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해피 데이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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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매일 행복하겠어 [오 해피데이_ 오쿠다 히데오]



이사를 가기위해 짐을 줄이지 않았다면 그녀의 심정을 백프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총 6개의 에피소드로 이뤄진 오쿠다의 단편집에 있었던 첫 번째 이야기 <sunny day>의 노리코의 마음은 어떻게든 짐을 줄여보자는 나의 절실함과 비슷해보였다.



노리코는 집에 방치된 피크닉 테이블을 옥션에 팔게 되면서 옥션의 맛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쓰지 않는 물건을 찾아 팔았지만 이후에는 내가 사더라도 비싸고 좋다고 생각하는 물건들을 찾아내었다. 그녀의 품목들은 많은 구매자들이 선호하는 물건들이었다. 처음 아무도 선택되지 않는 물건을 만날 때는 마치 시련을 당한 것처럼 슬퍼했지만 환호하는 물건을 내놓자, 그녀의 평범했던 얼굴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생기 있어 보인다며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그저 물건을 팔고 돈이 생겨서 그동안 가고 싶었던 비싼 음식점을 갔던 것으로 즐거워졌을까.


단순하게 물건을 팔고 돈만 얻었다면 노리코는 옥션을 통한 즐거움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 구매자가 노리코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면 노리코의 집에 잠들고 있던 물건들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으로 점점 활기찬 매일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과하면 부작용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녀가 물건을 팔기위해 집안의 물건들을 찾아내는 것처럼 나도 그랬다. 노리코의 옥션 아이디 sunny day같은 날이 cloud day로 바뀌는 것은 한 순간이었고, 내게도 행복이 오래 지속 되지 않았다. 행복한 날이 어떻게 매일 되겠어.

 


어떻게든 물건을 버리자는 생각으로 대학교 앨범을 빼고 초중고 앨범도 다 버렸다고 하니 주변인들이 뭘, 그렇게까지 버렸냐는 얼굴들이었다. 어린 시절 유독 많이 받았던 편지들이 커다란 박스 4개나 있었는데, 그것도 다 버렸다. 버리면 버릴수록 기분이 좋았다. 이 물건들을 버리고 나면 공간이 비워진다는 것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가슴이 뛰었다. 노리코가 더 좋은 물건을 찾아 옥션에 올려 물건을 팔고 싶어 했던 것처럼 그래서 결국 남편의 애장품까지 올렸던 것처럼, 나 또한 필요 없는 물건을 더 많이 버려 빈 공간을 만들고 가벼운 집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에 추억의 물건들을 다 버리고 말았다. 잠깐 행복했다. 물욕을 버리고, 조절 할 수 있는 배포를 가질 수 있다니, 지금의 나이에 철들었다며 스스로 칭찬까지 했다. 하지만 추억의 물건이 하나도 없는 현실의 집에서 간혹 그리워졌다. 집을 통째로 쓰레기통에 버리듯이 도망친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외롭고 서글퍼졌던 어떤 날은 촌스럽게 웃고 있었던 초등학교 시절의 사진들이 너무 그리워졌다. 행복하지 않았다. 버리고 행복해질 줄 알았던 순간이 어느 날은 없어서 슬펐다.


 

두 번째의 이야기 <우리 집에 놀러오렴>을 읽으면서 점점 변하는 평범한 직장인 다나베 마사하루보다 살고 있던 모든 집기들을 들고 집을 나간 아내의 마음에 감정이 이입됐다. 잠시의 별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내는 대부분의 물건을 들고 나가버렸고 텅빈 집에 남게 되었다. 필요한 물건을 사기위해 들렸던 곳에서 잊고 있었던 자신의 취향을 찾아버렸다. 결국 그가 잊고 있었던 턴테이블의 음악도 찾아 들으며 그곳은 남자들의 욕망이 가득 담긴 아지트로 변하게 되었다. 결혼이라는 틀에 자신의 취향을 멀리 했던 그에게 자아가 찾아 왔다. 원하는 소파를 사기위해 얼마나 발품을 팔던지, 이런 꼼꼼함은 어디다 숨겨 놓고 나온 것인지.


 

그의 집에 잠시 들린 아내는 놀랐다. 내 남편의 취향이 이런 것이었나? 남편의 몰랐던 취향을 발견한 것은 새로운 남자를 만나는 설레임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들은 별거가 새로운 시작이 되었을테니. 그들의 앞으로의 날들에는 정말 행복한 일들만 있을 것 같고, 그랬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읽은 오쿠다 히데오의 단편들에 혼자 낄낄거리며 다시 웃었다. 역시, 오쿠다 히데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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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빵의 위로
구현정 지음 / 예담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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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환영 [유럽, 빵의 위로]



독일에 오랫동안 여행했을 때 가장 좋았던 순간은 기차를 타는 것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다른 지역으로 가기위해 플랫폼으로 들어서기 전에 꼭 사야 하는 것이 두 개가 있다. 커피와 브레첼이었다. 굵은 소금이 박혀 있는 담백한 빵인 브레첼은 처음에는 참 맛 없는 빵이었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계속 먹고 싶은 빵이었다. 1유로도 안하는 싼 값에 처음 선택했던 브레첼이 이리도 맛이 있었다는 것은 때로는 외로웠던 독일 생활중 가장 반가운 만남이었다.


 

다른 도시로 출발하기 전 도너츠와 커피의 짝꿍처럼 나에게는 브레첼과 커피가 짝꿍이었다. 천천히 출발하는 기차에 앉아 유난히 높은 하늘과 넓은 들을 보면서 내가 지금 여행중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간혹 다른 빵들도 챙겨서 기차에 올랐지만 이상하게 브레첼이 주는 여행의 맛이 없었다. 한국에서 먹어보지 못한 그 나라만의 그 향기가 가장 많이 들어 있다고 느낀 빵은 브뤠첸도 아닌 브레첼이었다. 그 브레첼을 먹고 있으면 독일을 떠돌고 있는 나의 현재가 행복했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 브레첼를 몹시도 그리워했다. 어쩌다 들어온 굵은 짠 소금에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침으로 넘어가고 부드러운 빵속은 놀란 혀를 위로하는 시간을 어떻게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새벽 기차에 홀로 앉아 있었던 그 푸른 시간은 눈 감아도 그려지는 풍경이었다.


 

<유럽, 빵의 위로>에도 브레첼 얘기가 나온다. 맥주의 나라, 독일에서는 맥주 안주에도 좋은 브레첼은 부드럽거나 딱딱해도 좋은 빵이었다. 저자가 유럽에서 만난 빵의 위로는 내가 만났던 그 시간을 회상했다. 그때 그 빵을 들고 걸었던 그 좁은 골목이 떠올랐고, 그날 있었던 그 향기까지 나서 힘들었다. 저자가 만난 유럽빵들은 내게도 이런 기억들을 쏟아냈다.



이런 빵이 뭐가 맛있다고 궁시렁거리며 입천장이 까지게 먹었던 파리의 바게트며, 왕소금이 이 사이에 끼어서 한참을 물을 마시게 했던 브레첼, 벨기에의 그 와플이 뭐라고 먹었던 와플의 바삭함, 겹겹이 뜯어 먹으며 즐겼던 크루아상, 상제리제 거리에서 맛보았던 라듀레의 마카롱, 로텐부르크에서 먹었던 단단한 달콤한 슈나벨, 유럽의 첫 도시였던 비엔나에서 먹었던 머리까지 띵하게 했던 진한 초콜릿의 자허 토르테, 스페인 톨레도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목마르게 먹었던 마지판들. 여행의 고된 발걸음은 때로는 즐거웠던 모든 순간에 반짝였던 그 빵들이 주는 잠깐의 위로는 언제나 환영한다.


 

빵 때문에 다이어트가 어려운 나는 전국 5대 빵집이라고 불리는 곳을 모두 다녀왔었다. 각 지역마다 유명한 빵들을 먹으면서 또 그때의 시간들을 지인들과 공유 했었다. 유독 빵에 밭이며, 야채가 많이 들어간 한국빵은 주식보다 간식으로 많이 먹지만, 유럽의 빵들은 주식의 개념이 있으니 더 담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였는지 유럽이 빵이 사실 아주 맛있다고 느껴진 적은 많지 않았다. 무엇인가 함께 곁들여 먹어야만 했던 빵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유독 기억에 남는 빵은 많지가 않다. 하지만 내게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이 오로지 맥주와 브레첼만 있다면 그날은 다 필요 없다. 물론 커리부어스트가 있다면 더 금상첨화이겠지만. 독일이라는 나라가 유독 많은 기억이 있는 것은 내가 그간 머물렀던 유럽의 도시 체류 기간이 가장 길었기 때문이다. 그래서들 다들 한 달 살이를 하는것 같다. 어서 빨리 그런 기회가 또 와 주었으면 좋겠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아무 걱정 없이 브레첼을 들고 기차를 타기위해 그 독일의 작은 도시에 설 수 있을까. 매일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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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은유 지음, 임진실 사진 / 돌베개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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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을 그 이름들을 위하여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올해는 1948년생 전태일이 세상을 떠난지 50년이 된 해이다. 1970년 11월 12일 전태일은 그의 손에 들린 근로기준법전과 자신을 태우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라고 외쳤다.(나무위키) 엉덩이를 제외한 온 몸은 3도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다음날 13일 세상을 떠났다. 12일 집을 나서기 전에 아침에 먹었던 라면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마지막 끼니였기에 배가 고프다는 말을 남기고 갔다는 그의 마지막 말에 목이 따가워진다.



 

드라마 <시그널>에서 1980년대에 있는 이재한은 2015년에 있는 박해영에 세상이 좀 바뀌었는지 묻는다. “죄를 지었으면 돈이 많건 빽이 있건 거기에 맞게 죗값을 받게 하는 그런 세상이 왔냐”고. 하지만 박해영은 이재한 형사에게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을 하지 못했다. 80년대의 그 세상이 2015년에도 바뀌지 않고 똑같이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 해 달라며 자신을 태웠던 그 50년 전의 외침이 지금은 얼마나 지켜지고 있는 것일까.

내게 김동준의 이야기는 안타까운 어린 죽음으로 기억되는 기사에 지나지 않았다. 동준이의 자세한 이야기를 다 알지 못하고 그저 또 어린 목숨을 세상 밖으로 몰아냈다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어른이 되었거나.


 

프로 게이머가 되고 싶었던 동준이는 동아마이스터고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프로그래머가 되어 그토록 좋아하는 게임을 만들어 보고 싶었던 동준이는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했다. 마이스터고는 특성화고였기에 고3이 되면 현장 실습을 나가야 했다. 그렇게 동준이는 CJ그룹의 한 회사에 입사를 했고 그곳에서 원치 않는 회식에가 술도 마셔야 했고 담배도 피워야 했다. 그것이 싫었던 동준이에게는 선택권이 없었고 힘든 시간이 계속 되었다. 잘못이 없어도 동준이에게 돌아온 기압과 폭행은 동준이가 원했던 꿈을 이뤄주지 않았다. 담임선생님의 응원 문자를 보지 못하고 투신자살을 했기 때문이다. 현장 실습생이였던 동준이에게 요구 되었던 많은 일들은 19살 동준이가 견디기 힘들었을 사회생활이었을 것이다. 간혹 그런 동준이에게 나약하다는 말을 할지 모르겠지만 그 고통은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동준이와 같은 아이들의 죽음이 너무도 많다. 제주도 생수 회사에서 일어난 이민호의 죽음은 또 얼마나 끔찍한가. 업무를 배운지 단 5일만에 베테랑이 하는 일들을 해내야 했던 민호는 적재 프레스에 몸이 끼어 열흘 동안의 사투 끝에 세상을 떠났다. 2016년 구의역에서 스크린 도어를 고치다 사망한 김군도 현장실습생으로 취업한 청년 노동자였다.


 

“지하철을 고치다가, 자동차를 만들다가, 뷔페 음식점에서 수프를 끓이다가, 콜센터에서 전화를 받다가, 생수를 포장.운반하다가, 햄을 만들다가, 승강기를 수리하다가....


그러니까 우리가 먹고 마시고 이용하는 모든 일상 영역에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의 흔적이 남아 있다.” P17



기본적인 응대와 시스템에 적응할 시간을 주지도 않고, 사회 초년생도 아닌 그들에게 주어진 의무란 너무 큰 간극의 업무는 아니었을까.

산업 재해로 세상을 뜨게 된 아이들을 애도하기 위해 기록된 이 책속의 아이들이 아니더라도 알려지지 않은 많은 아이들이 세상 밖 문턱에 놓여있다. 그리고 아이들이 떠나고 남겨진 부모들의 이야기는 세월호의 책들을 읽었을 때의 생각이 겹쳐서 한동안 책장을 넘기지도 못했다. 부모 형제가 저 세상을 가면 땅속에 묻는데, 자식은 머리와 가슴에 웅크리고 있다는 이민호군의 아버지의 말은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일들은 왜 자꾸 일어나는 것일까. 회사는 산업재해로 일어나는 죽음과 사고에 인정이 아닌 부인으로 일관되게 행동한다. 사측의 잘못이 되면 그들이 책임져야 하는 부분도 크겠지만 선례를 남기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 때문에 현장 실습에 있던 아이들의 죽음과 사고는 다르게 취급되지 않는다. 적당한 합의금으로 입막음하거나 사건을 무마시키기에 급급하다. 부모들은 자식을 떠나보낸 상처와 함께 더 큰 상처를 입고 머리와 가슴에 웅크리고 있는 자식에 생업을 놓고 괴로워한다. 후회가 되는 날들일 것이다. 아이의 말을 더 빨리 이해하고 그만두고 싶을때 그만 둘 수 있다는 얘기를 해줄 것을.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다 그런 거니까 견디고 버티라는 말을 위로라고 생각하지 말았어야 했다.


 

책 뒷부분에 아이를 잃은 부모님들의 담화는 우리들에게 많은 울림을 남겨 놓았다. 모른척하지 않기, 그렇게 그들을 기억해내기. 그래서 앞으로는 이런 안타까운 죽음을 더 이상 만들어내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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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살기 위해 버렸습니다 - 미니멀 라이프를 위한 정리의 기술
심지은 지음 / 경향BP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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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살기위해 오늘도 정리를 해 봅니다 [다르게 살기 위해 버렸습니다.]



4년 만에 다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사를 오며 절대 짐을 늘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루키가 증식한 짐들이 많아졌다. 물론 루키가 원했는지 알 수 없지만, 나의 선택으로 증식된 루키 물건이었다. 이삿짐 견적을 받기위해 짐정리를 하며 이번 이사도 쉽지 않겠다는 직감을 하며 일주일동안 짐을 버렸다. 그러면서 깊게 고민 없이 사들인 물건들과 마주하며 외면했던 나를 발견하며 깨달았다. 필요 없는 짐들이 너무 많으며 열심히 돈 벌어 필요 없는 물건들을 사 놓았다는 것을. 그간 정리 관련 책들을 많이 읽었지만 그 순간뿐이었고 오래 지속되지 못한 나의 살림들과 어떻게 헤어져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다르게 살기 위해 버렸다는 작가는 정리카페를 운영 중이다. 그곳에 많은 회원들의 정리법 보다는 정리를 하게 된 계기들을 볼 수 있었던 이 책 [다르게 살기 위해 버렸습니다]는 이사를 위한 나의 물건들과의 이별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몇 개 만들어 주기도 했다.


 

나의 미니멀을 위한 첫 번째 선택은 텔레비전을 버리는 일이었다. 태어나면서 있었던 텔레비전이 집에 없어진다는 것은 이상할 만큼 나는 인간 텔레비전이었고 늘 함께 했지만, 요즘들어 가장 사용 빈도수가 떨어지고 있는 것은 텔레비전이었다. 49인치의 텔레비전을 버리겠다고 하니 주변인들이 모두 자신에게 버려 달라고 원해서 처분하였고, 텔레비전 장식장도 필요 없어져서 버렸다. 이인용 책상도 버리고 나니 큰 가구가 정리되어 뭔가 없어 보였으나 거실과 작은방에 한가득 쌓여있는 책이 문제였다. 일주일 동안 500여권의 책을 버리고 중고서점에 넘겼지만 가지고 있는 책이 워낙 많으니 500여권의 빈자리가 느껴지기 않았다. 결국 바릴 것인지 남길 것인지 갈림길에 선 수천 권의 책들과 함께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다시 이곳에서 나의 못 버린 것들과의 이별을 준비 중이다.


 

저자의 카페에서 제시한 100일 프로젝트의 하루인 ‘20리터 쓰레기봉투에 물건 버리기’, ‘하루 15분 버리기’, ‘서랍 한 칸 버리기’등으로 남은 물건들을 정리하고 버리고 있다. 이런 일을 하고 나면 늘 요즘 말인 ‘현타’가 찾아온다. 하루 종일 정리, 버리기를 계속하면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다가도 정리가 되어가는 집을 보면 멈추기가 힘들 때가 있다. 문득 내가 죽고 나면 남겨질 물건들을 치울 가족들을 생각하니 더 줄이며 간소한 살림으로 살아가자고 다짐했다. 10프로의 짐을 줄이는데도 보름동안 어찌나 에를 썼는지 이사를 하고 다음날은 앓아 누워버렸다. 이렇게는 다시는 살지 않겠다며 약을 먹으며 이틀 동안 식은땀을 흘리며 몇 달 만에 일기를 썼다. 몸살이 날만큼 나는 치열하게 버렸다. 대학교 졸업장만 남겨 두고 초중고의 졸업장을 모두 버렸다. 임원 상장들도 버리고, 경시대회에 받았던 상장은 추억으로 몇 개를 남겨 놓고 모두 버렸다. 정리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 버리고 나면 후회보다는 더 버리고 싶은 욕구를 가지게 된다. 깨끗하게 보인다 싶으면 그 주변의 여백을 위해 방해되는 물건들을 모두 버리고 싶게 만든다.

 

전보다 작은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나는 결심했다. 더 이상의 물건을 사지 않겠다. 옷장에서 터져 나가는 옷들을 보면서 일 년 동안 옷 사지 않기, 인터넷 쇼핑하지 않기, 한 달 필요한 물품들을 체크하고 그 이상의 물건과 음식을 사지 않고, 냉장고도 더 이상 음식을 저장용으로 소비하지 않기로 했다. 600리터가 넘는 양문형 냉장고는 고장이 나면 3단으로 나눠진 작은 냉장고를 사지로 했다.

 

저자의 책 속에 나오는 많은 일들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도 있고, 우울증으로 삶을 놓고 싶은 마음에 아무것도 치우지 않고 살아갔던 사람들도 나온다. 그들이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제도 오늘도 시간은 흐른다는 것이고 그 시간을 살아나가야 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산다는 것은 어지럽혀지는 것’이기 때문에 또 오늘을 정리하며 살아간다.


 

“정리하는 힘을 갖는 것은 가슴속에 언제나 ‘어질러지면 치우면 된다’ 라는 생각을 품고 사는 것이다. 이것은 허황된 낙관이나 긍정이 아니라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혼란을 포옹할 수 있는 담대함과도 같다. 그래서 정리하는 사람은 예상치 못한 상황과 변화를 보다 쉽게 받아들이고, 좌절을 경험하더라도 늦지 않게 일상으로 회복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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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의 하루가 지나갔다.



작년에는 혼자 치앙마이에 가서 큰 이벤트 없이도 즐겁게 다녀왔었다. 공원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매일 찾아간 호텔 옆의 카페에서 30분씩 책을 읽으며 마신 라테는 한국에서도 먹을 수 없는 맛이라 그립다. 수십개의 사원을 돌며 그늘에 앉아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홀딱 젖어 걸어 호텔로 들어갔다. 원목으로 깎여진 코끼리 상을 사기위해 세 시간이나 상점 구경을 하기도 하고, 200원하는 삼천원어치 꼬치, 먼지와 함께 볶아지는 길거리 팟타이는 타이거 맥주와 하루의 엔딩을 만들어줬었다. 내년에도 태국에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짐을 싸 비행기에 올랐던 그 여름의 똑같은 날



나는 방 한구석에 앉아 마트에서 사온 타이거 맥주로 그날의 사진들을 뒤적이며 치앙마이 올드 타운에 있는 낡은 그 호텔의 침구마저 그리워지고 있다. 아니 사실은 그것들보다는 낯선 곳으로 간다는 그 설렘을 가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비행기를 타고 싶다. 작은 공간에 꼼짝없이 콕 박혀 앉아서는 착한 얼굴로 자고 싶다. 얇지만 따뜻한 비행기 담요를 덮고 목이 꺾이도록 자다가 킁킁 기내식 냄새를 맡으며 부스스 일어나 생선과 닭고기 중에 뭘 먹을까 오래오래 고민하다가 승무원이 물어 오면 “피시, 플리즈” 당황하지 않고 세련되게 대답하고 싶다. 스프라이트도 달라고 해야겠다. ‘사이다’라고 말하면 안 돼.

이제 식판을 받아 들고 비닐을 쭉 찢어 플라스틱 포크와 나이프와 숟가락을 꺼내서 칸칸이 나눠 담긴 음식을 차례차례 해치우는 거다. 작긴 해도 있을 건 다 있지. 누가 그랬더라.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딱 맞는 말이지. 작은 은박 도시락, 작은 치즈, 작은 케이크 조각, 가방 속엔 작은 샴푸, 작은 비누, 작은 샘플 화장품들, 그리고 잠깐 만나고 곧 헤어ㅓ지는 사람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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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비행기, 비행기를 타고 싶어. 꼼짝없이 콕 박혀 있는 작은 공간이 필요해.” (내 여자 친구는 여행중 - 이미나 P24~26)



















비행기를 타고 싶었다. 천천히 달리다 활주로에 바퀴가 올라갈 때 그 짜릿함을 느끼고 싶었다. 고막이 막혀 침을 꼴깍 삼키는 그 순간 막힌 속이 뻥 뚫리는 것처럼 환한 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그 짧은 순간을 다시금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코로나 19는 나에게 이런 경험을 주지 않는다. 갈 수 있는 나라도 별로 없지만 귀국 후 자가 격리 2주는 회사를 그만둬야 가능한 일이다.



서울을 벗어나 어디든 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 시국에 지인들을 찾아 가는 것이 맞는 일인지 모르겠다는 결론으로 결국 나는 집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이제 하루 지난 휴가는 그동안 사 놓기만 하고 읽지 못했던 책을 읽어 보기로 했다. 잘, 할 수 있겠지? 졸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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