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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래스카에서 죽었다 - 호시노 미치오의 마지막 여정
호시노 미치오 글.사진, 임정은 옮김 / 다반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지독한 독서광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치바나 다카시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 문득, 내가 여태까지 역사라는 것을 어딘가 근본적인 데서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식으로서의 역사는 윤색된 것이다.  학교 강단에서 배운 역사, 교과서 속의 역사, 역사가가 말하는 역사, 기록이나 자료로 남는 역사, 그런 것들은 전부 윤색된 것이다.  가장 정통적인 역사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언급되지 않은 역사, 후세인이 전혀 모르는 역사가 아닐까.  기록된 역사를 기록되지 못한 현실의 총체에 비한다면, 우주 속의 바늘끝만큼이나 미소한 것이리라.  우주의 대부분이 허무 속으로 삼켜지는 것처럼, 역사의 대부분도 허무 속으로 삼켜지고 있다.  " 

  

타인과 구별되는 특별한 역사관을 갖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다치바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경험이 있다.  호주의 노던 테리토리의 울루루를 보았을 때 그랬고, 일본의 야쿠섬을 방문했을 때 그랬다.  9억 년 전에 생겼다는 울루루와 천 년 이상의 고목이 자라는 야쿠섬의 원시림이 주는 느낌은 서로 달랐지만, 나는 두 곳 모두에서 시간의 영속성과 숨이 멈출 것만 같은 서늘한 경외감을 느꼈다.  4차원의 세계에서 시간의 좌표축을 제거한 온전한 역사를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 역사의 저편에 흐르는 도도한 숨결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일본 열도 최남단 가고시마현에서 뱃길로 130㎞, 오래된 삼나무가 있는 야쿠시마(屋久島)를 방문했던 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일본에서의 업무가 일찍 끝나는 바람에 우연처럼 찾아간 그곳엔 해발 2000m에 가까운 미야노우라산이 있다.  그 산을 오르기 위해 사람들은 새벽 어둠이 걷히기도 전에 길을 나선다.  여행이 주목적이 아니었던 우리 일행은 결국 720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조몬스기(繩文衫)’는 보지 못했지만 이끼에 뒤덮힌 수천 년의 세월을 온몸으로 느낄 수는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역사는 읽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화로 전해지는 고시대의 현실이 내 몸 곳곳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1952년 지바현 이치카와시에서 태어난 저자는 19세 때 헌책방에서 우연히 알래스카 풍경을 담은 ‘조지 모블리’의 사진집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실린 에스키모 마을의 모습에 푹 빠져 촌장에게 방문을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쓴 그는 촌장으로부터 방문 환영 답신을 받고 그곳에서 에스키모 일가와 함께 여름 한철을 보낸 이후 알래스카 풍광을 담는 사진가의 길을 걷게 된다.  곰을 좋아하던 그는 알래스카를 누비며 사진을 찍었고,1996년 8월 취재차 방문한 캄차카반도 쿠릴 호수에서 그토록 좋아했던 곰에게 물려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은 그의 마지막 여정이다.

 

"갖가지 동물, 한 그루 나무, 숲, 심지어 바람마저도 영혼을 가지고 존재하며 인간이 그들을 바라보듯 그들도 인간을 응시한다......  인디언의 신화는 신화의 자리를 넘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나직이 말을 건다.  밤의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생명이 품은 헤아릴 길 없는 신비를 전하는 것처럼.  나는 곰이 다니는 길이 사라져 간 숲속 세상의 오묘함을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심오함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알고자 하는 것'과 어떤 지점에서 분명히 얽혀 있을 것이다."  (P.162)

 

저자는 큰까마귀 전설을 따라 남동알래스카에서 시베리아로 이동한다.  그 길이 마지막 여정임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는 자신의 짐을 챙겨 돌아섰을까?  기원전 1만 8천 년 전쯤 물밖으로 드러난 베링 평원을 건너 몽골로이드는 아시아에서 알래스카로 이주했다.  알래스카의 역사를 되짚는 저자의 시간 여행은 하얀 베일에 가려 영원 속으로 회귀하고 있다.  역사로 기록되지 않은 전설의 세계.  작가의 사진에는 곰의 발자국을 따라 영원 속으로 사라지는 고독한 사진가의 시선이 있다.  유화와 같은 그의 사진에서는 원시의 울림이 끝없이 전해진다. 

 

"촬영이 끝난 뒤, 머리뼈를 나무상자에 고이 넣어 품에 안은 채 어둑어둑한 고생물학 연구소의 복도를 걸었다.  죽은 이가 든 유골함처럼 다루기가 조심스러웠다.  나무상자가 흔들릴 때마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났다.  그 투명한 소리마저 나는 아름답다고 느꼈다.  동굴에서 나온 뒤에도 뼈에는 천천히 시간이 새겨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뼈의 소리에서 나는 3만5천 년 전 남동알래스카 숲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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