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부자경제학 - 『사기』 화식열전 Wisdom Classic 4
신동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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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사실 부자가 되고자 하는 욕심도 없고, 부자가 될 가능성도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내가 마치 십수년간의 면벽수행을 거쳐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또는 큰 실패를 겪고 낙담하여 자포자기적 심정에 빠졌다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둘 다 아니다.  나는 그저 한 가정의 평범한 가장일 뿐이다.  그럼에도 서점에 들러 책을 구경할 때마다 자기계발 코너에서 자주 보이는 '부자'라는 단어가 들어간 제목의 책에 습관처럼 시선이 닿곤 한다.  이것은 일종의 의도되지 않은 현상으로서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습득된 세뇌라고 여겨진다.

 

게다가 나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지금 와 돌이켜 생각해 보면 대학 4년 내내 나는 수학 문제만 풀은 듯한 느낌인데, 이러한 배경에는 어떤 원리나 철학보다는 수학적 계산을 통하여 보여지는 명쾌함을 추구하는 서양 경제학자들의 선호가 경제 이론이나 모델의 주류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대학을 졸업한 지 꽤나 긴 시간이 지났고, 그 세월에 비례하여 수많은 이론과 모델들이 쏟아졌지만 세계 경제는 정체되었거나 오히려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것을 보면 서구 중심의 자본주의 이론은 뭔가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이와 같은 세계경제의 흐름에도 오직 중국만은 그 궤를 달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저자는 지금껏 배워온 서구의 경제이론이 아닌 사기열전의 69번째 편인 '화식열전'에서 그 답을 찾고자 시도하고 있다.  어떤 분야의 학문이건 그 원류가 존재하고, 그것에서 분파되고 세분화 된 각종 이론이 존재할 뿐, 혁명적 원리가 새롭게 등장하여 기존의 본원적 이론을 뒤집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관점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중국 경제의 근원적 이론을 살펴보고 이것을 현대에 맞게 재해석 하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겠다.  더구나 초강대국 미국의 위상이 점차 낮아지는 반면 세계경제의 빅2로 미국을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는 인접국 중국은 우리로서도 결코 도외시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2012년 연초에 새해 계획으로 '인문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해 보자'는 결심을 했었다.  다들 그렇겠지만 1월 한 달은 그럭저럭 지켜지는 듯했다.  내가 가장 먼저 선택한 책은 서양의 고전인 '일리아스', '오딧세이아'와 함께 동양의 고전인 사마천의 '사기'였다. 나는 서해문집이 출판한 사기 1권 <패자의 탄생>, 제2권 < 난세의 영웅들>, 제3권 <진시황의 천하>를 1월 한 달에 읽고는 지쳐 나가떨어졌다.  [사기] 130권([열전], [본기], [세가], [서], [표])에 흩어져 있는 역사 사건과 인물들을 시대 순으로 재구성하여 독자가 읽기 쉽도록 하였다고는 하나 그렇게 만만히 볼 책은 분명 아니었다.  한동안 '사기'는 거들떠도 보지 않다가 지난 달에 <사기열전>을 읽었다.  그 중 내가 재미있게 읽은 내용은 '자객열전'이었는데 따지고 보면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도 '부자'라는 단어와 '사기'라는 단어가 먼저 눈에 띄었기 때문이지 '화식열전'의 내용이 궁금했던 것은 아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비롯된 서구의 경제학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온 반면 동양의 이론이나 사상은 그동안 뒷전으로 밀려나 있던 것도 사실이다.  중국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이제서야 조금씩 주목을 받는 것 또한 뒤늦은 감은 있지만 서양의 제 이론에 비해 동양의 그것이 결코 뒤쳐지지 않음을 독자들은 알게 될 것이다.  책으로 들어가 보면 2000년 전에 씌어진 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지금의 경제, 경영서의 논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 제자백가의 반열에 오른 상가(商家)의 핵심 사상은 부민부국을 치국평천하의 요체로 삼는 데 있다.  그리고 구체적인 방법론에 있어 중농(重農)이 아닌 중상(重商)을 택한다.  상가의 이론은 관중에게서 비롯되었지만, 공자의 제자로서 상가의 이론을 몸소 실천하여 당대 최고의 부자로 명성을 떨쳤던 자공에 이르러 세상에 드러났고, 이를 높게 평가한 사마천은 공자의 제자를 다룬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가운데 절반을 자공의 사적으로 채웠다.

 

그러나 '가족을 먹이지 못하면 거짓 군자'라고까지 말할 정도로 당시로는 파격적인 일면이 있던 상가의 흐름은 유학을 유일한 관학(官學)으로 삼았던 한대(漢代)의 정책 탓으로 빛이 바랬다. 유학을 유일한 관학(官學)으로 못박는 한대(漢代)의 정책 탓에 사마천의 업적은 이내 빛이 바랬다.  이후의 역대 왕조도 중상주의 정책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중국의 실생활에는 여러 왕조의 흥망에도 불구하고 중국 10대 상방과 함께 도도히 이어지고 있었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好利知性)이라는 상가의 논리는 유교가 지배했던 동양의 여러 나라에 있어 각광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도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몇몇 실학자들이 중상주의를 주장한 바는 있지만 그렇다고 중상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 명분과 허세를 중시했던 유교의 논리는 먹고 사는 문제를 중시하는 상가의 현실적 이론에 의해 반박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세인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10배 부유하면 헐뜯고, 100배가 되면 두려워하고, 1천 배가 되면 그의 일을 해주고, 1만 배가 되면 그의 하인 노릇을 한다.  이것이 사물의 이치이다."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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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동이 어깨동무 합니다 -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며
김제동 지음 / 위즈덤경향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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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도의 영적 스승인 오쇼 라즈니쉬는 그의 책 <삶의 길 흰구름의 길>에서 이렇게 썼다.

"이기주의자는 무슨 수를 써서든 정치인이 될 것이다.  그들이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그 직업을 통해 그들은 정치인이 될 것이다.  정치라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에고 간의 싸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다.  내가 우월해지려고 애쓰지 않을 때 나는 진정으로 우월하다.  그러나 이 우월함은 열등함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열등하다는 느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개그맨 김제동을 부를 때 수식어처럼 따라붙는 말은 너무도 다양하다.

좋게는 '국민MC', '대한민국 최고의 입담꾼'에서부터 '소셜테이너' 또는 심하게는 '좌빨', '빨갱이'까지 한 사람에게 내려지는 평가는 그야말로 극과극이다.  이러한 평가는 평가를 내리는 당사자들이 자신의 사상에 비추어 호불호를 말하는 것일 뿐 정확한 평가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시각을 달리하여 제3의 입장에서 김제동을 평하고자 한다.  어쩌면 이것은 김제동 본인이 원하지도 않았던 변명을 내가 대신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서두에서 언급한 오쇼 라즈니쉬의 시각에서 그를 말하려고 한다.

 

오쇼는 세상을 보는 시각으로 종교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정치적이라 함은 열등의식에서 비롯된 남보다 우월하고자 하는 욕구를 이름이다.  즉, 남과 비교하여 자신이 열등하다고 느끼면 상대방을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려는 일체의 행위를 정치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인도 자신이 속한 종교가 타종교와 비교하여 열등하다고 느껴 타종교를 헐뜯고 비난한다면 그 또한 종교 안에서 정치적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열등의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자신이 정치적 행위를 하거나 정신병자가 되는 수밖에 없단다.  덧붙여서 정신병자는 정치인보다 덜 위험하다고도 했다.  최소한 정신병자는 자신이 우월하다고 주장할 뿐 입증하거나 강제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한 발 더 나아가면 자신이 우월한 위치에 있더라도 그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정치적이라고도 했다.

 

남보다 우월해지려는 욕구가 없는 상태, 그렇다고 우월하다고 인식하지도 않는 상태를 '종교적'이라고 했다.  오쇼의 관점에서 보면 김제동은 오히려 꼬리표처럼 따라 붙는 '정치적'이라는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종교적에 가깝다.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김제동이 본인 스스로 우월하다고 인식하는지 아닌지까지는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최소한 열등의식을 느껴 타인을 비난하고 헐뜯어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려 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우리와 같은 범부의 입장에서 충분히 종교적이다.  그럼에도 그를 정치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그 사람이 정치적인 것이다.

 

<김제동이 만나러 갑니다> 그 두번째 이야기인 이 책은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뷰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 중 내가 기억에 남았던 것은 딴지일보 총수인 김어준과의 인터뷰 내용이었다.

옮겨보면 이렇다.

 

김제동: 당당, 교만은 한 끗 차이야.  겸손과 비굴도 한 끗 차이지.  당당과 겸손, 교만과 비굴은 각각 세트잖아.  그런데 형은 당당한데 겸손하진 않아.

김어준: 나에겐 청소부나 대통령이나 똑같아.  그가 가진 권력으로 덕 볼 생각 없어.  내가 누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면 언제나 남세스러워.  그 정도 균형감각이나 염치는 있어.  난 염치를 중요하게 생각해.  그게 세상의 균형을 만드는 거거든.   (P.171)

 

다른 나라에서는 박물관에 가서야 찾을 수 있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반짝반짝 윤이 나는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즐기고 덕을 보는 사람들은 따로 있을 게 분명한데 말이다.  내가 알기로는 그것으로 덕 보는 직업군은 오직 시정잡배만도 못한 정.치.꾼.이 아닐까 한다.  최소한 이 책을 읽으면 김제동이 종교적에 가까우면 가까웠지 결코 정치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쉽게 판단하리라고 본다.  한글을 뗀 사람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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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 박범신 논산일기
박범신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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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하고 벌이 날았다.  아니, 그런 듯 느꼈다.  아카시아 꽃잎이 오월의 파편처럼 등산로에 흩어지던 어느 날, 그 메마른 시간에 농부들은 여느 해처럼 씨를 뿌리고, 마른 하늘을 원망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난 세월을 곰곰 되짚어가며 이쪽 논배미에 이른다.  무심한 세월이었다.  지나온 발자욱이 순간의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휑한 가슴에는 피죽바람이 분다. 

 

아침마다 오르는 등산로 입구에는 산을 깎아 일군 비탈밭이 있다.

오늘도 습관처럼 산을 오르는데 사래 긴 밭에 가득 심어진 고구마에 일삼아 물을 주고 계신 어르신 한 분을 만났다.  차가 닿을 수 없으니 등산용 배낭에 물을 지고 날라다 그 넓은 밭의 농작물에 병아리 오줌만큼이라도 목을 축이게 하려면 오죽이나 힘들까마는 굽힌 허리는 펴질 줄 몰랐다.  한 시간 남짓 운동을 하고 내려올 때도 노인은 여전히 물통을 손에 쥐고 마른 땅에 물을 축이고 있었다.

 

내가 인사를 건네며 말을 걸자 그제서야,

"워낙 가물어야지요."하며, 일손을 놓고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쩍쩍 갈라진 손바닥을 가로질러 흩어지는 푸른 담배 연기처럼 농부의 지난 세월이 바람 속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논바닥 위에 올챙이가 하얗게 배를 뒤집고 가득히 죽어 있던 풍경이 아스라히 스쳐 지나갔다.  그의 삶에도 몇번쯤 지금처럼 마른 먼지 풀풀 날렸던 시간이 있었을 게다.  속만 바짝바짝 타들어가던 그런 시절이 분명 있었을게다.

 

유년기를 시골에서 보낸 사람은 누구나 애틋한 향수를 가슴에 묻고 산다.

잊고 싶을만치 어렵던 시절이 세월의 풍상에도 닳지 않는 석문(石紋)처럼 핏줄을 타고 흐르다 적당한 시간에 이르러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그리움.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나는 뼈마디가 툭툭 불거진 농부의 거친 손을 보며 아날로그적 감상을 서두에 적었다. 

 

소설가는 때로 감정적이다 못해 충동적일 때가 많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글로 배설하는 행위, 그것이 곧 소설이며, 시이며, 문학이다.  책에서 펼쳐지는 일상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겨야 독자는 크게 공감하는 법이다.  책에서는 항상 나와 크게 거리가 있는 신들의 세상을 접할 뿐이라면 어느 누가 책을 읽을 것이며,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쪼개려 들겠는가.  작가 박범신은 항상 그렇게 충동적이었고, 일반 독자와 충분히 닮아있었다.

 

"이제 내 문제를 알겠다.  쓸 때만 '생각'할 뿐 나의 일상은 거의 정서적 '충동'에 지배받는다.  감으로 결정하고 급한 맘으로 행동한다.  나는 바둑을 두지 못한다.  앞의 수를 내다볼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평생 생각하면서 쓰고, 충동적으로 일상을 운영한다.  이 나이까지 벼랑 아래로 떨어지지 않은 건 운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논산행을 결정한 것도 그렇다."   (P.184)

 

작가는 그렇게 2011년 어느 가을날 논산행을 결정했고, 그렇게 그는 떠났다.

고향이라는 패찰이 붙어있을지라도  그곳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고 느꼈다고 그는 썼다.  새로운 시간의 레일을 따라 새로운 공간에 처음 온 것이라고도 했다.  어쩌면 그는 지나온 시간보다 남겨진 시간을 추억하는지도 모른다.  새로이 겪는 순간순간의 경험을 추억하기 위해 새로운 공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1980년대, 나는 작가 박범신이 소설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TV에 가끔 등장하는 인기없는 연예인쯤으로 생각했었다.  겉표지에 또렷한 그의 이름 석 자를 보면서도 TV 속의 그와 활자 속의 그를 짝짓지 못했었다.  내게는 그가 그렇게 멀리 떨어진 '누군가'였다.  이 책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TV에 가끔씩 얼굴을 비치던 예전의 그는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비춰지는 자신의 이미지를 많이 의식했던 듯하다.  그러나 페이스북에 올린 두서없는 글들을 모아 엮은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었다.  결코 꾸미려 하지 않는 모습, 남들과 구별짓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곳곳에 보인다.  작가가 자신의 고향 논산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머물렀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물이 하는 소리를 들으려면 나를 낮추고 지우는 수밖에 없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선언하지 않고서 얻을 수 있는 사랑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내가 집의 주인이 되는 것보다 나를 지워 빈집이 나의 주인이 되도록 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말하고 나면, 비로소 어둔 밤도 어린 연인처럼 사랑스럽다.  어둠이 지금, 내가 없는 듯, 나를 자유로이 관통해 지나간다."   (P.111)

 

"논산일기 2011 겨울"이라는 부제가 붙은 그의 페북일기는 디지털 세대에 쓴 작가의 아날로그적 감상이다.  논산집에 적응하며 홀로 겪는 일상과 작가의 고향 이야기, 논산과 서울을 오가며 만난 사람들과 세태에 대한 단상들이 직접 찍은 사진들과 어우러져 탑정호를 스치는 바람의 노래처럼 감미롭다.  나는 작가의 노래를 그렇게 눈으로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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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2-06-15 14:38   좋아요 0 | URL
일상생활 속의 이야기와 함께 박범신 작가의 페북일기를 잘 결합시켜 주셨네요.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꼼쥐 2012-06-19 15:56   좋아요 0 | URL
부끄럽습니다. 급하게 올리느라 생각나는 대로 적은 듯해서...
 
정체성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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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자석의 N극과 S극이 서로에게 끌리듯이 극단적으로 다른 서로에게 끌린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에게 있어서도 다르지 않다.  나는 그것을 일종의 지적 호기심, 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궁금증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남자와 여자가 너무나 다른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가령 남자의 사고방식과 행동양태가 여자와 하나도 다를 게 없다면 여자는 결코 남자에게 추파를 보내거나 그들의 세계를 궁금해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자들에게 남자는 자신들과는 외모적으로 조금 다른, 같은 성(性)으로 보이는 돌연변이쯤으로 인식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때로는 비이성적으로 보여지기까지 하는 상대방에게 마음이 끌린다는 것은 신이 남녀를 다르게 빚어놓음으로써 영원히 서로의 관심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만든 오묘한 섭리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다름'도 세상이라는 용광로에서 용해되고 나면 선천적이고도 개별적인 '다름'이 집단적 '다름'으로 전이되고 만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통일성을 갖춤으로써 잃게되는 집단적 망각, 또는 구분짓기에 실패한 개인들의 혼돈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서 외따로 떨어져 사랑하는 두 존재, 그건 아주 아름답지.  하지만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이 아무리 경멸할 만한 것일지라도 그들에겐 이 세계가 필요해.  서로 대화를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침묵할 수도 있을 텐데요."

"옆자리에 앉은 저 두 사람처럼?"  하고 장-마르크가 웃었다.

"아니야, 어떤 사랑도 침묵에 배겨날 순 없어."   (P.88)

 

밀란 쿤데라의 소설이 인기 있는 이유는 작가의 예리한 눈으로 세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사고를 통하여 사물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본다는 것은 그 사물에 대한 철학적 인식일 수 있고, 더구나 독서를 통한 세상 읽기는 결국 작가의 사상적 흐름을 읽는 것과 다르지 않다.  괜히 번거롭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작가의 의식을 그 뒤에 숨기는 것은 오히려 독자에게 혼란만 야기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밀란 쿤데라는 독자에게 친절하다.

 

이 책에서 작가는 인간이 자신이 속한 세상을 경멸함으로써, 또는 그곳으로부터 배제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다섯 살 나던 해 죽고 말자 샹탈은 시댁 식구들의 임신 종용과 이에 동조하는 남편에게 화가 나 이혼을 했다. 그리고 경제적 자립을 위해 광고회사에 취직했고 애인을 찾았으며 지금 그녀보다 네 살이나 어린 애인 장-마르크와 살고 있다. 어느날 샹탈은 문득 더이상 어떤 남자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느끼고 이를 장-마르크에게 이야기한다. 이것이 샹탈의 육체가 점진적으로 소멸될 것임을 알리는 경고라는 것을 알아챈 장-마르크는 의기소침해진 샹탈을 즐겁게 해주고 싶어 익명으로 편지를 보낸다. 그녀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불어넣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익명의 남자가 보내오는 편지를 읽으며 샹탈은 열예닐곱살 무렵 가슴에 품고 살았던 장미향이 되살아남을 느끼지만 얼마되지 않아 편지의 발신인이 장-마르크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의도를 생각하다가 샹탈은 장-마르크가 자신을 떠날 구실을 찾고 있었던 것이라고 결론짓고 혼자 런던으로 떠난다. 처음에 화가 났던 장-마르크는 샹탈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고 역시 런던행 기차를 탄다. 이제 런던에 온 샹탈도 자신에게 장-마르크가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는다. 잃어버린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쳐줄 사람은 장-마르크 뿐임을 안 것이다.

등장인물들 간에 극적인 갈등도 없고 흥미진진한 스토리 전개 따위도 찾아 볼 수없다.  한 사건이 두 주인공의 시점에 따라 다른 모습과 의미를 띠면서 일으키는 긴장감이 독자를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할 뿐, 독자를 유혹하기 위한 어떤 작위적 구조나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등장인물도 작품구조도 단출하기 그지없다.  군더더기를 제거한 것이 이작품의 묘미라고나 할까. 49장까지 그(장-마르크)와 그녀(샹탈)가 화자로 나오다가 50장에 이르면 느닷없이 `나' 즉 작가가 화자로 등장한다.  밀란 쿤데라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색깔로 자신을 드러낸다.  마성과 같은 그의 매력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쉽사리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아들의 무덤 앞에서 샹탈의 독백은 인상적이다.

 

"아기를 갖고 동시에 이 세계를 경멸하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를 내보낸 곳이 바로 이 세계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계에 집착하는 것은 아기 때문이며, 아기 때문에 세계의 미래를 생각하고 그 소란스러움, 그 소요에 기꺼이 참여하며 이 세계의 불치의 바보짓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란다.  너의 죽음을 통해 너는 나로부터 너와 함께 있는 즐거움을 앗아갔지만 동시에 너는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지.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도록 나는 자유로워졌단다."   (P.64) 

 

인간존재의 이면에 존재하는 속물성과 위선을 예리한 시선으로 파고드는 밀란 쿤데라는 이 소설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 시대 남녀간의 사랑이 존재할 수 있는 양태의 극한을 추구했다고 말하는 작가.  그가 의도하는 철학적 주제는 언제나 독자의 몫이겠지만, 그의 시선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끌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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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래스카에서 죽었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는 알래스카에서 죽었다 - 호시노 미치오의 마지막 여정
호시노 미치오 글.사진, 임정은 옮김 / 다반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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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독한 독서광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치바나 다카시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 문득, 내가 여태까지 역사라는 것을 어딘가 근본적인 데서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식으로서의 역사는 윤색된 것이다.  학교 강단에서 배운 역사, 교과서 속의 역사, 역사가가 말하는 역사, 기록이나 자료로 남는 역사, 그런 것들은 전부 윤색된 것이다.  가장 정통적인 역사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언급되지 않은 역사, 후세인이 전혀 모르는 역사가 아닐까.  기록된 역사를 기록되지 못한 현실의 총체에 비한다면, 우주 속의 바늘끝만큼이나 미소한 것이리라.  우주의 대부분이 허무 속으로 삼켜지는 것처럼, 역사의 대부분도 허무 속으로 삼켜지고 있다.  " 

  

타인과 구별되는 특별한 역사관을 갖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다치바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경험이 있다.  호주의 노던 테리토리의 울루루를 보았을 때 그랬고, 일본의 야쿠섬을 방문했을 때 그랬다.  9억 년 전에 생겼다는 울루루와 천 년 이상의 고목이 자라는 야쿠섬의 원시림이 주는 느낌은 서로 달랐지만, 나는 두 곳 모두에서 시간의 영속성과 숨이 멈출 것만 같은 서늘한 경외감을 느꼈다.  4차원의 세계에서 시간의 좌표축을 제거한 온전한 역사를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 역사의 저편에 흐르는 도도한 숨결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일본 열도 최남단 가고시마현에서 뱃길로 130㎞, 오래된 삼나무가 있는 야쿠시마(屋久島)를 방문했던 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일본에서의 업무가 일찍 끝나는 바람에 우연처럼 찾아간 그곳엔 해발 2000m에 가까운 미야노우라산이 있다.  그 산을 오르기 위해 사람들은 새벽 어둠이 걷히기도 전에 길을 나선다.  여행이 주목적이 아니었던 우리 일행은 결국 720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조몬스기(繩文衫)’는 보지 못했지만 이끼에 뒤덮힌 수천 년의 세월을 온몸으로 느낄 수는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역사는 읽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화로 전해지는 고시대의 현실이 내 몸 곳곳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1952년 지바현 이치카와시에서 태어난 저자는 19세 때 헌책방에서 우연히 알래스카 풍경을 담은 ‘조지 모블리’의 사진집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실린 에스키모 마을의 모습에 푹 빠져 촌장에게 방문을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쓴 그는 촌장으로부터 방문 환영 답신을 받고 그곳에서 에스키모 일가와 함께 여름 한철을 보낸 이후 알래스카 풍광을 담는 사진가의 길을 걷게 된다.  곰을 좋아하던 그는 알래스카를 누비며 사진을 찍었고,1996년 8월 취재차 방문한 캄차카반도 쿠릴 호수에서 그토록 좋아했던 곰에게 물려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은 그의 마지막 여정이다.

 

"갖가지 동물, 한 그루 나무, 숲, 심지어 바람마저도 영혼을 가지고 존재하며 인간이 그들을 바라보듯 그들도 인간을 응시한다......  인디언의 신화는 신화의 자리를 넘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나직이 말을 건다.  밤의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생명이 품은 헤아릴 길 없는 신비를 전하는 것처럼.  나는 곰이 다니는 길이 사라져 간 숲속 세상의 오묘함을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심오함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알고자 하는 것'과 어떤 지점에서 분명히 얽혀 있을 것이다."  (P.162)

 

저자는 큰까마귀 전설을 따라 남동알래스카에서 시베리아로 이동한다.  그 길이 마지막 여정임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는 자신의 짐을 챙겨 돌아섰을까?  기원전 1만 8천 년 전쯤 물밖으로 드러난 베링 평원을 건너 몽골로이드는 아시아에서 알래스카로 이주했다.  알래스카의 역사를 되짚는 저자의 시간 여행은 하얀 베일에 가려 영원 속으로 회귀하고 있다.  역사로 기록되지 않은 전설의 세계.  작가의 사진에는 곰의 발자국을 따라 영원 속으로 사라지는 고독한 사진가의 시선이 있다.  유화와 같은 그의 사진에서는 원시의 울림이 끝없이 전해진다. 

 

"촬영이 끝난 뒤, 머리뼈를 나무상자에 고이 넣어 품에 안은 채 어둑어둑한 고생물학 연구소의 복도를 걸었다.  죽은 이가 든 유골함처럼 다루기가 조심스러웠다.  나무상자가 흔들릴 때마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났다.  그 투명한 소리마저 나는 아름답다고 느꼈다.  동굴에서 나온 뒤에도 뼈에는 천천히 시간이 새겨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뼈의 소리에서 나는 3만5천 년 전 남동알래스카 숲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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