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바이와 경계를 넘다 - 수의사 문성도, 5대륙 12만 킬로미터를 달리다
문성도 글.사진 / 일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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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바이와 의사, 그리고 여행과 길이라는 단어들의 조합을 떠 올리면 체게바라가 떠오르는 것은 너무나 상투적인 생각일까? 오토바이를 타고 대륙을 누비는 여행을 떠난 수의사의 얘기라는 말에 나는 그가 마치 혁명을 준비했던 20세기의 가장 완벽한 사람이라고 하는 체게바라가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속초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유럽으로 관통하는 그의 여행 경로에 군침이 흐른다. 넓디넓은 사막과 황무지를 가르며 달리는 오토바이를 떠올리면 사실 잠깐의 소름이 돋기는 했지만 그 황무지를 달려 만나게 될 도시들의 황홀한 만남은 얼마나 짜릿할 것인가.

언젠가 자전거를 타고 일본 여행을 한 어느 청년의 얘기를 보면서 걷다가 아닌 다른 수단을 통한 여행의 매력에 부러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걷는 것이 힘들고 많이 외롭다고 느꼈던 작년 제주도의 여행을 통해 혼자 떠나는 장기 여행이 얼마나 많은 외로움을 견디며 지내야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몇 달씩 혹은 일 년 넘게 혼자 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즐거운 한때를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 시간들보다 스스로 견뎌야 할 외로움과의 싸움에 더 많은 이해와 안쓰러움을 가질 수 있었다.

 

새로운 도시와의 만남 때문에 그의 여행이 부러운 것보다 오토바이를 타고 밤이 되면 1인용 텐트에서 잠을 청할 수 있는 그 자유로움이 가장 부럽다. 위험하다는 생각은 황무지 건너편으로 보내고 잠을 청할 수 있는 자유. 여자가 아직은 이렇게 여행을 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기 때문이고 물론 남자들도 위험한 도시들이 있기는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더 위험한 여행이 있기 때문에 그가 오토바이로 경계를 넘을 때마다 그의 데워지는 엔진에 부러울 수밖에 없다. 유럽 어느 나라에서 만난 여자 바이크 여행가를 만나서 생각이 드는 그 나라의 안전한 치안과 자유에 부럽다는 생각에 나는 더 없는 갈망을 느낀다.

“나와 마찬가지로 캠핑장에서 야영을 하면서 혼자 여행 중이었다. 여자 혼자서 장기간 오토바이 여행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과 안전한 치안상태, 그리고 여성의 자의식 등 모든 면이 부러웠다.” (p56)

 

 

오토바이를 통해 대륙을 넘는다는 것은 걷는 여행보다 더 어려웠던 순간이 많은 것 같다. 속도를 내고 비포장도로에서 전복되었던 그의 오토바이 때문에 한 달 때로는 넉 달을 깁스를 하고 낯선 도시에 머물러야 했고 오토바이의 부속이 없어 며칠을 기다려 수리를 해야 했지만 역시 여행이 주는 가장 큰 묘미, 사람과의 만남은 행복해 보였다.

 

아시아를 시작해 유럽, 유럽을 시작해 아프리카. 다시 아메리카 대륙의 모든 경계를 넘었던 그는 어떤 경계들을 또 넘고 있을까.

칠레, 우수아이아의 도시 그 세상의 끝에서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지면을 통해 느끼지 못했던 그 막막한 세상의 끝을 알고 싶다.

 

“ 그 도로의 공허 앞에서 나는 얼마나 나 자신이었나. 우리 행위의 주체가 각성한 자아가 아니라 무의식적 자아일 때 인간은 동물과 다를 것이 없다. 그곳에서 나는 완벽하게 혼자였고, 그것은 나에게 세상 모든 것과 동등한 나의 무게를 느끼게 해주었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우리는 얼마나 느끼고 있는가.”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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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오스 - 피의 맹세 스토리콜렉터 5
크리스토퍼 판즈워스 지음, 이미정 옮김 / 북로드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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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해결 해 줄 뱀파이어가 있어서 강력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 뱀파이어가 너무 탐이 난다. 그런 상상만 해도 막강한 나의 지원군이 있다는 생각만으로 흥분이 되는 사실이 아닐까. 그것으로 인해 생기는 권력은 탐욕을 부르고 갈망은 욕망으로 바뀌어 인간을 새로운 악으로 소모시켜 사라지게 할지도 모르겠다.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것 같은 이야기가 현재 일어났던 일들과 함께 만나서 마치 정말로 비밀 벙커에 그런 존재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상상하게 만드는 소재임은 틀림없다.

 

죽은 시체로 좀비를 만들고, 대통령을 위해 막강한 세력을 대항하는 뱀파이어의 얘기의 이 소설은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소재일 것이고 당연히 영화사는 그런 얘기를 가만 둘리가 없다. 소설이 영화로 다시 탄생하게 되었다는 얘기는 놀랍지 않다.

 

나는 좀비나 뱀파이어 영화를 잘 보지 못한다. 무엇보다 피가 낭자한 얘기는 정말 싫어서 그런 장르의 영화는 보지도 않는데 이 소설의 묘사에 섬뜩한 기분으로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보다 캐릭터의 힘이라고 생각된다.

뱀파이어 영화를 거의 본적이 없으니 너무나 아름다웠다는 탐 크루즈나 브레드 피트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지만 백 살이 넘게 대통령과 피의 맹세를 통해 그림자 속에서 어둠의 세력과 싸워 나가는 뱀파이어 케이드의 모습은 정말 섹시하기까지 하다. 이런 매력적인 역에 어떤 배우가 연기를 할지 참 궁금하기까지 하다.

그런 반명 케이드와 운명을 함께해야 하는 정치인 잭은 이상하게도 외국 배우가 아닌 밉상 전현무가 떠오르는 것일까. 마지막 장면은 그에게 너무나 안 어울리지만 이상하게 어울리는 잭과 전현무였다.

 

인물 설정이 확실하니 구성이 문제가 될 텐데 뱀파이어가 비밀병기가 되어 어둠의 세력과 싸워 나간다는 허무맹랑한 설정이 이상하게도 끌린다. 권선징악의 관점에서 볼 때 뱀파이어 케이드는 분명 악의 축에 있을 테지만 그는 선을 권하는 뱀파이어이로 그와 대립을 두는 콘라트 박사의 얘기는 또 다른 축으로 흥미를 끄는 구성임에 틀림없다. 콘라트의 얘기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콘라트의 등장은 뱀파이어 케이드 보다 훨씬 강력한 스릴을 가지고 있다.

한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잭과 케이드와의 어색한 만남이 쭉 연결될 것 같은 시리즈물로도 충분한 캐릭터의 탄생이다. 또 다른 시리즈물의 탄생이다.

 

여름나절 시원한 스릴러 한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며칠이었다. 보통은 책을 읽으면서 많은 포스트잇을 붙이면서 읽는 편인데 이 책은 단 한 개의 포스트잇도 붙여있지 않다. 그만큼 빨리 읽히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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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어 투 도어 - 내가 빌 포터로부터 배운 10가지
셸리 브레이디 지음, 장인선 옮김 / 시공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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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자기 계발서나 경영서를 통한 석세스 스토리를 많이 읽어봤지만, 지나온 시간을 스스로 반성하며 한 장 한 장 소중하게 읽어 본 책은 오랜만이다. 성공을 위해서 지켜 나가야 할 목록들로 가득한 책들은 많기는 하지만 가슴을 이끌며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책을 만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나는 빌 포터라는 사람의 얘기를 들어 본적도 없고 그와 관련된 그 어떤 영상도 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몇 장의 사진과 그와 관련된 얘기를 읽으며 보지도 못한 영상이 만들어져서 스스로 돌아가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든 것일까.

 

빌 포터는 언어 장애와 사지근육마비를 동반한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사람이다. 보통은 뇌성마비를 앓고 있다고 하면 움직이지 못하는 병이기에 그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장애인일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는 한 기업의 판매왕에 오른 사람이다. 그것도 사람들의 문을 두드리며 물건을 팔러 다니는 외판원인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카탈로그를 사람들에게 들이면서 그는 물건들을 팔러 다니고 그것을 통해 그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몫의 인생을 훌륭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빌의 지인인 셀리가 그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반추시키며 반성하고 수정하며 살아가는 그 시간이 참 부럽다. 누군가 자신을 계속 자극 시키며 살아가게 만드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란 말인가. 빌의 노력을 통해 나태한 자신의 삶의 한 부분을 고쳐 앞으로의 인생을 빛나게 만든 다는 것은 그 어떤 자기 계발서가 주지 못하는 훌륭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빌은 사람들의 집에 문들 두드리며 물건을 파는 외판원이다. 멋지게 생긴 사람도 아니고 사지 근육마비를 앓고 있는 뇌성마비 장애인이 문 앞에 서서 물건을 사라고 한다면 선뜻 그의 카탈로그에 있는 물건을 주문 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요즘처럼 자신의 집 앞에 전단지 한 장만 붙여 놓고 가도 그곳으로 전화를 해서 불법 투기 물에 대한 벌금을 얘기하며 다시는 그와 같은 행동을 하지 말 것을 경고 하는 전화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빌은 전단지가 아닌 판매를 위해 집으로 방문하는 그런 사람이 아닌가.

 

누구나 거절에 대한 반응은 차갑고 무섭고, 두렵다. 더욱이 일이라고 생각하며 찾아든 곳에서 거절의 얘기를 듣는 것은 직장을 그만두게 하고 싶은 마음을 더 간절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빌은 그런 두려움이 없었다. 거절을 해도 절대로 다시는 오지 말라며 문전박대를 해도 결국 빌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그 사람들은 빌의 단골 고객이 되었고, 빌의 위대한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처음 방문하는 고객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를 때 빌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수십 번 거절을 당한 집 앞에서 그런 마음을 가진다는 것이 가능할까. 하지만 빌은 거절에 대한 거부감보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로 모든 가치관을 바꾸고 있다. 그런 빌의 마음을 닮고 싶다. 처음에는 빌이 장애인이 아닌 일반인처럼 직업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목표가 최고가 되는 것이고 세일즈에서 우수 사원이 되는 것이라는 것에 좀 놀라기는 했다. 그리고 미안했다. 내가 그를 너무 낮게 그를 인식했다는 것이다. 그가 상대방의 거절에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문전박대를 받으면서도 그 집의 문을 두드리고 판매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노’라고 말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면 그 노라는 말을 대하는 태도와 부정적인 면에 집착하지 않는 빌의 능력은 많은 사람이 그를 존경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빌의 뇌성마비가 하느님께서 그에게 던진 최대의 ‘노’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빌은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해 나가는 것이다. 그에게 ‘노’라는 것은 없다.

그래서 그는 맑은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이나 하루도 빠짐없이 빌은 하루 여덟 시간 동안 15킬로미터 정도를 걸어 다니며 집집마다 문을 두드렸다. 매일 100여 집의 문을 두드렸고 운이 좋으면 열 집 중 한 집이 물건을 사주었다. 하지만 빌은 자신의 일을 거르지 않고 열심히 해 나간 것이다. 그의 그런 성실함을 정말 배우고 싶다. 그런 빌에게 그 어떤 디지털로도 이길 수 없는 그런 성실함을 배우고 싶다. 그 성실함으로 자신을 넘어서며 멋진 인생을 살고 있는 빌 때문에 나는 너무나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이 미안하기만 하다. 매일 매일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다. 빌처럼 부지런하게 살아갈 수도 없을 수 있다. 특별할 것 같지 않은 그의 삶이 특별해 보이는 것은 그가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문을 두드리며 사람이 나오길 기다리는 빌의 모습이 그려진다. 우리에게 앞으로 펼쳐질 삶에 수많은 문을 두드리며 살아 갈 것이다. 빌처럼 거절에 겁내지 않고 다시 한 번 또 문을 두드리며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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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7
제러미 시프먼 지음, 김형수 옮김 / 포노(PHONO)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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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본 발레 공연이 “호두까기의 인형”이었다. 강약이 살아있어 보는 내내 숨죽여 봐야했던 공연은 최고였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또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공연이었는데 아마도 발레리나들의 몸짓보다 나는 그 속에 담겨있는 신경쇠약증에 걸린 차이콥스키의 음악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조숙하기만 했던 나는 초등학교 5학년때 쇼팽의 야상곡을 들으며 울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좋아하게 되었던 쇼팽이후 다른 작곡가들에 대한 관심이 극히 떨어졌었는데 “호두까기의 인형” 때문에 차이콥스키의 음악의 강약이 그 어떤 갈등의 폭을 가지고 있는 드라마나 소설, 영화와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피아노 협주곡만 좋아했던 나에게 신세계나 다름없는 웅장한 음악이었다는 것으로 기억된다.

 

음악가의 일생이 궁금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죽음 때문에도 있다. 화가나 소설가들처럼 극한의 상황을 맞이하여 자살하는 이들의 삶처럼 음악가들도 영혼을 태우며 자신의 삶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러시아 작가가나 화가들의 삶은 늘 풍족하게 시작한다는 것이 부러울 따름이기는 하다. 차이콥스키 또한 풍족한 삶을 영위하며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그의 대저택에 기거하는 하인만 해도 십여 명이 넘고, 지금의 오디오와 같은 기능을 하는 기계로 음악을 들었다고 하니 신문명을 접하는 얼리어답터인 것 같기도 하고 부유했던 그의 미소년 사진을 보니 그가 이후에 겪었던 어려움은 생각 할 수가 없었다.

 

차이콥스키가 신경쇠약증에 걸린 예민하고 날카로운 성격의 소유자인 것은 사실 그의 호두까기의 음악만 듣더라도 그 강약의 폭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될 것도 같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감정 표현의 극한을 다루고 구축했기 때문에 바그너의 음악처럼 늘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P218)

 

잔잔한 감정을 흘려보내지 않고 늘 그의 예민하기만 한 감성이 그대로 표출되는 음악은 그런 감성 때문에 힘들었을 그의 유년시절과 청년기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둥글게 표현하지 못하고 날카로운 모서리로 자신의 감정을 계속해서 베어냈을 그는 또 어떤 고통 속에 있었을까. 그래서인지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것이 충격적이지 않았다. 남자들 사이에서 유독 연약하게만 보였던 차이콥스키의 모습은 당연히 법률학교속 같은 남자 동급생들에게는 어쩜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감정이 아니었을까. 그런 그가 선택했던 과부 나데즈다 필라레토브나 폰 메크의 만남 또한 이상하지 않았던 것은 정상적인 사랑을 해보지 못한 차이콥스키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의 마지막까지 감정을 가져갔던 사람도 결혼한 부인이 아닌 메크여사가 아닐까. 그녀를 향한 절절한 편지들은 톨스토이처럼 서사를 잘 다루는 능력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극작가가 아니었을지언정 충분한 감성을 가진 천재음악가의 러브레터였다.

 

모차르트는 16세에 천재성을 드러낸 음악을 작곡했다지만 차이콥스키는 선천적으로 보여줬던 천재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가 오페라가 실패를 했다가 다시 일어서고 성공하는 과정을 보면 어는 기업이 점차적으로 일어서는 석세스 스토리를 가진 기업역사를 보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는 늘 자신만만하기만 했다.

바흐에게는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가 위대한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우리에게는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헨델에게는 차이콥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헨델은?

헨델은 완전히 삼류라서 흥미조차 안생긴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다.“ (P35)

 

뭐 이런 차도남이 다있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는 참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이다. 창의성과 능수능란한 솜씨가 꾸준히 나타나지만 그의 천재성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P36) 시간이 필요했던 그의 음악처럼 그는 늘 타인에게 짐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악몽을 만들어내고 그것 때문에 우울증의 고전적인 증상이 나타나곤 했다. 예술가는 늘 이토록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만 하는 것일까.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는 관현악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또 그렇게 보냈을까. 우울하게만 생각되는 예술가의 삶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음악과 만났을 때는 빛날 수밖에 없다. 정직하게 감정을 실어 넣은 음악에 그 어떤 첨부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작곡가 중에서, 특히 위대한 작곡가 중에서 삶과 음악이 이토록 노골적이다 싶을 만틈 대책 없이 일치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인간으로서 차이콥스키는 정직하지도 않고 진실하지도 않고 표리부동하기도 하지만 그에게 무슨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음악가로서 그는 더없이 정직했다. 선율과 관현악 기법에서 보여준 대단한 재능과 단순명쾌한 음악 덕분에 r는 수백만 명이 사랑하는 작곡가가 되었다.” (P15)

 

이 책은 작가의 전기와 작가의 음악 ‘간주곡’으로 나눠있다. 작가의 일생을 골라서 읽어 볼 수도 있고 간주곡만 따로 읽을 수도 있게 만들어 놓아서 간혹 한 챕터씩 작가의 음악 강연을 듣것 같기만 하다. 무엇보다 이 책이 마음에 드는 것은 책과 함께 포함된 작가의 음악 CD다. 주장의 음악 CD를 다 듣고 나면 책을 덮을 수 있다. 마치 인생의 파노라마를 함께 타고 온 것만 같다. 그의 삶에 음악이 녹아있고, 시간이 흘러있다. 매우 매력적인 책이다. 이후에 시리즈로 올라와져 있는 리스트를 보았다. 내 사랑 쇼팽이 있다. 39세만 세상에 머물다가 사라진 그의 삶을 이렇게 또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생각하니 떨리기만 하다. 책 시리즈가 멋지다.

 

“그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위대한 음악가, 완벽한 장인, 강력하고 독창적일 때가 많은 정신, 위대하고도 넉넉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념이 미치는 해로운 영향에 인간 정신이 말살되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는 늘 그런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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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다다오의 도시방황]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안도 다다오의 도시방황
안도 다다오 지음, 이기웅 옮김 / 오픈하우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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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다다오의 도시 방황.

 

오래전부터 정말로 가지고 싶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출국과 입국 도장이 가득 찍힌 너덜너덜한 여권이었다. 요즘 유독 여행관련 책을 많이 읽다보니 그런 생각이 더 많이 들고 얼마전 아는 지인의 터키 여행 사진은 나의 갈망을 더욱 극대화 시켰다. 세계의 절반을 자전거로 돌았다는 모 예능 프로에 나온 젊은 청년이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부러움을 21세기도 아니고 20세기 그것도 1960년대에 아시아인이 유럽을 방황하며 그곳에서 자신이 원했던 건축이라는 꿈을 이뤄냈다는 인도다다오는 그저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스러운 인물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다.

 

보통은 건축 관련 대학을 나오거나 그쪽을 통한 일을 통해 건축과 관련된 직업을 갖은것이라고 생각하는 통상의 생각에서 벗어난 인물인 안도다다오의 세계 각국의 건축물에 대한 생각은 그저 건축이란 건물의 내부와 외형으로 나눠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무지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생소할 뿐이다.

 

언젠가 분당 쪽을 지나고 있었는데 빼곡히 들어찬 아파트 라인이 눈에 들어왔었다. 마치 누워 있는 여인의 곡선을 연상하게 하는 아파트의 높이들이었다. 도시를 디자인한다는 어느 광고 카피의 말처럼 건축의 미학은 날이 갈수록 깊어진다.

 

안도다다오가 건축의 꿈을 갖게 되는 것은 어느 유명 건축 설계자의 도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채 건축을 지향한 나날은 긴장과 불안 속에서 낯선 땅을 홀로 헤매는 여정과 같다고 생각했다는 그는 (P11) 1960년대에 아르바이트비를 모아 무거운 짐 가방을 들고 해외여행에 나선다. 그가 건축을 꿈꿀 수 있게 해줬던 르 코르뷔지와 만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도 있겠지만 그것 때문에 안도다다오는 전문적인 교육 없이 멋진 건축가가 되었다.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나훗카로 건너간 후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모스크바를 지나, 북구에서 파리로 들어가는 코스를 밟아 그는 르 코르뷔지의 건물을 보러갔다는 부분에서 그의 오랜 시간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비행기 한번이면 하루도 안 걸려 태평양도 건널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의 시대는 이렇게 눈물겹게 길을 건너야만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를 통해 할게 된 무수히 많은 도시들은 그가 빛을 좋아하는 건축가로 만든 것은 아닐까.

 

그의 건축에 대한 소신 있는 신념은 멋지다. 그 어떤 형태와 형식이 없는 로스엔젤레스의 도시를 보며 그는 말했다.

“나는 건축에 최소한의 자료와 형태를 이용하여 최대한의 효과를 발취하고자 한다. 일견 단순하게 보일지라도 실은 복잡한 공간을 창출하고자 한다. 나는 건축을 만들 때 예컨대 원과 정방형, 입방체와 같은 원초적이라 할 최소한의 기하학 형태를 이용한다. 애매함은 철저히 배제하여 모든 요소를 내려버림으로써 성립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P218)

모든 요소를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이용하여 만들어내는 건축이야 말고 가장 근사한 작품이 아닐까. 인공적으로 만들어 질 수밖에 없는 건축은 자연을 살려 놓는다고 해도 이미 자연은 훼손되어 버린다고 생각한다. 웅장하고 멋있게 만들기 위해서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에서 자연을 살려 놓는 그 자연스러움이 가장 아름다운 건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작품들을 더 많이 만났으면 좋겠지만 요즘 어디 그런 작품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간혹 드라마나 영화 혹은 현실에서도 건축을 의뢰한 사람들과 설계자들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아 무산되거나 큰 갈등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것들을 정의하는 그의 말 또한 현명한 부분들이 있다.

“건축은 건축가 혼자의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좋은 건축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다양한 조건이 구비되어야만 한다. 그 조건 중 하나로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건축주다. 예컨대 가우디의 구엘 공원도 구엘이라는 후원자의 열정 없이는 태어날 수 없었고, 구겐하임 미술관도 라이트의 꿈을 공유하는 감성을 갖춘 구겐하임 없이는 완성될 수 없었다. 건축주 또한 건축가의 공동작업자다.” (P212)

 

그는 구엘에 대한 언급이 많다. 구엘은 유명한 가우디의 후원자였다. 그런 후원자가 있어야만 건축은 건축가만의 것이 아니라 건축가의 이성과 창조력, 건설자의 기술과 열정, 거기에 건축주의 경제력과 의지가 존재해야 비로소 건축은 성립된다고 했다.

건축가의 설계를 받아 줄 수 있는 경제력 있는 건축주가 있어야 한다는 말에 예술가의 혼을 모두 담아주며 그를 후원해줄 수 있어서 그의 예술세계가 확대될 수 있었던 오래전 화가들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비록 넉넉한 경제력은 아니었지만 그를 먹여 살렸던 테오가 없었다면 고흐는 더 일찍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본인의 50세 생일 선물로 게스트하우스를 만들어 달라고 한 벨바움씨와의 작업 얘기에 그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좋은 건축을 만들기 위해서 좋은 건축가와 건축주가 필요하다는 그의 말에 따르면 그가 만들어 낸 많은 훌륭한 건축물들은 얼마나 많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 이뤄졌다는 것인가. 그를 믿고 그의 신뢰를 통해 만들어진 공간과 그 공간속에 녹아든 시간이 멋지지 않을 수 없다.

 

콘크리트와 철과 유리라는 소재, 그리고 그것들을 밑받침하는 기술에 따라 확대해온 20세기의 건축, 그 자체에 집착한다고 하는 그의 건축물의 사진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정규 교육도 받지 않고 노력하며 만들어낸 그의 집착물들에 마음이 녹녹해지고 말았다. 그의 도시 방황 속에 스며들었던 그의 건축의 생각들은 나를 자꾸만 들뜨게 만들었다. 한 건축가가 자신이 떠돌았던 유럽과 아메리카의 도시들에 남겨진 방명록을 들춰보는 재미에 자꾸만 그 도시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가 마치지 못한 도시를 내가 방황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앞으로 건물이 그냥 건물이 아닌 누군가의 집념의 집착물이라고 생각하니 나의 집착물은 무얼까 고민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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