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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
카롤린 라로슈 지음, 김성희 옮김, 김진희 감수 / 윌컴퍼니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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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롤린 라로슈가 첫머리에서 인용하듯 ㅡ 앙드레 말로 왈, 「예술은 형식으로 다른 형식을 정복하는 것」 ㅡ 예술은 끊임없는 재해석이자 영원한 동어반복인 듯싶다. 저 옛날 사람들에 의해 소재와 기법이 나올 만큼 다 나왔다면 더욱 그러하다. 어떻게 바꾸고, 어떻게 해체하고, 어떻게 조합하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라면 기존의 것들과 조금이라도 더 다르고 조금이라도 더 기발한 아이디어로 접근하려는 방식이 필요한 법. 그중에서도 미술은 곧바로 한눈에 들어오는 것인데, 때때로 그 본보기와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확연히 알아챌 수 있는가하면, 어떨 땐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음에도 동일한 소재로 인해 모방이나 패러디 아니면 오마주 작품이라 여겨지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책을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재는 보편적이나 기발한 상상력으로 눈을 사로잡는 작품을 하나 발견했다. 서양화에서 성모 혹은 (아기) 예수는 꽤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자 이야깃거리여서 성화의 발전과 다양성에도 일단의 영향을 끼쳤을 것인데, 특히 다 빈치를 비롯해 보티첼리와 라파엘로 등에 의해 그려진 작품들이 그 사례가 될 것이다. 그들의 그림은 모두 15, 16세기를 관통하며 후대의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20세기 현대에 들어 막스 에른스트가 그린 성모와 아기 예수(아래 그림 왼쪽)를 보면 그야말로 '그 담대함을 대놓고 피력하는' 멋진 그림이라는 생각밖엔 들지 않는다. 바로 <세 명의 목격자 앞에서 아기 예수를 체벌하는 성모>다. 더군다나 그림에서 성모 마리아는 시뻘건 원피스(일까?) 차림인데다가 아기 예수의 볼기짝은 이미 여러 차례 맞았던 듯 붉게 달아올라 있다(그녀는 어지간히 말려서는 꿈쩍도 하지 않을 눈빛을 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고야와 마네의 발코니 그림을 초현실적으로 재해석한 마그리트의 관(棺)도 있다(위 그림 오른쪽). 고야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 두 명(각기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과 그녀들을 감시하듯 지켜보는 남자들, 그리고 마네의 발코니엔 역시 다른 시선의 사람들과 그들을 지켜보는 것인지 아닌지 모를 아주 어둡게 그려진 소년이 있었다. 하지만 마그리트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이 사람들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멋진 방식으로 ㅡ 고야와 마네의 그림 속에서 상대방에게 관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만 같은 사람들의 소통 부재 ㅡ 표현해냈다. 그는 사람을 관으로 대체했는데, 심지어 본래 마네의 그림에서 그의 동생의 약혼녀가 앉아있는 포즈를 그대로 재현해 관을 비틀고 꺾어 사람처럼 앉히기까지 했다. 주인을 찾는 듯 어슬렁거리는 개와 몇몇의 행인이 등장하는 생라자르 역을 가로지르는 철제 다리 그림(귀스타브 카유보트 <유럽의 다리>,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되기도 했다)을 표지판과 파이프, 원색의 커다란 조합물들로 대체한 페르낭 레제(p.146), 근엄하며 점잖게 앉아있는 교황과 추기경의 초상을 유령처럼 울부짖는 괴기스런 작품으로 변형시킨 베이컨(p.55), 모나리자(아래 그림)에게 콧수염을 선물하고 재미있는 문구(L.H.O.O.Q.)까지 덧붙인 뒤샹(p.251)까지……. 이들을 그저 '베끼다'라는 동사 하나로만 표현해야 할까? 지극히 공개적으로 원형을 밝히고 거기에 자신만의 새로운 생각을 집어넣는 행위를? 고흐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엔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한다. 「생각할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내가 밀레의 작품들을 모사하려고 애쓰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야. 이것은 단순히 베껴 그리는 작업이 아니야. 그보다는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가까워. 흑백의 명암에서 느껴지는 인상을 색채의 언어로 풀어내는 거지.」 옛 가수들의 노래를 새로이 편곡해 리메이크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보아도 좋지 않을까? 언제든 시대를 바꿔가며 그 모습 역시 다르게 접근한 또 다른 창작물을 그저 모사품이나 모방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을 거다. 거기엔 분명 시대의 이야기가 담겨 있고 사회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으며 그때그때의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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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제국
이토 게이카쿠.엔조 도 지음, 김수현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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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 한 자밤에 불과한 21그램의 영혼과 의식을 좇는 작품이다. 갈바니즘과 생명 창조, 동일인인 괴물 크리처(the creature)와 창조자(the creator), 인간과 인간의 주인에 관한 이야기. 왓슨, 반 헬싱, 프레데릭 버나비, 프라이데이(『로빈슨 크루소』? 『목요일이었던 남자』?), 알렉세이 표도르비치 카라마조프, 헬레나 블라바츠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윌리엄 버로스, 찰스 다윈, 언캐니 밸리, 로봇 3원칙과 러브크래프트의 냄새까지. 더군다나 실존 인물과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자들이 뒤섞여, 기존에 번역된 엔조 도의 『어릿광대의 나비』와 같이 복잡하고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처럼 희한하다. 소설은 인간의 의사와 인식이란 것은, 인간에 기생하며 지배하는 균주(菌株)가 만들어낸 환상이지 않을까 하는 물음을 던진다. 무대는 19세기 말,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움직이는 시체가 양산되는 세계. 화자인 존 왓슨은 첩보원이 되어 '죽은 자의 제국'을 찾아 나선다. (다소 거리끼게 되는 것이 있다면 엔조 도의 이해하기 어려운 서술일 텐데 한차례 그의 작품을 읽은 후라면 이쪽은 차라리 장난에 가까울 정도다. 또한 근과거와 근미래를 다루며 이런저런 요소들로 인해 스팀펑크로 분류되는 모양이긴 하나…… 글쎄) 영혼이 빠져나간 시신에 가짜 영혼을 주입해 좀비처럼 움직이게 만든 것을 여기선 '죽은 자'라 부르는데, 주인공 왓슨이 최초의 죽은 자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이 특히 눈여겨볼만하다. 반 헬싱 교수의 주선(스카우트)으로 첩보기관 월싱엄의 일원이 되어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나는 왓슨은 '죽은 자들의 왕국'을 건설한 카라마조프라는 자를 만나고, 그로부터 빅터가 창조한 최초의 죽은 자 '더 원'의 생존과 생명 창조의 비밀이 담긴 <빅터의 수기>에 관해 알게 된다. 사실 『죽은 자의 제국』은 왓슨이 더 원을 만나기까지의 엔터테인먼트적 이야기 진행, 그리고 훗날 그가 고민하게 되는 저간의 사정과 놀라운 결말 (더 원의 등장 이전과 이후) 이 두 부분으로 나뉜다. 그러므로 작품의 프롤로그만 남긴 채 요절한 이토 게이가쿠의 '인간은 죽은 뒤에도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명제는 당연히 전반에 걸쳐 이어지지만 왓슨이 품는 인간에 대한 의심은 결국 죽은 자에 의해 촉발된다. 결말만 떼어 보면 이름 없는 크리처가 자신의 창조자(들)를 설득한 셈일 텐데, 이 부분에서 모든 빅터들 ㅡ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ㅡ 의 고민이 폭발하고 마는 거다. 물론 그녀의 작품에선 인간의 오만과 비극이 초점이 되지만 여기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불분명한 증명과 그것에 대한 회의(懷疑)가 주를 이루어 '의심할 수 없는 사실 / 가당찮은 논리'로 양분되어(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구분?) 대결한다(그렇다고는 하나 신이 인간의식의 바깥에 있다는 기독교적 관심을 깔아뭉개는 것으로 봐서는 곤란할 듯싶다)ㅡ 인간으로 하여금 의식하게 만드는 균주가 제 숙주(인간)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죽은 자의 제국』은 그 '죽은 자'가 누구를 지칭하는가 하는 당연한 물음을 함께 던지는데, 개인적으로 상당히 잘 쓴 소설이라고는 보지 않지만 (이미 마련된 최초의 플롯을 가지고 집필했다는 점에서 오는 물리적인 어려움은 차치하고라도) 하나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과정은 꽤 볼만하다ㅡ 엔조 도는 (이토 게이카쿠의 생전 두 작품을 언급하며) 『학살 기관』의 언어에 의한 인간사회 붕괴와 『하모니』에서 그린 인간 의식 자체의 상실에 이어, '죽은 이후의 인간'에 대한 맥락을 받아들이는 것을 목표했다고 말한 바 있다. 때문에 대체로 지난하게 넘어가는 페이지를 정복하고 나면, 이 소설이 철저하게 엔터테인먼트 작품으로 구상되었다는 작가의 말은 일거에 부정될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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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롤랑 바르트 지음, 변광배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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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철저히 내 관심사에 의해 소설을 통제하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소설 속에서 주눅 들기를 원망(願望)한다. '소설 = 환상화된 형식'이라면 글쓰기-의지(스크립투리레, scripturire) ㅡ 소설을 쓰고자 하는 의지 ㅡ 또한 글쓰기-욕망에 복종할 수밖에 없으니 종국엔 동일 선상에서 환상화된다. 그리고 그 환상이란 심히 걱정스럽고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이미 소설-준비로서의 과정에서 중요시되어야만 하는데, 더군다나 바르트에게 글쓰기 욕망은 자신이 파악할 수 있는 출발점을 품고 있으므로(p.228)ㅡ 그는 이미 매혹된 주체이자, 소설이 생산성을 띠고 태어난 변이된 산물이라는 정의와 은유 앞에서 반박할 수 없는 가련한 존재이기도 하다(하여 나는 그가 살아서 소설을 기획한다 한들, 소설의 외양을 갖춘 글을 쓴다 한들, '더럽게' 이타적이어서 '더럽게' 재미없는 결과물이 나왔을 거라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가 필기구를 꺼내 메모하고 있는 순간에도 현재는 증발되고 당장의 포착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다(게다가 그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ㅡ 그는 소설을 만들지 못하고 그저 소설 한 편을 만들 '것처럼' 하고 말 것이다…….(p.55) 사실 소설(문학)의 출발이란 모든 연속과 단속 위에서 너무나도 교활한 사물의 법칙에 의해 그 운동성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는 찰나의 현재, 잠정적 휴지에 접어든 한 장면의 파편을 대체 어떻게 기능하게 만들 것인가? 당연히 쓰는 것은 읽는 것과 대척에 있다. 그렇다면 글쓰기가 읽기를 쫓아내는 것일까?(p.409) 은유를 은유화하고, 결정적으로 실마리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간극을 메울 착상이 제대로 응집되고 서술되는 것은 일종의 수수께끼 같은 일이지 않던가? 맙소사. 베케트의 남자들이 줄기차게 읊어대는 대사가 이 진실을 재현하고 있을 따름이다ㅡ 「Nothing to be done.」




……비록 일상 속에 내팽개쳐져 있어도 심각한 죄의식의 회귀처럼 느껴지는 추락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바로 그것이 권태의 양면성입니다. 권태를 뒤로하고 글을 쓰지만 글쓰기를 막는 두 번째 권태가(어쩌면 첫 번째 권태가 전환된 것입니다) 작업의 내부에서 솟아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 나는 이 '작은' 권태에 대항하는 단 하나의 해결책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실용적이고 능동적이어야 합니다.
ㅡ 본문 p.440~441




내가 글을 하나 쓴다면 바르트와 궤를 같이하진 못할는지도 모른다. 문학을 사랑한다는 건 읽는 그 순간 현재(성), 즉각성에 관한 모든 의혹을 일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ㅡ 적어도 바르트에겐 그렇다. 그러므로 문학이 일종의 매춘이라는 내 의견이자 확고한 신념과는, 미끼로 사기를 친 뒤 주둥이를 한 대 갈겨서 물고기를 낚는, 전혀 다를 것이다. 물론 '현재'는 '현재적인 것'과 구분되며, 때문에 현재는 생생하고 현재적인 것은 소음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맞다.(p.445) 동시에 문학이 가진 욕망이 더욱 생생하고 더욱더 현재적일 수 있다는 것도 맞다. 고삐 풀린 허무감 속에서 발을 동동 구를지언정 문학은 하나의 부속물로서가 아닌 그 자체로 개인적 우주를 들이받을 수(도) 있는 까닭이다. 글쓰기-의지와 글쓰기-욕망은 이로써 (비로소) 완성된다(완성이라는 단어에 가까워진다). 그렇다면 나는 반드시 무언가를 써야만 하는가? 나는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생물인가? 익숙한 감정, 잡동사니, 반복의 공간, 비굴한 생활 전선, 이들 속에서 나는 어떤 식으로 글쓰기-의지와 글쓰기-욕망을 증명해야 할 것인가? 심지어 나는 '비현재'와 '비현재적인 것'마저 배제할 수 없는데도! 바르트가 글쓰기(문학)에 접근하려는 방식을 나는 때때로 참을 수 없다(이는 종종 '가독성'과 '단순성'에 관해서도 해당되는데, 본문에서 그 자신은 해당되지 않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또한 하이쿠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상당량의 글에서도 그렇다). 그렇다면 플로베르에 의해 '절대적 글쓰기'는 본질이 되는가? ㅡ 「나는 한 사람의 인간-펜입니다. 나는 펜에 의해, 펜 때문에, 펜과의 관련 속에서, 펜과 더불어 더 많이 느낍니다.」 ㅡ 전달자가 아닌 주체적 인격을 지닌 작가로서 말이다 ㅡ 그리하여 여기서 '글쓰다'는 자동사가 된다(작가가 무언가를 쓰는 자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그냥 쓰는 자라면).




나는 깊이, 다시 말해 완강하게, 다시 말해 계속해서 내가 쓰기 시작한 때부터,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믿고 있습니다. 책 속에 저장되어야 하는 이 욕망을 말입니다. 언어활동의 욕망, 꽤 큰 언어활동의 욕망입니다 (...) 문학이 증언할 수 있을지 모르는 유일한 혁명은 끊임없이 새롭게 환기시키는 것, 다시 말해 욕망 속에는 고귀함의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더 좋게는 고귀한 욕망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 나는 왜 그것을 ㅡ 당장, 아직까지 ㅡ 만들지 않을까요?
ㅡ 본문 p. 483~484




그러나 이 극복되지 못함, 대기(待機), 유무한의 기다림이 글쓰기의 또 다른 난점일지도 모른다. 질서와 무질서의 공간인 테이블과 통합의 미덕을 발휘하는 밤[夜]의 시간 그리고 수첩과 필기구를 넣을 수 있는 주머니 달린 옷은 차치하고라도, 누군가가 실제로 글쓰기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ㅡ 단순히 페달을 밟는다고 해서 저절로 나아가지는 않는 것이며, 결코 아무것도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p.421) 위기가 있은 뒤 시동(始動) 작업이 있고, 그렇게 된다면 능동적으로 발견되는 것들(멋진 직관)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증거도 증언도 증인도 없는 봉합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해진 도식에 맞추고 '상상적 직사각형'을 채워나가면서 말이다. 바르트는 끊임없는 가필을 언급한다. '마요네즈 기법.' 일단 마요네즈가 만들어지면 식용유를 무한히 더 넣을 수 있고, 그 마요네즈 덩어리 앞에는 이런 글이 끝없이 쓰여 있다ㅡ <어딘가에 더하기.> 그러나 이 '끊임없는 필기(혹은 두드리기)'는 그 자체로 끊임없는 리듬의 블랙홀인 것으로, 꽤나 까다로운 조각 모음이 될 공산도 크다. 이 조바심 앞에 무릎 꿇는 당황스러움은 나를 고장 내고 내 글을 고장 나게 하며 내 손에 있는 펜마저 부러뜨려버린다. (바르트는 많은 부분에서 귀엽게 분(扮)해 이를 대처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바르트에겐 '영원한 기다림'을 극복할 만한 재간은 없었던 것 같다(그가 죽은 때문이 아니다). 글쓰기-의지, 글쓰기-욕망, 이 고요한 무풍지대이자 거센 와류의 한복판에서 글을 쓰는 것(문학하기)이 어떤 방법론에 의지해 끝맺음을 가져갈 것인지는 그 욕망의 이전과 이후의 변화 속에서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문학이란 환상은 좀처럼 확신할 수 없는(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희망과 소원으로 남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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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의 시대>
한국과 독일의 사회학자 16명이 모였다. 2차대전 이후의 반공주의가 양국 사회에 미친 영향과 유산 혹은 산물들, 이런저런 균열들을 바라본다. 이데올로기 상의 반공주의, 정치적 문제, 그에 대한 학문적 담론과 논의가 담겨 있다.




<상상하기 어려운 존재에 관한 책>
희귀한 동물들의 집합소. 그러나 당연하게도 인간과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들의 생존기, 그리고 인간의 생존기.




<혐오와 수치심>
하나의 감정이 법체계에 간섭한다고 했을 때, 그럼에도 혐오와 수치심만큼은 안 된다는 입장. 왜 그런가? 양쪽 모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배척의 도구로 이용될 우려가 있다는 저자의 말. 그렇다면 이것은 약자와 강자의 사이에서 고민되지 않을 수 없다.




<판문점 체제의 기원>
판문점 체제. 종전도 아니고 국가가 둘로 나뉜 것도 아닌 휴전 또는 정전 상태에서 태어난 물건. 자유주의적 평화의 역사적 상흔과 변화를 톺아본다.




<담바고 문화사>
담배, 담배를 보자. 세금을 뽑아내기 좋은 물건이자 값싼 기호품이었던 담배였다. 그리고 책은 그보다 더 이전을 돌아본다. 신선의 풀, 못된 물건이라는 다양한 인식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지만 오늘날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것과 같은 인식은 아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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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주의 선언 - 좋은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문광훈 지음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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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로그엔 총 네 개의 자화상이 등장한다. 죠르죠네의 삐딱한 고개, 뒤러의 정면 응시, 로사의 앙다문 입술, 앙소르의 괴물들. 특히 마지막 앙소르의 자화상에는 다종다양한 '것'들이 나오는데 그 기괴한 괴물, 좀비, 해골, 시체, 인간들은 '멀쩡한 앙소르'를 겁먹게 하지 못하며, 멋진 붉은 모자를 쓴 그는 종국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과 동일시된다. 살아있는 인간의 피로 연명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자화상의 주인공은 죽어서도 죽지 않는 좀비나 흡혈귀와도 같다. 나ㅡ앙소르ㅡ그들은 거울, 성수(聖水), 십자가나 마늘 같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저들의 두려움은 승진, 실패, 잔고 액수, 자동차, 실직(失職), 안락한 집에 있다. 때문에 문광훈에 의하면 인간은 똥파리처럼 죽는다. 스스로의 생활을 만들지 못하고 자신의 색채를 찾지 못한다면, 이라는 전제가 붙어있긴 하나, 그의 말대로 끝내 영원히 이 세계에서 똥파리처럼 죽어갈 공산이 클 것이다. 공공의 미덕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예술 체험이 자발적 발의와 사유를 촉발하지 못한다면 더욱 그렇다. 예술의 진정성이라. 글쎄. 아름다움이 내가 보고 만질 수 있게끔 경험적 산물로써 작용해야 하건만 그 고유하고 일관된(현대사회에서) 방식이 아름다움 자체로 현현되기까지의 시간과 간극을 어떻게 메운다는 건가? 항거의 발현이라는 것이 규범 일탈로 정의되지 않고 예술생산 본연의 가치를 드러내는 경우가 얼마나 가능할 것인가? 결국 나ㅡ앙소르ㅡ우리가 주체를 이해하고 연마해, 자신과 예술 발현의 관계를 개선해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다. 더군다나 규범의 틀 속에서가 아닌 나 스스로 즐겁고 기꺼워하는 상태에서 말이다.





자유롭다는 건 쾌락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자신의 충동과 욕망에 봉사하지 않는다는 의미인가? 그것도 욕망 자체를 없애려 해서도 안 되고 욕망에 충실하지 않으려는 자세도 아닌 유의미한 가능성 속에서? 당연히 자발적 절제와 분별은 우리 정신의 격려와 고취를 가능케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가 다소 답답할 수도 있는 것은, 저자의 아내가 토로했던 점과도 일견 맞닿아 있는데, 그것은 미덕이라 부를 수 있는 아름다움이 곧 행복이며 그 아름다움이란 선하고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는 추론이 가능한 상태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까닭이다. 이 대목에서 살짝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왜냐. 바로 문광훈 자신도 당당히 털어놓지 않았던가? 인간은 똥파리처럼 죽는다고 말이다. 물론 이 문장으로 하여금 똥파리처럼 죽지 않기 위해 이러이러한 논의를 하고 체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는 해도, 이것을 공론장 한가운데로 들이밀기엔 얼마간의 어려움이 보인다. 그것은 인식 전환과 실천의 문제이며 변화의 핵심이어야 할 나 자신조차도 지독히 사회화되었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일이다. 나ㅡ앙소르ㅡ우리는 이러한 '사회화된 존재'로부터 교정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때때로 심미적 소통은커녕 심미적 고통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리시의 젊은 헨더슨이 아무리 그 여성을 찾아 헤맨다손 치더라도 끝끝내 환상에 불과했던 것처럼. 그럼 대체 뭐가 문제인가? 바로 현실에서 일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느냐다. 동시에 이 명제는 참으로 얄궂은 것이어서, 현실의 나ㅡ예술ㅡ심미의 경험ㅡ아름다움이 반드시 현실적인 것이어야만 하는가, 하는 명제와도 상충하게 된다. 성공하기 전부터 이미 실패한 상태이고, 실패하기 전에 미리 성공의 달큼함을 맛본 정말이지 우스꽝스러운 상황이다. 그러나 독자 된 입장인 내가 이 대결 구도에서 갈팡질팡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실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인데(그럴 마음도 들지 않는다), 엄숙한 고담준론의 보편성을 압도할 재간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인정과 부정 사이에서 멀거니 고민하기에 앞서 저자가 먼저 나서서 고민해주고 있으므로 그렇다. 그러니 일단 귀 기울여 들어보자. 심미주의를 선언하는 일이 가능한 것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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