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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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유처럼 에로티즘을 가리켜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라 단정할 수 있으려나. 그에 따르면 에로티즘은 자연 본래의 목적과는 별개의 심리적 추구이며 그런 까닭에 생식과는 구분된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책 결론 부분에서 말하길 에로티즘은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는 문제 중의 문제다. 인간과 에로티즘을 분리할 수 없는 한 인간은 그 자신에게 문제이며, 그리고 에로티즘은 인간의 문제이다(『에로티즘』 민음사, 1997). 『에로스의 종말』에서 한병철이 이야기하는 성과 원리, 에로틱한 갈망, 타자의 부재 속에서야말로 발현되는 쾌락ㅡ이러한 급습은 오늘 우리의 전 영역을 지배한다(그러므로 정반대의 논리도 가능할 것만 같다). 환상의 위기, 타자의 소멸, 에로스의 종말. 만일 욕망이란 것이 언제나 타자에 대한 욕망이라면, 그래서 무언가 가질 수 있는 상상력이 상품, 이미지, 소비와 결부하게 된다면 나는 심지어 (다소 동떨어진 맥락일지라도) 다음과 같은 경우를 떠올려 볼 수도 있다ㅡ어느 책에선가 읽은 바에 의하면ㅡ암컷 송어가 짝짓기를 위한 경쟁을 벌일 때 속임수를 쓴다는 사실을ㅡ예컨대 오르가즘에 도달한 것처럼 행동한다는 건데, 어딘지 모르게 한병철이 적시한 '비밀도 표현도 없이 구경거리로 전시된 벌거벗음'ㅡ포르노적 노골성ㅡ즉 에로스의 적수인 포르노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결국 타자와의 성공적인 관계는 일종의 실패로 여겨져야 할까? 에로스는 모든 것의 실패일까? 우리는 이질성이 제고된 타자를 사랑하지 못하고 다만 그것을 소비할 뿐일까?(p.42) 이래서야 마치 모래 속에서 허우적대는 니키 준페이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아베 고보 『모래의 여자』)ㅡ알랭 바디우가 이 책 서문에 썼듯(그 이전에 랭보가 말했듯) 사랑의 '재발명'이라니, 맙소사. 하나 단순 사무로 전락한 에로스의 위치라는 것에는 일면 동의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대로 신자유주의의 토대가 충동이라면, 각자 고립되어 있는 성과주체들로 이루어진 피로사회에서는 용기도 완전히 불구화되는 까닭에서다. (에로스는 충동과 혼동되어서는 안 되며 그것은 충동 그 자체만이 아니라 용기 또한 관장한다. 에로스의 정치가 만나는 접점이 바로 용기일 텐데 오늘날에는 이러한 용기도 에로스도 사라져버렸다; p.83~84) 자, 다시 처음으로. 『에로스의 종말』을 시작하며 한병철은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하지 않은 채 자기 자신만을 확인하려는 경향이, 스스로인 주체를 타자에게로 내던질 수 없게끔 만든다고 적었다(이 책 두 번째 장에 등장하는 '할 수 있을 수 없음'이라는 표현과 이어지고, 그래서인지 희한하게도 전작 『피로사회』를 자연스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내가 거울 속의 내 얼굴만을 바라봐서는 타자를 향할 일이 (좀처럼) 없을 것이고 그럼에 따라 타자가 사라진다는 사실 역시 눈치챌 수 없을 터다. 수십억이나 되는 머릿수 가운데 내가 나 자신만을 확인하는 데 성공한다손 그것이 나라는 주체를 겨냥하고 있다고, 거기에 유의미한 존재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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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살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6
나카마치 신 지음, 현정수 옮김 / 비채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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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마치 신이다. 또. 더군다나 지난번의 『모방 살의』에 이어 다시 한 번 서술트릭을 사용하며 여지없이 작가와 편집자가 등장해주시고 있다. 이번엔 추리소설 현상공모에 입선한 신진 작가 야규 데루히코가 잡지 편집자에게 소설 게재를 부탁, 자신의 원고를 범인을 알아맞히는 릴레이 소설이라 칭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문제편'을 집필하고 다른 작가가 '해결편'을 집필하는 방식. 이미 전작의 학습효과가 발휘되었다고 해야 할까, 이쯤 되면 야규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대강 감이 잡힌다. 실제로 벌어진 모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는 작가가 미완성의 소설을 발표해 범인을 구석으로 몰아가려 한다는 의도. 『모방 살의』의 반복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과는 달리 이야기의 진행은 조금 더 입체적으로 표현되었다. 온라인 서지정보에도 등록된 바와 같이 『천계 살의』에는 가출한 지 나흘 만에 살해된 여자,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수상쩍은 단서들과 도박판에서 발생한 거액 등이 양념처럼 들러붙어 있는데(결벽증이 심한 사람이 맨손으로 초밥을 집어 먹었다는 소소하지만 흥미로운 단초도 있다), 특히나 에도가와 란포가 구분했던 범죄의 동기들 중 요즘 들어서는 잘 보이지 않는 이상심리도 (작게나마) 간여하고 있어서 반가운 점이 있었다(구태여 적자면 그가 구분한 범죄의 동기는 크게 4가지로 나뉜다. 먼저 감정(연애, 원한, 복수, 우월감, 열등감, 도피 등), 사욕(물욕, 유산 문제, 자기 보호 등), 이상심리(살인광, 변태심리, 예술로서의 살인, 각종 콤플렉스 등), 신념(사상, 정치, 미신, 종교 등에 기초한 범죄)이 그것이다). 개인적으로 『모방 살의』에 비해 조금이라도 더 좋은 평을 하고 싶은데, 전작이 직접적이고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면 『천계 살의』는 그보다 복합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헛갈리고 어지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미완성의 소설과 더 미완성의 소설(!)>, 바로 이 아이디어가……. (기막힌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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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밤 : 시 밤 (겨울 에디션)
하상욱 지음 / 예담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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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으로 그칠지 나름대로의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둘지. '시 읽는 밤'을 줄여 <시밤>이다. 노골적인 노림수. 일전에 출판사에서 '시밤'을 가지고 이행시를 짓는 이벤트를 연 적이 있었는데 나 또한 <시: 시밤(발), 밤: 밤꽃 냄새…….>로 응모를 했으니 이 역시도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재미라고 한다면 그런 식으로 봐 줄 만도 하다. 이 세계에 좋은 책은 많지 않아도 나쁜 책은 없다던 말이 떠오르긴 하나(심지어 온전히 맞는 것도 아니라도 생각한다) 재미있는 책과 재미없는 책은 분명히 존재한다. 개인차는 차치한다 하더라도(혹은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독자에 따라 흥미가 동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반드시 개입하는 거다. 『시밤』은 제대로 된 시집이 아니다. (온라인 서점에 등록된 서지정보에 의하면 '시' 카테고리에 속하긴 하지만) 아니, 차라리 자유시라고 넓게 헤아릴 수 있을까? 그렇다면 '제대로 된'이라는 말은 뭘 의미하는 건가? 각 시마다 제목이 있고ㅡ설령 '무제'라는 제목을 붙인다손, 몇 개의 행으로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때로는 산문처럼 다소 길게 늘어진 문장으로 구성되기도 하는, 소위 종래의 시, 익히 접하고 읽어 온 시의 형태를 의미하는 건가?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책은 제대로 된 시집이 아닐 것이며, 더욱이 전체적인 틀로 보건대 수첩에 적어놓은 문득문득 떠오른 이런저런 생각들의 집합에 불과할 거다. 더불어 나는 이런 구분에는 놀라울 정도로 관대하기도 하지만 『시밤』을 시집으로 받아들이기엔 다소간의 불편함을 느낀다. 나쁜 책은 아니다. 그러나 내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큼의 내용을 양껏 제공하고 있지는 않다. 다시 말하지만 독자에 따라 흥미가 동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니 『시밤』이 완전한 혹평을 받든 일상의 소소한 감정을 재미있게 표현 했다는 이야기를 듣든, 어느 쪽이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다른 독자가 어떤 감정을 느꼈건 간에 이쪽은 이쪽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으니. 그러나, 그래서, 내 평점은 별 다섯 개 만점에 세 개다. 의견 보류이거나 판단을 잘 내리지 못하겠어서이거나(그게 그거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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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지음, 조현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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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를 관찰하고 기록한다. 때로는 치밀하기도 하고 가끔은 놀라기도 하면서. 몽정을 하고, 울퉁불퉁한 어쭙잖은 근육이 생겨나고, 등고선처럼 쭈글쭈글한 주름이 만들어진다. 별일 없는 한 남자의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일기. 죽기 전 마지막 날의 글을 마친 뒤 딸에게 남긴다는 가증스런 붙임으로 자신의 변을 다한 아버지의 평생의 진술서다. 벌거벗은 또래 여자애의 옆에 누웠음에도 전혀 발기되지 않았던 갓 열아홉이 된 소년. 일생의 반려자를 만나 비로소 각종 자세를 취하며 도시 이곳저곳에서의 섹스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스물여섯 청년. 온종일 활기 넘치는 아이와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한 서른셋의 아버지. 그리고 친구들이 이 세계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기 시작한 늙수그레한 노인네. 말 그대로 인간 한 개(個)의 일기. 그의 기록. 몸이라는 장치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움직이고 반응하는지를 시간의 흐름과 함께 나열한 인간 탈바꿈의 진열장. 머리 위에 작은 개구리를 달고 태어난 남자가 있었다. 한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그는 어느 날 출근길 외과로 향했고, 의사의 질문에 남자가 아닌 개구리가 말한다. 별것 아니에요, 선생님, 제 엉덩이에 작은 종기가 하나 났는데 그게 이렇게 커져버렸지 뭐예요.(p.253) 내 몸의 주인은 온전히 나라고 불리는 사람의 것인지? 더도 덜도 말고 모자람 없이, 나란 인간이 내 육체를 빌린 세입자인지 아니면 이 몸뚱이가 내 존재를 발현시키기 위해 그저 간당간당 매달려 있을 뿐인 것인지? 아무리 연마한들 내 몸은 종국엔 녹이 슬고 힘없이 늘어질 것이며 곳곳이 썩기 시작해 앙증맞은 검은 버섯들을 피워낼 터다. 역자가 정리해놓았듯 내 몸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상황들ㅡ이명, 건강염려증, 동성애, 구토, 티눈, 월경, 용종, 불안증, 성 불능, 불면증, 몽정, 자위, 비듬, 코딱지, 현기증, 악몽, 건망증, 노안, 몸을 긁는 쾌감, 똥의 모양, 코피, 설태, 전립선비대증, 수혈, 치매, 기타 등등ㅡ이 슬슬 좀먹어가는 거다. 그것들은 아마 내가 태어났던 순간부터 전원 버튼을 켠 채 시작되었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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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리언 유니버스>
말 그대로 외계인에 관한 탐구서. 외계인에 관한 거짓과 진실 모든 것을 가리려 한다. 외계인의 이미지에 관련한 미디어 문화적 관점과 실제 과학을 토대로 풀어나가는 이야기.



<일탈>
성 인류학의 선구자란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으나 두툼한 분량만큼 뭔가 해주리라는 기대감이 든다. 페미니스트이건 아니건 충분히 읽어볼 만한 글들. 그리고 거대한 연구.



<눕기의 기술>
<연필 깎기의 정석>으로 한바탕 웃었던 때가 있었는데 이번엔 눕는 방법을 알려준단다. 어느 방향으로 누워야 할지, 잠자리를 어떻게 마련할지에 관해서까지 다룬다. 인간 수명 3분의 1은 잠을 자는 것에 소비한다고 하던데.....



<인류의 기원>
인류 진화의 이정표 관찰. 인류 화석 등을 통해 짚어보는 인류의 기원. 언제나 흥미진진한 고고학이나 역사이니만큼, 그리고 더더욱 인간에 대한 것이니만큼 기대감이 크다.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
레비 스트로스의 유작. 식인종과 식인종이 아닌 인간의 차이점이 뭘까. 이 물음 하나로 이 책은 정의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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