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이 된다는 것 -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
안셀름 그륀 지음, 황미하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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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그렸지만 본인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얼굴입니다. 얼굴에는 자신의 삶의 이력이 그려집니다. 자연스러움은 이처럼 시간의 경과에 따른 변화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변화를 모두 이해하기에는 우리의 지식이 너무나 얕고 보잘것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삶에서는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입니다. 온갖 부조리가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를 주저앉히는 좌절과 낙담, 슬픔과 분노... 위로가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정작 위로가 필요치 않은 시기에는 위로가 없었던 것처럼 위로가 넘쳐난다는 건 또 한편으로 슬픔과 분노 혹은 좌절과 낙담이 넘쳐난다는 걸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위로를 가장한 거짓 위로가 세상을 장악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인 없는 빈 밭에는 밀알의 싹보다는 잡초만 무성한 것처럼 말이지요.


"일부 그리스도교 단체들도 상업 광고처럼 그러한 구호를 내걸면서 슬퍼하는 이들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신앙인들로 구성된 자기네 공동체 안에서 위안을 얻게 될 거라고 약속합니다. 그 단체들이 자신들의 약속을 이행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놓고도 늘 질문이 제기됩니다. 그러나 큰 도움을 주는 긴밀한 관계, 결속은 사람들이 위안을 얻게 될 거라고 피상적으로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더 심오한 것입니다."  (p.40)


세계적인 영성 심리 상담의 대가인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저서 <위안이 된다는 것>을 구매했던 시점은 '10.29 참사' 직후였습니다. 최근의 일이지요.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좁은 골목길에서 비참하게 죽어갔는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에게도,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국민들에게도 진정한 위로를 건네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국정을 책임지는 관료들의 생각은 '시간이 가면 금세 잊힐 일인데 뭐 그리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것일 테지요. 적당히 애도하고 밑선에서 몇 명 책임자를 처벌하면 가족을 잃은 유족들도, 일시적으로 분노하는 국민들도 그 위세가 금세 잠잠해지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온을 되찾게 될 것이라는 게 그들의 판단인 듯합니다. 그러나 깊은 슬픔은 가슴에,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깊은 생채기를 남길뿐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새살이 돋고 그리운 이를 가슴에 묻을 때까지 말입니다.


"울음은 쌓이고 쌓여서 터져 나오는 감정에서 우리의 짐을 덜어 줍니다. 눈물은 고통을 완화시킵니다. 펑펑 울고 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울음은 누군가를 제압하고 그에게 과도하게 요구하는 듯한 고통을 견뎌 내게 하고 그에게 답해 주는 유일한 방법이 됩니다. 우리 인간은 울음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 울면서 자기를 내려놓는 것, 그러면서 고통을 허용하고 그 방향을 돌리거나 사라지게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답을 더 이상 알지 못합니다. 말로도, 몸짓으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p.218)


책의 부제인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륀 신부님의 의도는 명백합니다. 어떻게든 지금의 슬픔이나 좌절에서 벗어나 남은 삶을 꿋꿋하게 살아가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어쭙잖은 말로 생색을 내거나 아는 체를 한다는 건 그들의 고통을 가중시킬 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장 '빗나간 위로', 2장 '결속감에서 얻는 위로', 3장 '아름다움 속에 깃든 위안', 4장 '자연이 주는 위안', 5장 '몸과 영혼에 생기를 북돋아 주는 위안', 6장'내적 원천의 힘', 7장 '기도가 주는 위로'의 목차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위안을 얻습니다. 포옹이나 대화, 독서, 음악, 그림, 자연, 산책, 반려동물, 운동, 낮잠, 걷기, 목욕, 기억, 유머, 고요, 기도 등 신부님이 제시하는 위안의 방법들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친밀한 사람이 당신과 대화를 나눈 뒤 위로를 받고 떠나간다면, 그것은 당신 자신도 굳세게 할 겁니다. 위로, 위안은 이 불확실한 세상 가운데서 우리 모두에게 든든한 토대를 마련해 줍니다. 이 토대 위에서 우리는 자신을 향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서로 마주보며 똑바로 설 수 있습니다."  (p.292 '맺음말' 중에서)


우리는 종종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와 같은 꼰대질을 지금 슬픔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내뱉곤 합니다. 습관화된 자기 과시와 자기 피알의 시대에 위로마저 형식적으로 흐르는 듯하여 씁쓸하기만 합니다. 결국 우리는 마음과 마음이 다가가는 방법을, 체온과 체온으로 위로하는 방법을 까맣게 잊어버린 세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현종 시인의 시 '놀다'에는 이런 시구가 있습니다. "괴로움을 견디느라 괴로움과 놀고/ 슬픔을 견디느라 슬픔과 놀고/ 그러다가/ 노는 것도 싫어지면/ 싫증하고 놀고......”(「놀다」 전문) 싫증하고 놀 수 있는 날은 아마도 머나먼 미래가 될 듯합니다. '10.29 참사'를 잊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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