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 - 절대 외면할 수 없는 권리를 찾기 위한 안내서
김지윤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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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총선이 끝나자마자 모든 언론들은 제각각 그 결과에 대한 다양한 분석들을 쏟아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180석에 육박하는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직후에 있었던 총선에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152석을 확보함으로써 겨우 과반을 넘겼던 걸 생각하면 180석은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수준의 놀라운 결과였다. 이를 두고 한 신문은 대한민국 유권자의 이념 지형이 보수에서 진보로 변화했다는 분석 기사를 실었다. '노동운동 및 민주화운동 세력으로 인식되던 진보가 산업화시대를 대표하던 보수세력을 밀어내고 우리 사회 주류로 등극하는 서막이 올랐다'고도 썼다. 과연 그럴까? 해방 이후 70여 년 동안 쇠심줄처럼 변하지 않던 이념 성향이 하루아침에 어떻게 그토록 쉽게 변할 수 있었을까? 국민 개개인의 이념이 손바닥을 뒤집듯 그렇게나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이었던가.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김지윤 박사의 저서 <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알에이치코리아, 2020)>를 읽게 된 것도 그와 같은 그와 같은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저자가 아산정책연구원 여론분석센터 센터장으로 활동하면서 다년간 한국 사회의 이슈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대한민국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들이 이 책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에서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불균형을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고 각자가 자신의 권리에 대한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모든 이들이 '주류'라는 안전망을 좇지만, 사실 우리는 대체로 '비주류'이다. 나는 남이 믿거나 말거나 '비주류'라고 말한다. 잘난 것보다 못난 것이 많은 인간이었기에, 비주류 속에서 편안함과 안온함을 느낀다. 어쩌면 나는 이 책을 통해 나의 '비주류'로서의 정체성을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많은 비주류들과의 교류와 공감을 통해, 코끼리에게 다가갈 수 있는 용기를 얻길 원한다." (p.10 '프롤로그' 중에서)

 

1장 '여성의 권리는 곧 인권이다', 2장 '나는 약자인가, 강자인가?', 3장 '공동체는 단수인가, 복수인가', 4장 '계급이 쏘아올린 빈곤 곡선'의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의 주장은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다. 여성, 장애인, 성 소수자 등 우리 사회의 약자로 분류되는 그들의 삶을 조망하고 점점 더 옅어지는 공동체의 보호막과 확대되는 빈부 격차의 추세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어떤 세상을 꿈꾸어야 하는가? 에 대한 저자 자신의 주관적 견해와 비관적 전망,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공동의 선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는 믿음이 책에 담겨 있다.

 

"강한 민족주의가 만든 가장 큰 부작용은 배타성이다. 민족이라는 내 집단 속의 사람들과 끈끈한 애착 관계를 맺고 있다면, 외부인에 대해서는 그만큼 배타적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강한 '우리'의 관계는 악의적인 '그들'이 있어야 정당성을 가지고 더욱 공공해진다. 특히, '그들'이 '우리'에 비해 열등하거나 비열하거나 정의롭지 못하면 '우리'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단순한 관계망에서 선한 당위성을 가진 집단으로 승화된다. 선한 당위성이 강해지면 내가 속한 '우리'는 정의로워진다. '우리' 집단의 존재 가치는 더욱 올라가게 마련이고, 집단 공동체의 자긍심은 절대적인 것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 절대적인 존재를 지키기 위해 목숨도 지푸라기처럼 버릴 수 있게 된다." (p.179)

 

책에서는 크게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 사회의 불균형을 조장하고, 대대손손 그러한 불균형을 세습하며, 불균형의 정도를 확대 재생산하도록 유도했던 세력이 바로 언론이다.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언론이 제 역할을 떠나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기득권 세력의 불법을 옹호하고 감싸줌으로써 기득권 세력에 대한 비판을 앞장서서 막아주는 역할에 열과 성을 다해왔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들 역시 정치권의 비호 속에서 승승장구했던 것은 물론이다. 여론을 주도하는 몇몇 거대 언론의 꼭두각시놀음에 국민들마저 놀아나지 않았나 싶은 것이다. 그러나 언론의 지형이 바뀌고 정보의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우리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유권자의 이념 지형이 바뀐 게 아니라 조작에 가까운 언론사의 농간에서 우리 국민이 빠르게 벗어나고 있음을 4·15 총선의 결과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고가 나면 취약 계층의 사람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고 감염병은 여전히 이들을 가장 악랄하게 공격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히 존재하는 이 법칙을 외면하지 않고 공격의 총체적 영향력을 줄이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바이러스는 누구나 차별 없이 공격한다며 세상에 뭐 하나쯤은 공평하다는 말을 하고, 그러니까 다 함께 노력해서 극복하자는 정신 승리는 이제 그만 할 때가 되지 않았나?" (p.258 '에필로그' 중에서)

 

코로나 정국을 겪으면서 우리는 국가의 리더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느냐에 따라 국민의 안위가 달라짐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지만 40년 전 그날의 광주 시민들이 겪었던 참혹했던 경험을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후에 그저 언론으로만 접했던 나는 동시대를 살았던 한 사람으로서 가슴 한켠에는 언제나 광주 시민들에 대한 커다란 부채의식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어제 있었던 5·18 기념식장에서 연설을 하던 대통령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우리가 시급히 회복해야 할 것은 어쩌면 아주 단순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공동체의 연대와 약자에 대한 배려, 그리고 부당한 권력에 대한 부단한 저항.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하루 지난 오늘, 나는 마음속으로 가만가만 되뇌어 본다. '희생을 보고 외면하지 않는 용기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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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진정되는가 싶던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다시 확산세에 있는 분위기이다. 그래서인지 뉴스를 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착잡하다기보다 화가 나거나 괜한 짜증이 나는 듯했다. 그동안 국민 모두가 극도로 신경써왔던 개인위생이나 모임 자제, 여행이나 불필요한 외출의 자제 등 개인이 누려야 할 사적인 자유를 기꺼이 반납한 채 숨죽이며 지내왔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어서 일종의 배신감이나 허탈감마저 느껴졌던 탓이리라. 자제해왔던 비난의 화살이 클럽을 방문했던 젊은 사람들과 확진자들에게 쏟아지는 걸 보면서 일견 그럴 만하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들도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싶어서 그랬던 것도 아닌데 그런 비난은 너무 과도하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물론 이런 비상시국에 조금 더 참을 것이지 생활 방역으로 전환하자마자 유흥을 즐기기 위해 나섰던 그들의 잘못이 없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몇 달째 지속되면서 일상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매일 반복되는 구질구질한 일상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는 것이다. 지겹고 흔해빠진 일상을 반복하면서 별일 없이 산다는 건 차라리 축복이다. 생각해 보니 이러한 일상을 그림으로 그린 예술가가 있었다. 프랑스 출신의 화가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식사 전의 기도>, <시장에서 돌아옴>, <카드로 만든 집> 등 가정생활과 인물을 다룬 샤르댕의 그림은 정물화에서처럼 소박하고 평범하게 보통 사람들을 묘사하여 시간을 초월한 인간의 평범한 모습을 담아냈다는 평을 받는다.

 

"컵과 양파와 커피포트와 한 송이 꽃, 아니면 빵과 솥과 냄비와 계란... 너무도 흔하고 흔한 것이어서 가끔은 귀찮고 성가시며 지루한 것이 될 수도 있지만, 매일 보고 먹으며 사용하는 것이기에 중요하기도 하고, 그것이 없다면 살아가는 일 자체가 어렵다는 점에서, 필요 불가결하기도 하다. 일상에서는 그 어느 것도 하찮지 않다. 모든 것이 고상하고 고귀할 수는 없으나, 내팽개쳐도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지극히 일상적이고 범속한 것 이외에 달리 고귀한 것은 없다. 가장 평범한 것이야말로 가장 귀한 것이다. 샤르댕의 정물화에서는 각 사물의 특성이 그 어느 것 하나 지워지거나 무시되지 않고 두드러져 보인다. 제각각의 구체성 속에서 자신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내세운다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사물의 서열관계는 완화되고 존재론적으로도 평등해 보인다." ("예술과 나날의 마음" 중에서 p.124)

 

<예술과 나날의 마음>을 쓴 문광훈 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 '샤르댕 역시 나날이 반복되는 일상의 정경을 오랫동안 바라보았을 것이다. 거기에는 여성이 주로 담당했던 집안일, 젊은이와 아이의 행동에 대한 그의 관심이 담겨있다. 그는 별 의미 없이 되풀이되는 허드렛일의 포착이야말로 세속적 순간의 덧없는 망실을 이겨내는 어떤 세계의 창출로 이어지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라고.

 

주말에 내리던 비는 모두 그쳤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불안이 짙푸른 어둠처럼 깊어지고 있다. 조금씩 되살아나던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듯한 느낌. 다른 사람의 일상을 지키는 일이 나의 일상을 지키는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아주 가깝게 맞닿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대를 생각하는 이 밤이 부디 평범한 일상으로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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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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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고향을 묻는 이유는 단순했다. 적과 아군을 구분하자는 이유,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는 듯했다.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에서 영남과 호남으로 대표되는 극한적 대립은 말할 것도 없고, 실재하는 전쟁에 의해 70여 년의 세월 동안 분단국가로 살아온 또 다른 이름의 고향, 남한과 북한. 그리고 실향민이라는 이름의 디아스포라. 어쩌면 그것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모국에서 살아가면서도 마음속의 모국을 잃어버린, 간절히 가고 싶어도 다시는 갈 수조차 없는, 모국을 떠나온 그 어느 나라의 국민보다 못한, 그야말로 디아스포라가 아니지만 가장 비극적인 디아스포라이기도 한 그 이름은 실향민. 나는 몇 년 전 속초의 아바이마을에서 만난 주름살 가득했던 어느 노인을 생각하며 이 소설을 읽는다.

 

"복잡한 문제군요! 어디서 왔냐는 말이 암시하는 바가 뭔지부터 따져봐야 해요. 분만실이 위치한 언덕의 지리적인 위치를 암시하는지, 마지막 진통이 시작되는 순간에 머물고 있는 나라의 국경을 암시하는지? 부모님 혈통인지? 유전자, 조상, 방언인지?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출신이 창조물이라는 건 변함이 없어요! 한번 입으면 영원히 입고 있어야 하는 옷 같은 거죠. 그건 저주예요! 아니면 약간의 운이 들어 있는 능력이랄 수 있어요. 재능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장점과 특권을 만들어내는 능력 말이죠." (p.44)

 

우리는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보스니아 내전을 기억한다. 19924월부터 199512월까지 있었던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일어난 국제적인 무력 충돌 말이다. 치열했던 전투와 무차별적인 도시 폭격, 인종 청소, 집단 강간과 대학살 등으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던 끔찍했던 전쟁. 소설 <출신>은 그 오래전 기억과 맞닿은 채 현재와 미래가 뒤섞인다. 유고슬라비아 출신이면서 지금은 독일인으로 살고 있는 저자의 현재가 그러한 것처럼. 그리고 장담할 수 없는 미래가 또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보스니아 내전이 터졌을 때 작가는 부모님과 함께 독일로 이주했다. 작가는 치매를 앓다가 2년 전 세상을 뜬 자신의 할머니를 회상하며 '우리 할머니 크리스티나가 기억을 잃어가기 시작할 때 나는 기억을 수집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할머니가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던 그 시점에 작가는 난민 신분에서 벗어나 독일 국적을 취득하기 위한 자필 이력서를 쓰면서 자신과 연관된 오래전 기억을 수집해야만 했던 것인데 그것은 어쩌면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는 작업인 동시에 지구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모국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작은 추도이자 헌사일지도 모른다.

 

시간의 연속성 위에 드문드문 공란을 남겨둔 채 파편처럼 이어지는 기억. 작가는 전쟁이 발발하자 어머니와 함께 세르비아에서 헝가리로, 크로아티아를 넘어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로 도피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들을 세르비아 국경까지 무사히 인도한 후 비셰그라드로 돌아갔다. 그렇게 반년 동안 할머니를 돌보셨던 아버지. 그 후 아버지도 독일행을 택했지만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신분은 모두 잃었다. 조국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정치학자였던 어머니도, 경영학자였던 아버지의 신분도 한낱 과거로 남았을 뿐 독일에서 어머니는 큰 세탁 공장에서 뜨거운 수건에 묻혀 살았고, 독일어를 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공사판을 전전할 뿐이었다. 이마저도 불안불안하게 이어오던 부모님은 인종 청소가 자행되는 비셰그라드로의 추방을 염려하여 1998년 미국 플로리다로 이주했다. 그리고 미국 연금 생활자 신분이 된 지금 부모님은 크로아티아에 살고 있다.

 

작가 역시 독일에서의 삶이 순탄치 않았다. 작가로서의 삶을 끝없이 '증명'해야만 했고, 이방인인 자신으로 인해 토착민인 주변의 독일인들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모든 규칙'을 상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방인으로서의 부당한 대우와 편견을 통해 가족들은 오히려 사람들을 좀 더 편하게, 부드럽게 대하는 방법을 배웠다.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출신'으로 인해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자신들과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게 되었던 셈이다. 그리고 치매를 앓는 할머니로 인해 비셰그라드에서 그녀가 누렸던 행복했던 삶을 기억 속에 저장하게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비셰그라드 출신이라는 이유가 부당한 차별과 불공평한 대우의 시발점이었다면 할머니에게는 행복의 원천이자 지금의 불행을 잊게 하는 행복의 방부제였던 셈이다.

 

'한 번 입으면 영원히 입고 있어야 하는 옷 같은 것''출신'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의식의 자유로운 흐름처럼 전개되는 소설 속에서 '출신'은 어느새 '계속해서 이야기되는 현재의 모습'으로 바뀐다. 과거에 대한 회상과 주변 인물의 일화가 모여, 그 모든 과거와 현재가 끝없이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출신'이 형성되고, 흐르는 세월과 함께 끝없이 창조된다는 것이다. 속초에서 만난 북한 출신의 어느 노인이 그랬던 것처럼 한 사람의 과거는 오롯이 과거 자체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내가 쓰는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쓰여 있다. '나의 반항은 일종의 적응이었다.' 독일에서 이민자로 살아가야 하는 방식에 걸었던 기대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반항은 출신의 숭배뿐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환상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속감은 지지했다. 나를 원하고 내가 있고 싶은 곳에서는 소속감을 갖고 싶었다. 그런 소속감과 함께 우리의 가장 작은 공통분모는 '충분하다'였다." (p.295)

 

지나온 삶이 한 번 지운 일기장처럼 희미해지는 날이면 나는 아바이마을에서 만났던 어느 노인을 떠올리곤 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공통분모로 그와 나의 희미한 기억들이 위치도 정해지지 않은 이 땅의 어느 곳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저 든든해지곤 했다. 나의 기억이 그에게도 닿아 나처럼 든든했으면 하는 바람이 없지 않았다. 할머니의 행복했던 기억이 작가에게 든든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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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말고 진보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목수정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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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시기에 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찾아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설사 발견한다 하더라도 구성원 전체를 설득하여 더 나은 쪽으로 혁신을 유도한다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단지 사회 구성원 몇몇에 의한 너무나 미약한 목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 전체의 삐걱거림, 혹은 사회 시스템의 붕괴와 같은 위기 상황이 아니고서는 사회의 모순을 발견하고 이를 시정해야만 한다는 강한 신념이 구성원 각자에게 발현된다는 건 기대하기 어렵다. 이와 같은 까닭에 사회의 진보는 마냥 더딜 수밖에 없고, 성급한 사회 구성원에게 진보란 언제나 답답한 현실로만 비친다.

 

"국가의 경제적, 재정적 권력이 우리를 움직이긴 하지만, 국가의 지성은 그렇지 않다. 분노의 힘과 시민들의 운동 속에서 단순하고 명확한 메시지가 나타나야 한다. 이 세계는 우리에게 속해 있다. 우리는 결코 정부에 속하지 않았으며, 국가를 장난감처럼 갖고 노는 금융권력에는 더더욱 속하지 않는다." (p.274)

 

전 세계적인 코로나19의 충격은 각국 정부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바이러스처럼 빠르게 전파되었던 자유주의 시장 경제 체제의 한계를 노정하는 시발점이었는지도 모른다.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금과옥조처럼 추구되던 신자유주의 경제에 대한 회의와 우리의 미래를 맡기기에는 그 제도가 얼마나 부실한가에 대한 실제적인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가 작금의 코로나 위기였다. 그런 측면에서 스테판 에셀의 자서전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갈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는 길라잡이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2010년 그의 나이 92세에 발표한 32쪽 분량의 작은 책 <분노하라>가 세계인들에게 분노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것처럼 말이다.

 

국가의 구성원들이야 어찌 되든 오직 자신의 정치적 유불리만을 따져 상황을 판단하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유리하다면 비록 그것이 범죄에 가까운 행위일지라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저지를 수 있는 정치인들. 자신 입장은 쏙 뺀 채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게 국가 구성원 전체에게 유리하며 그것이 마치 정치적 선을 추구하는 유일한 길인 양 선전하는 정치인들. 부를 향한 무한대의 욕망을 부추기고 '자유 경쟁'이라는 미명 하에 무한대의 축재를 용인하는 정치인들. 예컨대 북한의 김정은이 최근 99% 사망했다고 주장함으로써 국민들 전체를 불안에 떨게 하고 국가 전체를 혼란에 빠트렸던 탈북 정치인과 그가 속한 정당의 정치인들은 김정은이 건재하다는 뉴스에도 불구하고 일언반구의 사과조차 없었다. 그를 뽑아준 지역구의 국민들도 우매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선적으로 그와 같은 자들을 공천한 정치인들의 잘못이 크다 하겠다. 결국 코로나19와 같은 전 세계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분노가, 깨어 있는 시민들의 용기가, 그리고 타인을 배려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걸 우리는 작금의 위기를 통해 배운다.

 

"내가 보기에 문제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방관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를 기다리고 잇는 어려움들은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이 아니며 우리에겐 충분히 사용하지 않은 에너지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아직은 너무 멀게만 보이는 가치들에 대한 열망이 우리 안에 들끓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만일 우리가 불가능을 가능이라고 여긴다면, 그곳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고 충분한 힘이 있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조화를 이룰 수 있다." (p.167)

 

외교관으로서 세계 인권 선언문 초안 작성에 참여하는 등 현실 정치인이자 사상가였던 저자는 자본의 폭력에 맞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꾸자고 호소했던 '낭만적인 레지스탕스'이기도 했다. 우리가 유럽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두 개의 지구가, 미국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다섯 개의 지구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나의 지구에서 70억 명의 인구가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시스템 구축에 헌신할 것을 강조했던 스테판 에셀.

 

"나를 바르게 지탱해주었던 첫 번째 힘은 우리 집안이 갖고 있는 일종의 전통 같은 것이었다. 내 부모님의 삶의 핵심이자 유익하며 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쳐주었던 것들의 영향이다. 내 부모님은 한 편으로는 그리스 신들을, 다른 한 편으로는 시를 내게 물려주었다.(중략) 내게 시는 하나의 '증거'였다. 내 경험에 의하면, 세상에는 우리를 활짝 피어나게 해주고, 우리가 맞서 싸우는 세력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그로부터 초월하게 해주는 영역이 있다. 시가 바로 그 증거다. 그때 우리는 다른 영역에 존재한다." (p.158)

 

'나에게 영혼이라는 것은 내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다. 그것은 전 인류의 눈이며, 눈물 흘리지 않고는 암송할 수 없는 시들이기도 하다.'라고 했던 스테판 에셀의 명언은 코로나 시대의 전 지구인에게 전하는 위로이자 계명이다. 민주주의가 발전했다고 하는 미국과 서구 유럽의 국가에서 코로나19로 인한 많은 희생자가 나왔던 것은 아마도 그들의 지도자 대부분이 '눈물 흘리지 않고는 암송할 수 없는 시'를 가슴에 품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반면에 우리는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여길 수 있는, 영혼이 있는 지도자를 둔 덕분에 위기 상황에서도 오늘과 같은 평화를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민을 혼란에 빠뜨리는 가짜 뉴스도 언제든 퍼뜨릴 수 있는 사이비 정치인을 배제하는 게 이 시대의 진보를 향한 첫걸음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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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봄을 즐기기도 전에 때 이른 초여름 날씨에 어리둥절했던 하루였다. 그러나 부처님 오신 날과 근로자의 날 그리고 주말 연휴로 이어지는 달콤한 휴가 덕분인지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웠다. 무엇보다 코로나19의 진정세가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마트에도 근래에 보기 드문 인파로 북적였다. 미덥지 않은 삶의 동아줄을 확인하면서도 하루하루의 일상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는 자각이 사람들을 저으기 안심시켰는지도 모른다.

 

이천의 한 물류창고 공사 현장에서 있었던 화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지난한 삶의 현장에서 전해지는 암울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옛말이 나도 모르게 떠오르곤 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밥이 곧 하늘인 현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의 위협에 다들 외출도 꺼려하던 요즘, 직접적인 살인 도구인 우레탄폼의 검은 연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야만 했던 그들의 거친 일상은 또 어떠했을지... 때 이른 무더위가 지나던 오월의 첫날, 그래 오늘은 근로자의 날이지. 근로자가 없는 달력에 붉은 글씨의 '근로자의 날'만 선명한...

 

우리는 이따금 'n번방 사건'의 주범 조주빈과 같은 범죄자는 선천적으로 타고난다고 믿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착각에 불과하다. 만민중앙교회의 이재록 목사도, 지난 30여 년 간 자신의 교회에 다니는 여성 신도 9명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하거나 추행했다는 전북의 어느 목사도 선천적인 악인으로 보기는 어려울 터, 그들은 다만 범죄가 용이한 환경에 너무나 자주 노출되었을 뿐이다. 자신의 돈과 권력으로 너무도 쉽게 저지를 수 있었던 범죄와 그런 범죄에도 불구하고 법적인 처벌은 집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은 그들로 하여금 절대적인 악의 편으로 내몰지 않았을까.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람들과 그들의 생명을 담보로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던 사람들. 죄는 다만 처음이 어려울 뿐 두 번, 세 번은 비교적 쉬웠던 게 아닐까.

 

샌드위치 패널을 휩쓸고 간 이천의 어느 공사현장의 화마처럼 후끈한 열기가 한반도 전체를 달구었던 오늘, 그래 오늘은 공사 현장의 근로자도 없는 붉은 글씨 선명한 '근로자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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