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의 황금 연휴는 없지만
일 년 동안 유일하게 기다렸던 휴가는 늘 비행기를 타는 일로 시작되었지만 작년부터 나의 휴가는 그러지 못했다. 물론 이런 나의 상황은 많은 사람과 비슷할 것이겠지만. 작년과 비슷한 책의 양을 휴가 전에 미리 준비해 두었다. 일주일 동안 15권의 책을 읽어 볼 생각으로 그동안 사 놓고 방치 되었던 책을 모아서 테이블 앞에 세팅까지 끝냈다. 이제 휴가 전날 추천받은 브레드 앤 버터 샤도네이 2019 와인과 함께 저녁을 맞으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준비한 샤도네이는 장식장 안으로도 들어가지 못하고 바닥에 방치되고 말았다.
휴가 전날 밤 단체 카톡이 쉬지 않고 울렸다. 집에 오면 비행기 모드로 해 놓고 싶을 때가 많은 핸드폰은 이벤트가 있는 날은 쉬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했다. 분명 뭔가 일이 생겼지만 모른척했다. 쉬지 않는 카톡 소리에 결국 카톡방에 들어가 수십 개의 회사 단체 내용의 처음부터 읽으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수업을 했던 한명이 코로나 확진으로 수십 명이 검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하필 수업이 많은 날, 동선이 겹친 아이들이 많아 그 수가 더 많았다. 늦은 밤, 놀란 아이들에게 그 부모님들에게 전화를 걸고 잠을 자지 못한 채 나도 검사를 받으러 보건소로 향했다.
그동안 수많은 확진 숫자를 보아도 사실 감각이 없었다. 간혹 지인의 가족들이 혹은 동료의 가족들이 동선이 겹쳐 검사를 받았지만 바로 내 앞에서 벌어져 나까지 검사를 받아야 했던 일은 다행히 한 번도 없었기에 무심했었다. 나의 것이 되니 불덩이처럼 뜨거운 것들을 손에 놓고 고통을 받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떤 일이 올지 모르니 대비는 하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막상 내 눈 앞에 현실로 다가오니 마음먹었던 것들은 백지가 되었다. 그런 것들은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 참 무식한 생각을 했다.
면봉이 뇌까지 찌를것 같았다는 지인의 과장된 얘기가 현실로 느껴지며 <음성>이라는 말을 듣기까지의 시간을 보내며 집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 있다가 도착한 <음성>이라는 문자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수업 시간이 많았던 한분의 동료와 열 명의 아이들이 자가 격리가 되었다. 능동적 감시자가 된 나는 외부 출입은 할 수 있지만 다수가 모인 장소는 갈 수 없는 이상한 상황에 놓인 사람이 되었다.
나가도 되지만 사람 많은 곳은 가지 말라는 것, 어쩌라는 건지...가슴이 답답했다. 지옥은 이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수없이 울리는 회원모들의 전화를 받느라 고통스러웠다. 자가 격리가 된 회원모들에게 원망의 전화를 하루에 2시간 이상 일주일을 받고 나니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더운 8월의 여름휴가를 10층 아파트 창문을 열고 리코더를 불며 보냈다. 15권을 읽겠다는 나의 다짐은 리코더의 음계를 하나씩 외우며 사라졌다. 그렇게 15권의 책 리스트는 테이블에 그대로 있게 되었고 9월의 연휴를 맞았다. 9월의 휴가는 30권의 책을 준비 했다. 다행히 20권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 만화라 쉽게 빨리 읽을 수 있을 것이고 열린책들도 얇아 문제 될것이 없을 것 같았던 그 황금연휴.....그 연휴 시작 전에 그 지옥 같은 8월의 일이 또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나는 능동적 감시자가 되어 그 어떤 곳에도 나가지 못하고 스스로 자가 격리자가 되어 추석을 맞았다.
눈을 뜨면 제발 9월이 끝나길 바라며 원망의 전화를 하루에 몇 통씩 받았다. 능동감시가 끝나는 마지막 날은 결국 눈물을 흘렸다. 억울한 마음을 눈물로밖에 표현을 못하다니. 진부한 모습밖에 없는 슬픈 현실의 문 앞에 나의 분노는 눈물밖에 없다니.
오래전에 읽고 다시 읽고 싶어 사들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권, 그리고 열린책들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 10권 그리고 그 이후의 책들을 골라 놓고 기다렸던 황금연휴의 시간들이 다 갔지만 진부한 슬픔을 독서로 풀겠다는 것은 더 진부한 상황인가 싶지만...12월 말까지 어찌 어찌 다 해결해 보련다. 만화로 쉽게 그려진 박시백의 책들은 벌써 10권 다 읽었고 열린책들도 세권 클리어 했으니 어찌어찌 되겠지.
잠깐 잠이 들면 마음의 짐으로 남은 책들을 모두 읽고 12월 말이 되었으면 좋겠다. 정말로..나이 한 살 더 먹는 것은 이제 아무렇지 않고 그래...뭐 어때. 나만 나이 먹는 것도 아니고 아직 11월도 안갔으니 어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