 시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선거도 자신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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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 2020-04-18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탁견입니다. 어렴풋하게 인식의 언저리에 떠돌던 국내 정치 상황 · 기류 · 지형의 실체를 정말 명료하고도 핵심적으로 정리해주셨네요. 비로소 독자의 하나인 저한테도 뚜렷한 윤곽이 잡힌 듯한 느낌입니다. 특히 ① 세계사의 흐름/변화에 대한 미통당 지도부와 후보들의 인식 부재가 미통당의 참패를 불러왔다는 점, ②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기반한 서구 민주주의가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병과 같은 전방위적 위기 상황에서는 결정적 한계를 노출한다는 점, ③ 우리나라 정부의 정보 투명성 유지와 (국민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적극적 노력(이 울나라가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병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점), ④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공동체적 민주주의 또는 자기희생적 민주주의 또는 호혜평등적 민주주의로 파악하신 점, ⑤ 일본의 정치 체제를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로 파악하신 점, 등등은 정말 날카로운 통찰이고 핵심적 요점을 정확하게 검출해낸 혜안이라고 봅니다. 저를 비롯해 많은 독자들이 비슷비슷한 생각을 어렴풋하게 단지 느끼고만 있을 터인데요. 꼼쥐 선생님의 명쾌한 파악/정리와 핵심적 요점 제시 덕분에 명철한 인식의 단계로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고/있겠다고 생각되네요. 정말 탁월한 혜안에 감탄하며 선명하고도 구체적인 인식을 전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꼼쥐 2020-04-19 19:10   좋아요 0 | URL
제가 오히려 감사를 드려야 할 듯합니다. 중구난방으로 쓴 제 글을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셔서 저 또한 감탄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
 
동생이 안락사를 택했습니다 - 가장 먼저 법적으로 안락사를 허용한 나라 네덜란드에서 전하는 완성된 삶에 관하여
마르셀 랑어데이크 지음, 유동익 옮김 / 꾸리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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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별거 아닌 문장에도 가슴이 녹아내리는 듯한 절절한 느낌이 들곤 한다. 글을 잘 쓰고 못 쓰고의 차이에서 오는 게 아니라 책을 통한 저자의 진심이 고스란히 전달되느냐 아니냐의 차이에서 오는 듯싶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생각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간절함이나 반드시 그럴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절실함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한 자 한 자 정성을 담아 써 내려간 어느 시골 할머니의 시구가 읽는 이의 가슴을 적시는 것처럼 말이다.

 

최근에 읽었던 책 중에 그런 책이 한 권 있었다. 네덜란드의 저널리스트인 마르셀 랑어데이크가 쓴 <동생이 안락사를 택했습니다>가 그것이다. 사업가로 성공하여 사우나를 갖춘 고급 주택에 고급 차를 소유하였던 동생 마르크는 남들이 보기에 어쩌면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책에서 저자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던 동생 마르크 랑어데이크가 결국 자신의 삶을 포기한 채 안락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동생의 일기와 형인 저자의 서술을 통해 더듬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죽기 하루 전날 밤에 무엇을 할까? 아마도 책을 읽거나 시시껄렁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하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빠르게 달리기를 하거나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갈 것이다. 운이 좋으면 벌거벗은 여자 셋-혹은 남자 셋-과 샴페인이 가득 채워진 욕조에 누워 있을 것이다. 어쩌면 다른 취미를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것에 대하여 고심하거나 생각에 잠길 문제는 아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모르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p.125)

 

젊다면 젊은 나이인 41세에 죽음을 선택한 마르크. 어려서부터 소심하고 남들과 어울리는 걸 그닥 좋아하지 않았던 마르크가 불안장애와 우울증, 공감능력 결핍, 자기애성 성격장애와 같은 정신병을 해결하기 위해 술에 의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삶은 오직 술에 의해 조종되었거나 적어도 술로 인해 파괴되어 갔다. 혼자 육아를 도맡다시피 했던 아내가 그의 곁을 떠났고, 부모형제에게 거짓말을 일삼고 이따금 발작을 일으키는 등 주변의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삶이 x 같다는 것, 그러다 결국엔 죽을 거라는 말이 옳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우리가 어깨에 짊어져야 할 짐에 관해서 그가 옳았다는 말이다. 내 동생이었지만 마지막 몇 년 동안 그는 짐이기도 했다. 짐이라고 쓰면서 짐처럼 바라보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그렇게 하면 부모님과 여동생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는 짐이었다." (p222~p.223)

 

마르크가 세상을 떠나던 날 부모님은 그의 목욕을 도왔고, 저자인 마르셀은 동생과 함께 담배를 피웠다. 그가 죽어 가는 중에는 함께 기도하고, 함께 울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는 건 알지만 그 죽음이 나나 사랑하는 가족에게 다가왔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자연사도 그럴진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죽음은 또 어떠랴. 남겨진 사람들은 떠나보낸 가족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애도와 부채감으로 인해 남은 삶이 결코 평온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인내하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우리는 언제나 그 중간의 어정쩡한 위치에서 결론을 보류한 채 함구할 수밖에 없다.

 

"그가 죽고 나서 시가이 지날수록 그의 죽음이 더 비통하게 느껴진다. 나는 왜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했을까? 동생을 알기 위해, 껍질을 깨고 나오게 하기 위해, 왜 좀 더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했더라도 그를 살려내지는 못했을 거라는 확신을 확실하게 갖고 잇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 특히 이곳 스테인베이크에서 홀로 생각에 잠겨 우리의 어린 시절을 관통하여 달려갈 때면 더욱 괴롭다." (p.204)

 

법적으로 가장 먼저 안락사를 허용한 나라 네덜란드. 사실을 전하는 저널리스트로서 동생인 마르크가 선택한 안락사를 객관적으로 쫓아가고 있는 이 책은 죽음의 방식이나 안락사에 대한 찬반 논쟁보다는 오히려 과연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치료 불가능한 육체적인 질병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질병 역시 감당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쩌면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더 심한 좌절감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단지 육체적으로 죽어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안락사를 선택한 당사자와 가족들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삶이 완전히 파괴된 사람에게 남겨진 삶을 끝까지 살아내라고 강요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는 게 아닐까. 죽음을 권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동생의 안타까운 죽음을 하릴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마르셀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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