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일인자 1 - 1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1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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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7부작으로 정리된 <마스터 오브 로마> 시리즈 중 1부 『로마의 일인자』 제1권. 하나같이 두껍기 그지없어서 한국어 번역이 완료되면 총 스무 권쯤은 될 것 같다. 꾸준한 투자와 관심이 없으면 좌초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는 소위 대작이 갖는 불안감과 분권 없이 출간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과거 2부까지 출간되었다 절판을 겪는 안타까움이 있었으니 이번만큼은……). 내용으로 들어가자면 언제나 그렇듯, 역사는 사람과 장소만 바뀔 뿐 그대로 머물러 있다고 해도 될 정도가 아닐는지. 『로마의 일인자』 1권은 카이사르(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리우스(가이우스 마리우스), 술라(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이 세 남자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카이사르가 자신의 열여덟 먹은 딸과 그녀보다 서른은 좋이 나이 든 군인 마리우스를 결혼시키고자 하고, 카이사르의 아내가 이를 아무렇지 않게 '사업 문제'라 부르며(맙소사!), 마리우스가 앞으로 철저히 혼자가 될 거라 눈물을 흘리는 아내와의 이혼을 요구하면서 내뱉는 '그러게 작은 개라도 길러보라'라는 우스꽝스런 어조, 명문가 출신이나 파락호에 난봉꾼인 술라의 운명 등이 얽히고설킨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자신의 피호민(被護民)인 평민을 보호하는 귀족이 유독 자기 피호민들이 많은 지역에 공공사업 계획을 추진하거나, 유서 깊은 가문과 돈이 결혼이란 방식으로 어우러져 일종의 파급효과를 내거나, 유력 정치인(들)이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갖은 술수를 쓰는 모양새 그리고 끔찍하고 더러운 파벌 정치는 역시 사람과 장소만 바뀔 뿐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총 세 권으로 제작될 1부 『로마의 일인자』를 다 읽어보아야 이 걸작의 겉핥기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아직은 여기까지다. 다만 시리아의 점술가 마르타가 마리우스를 두고 일곱 번이나 집정관이 되어 '로마 제3의 건국자'란 칭호를 얻을 거라 읊은 예언과 더불어, 독버섯 등으로 두 여자를 저세상으로 보낸 야심가 술라가 카이사르의 둘째 딸과 결혼하며 얻은 카이사르 가문의 후원(동시에 동서지간이 된 마리우스의 재정적 지원)으로 시작할 정치적 입지 다지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가 최대 관심사가 되리라. 『로마의 일인자』가 모습을 갖추고 가이드북(용어와 개요를 정리한 소책자일 듯하다)과 함께 출간되는 것은 이제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시오노 나나미의 저 유명했던 책도 읽지 않았고 로마제국의 역사에 관해서도 전반 지식이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콜린 매컬로의 팩션이 일반 역사 서적에 비해 제격이지 않겠나. 아마도 로마제국을 다룬 딱딱한 역사서 한 권을 읽으라 했다면 쉬 접근하기 어려웠을 터다(13년간의 고증과 20년에 가까운 집필 기간을 거쳤다던가! 심지어 연구와 독서로 인해 심지어 매컬로 자신은 시력마저 잃고 말았단다!). 그리고 이제 <마스터 오브 로마> 1부가 모습을 갖춘다. 카이사르 가문과 마리우스의 결합에서 시작된 로마 이야기의 시작이,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 마지막 권 마지막 장을 덮을 땐 과연 어떻게 변해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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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공부 -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삶을 위한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적극적인 투쟁
장정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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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을 읽어 본 거라곤 시집 『햄거버에 대한 명상』뿐이다. 그의 공부 책을 읽는 것도 거의 십 년 만에 출간된 개정판으로, 어딘지 모르게 나는 장정일로부터 '도망중인 사나이'인 것만 같다(실제로 그의 작품 중 「도망중인 사나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는데, 내가 쓴 맥락은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장정일이 꿈꾸는 인문과 내가 꿈꾸는 인문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여기는 인문 또한 매한가지일는지도. 「존경받던 어른이 어쩌다 우리의 실망을 사는 경우는 바로 '기계적 중립'을 취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가 서문에 적어놓은 말이다. 중용? 좋다. 어디에서든 중간만 하라, 모나게 튀지 말고, 앞서가지도 말며, 뒤처지지도 말아라. 어르신들의 현명한 가르침이다. 아니, 현명한 가르침이었다. 다시 한 번 중용이라고? 좋다, 좋다. 그런데 흑과 백 사이의 회색분자며 기회주의자라니? 얼토당토않다. 외려 흑과 백에 있는 자들의 정체가 아리송할 때가 더 많은 건 왜일까(이 세계를 흑, 회, 백으로 딱 잘라 삼등분해서 세 개의 자루에다가 담을 수 없을지라도). 그래서 장정일의 '공부'다. 내가 서서 발을 딛고 있는 곳과 내 입을 통해 말해진 것을 나조차도 알지 못한 채 강 한복판에 있다면 이것도 중립은 중립이다. 그런데 앞서 인용한 '기계적 중립'이다. 그러므로 다시 '공부'인 거다. 하다못해 남을 응징하거나, 내 처지를 변명하거나, 무언가의 뻔뻔함을 타파하거나, 과거에 머무르고 싶지 않거나, 어느 쪽이건 공부다. 행동하는 철학자가 없다며 우는소리하기 전에 일단 공부다. 물론 장정일의 때로는 수상쩍은 공부가 나나 우리에게 가시적이고 즉각적인 명제를 던져주지 않을 공산도 있다. 탱크같이 밀어붙여서는 우리로 하여금 '기계적이고 무지한 중용'을 고민하도록 만들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지식과 사유의 덫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장정일의 공부에 대한 절절한 노력은 우리를 부지불식간에 뾰족한 가시 위에 앉게끔 유도한다. 세모꼴 지붕 한가운데에 달걀을 얹어놓으면 어느 쪽으로든 굴러가는 것처럼. 균형을 잘 잡아 그대로 있으면 또 어떤가. 그쯤 되면 이미 수많은 고민을 한 끝에 중용을 택하기로 마음먹은 것일 텐데. (다만 깨지지만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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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열린책들 세계문학 229
알베르 카뮈 지음, 최윤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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뮈가 가졌던 알제리나 나치에 대한 생각은 저쪽으로 제쳐 두고 그저 재난 소설로서의 『페스트』를 읽고 싶었다. 직간접적 영어(囹圄) 생활 속에서 불특정의 사람들이 병들고, 죽고, 시시껄렁한 대화를 주고받고,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탄복하고, 타인의 불행하지 않음에 화를 낸다.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도 닮아 있는데, 실제로 리유의 한 발짝 떨어진 서술과 진노 선생 집에 얹혀사는 이름 없는 고양이의 깨달음은 대동소이하다) 그리고 전염병 출현, 심각성 대두, 안정기, 소설은 대략적으로 이 구조에 따라 움직인다. 당국은 도시를 폐쇄하고 이런저런 조치를 취하려 하나 이미 늦었고, 병명이 공포되자 사람들이 두려움에 빠지긴 했지만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하며, 또 어김없이 종교가 끼어들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타인의 괴로움에 기꺼워하던 아무개는 전염병 확산이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자 다시금 자기 혼자만이 고통에 빠져있다고 여겨 이젠 그 스스로가 전염병과 같은 불행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해하려 한다. 특히 랑베르의 인물상이 흥미롭게 다가오는데, 그는 개인적인 이유로 폐쇄된 도시를 빠져나가고자 하지만 결국 마음을 바꾸어 리유(의사)를 돕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을 믿어야 한다? 이런 고담준론 같은 명제가 현실에 적용되기란 요원할는지 모른다. 『독감』(사이언스북스, 2003)을 쓴 지나 콜라타는, 저 옛날 아테네를 덮친 전염병 기록을 쓴 투키디데스를 인용한다. 「전염병은 격심한 무절제와 방종을 낳았다. 이제 사람들은 예전에는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하던 일을 공공연하게 시도했다.」 그때와 지금의 의학 수준과 사고방식의 상이함은 차치하고라도,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구분하기 힘들다. 소설 속의 시민들도 탈출할 수 없는 도시 안에서 영화와 술에 빠져 피로와 죽음의 고통을 잊으려 한다. 질병을 가지고 설교하는 자, 건강 증명서를 써주지 않는 의사를 비난하는 자, 혼란스런 틈을 놓치지 않고 암거래에 손을 대는 자, 이런 불협화음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는 자. 이제 불행은 비현실에서 이편의 현실 속으로 편입된 지 오래고, 작중 타루라는 인물의 '죽음 권하는 사회'에 관한 환멸에 가까운 폭로만이 허위허위 공기 중에 흩뿌려진다. 관찰, 그리고 관찰. 『페스트』는 끊임없는 관찰로 사람들 앞에 거울을 들이민다. 그러므로 이것은 더 이상 추억에 머무르지 않고 기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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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 모리어티의 죽음 앤터니 호로비츠 셜록 홈즈
앤터니 호로비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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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티는 셜록 홈즈 시리즈를 종결지을 수 있는 좋은 방편이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을 알지 못할 만큼 무지렁이이면서도 실로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인 사람을 끝장내기엔 모리어티만한 정도의 설정은 불가피했을 거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그만이 홈즈에 대적할 만한 인물로 그려졌고 동시에 영영 셜로키언들의 미움을 받는 처지가 되었을지도(모리어티가 가상의 인물이라는 둥, 실은 범죄자가 아니라는 둥, 홈즈의 배다른 형제라는 둥 별의별 이야기도 난무한다). 『셜록 홈즈: 모리어티의 죽음』은 애설니 존스 경감과 핑커턴 탐정 사무소(도일의 『공포의 계곡』에서도 등장한다)의 프레더릭 체이스 콤비를 내세워, 홈즈와 모리어티의 마지막 대결이 이루어졌던 라이헨바흐 사건 이후를 다룬다. 홈즈와 왓슨 없는 셜록 홈즈 시리즈이며 진행자는 왓슨이 아닌 탐정 사무소의 체이스. 이야기는 모리어티가 홈즈와 함께 폭포에서 떨어지기 전 편지 한 통을 받았다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여기에 모리어티에 버금갈 만한 클래런스 데버루라는 악명 자자한 인물이 떠오르고, 존스와 체이스 콤비는 소설 끝까지 그자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리고 기어이 모리어티 시신의 재킷에 비밀스레 꿰매진 솔기를 뜯어 모종의 쪽지를 발견하는데, 내용은 당연히 대문자와 소문자로 이루어진 수수께끼 같은 암호문. 클래런스가 모리어티를 만나고 싶어 하면서도 실제로 그의 얼굴은 알지 못한다는 것에 착안한 존스 & 체이스 콤비는 급기야 모리어티 흉내를 내며 약속 장소로 나가지만 '런던탑에서 날아오른 까마귀가 몇 마리였는가?' 라는 수상쩍은 암구호 앞에서 낭패를 보고, 이어 경시청 폭발 사건, 존스 경감의 딸 납치, 치외 법권에 가로막힌 끕끕수, 과거 홈즈 시리즈에서 다루어졌던 다종다양한 트릭의 차용 등이 어지러이 얽히고설킨다. 홈즈라 하면 나는 일단 가스등과 마차가 떠오르고 호로비츠의 소설에서도 그 같은 풍경을 묘사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보이는데(다소 폭력적이거나 얌체 같고 추잡한 짓거리를 일삼는 인물의 행동 탓에 뤼팽의 냄새도 살짝 풍기기는 하지만), 특히 개인적으로 가스등이 나간 상태에서 불을 뿜으며 난사되는 총격, 점멸하면서 앞뒤 분간이 어려운 시각적 분위기와 그 속에서 또다시 생겨나는 칼잡이의 의문스런 행동이 가장 마음에 든다. 결말은, 글쎄, 기막힌 반전이 준비되어 있긴 하나 호불호는 극단적으로 나뉠 것만 같다. 나는 나름대로 괜찮은 생각이라는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으며, 선한 자는 더욱 선하고 악한 자는 더욱 악하게, 라는 말을 적용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보았다. 잘 만들어진 패스티시는 원작을 조악하게 난도질하지 않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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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아 1호 - 창간호
미스테리아 편집부 엮음 / 엘릭시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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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말마따나 풍경화는 자연 경관이 살벌한 곳에서, 신문은 인간관계가 소원한 곳에서 발달한다든가. 한국 미스터리를 불모지, 척박, 혹은 '없다'는 부정어와 함께 일컫는 건 이런 이유에서일까? 현실이 팍팍하고 온갖 미스터리한 일들이 매일같이 벌어지는 마당에 굳이 책에서까지 비일상의 미스터리를 찾아야 하느냐, 하는 거다. 그런데 영화판을 보면 그건 또 아니다. 심심찮게 몇 백만, 몇 천만 관객이라는 표현을 보고 있노라면 더더욱 그렇다. 더군다나 '심심찮다'는 말은 이런저런 문학지가 등장했다 사라지는 저간의 광경에 더 어울릴 지경이 되었으니. 이런 만만찮고 녹록찮은 계란유골 같은 와중에 새로이 창간한 격월간 미스터리 전문 잡지 『미스테리아』, 일단 만듦새는 '멋지다'는 형용사 하나만으로 충분히 멋지다. 특히 겉표지는 직관적다 못해 야시시하기까지 한 디자인을 취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바타유는 에로티즘을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라 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와 야스이 도시오의 대담집 『밀실 입문』 연재분은 『유리 망치』의 에노모토를 상기케 하고, 한국 소설 속 '범죄의 낌새'를 조망한다는 꼭지 <집안의 괴물들>은 조정래가 자신의 중편에서 묘사한 '상상할 수조차 없도록 비싸고, 머리 위에서 불을 때고 그 머리 위에서 또 불을 때고, 오줌똥을 싸고, 그 아래에서 밥을 먹고, 사람이 사람 위에 포개지는 아파트'의 무시무시함을 떠올리게도 한다. 출판사 관계자들의 한국 미스터리에 대한 내밀한 이야기는 물론이거니와, 법의학자의 사건 기록 들추기와 경찰서 출입 기자의 취재 비화 또한 흥미롭다. 확실히 한국 미스터리는 최근 들어 판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기분이다. 그런데 때마침 하늘의 도우심이런가. '장르'와 '순'이라 구분 짓는 한국 문학판의 수상쩍은 심보에 맞서 바로 그 장르문학을 다루는 잡지가 탄생한다는 것은('장르'와 '비장르'가 실은 더 어울린다). 게다가 이미 주화입마에 빠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매체들이 몇몇 있었으니 독자 된 입장에선 기대와 불안감이 동시에 드는 것이 사실이어서, 『미스테리아』가 들어올 적엔 보무당당, 나갈 땐 죽상이라는 3D 아르바이트와 동의어가 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그러면서도 장르문학의 옐로페이지가 되는 것도 원치는 않는데, 일상의 미스터리를 자유롭게 탐색하겠다는 편집자의 변이 반가운 것은 앞으로 잡지에 싣게 될 다종다양한 내용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소망이 함량 미달의 턱없는 바람이었음이 밝혀질지, 신통방통하게도 대법원 확정 판결만큼이나 일호의 가차 없이 들어맞을지는 조금 더 두고 볼 노릇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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